-
-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ㅣ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구병모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3월
평점 :
“상처와 흠집에 매혹되는 건 오래된 인간의 불가해한 본능이다.” P 145中에서(수정인용)
합리적 추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죽음들과 피부에 수놓아진 사람들의 사연이 참담하게 얽혀있는 이야기다. 괴이하다할 - 온 몸에 불이 붙어 창밖으로 떨어져 내리고, 육식동물의 날카로운 송곳니로 찢어놓은 듯한 열상, 벽시계 높이까지 젖었다 마른 흔적만 있을 뿐 물에 빠져 질식한 듯한 - 죽음을 맞이한 대상들은 생전 타인을 향한 비열함과 비정함 그리고 잔혹한 폭력을 행사한 자들이다. 그렇게 타인을 사회적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이들이란 과연 누구인가?
‘시미’, 오십대의 중년 여성, 애 낳고 솥뚜껑이나 운전하지 않아서, 마트 계산대도 아니고 콜센터 상담원도 아닌 사무부서 직원으로 재취업한 것이 조롱 대상이 되어야 했던 여자, 남편의 폭력으로 이혼하며 아이와의 만남까지 배제되어야 했던 여자, 십년이 지나도 아무런 직위도 없는 그저 사무원인 사람이다. 딸 벌인 후배 직원 ‘화인’의 목뒤에 “꼬리를 고붓하게 말고....한 점의 불씨처럼 빛나는” 문신, 샐러맨더,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타투, 살갗을 뚫어 새겨진 매혹적 상처가 그녀에게 우연의 길을 연다.
재래식 한약방 같은 주택, 화려한 여느 타투 스튜디오 간판도 없는 곳 앞에 주저하며 서 있는 중년의 여성이 그려진다. “충동적으로 몸에 새긴 샐러맨더에 대해, 잃었던 자신감과 의욕이 다시금 심장에 고이는 듯 했던 날들에 대한” 화인의 얘기가 이끈 발걸음. 우체국 공무원 같은 인상을 지닌 30대 중후반의 타투 아티스트도 아닌 문신술사라는 명함을 지닌 사장과 시미의 선문답 같은 대화는 이야기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한 문장 한 문장을 새기며 읽게 된다.
“제가 한 건 맞는데 따로 찍지 않습니다. .... 남겨 두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요. ...
언제가 됐든 사라지니까요” - P 42~44 (발췌 인용)
기이한 죽음 뒤에 남아있는 여자들, 사회적 약자들, 한 때의 충동을 기억 한 채 흐릿한 흔적만을 지닌 사람들. 소설을 여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싼 채 쭈그려 앉아 떨고 있는 한 젊은 여성의 모습”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인 방화 추락 사건의 희생자를 화인의 아비로 연결 지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샐러맨더’, 그녀의 타투가 “영혼이 들고 나는 통로” 였겠구나하는 뒤늦은 애틋함, 그 고통의 나날을 잊기 위한 처절한 몸의 울림으로 파고 들어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가위로 샐러맨더를 찍어버리려 덤벼드는 아비, 밀어 넘어뜨리고 주먹으로 얼굴을 무자비하게 때리는 아비, 화인은 아비의 죽음을 말한다. “그 인간이 없어지기를 20년 가까이” 바랬다고. 그녀가 제일 절박했던 순간에, 이러다 죽을 것 같았을 때, 아비의 잔혹한 폭력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준 것은 무엇일까? 사회적 인습이라는 얼굴로 누군가의 아내이며 어미이며 딸인 여자들을 옥죄던 너울들, 뒤늦게 엄마 노릇하려 들지 말라는 성장한 아이의 냉담한 소리에서 “모자관계란 애당초 형성되지 않았음”을 깨닫는 시미의 현실 인식은 화인의 비참한 소망처럼 오래된 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의 목소리가 되어 울린다.
시미의 손목에 새겨진 작은 별 하나, 그 별이 떠올라 부풀어 산산이 흩어져 밤하늘을 수놓을 때, 불현듯 기 발표된 작가의 단편 소설, 「관통」이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칼로 캔버스를 베어내 틈을 만들어냄으로써 세계를 확장한 루초 폰타나(Lucio Fontana)의 그라피티가 떠오른다. 살갗을 뚫어 무언가를 새기는 상처의 매혹, 비일상을 꿈꾸고 기존의 인습적 세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이 내 마음속에서 겹쳐졌던 것 같다. 그들의 문신은 억압된 인식의 지평을 한 차원 확장하는, 공간을 들고나는 영혼의 창, 그 통로였으리라. 아마 이 소설을 이렇게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존재가 세상 누구보다 빛나기를 열망하는 ‘사회적으로 죽임 당한 자’들의 이 이야기가 문신을 통해 편협에 갇혀 무관심을 동반한 내 무지를 한 뼘 만큼 줄여줬다고. 그리고 내 이기적 시선이 조금은 관대해 질 수 있게 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