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유럽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책 『언레코더블』은 ‘기록될 수 없는 사건들’ 시리즈의 시즌 첫 작품이다. 이름 그대로 범죄지만 기록되지 않고, 진실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이야기다. 첫 번째 편 〈괴뢰사〉는 초능력을 다룬다고 출판사는 소개하고 있다. 사실 독자는 '괴뢰사'란 단어는 처음 접한다. 이 책을 읽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색적인 책의 표지와 스릴러라는 소개에도 관심이 컸다. 출판사의 소개글 따르면 이 소설 작품은 무엇보다도 장르적 재미가 돋보인다. 현장을 가득 채우는 긴장, 언제 터질지 모르는 대결, 한 장면 한 장면이 마치 스크린 위에 옮겨진 듯 선명하게 그려진다. 동시에 단순한 추격과 격투가 아니라 ‘왜 어떤 사람은 괴물이 되고 어떤 사람은 끝내 인간으로 남는가’라는 물음을 함께 건넨다.
스릴러에 익숙지 못한 독자로서는 처음 듣는 단어의 정확한 뜻을 알고 싶었다. 국어사전은 괴뢰사(傀儡師)는 "민속 꼭두각시놀음에서, 꼭두각시를 놀리는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일차적 판단으로 괴뢰사의 '사'가 죽음(死)을 뜻하는 것으로 알았지만, 뒷 표지 안쪽에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설명이 되어 있다. 책 속의 인용문으로 뜻을 더 분명하게 해준다.
"어쩌면··· 괴뢰사일지도 모르겠군. 괴뢰사라는 건 꼭두각시를 부리는 인형사를 뜻해. 그들은 실로 연결된 인형을 조종하듯 일정한 거리에서 사물을 움직이지만, 우리 눈엔 결코 보이지 않아."
이 소설은 모두 13장(章)으로 이뤄져 있다. 〈프롤로그〉 대신 쓴 '00장'과 〈에필로그〉를 합친다면 15장으로 구성된 셈이다. 책의 첫 문장은 "때때로 남겨진 자는 괴물이 된다."이지만 사실 페이지를 달리 해 이 한 문장만 써 놓은 것으로 보아 책의 내용을 암시하는 듯하다. 실제 가장 첫 문장은 '00'으로 표기된 〈프롤로그〉에서 시작한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한밤을 깨운 것은 묘한 마찰음이었다. '드르륵' 의자가 바닥을 긁는 기분 나쁜 소리에 아이는 눈을 떴다. 얕은 잠에서 깨어난 아이는 눈을 비비며, 가장 먼저 한 사람을 떠올렸다."(p.7)

앞서 나온 아이는 열 살이고 이날 밤 사건으로 고아가 된다. 엄마 아빠가 차례로 낯선 괴한의 칼에 찔려 사망했다. 책 소개글에 따르면 괴뢰사의 섬뜩한 존재감은 초능력적 장치이면서도 현실을 감당하지 못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은유다. 독자는 액션의 쾌감을 따라가다가도, 불시에 던져지는 질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언레코더블』의 힘은 바로 이 두 겹의 매력에 있다. 세상에는 끝내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나 지워진 흔적 속에서도, 그것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1편 〈괴뢰사〉는 그 시작에 불과하다. 기록되지 않은 사건들, 증명할 수 없는 진실들이 앞으로 어떤 얼굴로 다가올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이 소설 작품은 스릴러, 미스터리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결국은 남겨진 아이와 어른의 책임이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부모를 잃고 홀로 남겨진 한 아이가 결국 스스로 괴물이 되어 세상에 칼끝을 겨누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이야기는 초능력이라는 장르적 장치를 통해 극적인 긴장과 서스펜스를 만들어내지만, 그 밑바탕에 깔린 질문은 잔혹할 만큼 현실적이다. 보호받지 못한 아이는 어떤 모습으로 자라나는가, 그리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어른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작품은 이 질문을 피해 가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한다.
괴뢰사가 조종하는 인형의 기괴한 움직임은 초현실적인 장치이면서도, 인간 내면의 균열을 드러낸다. 이에 따라 독자들은 단순히 괴이한 장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아이의 상처가 어떻게 현실을 왜곡해 내는지 체감할 수 있다. 경찰과 범죄자의 대결로 보이는 이야기는 사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어른과 끝내 인정받고 싶어 한 아이의 충돌이다. 결국 소설 속 주인공들이 남기는 것은 총성도, 칼날도 아닌 늦게 도착한 사과 한마디와 눈물의 무게다. 책장을 덮고 난 뒤에도 독자들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괴물은 태어나는가, 길러지는가. 그리고 어른은 언제, 어떻게 아이의 삶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

책의 시작이자 전체 내용의 흐름을 잡아주는 〈프롤로그〉 00장(章)은 이날 밤 사건의 전개와 일단락에 몇 사람이 등장한다. 당연히 사건의 목격자이자 살아남은 아이와 사망한 엄마와 아빠, 그리고 강도 살해범으로 추정되는 체포된 범인이다. 또 아이의 전화 신고로 출동한 경찰, 한재우와 그의 한 팀 선배 김 경장이 있다. 이들은 아이가 112에 신고해 출동한 경찰들이다. 아이가 눈을 떠서 엄마 아빠방으로 가면서 방 안에서 일어난 소음 때문에 멈칫한다. 엄마 아빠 외에 누군가 방안에 있다. 문고리를 살짝 돌려 열고 아이는 얼굴을 빼꼼 내민다. 아이의 시선이 무언가를 발견하며 동시에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터져 나온다. "엄마~!!!"
아이의 부모가 동시에 잠에서 깨어나고 검은색 일색의 옷차림에 식칼을 든 남자가 침대 곁에 서 있다. "꺄악~!!!"
엄마의 비명과 동시에 아빠의 몸이 남자에게로 달려들었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두 남자는 한 덩어리가 되어 뒤엉켰다. 아빠가 남자와 육탄전을 벌이는 사이 엄마는 방 밖으로 뛰어나와 아이를 살폈다.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엄마의 물음에 아이는 엉엉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 방 안으로 빨리!"
아빠는 필사적으로 아내와 아이를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그 말은 그의 유언이 되었다.
엄마는 급히 아이를 방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문 잠그고, 112에 전화해! 어서!" 아이가 전화한 후 누군가 연신 방문을 두들기는 쾅쾅 소리에 울음을 터뜨리며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경찰이 출동하고 아이는 살해되기 직전 경찰에 의해 목숨을 건진다. 칼을 휘두르는 범인을 한재우 순경이 손바닥으로 칼을 막은 것이다. 격투 끝에 범인은 체포되고 한재우는 손바닥에 칼이 박히며 사건은 일단락됐다. 현장에선 살해 흉기는 발견되지만 그 흉기에는 그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고, 현장 주변에선 살인자의 그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다. 경찰에서는 미재 사건으로 돌리지만 이런 사건을 따로 수사하는 사람들, 조직이 있다. 그들은 이런 사건들을 기록할 수 없는 '언레코더블 사건'이라고 분류한다.
기록할 수 없다는 것은 기록할 것이 없다는 말일 수도 있고, 기록해봐야 아무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언레코더블 사건'은 후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건을 수사하고 추적하는 이들에겐 기록으로 남겨진 수많은 것들이 가지고 있다. 단지 일반적인 사람들, 경찰들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그런 기록과 단서였다. 어릴 적 부모가 살해되는 현장에 있던 아이는 그 시간 자체가 트라우마로 남는다. 그 아이는 그 트라우마를 자신의 손으로 악을 응징하는 쪽으로 해소한다. 이 소설은 이 아이에 대한 이야기다.
철수는 죽은 남자들을 경멸하듯 쳐다보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택진이 다시 보고를 이어갔다. “공원에 끌려온 뒤, 구타를 당했고…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니 셋 다 죽어 있었답니다. 지금도 지구대에서 보호 중이고요.” “과수대에서는 뭐래?” “살해도구가 석상인 건 확실한 것 같답니다. 사체들 전부 머리가 깨져 있는데 그 상처랑 딱 맞아떨어진다고요. 석상에서 피해자들 머리카락도 묻어나왔답니다. 문제는….” ‘문제’라는 말에 철수가 눈을 부라리며 택진을 쳐다보았다. 택진은 잠시 입술을 깨물다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석상에… 아무 흔적도 없답니다.”(p.29-30)

이 소설 『언레코더블』은 ‘읽는다’기보다 ‘보는’ 경험에 가깝다.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머릿속에서 장면이 자동으로 재생되고, 인물의 움직임과 긴장감이 영상처럼 또렷하게 다가온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스릴러적 긴장에 머무르지 않고, 그 긴장을 영화적 리듬으로 구현해낸다는 데 있다. 이는 저자 한혁이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전공한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라 독자에게는 이해된다. 저자의 묘사는 카메라가 줌인하듯 인물의 표정이 드러나고, 한 컷 한 컷 이어지듯 장면이 겹쳐진다. 이로 인해 독자들은 활자를 읽는 동시에 이미지를 체험하는 이중의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소설 작품은 장르소설임에도 시각적 상상력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더해, 마치 영상과 문학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듯한 독창성이 장점이다. 과장된 서술 없이도 화면이 그려지고, 설명을 넘어선 감각이 전해진다.
초능력을 지닌 빌런과 일반인 형사의 대결 구도라는 설정 자체는 소설의 시작부터 미스터리하면서도 흥미로운 서사 무대를 예고한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이 담백하면서도 압도적인 힘이야말로 이 작품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이어지는 시리즈가 기대되는 까닭이다.
탁자 위에는 정체 모를 기계 부품들이 녹슨 채 널려 있었고, 장식장 안에는 작은 석상들이 촘촘히 줄지어 서 있었다. 일부는 고대 신의 형상 같았고, 일부는 어디서 본 듯한 불상의 파편 같았다. 빛은 형광등이 아니라 천장에 매달린 낡은 주홍빛 전등 하나뿐이었는데, 그 불빛이 유리 진열장에 부딪혀 기묘한 그림자를 벽 곳곳에 흩뿌렸다. 한울은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게 안은 마치 버려진 시간과 잊힌 기억들이 얽혀 만든, 작은 세계의 심장부 같았다. 한울은 괜히 목덜미가 서늘해져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분명 아무도 없는데도, 누군가가 빽빽한 골동품 사이에서 숨을 죽이고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재우가 걸음을 멈췄다.(p.123)
저자 : 한혁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전공했다. 2016년 스토리공모전에 당선된 후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주로 영화, 드라마 원작 스토리텔링과 소설, 웹툰 작업을 하고 있다. 카카오페이지에 웹툰을 연재했으며, 원작으로 기획한 소설 두 편이 드라마로 개발 중이다. 연령, 전공 여부와 상관없이 작가가 되고 싶은 이들을 대상으로 스토리텔링 수업을 하고 있다. 인생에 특별한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계속 글을 쓸 계획이다. (8_hans@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