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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7년 8월
평점 :
원서의 제목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은 책 중에서 출판사의 기획력이 빛을 발한 최고의 책이 아닐까 싶다.
비틀스의 노래 NORWEGIAN WOOD를 직역하면 그때 당시 가장 흔했던 노르웨이산 가구가 책 제목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Wood를 작은 숲이라는 뜻도 있지만 노래 가사에선 분명히 가구에 불을 질렀다는 내용이니까.
처음 한국에서 번역되었을 땐 <노르웨이의 숲>으로 나왔었지만 판매 실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문학 사상사에서 <상실의 시대>로 제목을 바꿔서 재출간 되어서야 빛을 보게 된 책이다.
20대엔 야하다고 해서 <상실의 시대>로 읽었고, 지금 다시 읽게 된 <노르웨이의 숲>은 자살로 대표되는 상실에 집중해서 읽게 되었다. 기즈키의 자살, 하쓰미의 자살, 나오코 언니의 자살, 나오코의 자살로 이어져 있는 와타나베가 20대를 무사히 지나서 자살하지 않고 서른일곱 살이 된 것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설마 나오코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였을까?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네 곁에 있었다는 걸 언제까지나 기억해 줄래?"
함부르크 공항에 내리는 보잉 747기 안에서 비틀스의 Norwegian Wood가 흘러나오면서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처럼 와타나베는 19살로 돌아간다. 나오코가 좋아했던 노래를 듣게 되는 순간에.
과거의 나오코와 이별하고 미래의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막상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와타나베의 모습으로 끝이 나는 이 이야기를 상실과 허무로 대표되는 와타나베의 성장소설로 봐야 할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이라는 죽음을 경험한 나오코와 암에 걸려 돌아가신 부모의 죽음을 경험한 미도리의 상반된 태도에도 새삼스럽게 눈길이 갔다. 나는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죽음을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분명한 진실 앞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까?
기즈키와 나오코를 세상에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해주었던 와타나베의 청춘은 마치 내일 죽을 것처럼 젊음을 불태우기 위해서? 아니면 친구의 자살로 인해 느낀 상실의 터널을 지나갈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에 그렇게 성에 집중했던 것일까?
비틀스의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들으면서 집필했다는 하루키의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정말 오랜만에 비틀스의 노래를 들으면서 책을 읽는 시간을 보냈다. 1988년에 서른일곱 살이었으니 2021년은 일흔 한살이 되어 있을 와타나베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p.s. 책을 부르는 책이다. <마의 산>, <위대한 개츠비>도 다시 읽어보는 시간을 가져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