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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키
D. M. 풀리 지음, 하현길 옮김 / 노블마인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이게 대체······?” 아이리스는 열쇠를 집어 들었다. 한쪽 면에 ‘547’이라는 숫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클리블랜드 퍼스트뱅크’라는 작은 글자들이 숫자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열쇠를 돌려보며 담배를 빨아들였다. 오랫동안 살펴볼수록 이 열쇠가 지하의 금고실에 있는 대여금고의 열쇠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문 열쇠라기에는 너무 작은 데다, 숫자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리스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서랍을 잡아당겼다. 레이먼은 은행이 팔렸을 때 모든 금고실의 열쇠가 사라졌다고 말했었다. 어쩌면 그동안 수전의 책상에 틀어박혀 있었는지도 몰랐다. (p.101)
아이리스는 547번 열쇠를 손가락 사이로 이리저리 굴렸다. 이 열쇠는 뭔가 비밀을 갖고 있었다. 대여금고 열쇠를 서랍 속에 던져 넣고 잊어버리는 사람은 없다. 열쇠가 중요하지 않다면, 아예 대여금고를 빌리지 않았을 테니까. 이건 건물 안에 묻어버리라고 만든 게 아니었다. 아니, 건물이 아니라 묘지지. 아이리스는 생각했다. 카마이클이 그 건물은 묘지라고 했으니까······. (p.149)
베아트리스는 손을 집어넣었다. 뭔가 단단한 금속이 손가락 끝에 스쳤다. 그건 커다란 열쇠고리였다. 베아트리스는 은닉처에서 그걸 꺼내 쫙 펼쳤다. 각양각색의 열쇠들이 서른 개쯤 되었다. 커다란 철제 열쇠들은 사무실 열쇠 같았다. 열쇠고리에 좀 더 작은 열쇠 고리가 달려 있었다. 그곳에는 열세 개의 작은 놋쇠 열쇠가 매달려 있었다. 그중 하나를 집어든 베아트리스의 심장이 두방망이질했다. 한쪽 면에는 ‘D’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고, ‘클리블랜드 퍼스트뱅크’라는 글자가 그 둘레에 새겨져 있었다. 이모의 열쇠처럼. 다른 열쇠들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문자가 하나씩 새겨져 있었지만, 547번 열쇠는 아니었다. (p.205)
“왜 데드키라고 부르는 거죠?” 아이리스가 끝까지 물었다.
“대여금고가 여러 해 동안 열리지 않고 잠겨 있으면, 우린 ‘죽었다’고 말해요. 대여금고가 죽으면, 그걸 비우고 다른 대여자를 받아야 하죠. 우린 데드키로 죽어버린 대여금고를 열고 자물쇠를 바꾸곤 했어요. 지금은 드릴로 틀에 구멍을 뚫고, 틀 전체를 몽땅 갈아치우지만. 짐작하겠지만, 금전적으로는 엄청난 낭비죠.”
“대여금고가 자주 죽나요?”
“깜짝 놀랄 정도로 자주요,” (p.457)
1978년 겨울, 미국 오하이오주의 클리블랜드 퍼스트뱅크. 지역 내 거물급 인사들과 내로라하는 부유층 집안이 거액의 귀중품을 수탁한 ‘대여금고’가 운영되었음에도 은행은 석연찮은 이유로 파산하고 만다. 1,300여 개의 대여금고는 먼지와 함께 잠들고, 20년이 흐른 후 은행 건물 매각을 이유로 건물의 재사용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신참 건축공학기술자 아이리스와 그녀의 선배이자 멘토인 브래드가 함께 투입된다. 그리고 이후 그녀 혼자 이곳에 남아 일을 이어가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뭔가 꺼림칙하다. 누군가 이곳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텅 빈 건물에 무장경비원을 배치하겠는가. 그러던 중 우연히 보게 된 인사 파일과 열쇠로 아이리스의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가고 혼자서 조금씩 조사를 이어가다 급기야 남자의 시체까지 발견하게 된다. 그 일로 베아트리스의 직장 친구이자 행방불명 된 맥스의 오빠 앤서니 맥도넬 형사를 알게 되고 그와 함께 파산 직전에 일어난 몇몇 사건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2014년 아마존 브레이크스루 미스터리·스릴러 소설 부분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고 2017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리더의 선택’에서는 소설 부분 1위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은 <데드키>. 책은 클리블랜드 퍼스트뱅크를 중심으로 1978년 은행 파산 직전, 비서로 고용된 십 대 소녀 베아트리스와 1998년 은행의 설계도를 담당하게 된 건축공학기술자 아이리스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이어진다. 파산 이후 무덤처럼 잠들어버린 클리블랜드 퍼스트뱅크. 세월에 닳아버린 은행거래기록과 은행 비서에 관한 의문의 파일. 그리고 20년간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547번 대여금고. 각자 같은 공간, 다른 시간 속에서 데드키를 거머쥔 채 지난 20년간 은폐되었던 대여금고 속의 진실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하는 두 여자. 이야기는 후반부를 향해 갈수록 긴장감과 공포로 손에 땀을 쥘 정도로 흥미진진해진다.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구조공학자로 일했던 작가 자신의 실제 경험이 더해져서인지 꾸며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실제 어딘가에서 일어났을 법한 이야기를 그대로 가지고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현실감이 넘친다. 100개가 넘는 대여금고의 귀중품이 사라졌지만 모두가 침묵한 채 파산해버린 클리블랜드 퍼스트뱅크. 그곳에서 일어나는 스캔들, 도난, 살인 사건, 불신과 부정부패를 밝히고 그들의 음모를 막기 위해 목숨까지 내건 그녀들의 선택. 탄탄한 구성과 숨을 멎게 만드는 충격적인 반전 그리고 책을 뚫고 나올 것 같은 주인공들의 생생한 활약상까지 더해지니 도저히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입이 쩍 벌어질 정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648페이지에 이르는 동안 지루할 틈도 없이 빠르게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