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더스 헉슬리멋진 신세계에서 그려낸 유전자 카스트의 디스토피아 세계, 프랑켄슈타인의 폐쇄적인 과학기술의 맹목성이 만들어내는 괴물의 세계가 마침내 인류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뭔 뜬금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냐고 나무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전혀 헛소리가 아니다. 인간 게놈(genome)DNA 염기서열 중 특정부분을 잘랐다 붙였다, 혹은 끼워 넣거나, 아예 없애버릴 수도 있는 완벽한 유전자편집 능력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2013, 캘리포니아주립대 버클리캠퍼스의 생화학자인 제니퍼 다우드나가 개발한 정교한 유전자 가위로 불리는 분자의 기능이다. 이 놀라운 분자기계는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DNA염기 서열의 위치를 찾아내 해당 지점을 정확하게 절단하고 정상 DNA로 교체 수정한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의도대로 유전정보를 바꿀 수 있는 엄청난 도구, 온전히 인간의 상상력으로만 지구상 모든 종의 가능성이 재단되는 그러한 시대와 마주했다는 얘기이다.

 

모든 세포(세균)는 외부에서 침입하려는 바이러스(박테리아)와 무기경쟁을 벌여왔다. 바이러스는 세포에 결착해서 자신의 DNA를 주입하고 복제 확산하여 세포를 점령했지만, 세포 또한 무기력하게 당하지만은 않았다. 크리스퍼(CLISPR; 앞뒤가 동일한 서열인 짧은 회문(回文)구조가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 구조의 집합체)라는 특정유전자 발현을 억제하는 분자체계를 발전시켜 침략 바이러스와 동일한 DNA를 파괴하는 면역체계를 갖추었다.

 

여기에 착안하여 과학은 자신의 DNA를 단단히 보호하고 있는 박테리오파지의 DNA를 제거하여 수정하고자 하는 정상 RNA를 크리스퍼 구조에 탑재한 후 세포에 보내 세포내 DNA를 교체하기로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돌연변이를 일으킨 특정 DNA염기 서열만 잘라내고 해당 위치에 자신이 끼어 붙으면 여타 DNA의 손상이나 혼란 없이 깔끔하게 정상화 될 수 있는 방법에는 부족함이 있다. 드디어 원하는 DNA서열을 인식해서 해당 위치를 정확하게 그것도 모터 달린 전지가위처럼 효율적으로 고속으로 잘라내는 캐스9’ 이라 명명한 단백질 효소를 찾아낸 것이다.

 

이제 인간은 작은 가이드 RNA만 교체해서 캐스9 단백질과 함께 세포에 주입하면 의도한 대로 세포내 DNA를 수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의적으로 유전자를 수정, 교체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이란 것이 어찌 선한 목적으로만 이용하던가? 이 획기적이며 가공(可恐)할 기술로 인해 너무도 간편하고 정확하게 유전자 암호의 결함을 교정, 변형할 수 있게 되자, 이 인류 초유 기술의 성배(聖杯)는 남용 및 악용의 우려를 낳고 있다. 설혹 정상적 사용에서조차 예기치 않은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내재적 위험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유전자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으며 나아가 지구상에 지금까지 출현한 적이 없었던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해 낼 수 있게 된 인간이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자.

소위 인본주의에 도사린 인간의 무한한 욕망, 그것을 이기심이라고 단순하게 좁혀보면 아마도 지능의 개선, 음악재능, 수학적 기량, 큰 키, 놀라운 미모, 운동능력과 같은 비의료적 개선에 모아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되면 부와 권력을 지닌 계층이 생식세포의 유전자편집 혜택을 압도적으로 많이 보게 될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모두(冒頭)에서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을 이야기한 것은 바로 이러한 유전자 카스트가 만들어 낼 유전자 간극으로 인한 인간 불평등의 심화이다. 소설은 외부 생식’, 즉 생식세포의 유전자 편집을 통한 인간 생산이라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예정된 사회계급별로 인공 배양되고 부화 조건이 차별된 인간 생산 시스템의 디스토피아다. 끔찍한 세계이다. 내 본능적인 직관은 거부와 두려움의 감정으로 휩싸인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개별의 수용과 거부의 의식을 떠나서도 최초의 혁신적인 유전자 가위인 크리스퍼-캐스9’의 개발자인 제니퍼 다우드나 교수의 자각처럼 인간유전학의 총체적 지식이 우리가 관여해도 될 만큼, 그리고 최악의 부정적인 결과를 피할 만큼 충분히 발전할지 확신 할 수 없으며, 인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인간사회를 파멸로 이끌 잠재적 위험을 외면할 수도 없다는 점에 이 기술의 특이성이 있다.

 

그리고 다우드나 교수의 과학자로서의 폐쇄적 연구심성의 반성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떠오르게 한다. 자신의 연구가 불러올 결과와 타당성에 대한 고려없이 새로운 연구 분야에 무턱대고 뛰어든 결과에 대한 도덕적 물음의 선행에 대한 인식이다. 이것이 없을 때 유전자 조작 기술의 남용은 곧 괴물이라는 파괴와 죽음의 은유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생명체의 자의적 조작을 다루는 기술, 즉 인류 전체가 참여하여 숙고하여야 하는 거대 담론에 속한 질문을 외면하고 친숙한 자신들의 과학계라는 우물 속만 들여다 볼 경우 그 위험의 강도는 너무도 참담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기술의 사용에 대한 국제적 합의는 물론, 일본과 중국처럼 아무런 규제와 입법조치가 없는 국가들의 무책임한 임상실험은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20154월 중국 광저우 한 대학의 연구팀은 인간 생식세포인 배아 86개에 크리스퍼를 주입하는 심히 의심스러운 임상실험을 발표했다. 이 무모하고 허섭한 실험이 실패로 끝났기 망정이지 인류전체를 괴멸로 이끌 가능성을 내포한 위험천만하고 무책임한 실험이었다. 이런 힘이 과학자의 손 안에만 들어있을 경우, 인류 사회 전체가 볼모가 되는 위험천만한 사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다우드나 교수는 우리는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다"고 현 인류의 유전자지식에 대한 불완전성을 주장하고 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이 이 기술을 사용할 때 발생할 가공의 재앙을 제어하기 위해서라도 국제적 사용의 표준과 도덕적 지침이 시급히 마련되어야 할 당위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다. 지구 탄생 이래 대면한 적 없는 이 기술을 현 인류는 과연 감당해 낼 수 있겠는가? 아마 이 감당에 대한 논의는 가장 큰 인류의 도전이 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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