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저널리스트 : 카를 마르크스 더 저널리스트 3
카를 마르크스 지음, 김영진 엮음 / 한빛비즈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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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노동력을 판 노동자는 자기 삶의 8시간, 12시간, 24시간....조금씩 떼어 판다.

누구의 소유에도 속하지 않지만 떼어낸 삶의 시간에는 자본가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 자본가에게 매여 있는 것이다.” - 본문 151, 임금노동과 자본

 


마르크스의 주저(主著)자본(Das Kapital)과 함께 이의 원활한 이해를 위하여 고병권의 북클럽 자본시리즈와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를 참고하며 더딘 속도로 내 본질적 사유체계를 확인하기 위한 읽기를 하던 중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무엇보다 편역(編譯)자의 소개말처럼 마르크스가 어떤 과정을 통해 사상을 구체화했는지, 그 맥락 이해에 좋은 역할을 해주리라는 기대에서였다고 해야겠다.

 

자본1편 제2교환과정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상품은 스스로 시장에 갈수도 없고 스스로 자신을 교환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품의 보호자 즉 소유자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상품은 물건이므로 인간에게 저항하지 못한다.”

출처: 김수행 자본론』Ⅰ[], 2008420일 비봉출판사, 2개역판 9P108

 

굳이 이 문장을 인용하는 이유는 너무도 당연한 것, 지극히 평범하고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곳에 마르크스의 시선은 그 행위에 내재된 의미의 밑바닥까지 들이밀고, 바로 그 심연에서 실질적 작동의 원천을 기어이 퍼 올려, 보이지 않았던 아니 보지 못했던 진실을 우리들에게 펼쳐놓기 때문이다.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이 전제적 소유권을 행사하는 구매자인 자본에 끌려가는 자본의 내재적 폭력성을 함유하는 글이다.

 

마르크스를 오늘 읽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처럼 평범한 것에 놀라는 눈, 맹목을 맹목으로 보지 않으려는 관심의 눈을 배우기 위함이다. 그리고 덤처럼 지금 이 세계의 체제인 자본주의가 지닌 한계와 그 본질을 이해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올바른 지혜의 틀을 구축하고 내 삶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이를테면 왜 자본가와 노동자의 부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지기만 하는 것일까?’, 또는 최저임금은 진정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 와 같은 물음에 대한 근원적인 답을 사유하는 지혜의 바다로서의 역할을 해 준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를 읽는 것이 곧 체제전복 모의인 것으로 몰아대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에도 여전히 이를 기득권 유지의 도구로 이용하는 세력이 있긴 하지만 이젠 무시할 정도로 시민의 지적 소양이 높아졌다고 나는 믿는다. 오늘 민주화된 우리의 사회가 있기까지 일제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이래 무려 반세기에 걸친 부패와 독재, 유신, 폭력시대를 거쳐 왔다. 이에 대한 생생한 육성처럼 여겨지는 최근에 발표된 장혜령의 소설 진주에는 편집된 민주화 투쟁을 외치는 시국선언문의 문장들이 있다. 그리고 불법 연행, 감금되어 고문자가 읊어주는 나는 공산주의자입니다. 나는 사회주의자입니다. 나는 불법조직에 가담하여 사람들을 선동하였습니다.”(소설 진주128쪽에서 인용)를 울면서 받아쓰게 하곤 당신은 잘못한 것이 없어요. ...곧 돌아가게 될 겁니다.”라고 거짓 위로를 뇌까리던 소설 속 문장이 떠오른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이식되는, 자본을 축적하느라 노동력, 인간의 노동이 오직 착취대상으로만 취급되던 시기였다. 우리에게도 자본과 결탁한 권력, 권력과 자본이 유착하여 노동력의 축적가치를 독식하던 압축된 시기가 있었다. 이에 이의를 제기하면 사용하던 수법이 바로 공산주의자 몰이, ‘빨갱이낙인찍기다. 이 파렴치한 말이 지금도 정치배들로부터 흘러나올 때면 그 추악한 저의에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곤 한다.

 

케케묵은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쉴 새 없이 자본의 성장과 축적의 집중이 진행되고 있다. 분업의 가속화, 자동화와 노동의 단순화라는 노동 경쟁의 극렬화로 인한 압박이 높은 실업율을 정상화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대대적인 설비와 기술개발 경쟁으로 생산비용 감소를 통한 자본경쟁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과열된 동요”(본문 180)가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자본의 생존을 위해서 끝없이 반복되어야 하는 모순으로 가득한 체제의 불협화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옆의 약자와 고통 받는 이웃들이 알지 못하고 겪는 자본의 내재적 폐해에 대해서.

 

1. 저널리스트 마르크스의 기사들

 

책은 17편의 기사와 노동임금과 자본이라는 노동자를 위한 자본주의 설명서랄 수 있는 1847년 출간된 팸플릿으로 구성되어 있다. <The people's paper: 人民報에 실린 노동자 의회의 창립을 축하하는 편지를 제외하면 16편의 기사가 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기고한 글로서 게재된 1850년대의 영국중심의 경제, 사회적 상황을 가늠할 수 있다. 대부분 부르주아의 대변지 기능을 수행했던 <선데이 타임스를 비롯한 자본가들과 정치권력 계층의 곡해된 논리를 반박하는 형식의 글로 씌어진듯하다. 자본가들의 자기 계급적 이익을 위한 맹렬하고 저열하며 추악한 탐욕이 아마 가장 강렬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이번 달에도 런던에서는 기아 사망 사건이 또 여러 건이 발생했다....

메리 앤 산드리는 얄팍한 짚더미 위에서 아무것도 덮지 않은 채 발견됐다...”

(본문 30, <기아라는 형벌>에서)

 

공장주는 자신들이 고용한 노동자의 목숨이나 팔다리를 지켜주려고 하기는커녕....

움직이는 기계들의 마모비용을 어떻게 남에게 떠넘길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본문 119, <공장노동 현안 보고>에서)

 

 

이처럼 기사들의 내용은 온통 기아와 빈곤, 부상과 죽음의 위협에 놓인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을 일회용 소모품 정도로 취급하는 자본가들의 거침없는 축적의 열망, 욕망의 질주로 채워져 있다.

 

그 중 깊은 인상을 주는 몇 몇 기사가 시선을 잡는다. 그 첫째는 임금에 대한 당대 주류 경제학의 논리이다. “임금이란 공장주의 실질이익이나 추정이익에 대한 일종의 공동지분을 챙기는 것이라고 부르주아지는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은 무식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임금이란 자본가가 일정량의 노동력을 사기위해 기존에 축적한 상품, 즉 축적된 노동력의 일부분이다.” 노동력을 통해 축적된 가치자본이다.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는 불합리하게 착취당한 노동력의 생산 가치를 돌려달라는 의미이다. 게다가 임금인상을 요구하려면 공손한 태도로 요청해야 수용될 수 있다고 말하는 공장주의 말은 헛웃음까지 터져 나오게 한다.

 

둘째는 세계 경제, 아니 경제 식민화와 관련한 영국의 대외 수탈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렬한 비판의 시선이다. 2차 아편전쟁으로도 불리는 애로우 호사건에 숨은 영국 자본가의 비열함과 탐욕이 혼합되어 만들어낸 상품시장의 강제 개방을 위한 침탈 행위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자본주의 민낯인 노동력과 생산비용, 상품 시장에 이르는 자본 축적의 순환에 내재한 폭력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즉 노동력을 쥐어짜 생산비용을 절감하고 이윤을 더 많이 축적하기 위해서 더 많은 생산물을 만들어 내야하며, 이렇게 초과 생산된 상품의 교환가치를 늘리기 위해서 대외 통상을 통해 판로를 확장하려는 자본가들의 세력이 벌인 야만적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 기록으로서의 기사를 통해 이론의 살아있는 사례를 접하는 횡재를 얻기도 하는 것이다.

 

2. 임금노동과 자본에 대해서

 

사실 내겐 노동자들을 위해 준비된 강의 자료였던, 이후 1849<신 라인신문>5회에 걸쳐 게재되었던 노동임금과 자본을 마침 읽는 기회가 되었다는 반가움이 더욱 컸다고 해야겠다. 이후 집필된 자본(Das Kapital)의 주요한 내용이 압축되어, 그것도 누구라도 쉽고 이해 가능한 글이 되도록 하려는 마르크스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기회일뿐더러, 상호 틈새를 메워줄 무엇인가를 발견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동력을 말하기 위해서는 상품을 설명해야 하고, 또한 인간관계와 그 역사성에 대한 선행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아무려니 이 모든 것을 알려주고자 하는 의욕 탓에 상품, 교환가치, 노동력, 임금, 거래, 화폐, 이윤, 사회적 관계, 생산비용, 축적된 노동, 생활유지수단가격, 실질임금, 상대임금, 자본, 이자수익 등 각 용어마다 수십 쪽에 이르는 설명으로도 부족한 것들이 불과 30여 쪽에 집중되어 있어 읽는 수고가 만만찮다.

 

임금 노동자들인 당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자기 계급적 인식과 부르주아지와 그들이 축적하려는 자본의 성격을 명료하게 인식시키는데 총력이 기울여진 저술이다. 노동력이 왜 상품인지, 상품이기에 여느 상품처럼 가격 결정하는 방법도 같다는 것, 상품 가격의 상승과 하락은 무엇을 뜻하는지, 즉 노동력의 가치가 왜 상승 혹은 하락하는지를 설명한다. 결국 상품가격은 생산비용으로 수렴하며, 이 말은 상품의 가격은 생산비용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임을 확인시킨다. 그리고 생산비용에 따른 가격 결정은 상품 생산에 들어가는 노동시간에 따라 가격을 결정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라고 다시금 부연 설명하기도 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임금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것이며, 그것은 어떤 의미인지, 예컨대, 면방직 공장 노동자는 면제품만 생산하는가? 하고 묻는다. 그리곤 그는 자본을 생산한다!” 고 알려준다. 그가 만들어내는 가치는 다시 자신의 노동을 통제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자본은 축적된 노동력이다. 노동자의 노동력으로 만들어진 생산물의 교환가치 중 생활유지수단 만큼만 지급되고 나머지 잉여가치는 자본가가 축적한다. 그러니 자본을 축적된 노동력이라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축적된 노동력에 의해 노동자는 고용되고 또 생활유지수단을 의존하게 되는 것이니 노동자의 노동은 자기 자신을 얽어매는 기이한 형국이랄 수 있다. 자본의 본질이란 이처럼 노동력 착취를 근간으로 한 인간 역사 이래 아주 특수한 사회체제임을 설명한다.

 

더구나 이 순환 고리는 노동자의 임금 노동이 자기 자신 위에 군림할 별개의 부(), 그러니까 자신의 적대세력인 자본을 생산해내고 있다는 뜻임을 알려준다. 이 결과를 통해 노동자는 생활유지수단이 주어지는 체제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이러한 배경 지식을 기반으로 자본이 어떻게 성장해왔으며, 그 축적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한다. 새로 창출되는 가치에서 살아있는 노동이 차지하는 몫과 축적된 노동, 즉 자본이 차지하는 몫과의 관계인 상대 임금(relative wage)'을 이해하게 되면 임금과 이윤의 일반법칙의 절반은 안 것이 될 것이다. 이는 21세기 세계화된 상품시장에서 경쟁하는 오늘날의 거대 자본가들 간의 경쟁, 실업율의 지속적인 증가 현상, 소득 간극의 극단적인 확대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앎의 과정이 된다.

 

상대임금은 실질임금이 오르는 비율이 이윤의 증가비율에 미치지 않을 때 떨어지게 된다.

... 따라서 자본이 급속히 증가하면 노동자의 수입도 늘어나겠지만

동시에 노동자와 자본가를 가르는 사회적 간극은 더 벌어지고,

자본이 노동을 지배하는 권력도 커지며....”   (본문 174쪽에서)

 

 

이쯤에서 그쳐야 할 것 같다. 자본주의라는 생산방식은 역사발달 속에서 아주 특이한 관계에 속하는 사회체제임을 이해하는 것, 자본은 노동력의 축적가치임을 아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수고는 충분히 보상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 사이에는 그 어느 때보다 진정성과 불편부당에 대한 요구의 목소리가 높다. 알아야 요구할 수 있으며, 왜곡과 그릇됨을 분별할 수 있다. 당연한 것이라고 관심을 지니지 않거나 혹은 몰랐던 것으로부터 그 원천과 본질을 통찰해내는 마르크스의 눈으로부터 더 한층 배우게 되는 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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