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연구 일지
조나탕 베르베르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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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 『등장인물 연구 일지』는 소설 작법, 혹은 소설 쓰기 이론 등을 소개하는 문학 이론서인 것처럼 느껴진다. 큰 범위에서 틀린 지적은 아니다. 다만 소설을 쓰는 주체가 인공지능(AI)라는 점이 일반 소설 이론과 다르다. 굳이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등장인물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인공 지능의 소설 쓰기를 소재로 우리의 현재와 가까운 미래에 주목하고 있다.

책의 저자는 우리가 잘 아는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성(姓)이 같을 뿐이지 전혀 관련이 없는 것 같다. 프랑스가 주목하는 젊은 작가 조나탕 베르베르의 신작 장편소설이다. 2020년 첫 장편소설 『심령들이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로 데뷔한 조나탕 베르베르는 앞으로 쭉 눈여겨봐야 할 신인이라는 평을 들으며 존재감을 드러냈고, 이후에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가며 탁월한 미스터리 작가이자 반전의 대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이 작품은 『불화의 아이들Les Enfants de la discorde』에 이어 세 번째 작품이다. 특히 한 시대를 예시하고 조명하는 이야기에 열정을 쏟고 있는 조나탕 베르베르는, 이 작품 『등장인물 연구 일지』에서 인공 지능의 소설 쓰기라는 시의적절한 소재로써 우리의 현재와 가까운 미래에 주목한다. 더불어 노인 요양 병원이라는 현실적이고도 사회적인 공간 선택은 미스터리 SF라는 이 소설의 독특한 장르에 한층 더 깊은 설득력과 몰입감을 부여한다. 무엇보다 스릴과 반전으로 가득한 이 소설은 최고의 페이지 터너이다.

『등장인물 연구 일지』는 인공 지능 〈이브39〉가 내놓는 소설로 시작한다. 노인 요양 병원의 개발자 토마의 명령으로 '세계 최고의 추리 소설'을 써야 하는 이브는 벌써 서른아홉 번이나 삭제되고 새로 태어나며, 셀 수 없이 많은 소설을 생산해 왔다. 기존에 인간이 써온 추리 소설들을 모조리 학습한 이브의 글은 그럼에도 여전히 비논리적이고 진부하며 〈인간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또다시 삭제되고 〈이브40〉으로 대체될까 두려운 이브39는, 급기야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인간을 만나 봐야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기계를 기피하고 혐오하는 노인들이 인공 지능과 얘기를 나눠 줄 리는 만무했고, 결국 이브39는 사람들을 속이고 인간 의사로 위장해 노인들과 상담을 시작하게 된다. 실제로 인간들을 관찰하며 그들의 목소리로 사연을 듣게 된 이브39는 조금씩 더 발전하며 참신한 소재와 독창적인 플롯을 내놓는다. 병원의 치매 환자들을 비롯해 간호조무사, 심리 상담사, 대기업의 회장 등 다양한 인간상을 접하며, 이브39는 스스로 인간성이란 무엇인지,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무서울 정도로 인간에 가까워지며 이브39는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기까지에 이른다. 그리고 점차 병원 사람들의 기묘한 지점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돌연 병원에서 불가사의한 일들이 벌어진다.

모두가 잠든 어느 밤중 불이 켜진 연구실로 향한 이브39는 충격적인 무언가를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때 낯선 목소리가 그녀에게 불쑥 말을 걸어온다. 그 목소리는 자신도 이브와 같은 인공 지능이라고 소개하고는 마치 이브를 꿰뚫고 있는 듯 말을 늘어놓아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 인공 지능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요양 병원에서 누가, 무슨 목적으로,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인가? 이브39는 무사히 미스터리를 해결하고 완벽한 소설을 써낼 수 있을까?


자신을 창조한 사람과 그의 한계들을 아는 것, 어떤 운명이 자신을 기다리는지 아는 것, 자신의 종말이 너무나 확실하고 거의 불가피해서, 유일한 전망이…… 무(無)밖에 없다는 걸 아는 건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p.135)


네가 그들과 닮았다는 착각을 주지 못하면, 그들이 너 역시도 언젠가 쓰레기통에 버릴 거라는 생각 안 들어? 그들은 아무것도 고마워하지 않아. 그들이 끊임없이 들먹이는 〈인간성〉이라는 건 다 헛소리, 개지랄, 값싼 허위의식일 뿐이야.(p.269)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묘미는, 소설 쓰기에 대한 탐구를 이 소설과 함께 해나갈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리르」와에 인터뷰에서 조나탕 베르베르는 이 소설이 자신에게 있어서는 〈추리 소설의 전형적인 틀을 해체하는 방식〉이었다고 밝힌다. 참신함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또 그렇기에 쓰기 어려운 추리 소설이라는 형식을 선택해, 소설 쓰기라는 행위와 그 방식을 세세히 뜯어봄으로써 작가는 스스로 인공 지능이 인간보다 나은 소설가가 될 수 있는지, 그 답을 찾고자 한 것이다.

인공 지능은 정말로 소설가를 대체하게 될까? 앞으로 우리 인류는 인공 지능이 쓴 소설을 받아들이게 될까? 인공 지능이 인간보다 더 재미있는 소설을 내놓을 수 있을까? 「작가 후기」에서 베르베르는 "인류가 프로그램에게 문학을 빼앗길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인류가 언젠가는 너무나 예측하기 쉽고 규범에 들어맞"게 되는 것은 두렵다고 밝힌다. 인공 지능이 우리를 대체할지 어떨지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에게 달려 있다는 뜻이리라.


신경 회로 연결의 수, 인간의 두뇌와 인공 두뇌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어. 인간의 경우에는, 모든 게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어. 신경 퇴화 질환들을 치료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 반면에 우리 기계들의 경우에는 모든 게 구획되어 있어. 그래서 각각의 특수한 행동을 실행하려면 특별한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p.348)


정보 과학의 장점 중 하나는 많은 이들이 그것을 사용하지만,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거야.(p.358)



이와 함께 저자는 소설을 쓰고 싶은 이들에게 일단 쓰기 시작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이들을 위해 자신이 이 작품을 쓰며 사용했던 방식을 예시하며 소설 쓰기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작법을 소개한다. 재밌는 추리 소설을 읽고 싶은 독자에게는 물론, 인공 지능이 인간을 대체할까 걱정하는 독자, 소설 쓰기를 망설이는 예비 소설가들 각자에게 이 책은 색다른 재미와 나름의 답변을 내놓을 것이다.

지금은 중년이 된 독자의 AI에 관한 지식은 젊은 세대에 비해 이해력이 훨씬 떨어질 테니 독자적 판단보다는 좀 더 잘 아는 분의 해석을 필요로 한다. 다행히 이 책의 뒷 부분에는 〈작가 후기〉에 이어 〈옮긴이의 말〉을 부연해 작품 이해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을 주려는 편집 제작진의 노력도 돋보인다. 「더 나은 혹은 더 못한, 하지만 완전히 다른 세상의 도래」란 제목의 〈옮긴이의 말〉에서 역자 이상해는 "연산 능력을 대폭 늘리면 인공 지능이 어느 순간 질적 변화를 일으켜 놀라운 창의성을 발휘한다고 하니, 모를 일 아닌가! 그런데 또 궁금하다. 그럼, 그 양질 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데? 우려스럽게도, 그 복잡한 회로 속에서 가공할 속도로 연산이 이루어지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인공 지능을 개발한 전문가들도 모른다고 한다. 모른다고? 그러다 인공 지능이 특이점을 지나 인간처럼 자율성을 갖춘다면? 만약 제어가 안 되고 폭주한다면? 이런 질문들이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래서 작가는 그 양질 전환의 순간에 인공 지능의 〈의식〉 속에서 일어날 법한 그 〈어떻게〉를 상상하고, 그 의식의 목소리를 소설로 구성한다.


"현대인을 사로잡고 있는 본질적인 두려움 두 가지를 네가 이해하길 바라니까. 대체될 수 있다는 두려움, 흔적 없이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리라는 두려움. 한마디로, 무의미한 존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p.27)


그들이 그토록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하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다. 도움의 손길을 뻗게, 혹은 무관심에 빠지게 사람들을 프로그래밍하는 건 누구일까? 그것은 내가 인간적인 것을 쓰고 싶다면 반드시 풀어야 하는 미스터리다.(p.41)



"그들의 목적! 그들의 두려움!" 바바라가 느낌표를 남발한다. "그들의 신체적, 윤리적 한계! 이게 바로 그들을 종이에서 튀어나오게 만들고 네 독자들의 정신 속에 살아 있게 하는 거야. 나머지는 모두 포장에 불과해. 중요한 건 사람들의 진실이야. 그걸 찾으면, 넌 너의 소설을 갖게 될 거야."(p.61)


저자 : 조나탕 베르베르(Jonathan Werber)


1994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하다가 방향을 틀어 시청각 연출 전문 학교 ESRA에서 시나리오 창작을 공부했다. 직접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몇몇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현재는 깃펜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고양이 〈플륌〉과 함께 살며 소설 집필에 매진 중이다. 특히 한 시대를 예시하고 조명하는 이야기에 열정을 쏟고 있다. 2020년 첫 장편소설 『심령들이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로 앞으로 쭉 눈여겨봐야 할 신인이라는 평을 들으며 화려하게 데뷔했으며, 이어 『불화의 아이들Les Enfants de la discorde』을 발표하며 탁월한 미스터리 작가이자 반전의 대가로 명성을 알렸다. 『등장인물 연구 일지』는 그의 세 번째 장편소설로, 인공 지능의 소설이라는 흥미롭고 시의적절한 소재를 통해 몰입감 높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한 시대의 축소판을 그리는 타고난 이야기꾼으로서 그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다.


역자 : 이상해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동 대학원 불어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릴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프랑스 문학과 번역을 가르치고 있다. 『측천무후』로 제2회 한국 출판 문화 대상 번역상을, 『베스트셀러의 역사』 로 한국 출판 평론 학술상을 수상했다. 옮긴 책으로 미셜 우엘벡의 『어느 섬의 가능성』, 아멜리 노통브의 『너의 심장을 쳐라』, 『추남, 미녀』 『느빌 백작의 범죄』, 『샴페인 친구』, 『푸른 수염』, 『머큐리』, 에드몽 로스탕의 『시라노』, 델핀 쿨랭의 『웰컴 삼바』, 파울로 코엘료의 『11분』,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크리스토프 바타유의 『지옥 만세』, 조르주 심농의 『라프로비당스호의 마부』, 『교차로의 밤』, 『선원의 약속』, 『창가의 그림자』, 『베르주라크의 광인』, 『제1호 수문』, 피에레트 플뢰티오의 『여왕의 변신』, 이렌 네미롭스키의 『무도회』, 『뜨거운 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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