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역 예수의 언어 - 영원불멸의 고전에서 길어올린 삶의 지혜와 진리의 가르침
김학철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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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책 『초역 예수의 언어』는 예수의 가르침을 종교적 틀에서 벗어나, 그가 살았던 역사와 문화적 맥락에 비추어 오늘날의 삶 속에서 새롭게 해석했다. 국내 최고의 종교학자 김학철 교수가 예수를 단순한 종교적 인물이 아니라, 한 인간이자 지혜로운 스승으로서 조명하며, 그의 언어 속에 담긴 실존적 통찰과 인문학적 가치를 되살렸다. 이 책은 네 복음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전해지는 예수의 언어를 통해 삶의 방향과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하루 한 장씩 곱씹으며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된 이 책은 단순한 문자적 번역을 넘어 독자의 마음에 성찰의 씨앗을 틔우도록 이끈다. 예수의 언어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삶의 갈증을 풀어내는 길을 제시하며, 종교적 신앙을 넘어 누구에게나 통찰과 용기를 건네준다.

저자 김학철은 「그대들은 무엇을 찾고 있나요?」란 제목의 〈서문〉에서 「마태복음」 등 네 복음서에 대한 설명으로 말문을 연다. 이에 따르면(존칭어를 예삿말로 전환: 독자) 예수의 말만 모은 초기 기독교 책들이 있다. 정경(正徑)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도마복음서」, 「디다케」 등이다. 또 「마가복음」에는 없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공통으로 나오는 예수의 말씀 자료, 흔히 'Q(자료라는 독일어 Quelle에서 온 것)'라고 부르는 자료가 있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그러나 지금 정경에 속한 네 복음서에서 예수의 말은 대부분 이야기 속에 있다. 맥락을 갖는다는 뜻이다. 예수의 말이 전해지다가 거기에 이야기가 덧붙여졌고, 그것이 복음서에 수록되었는지, 아니면 예수의 말만 있었는데 복음서 저자가 그 말을 중심으로 이야기로 확장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아니면 예수의 말이 포함된 이야기 전체가 전승되어 복음서에 들어왔을 수도 있다. 그 과정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복음서에 나온 예수의 말은 대부분 이야기 속에 나온다. 

이야기 속에서 예수의 말만을 따로 떼어 번역해 달라는 출판사의 제안에 잠시 머뭇거렸다고 저자는 밝힌다. 그러나 초역(超譯)이라면 상황은 다르다고 저자는 말한다. 초역은 원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말이 속한 이야기 맥락은 물론 역사, 사회, 문화적 맥락을 감안하여 문자를 넘어선 과감한 번역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문자적 번역'과 '초역'의 다른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자신이 왜 초역을 했는지를 독자들이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말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이 이야기 속의 맥락을 잡아낸 것이라는 점이고, 문자적 번역과의 다르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또 한 모임에서 '초역 예수의 언어'를 쓰고 있다고 알리면서 한 첫 번째 말의 초역을 들려주었다고 말한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언을 했다. 거기에 서 있던 요한의 제자들 가운데 두 명이 과감히 요한을 떠나 예수를 좇아갔다. 예수는 자신을 따라오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을 보고 '그대들은 무엇을 찾고 있나?'라고 묻는다. 이것이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첫 말이다. 그리고 그 한 문장을 이렇게 초역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그대들, 그대들은 무엇을 찾고 있는가? 의식주가 해결되기를 바라는가? 안전을 바라는가? 돈과 명예와 권력을 원하는가? 자기 삶이 실현되기를 바라는가? 그대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그대들이 나를 따르고자 할 때 그대들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그 욕망은 무엇인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심연에 놓인 그 욕망은 무엇인가?'"(p.7)

저자가 초역 과정의 한 부분을 들려주자 모임에 참석한 한 분이 "미드라쉬로군"이라고 응답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유대인들에게 오래전부터 있었던 성서 주석 방법인 미드라쉬가 초역과 닮았음을 새상 깨닫게 되었다고 저자는 털어놓는다. 미드라쉬는 히브리어 동사 '다라쉬'에서 온 말로, '찾다', '연구하다', '해석하다' 등을 뜻한다. 현재의 삶에 적응할 수 있도록 성서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다. 가장 오래된 미드라쉬 문헌은 2세기 것이니까 최소한 1,800년 이상 되었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 책은 예수가 2,000년 전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건넨 일상의 조언부터 삶을 건 결단의 요청까지 오늘날 이해할 수 있는 교훈적 의미로 되살리려 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또 이른바 실존적 함의 를 드러내려고도 했다. 가끔은 오래전에 읽은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처럼 쓰려고도 해보았다. 이런 저런 방법을 심사숙고해 결정한 것이 이 책에 활자로 나타난 것임을 저자를 밝힌다. 이에 따라 가급적 하루에 하나씩만 읽기를 독자들에게 권유한다. 이 책은 정보를 제공하기보다 성찰의 씨앗을 마련하려는 목적으로 쓰였다고 역설한다. 이 책은 모두 3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마음 고쳐먹기〉, 2장 〈생각 다시 하기〉, 3장 〈인생 새로 보기〉 등이다. 네 복음서에 담긴 예수의 말을 모아 세 축(3장)으로 엮었다. 각 구절은 단순한 교리의 지침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이면서도 본질적인 물음이다. 복음서에 담긴 예수의 말들은 종교적 맥락을 넘어 일상에서 바로 실천 가능한 지혜라고 저자는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한글로 읽는 성경은 기독교인들이라면 세 가지 원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쯤은 잘 알 것이다. 독자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아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구분에 대해서도 잘 모를 정도로 문외한이다. 다만 그동안 영상이나 몇 권의 책을 통해 지식으로서의 성경의 겉만 조금 알 뿐이다. 이 책을 읽기 위해 사전 공부로 백과사전을 통해 성경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았다. 사전에 따르면 성경의 언어는 세 가지로 기록되었다. ① 『구약성서』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되어 있다. 히브리어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언어로서 구약성경 대부분은 고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창세기, 에스라, 예레미야, 다니엘서의 일부에서 아람어가 사용되고 있다. 고대 히브리어는 성경에서 ‘유다 방언’(왕하 18:26; 느 13:24; 사 36:11) 또는 ‘가나안 방언’(사 19:18) 등으로 불린다. 특히 ‘가나안 방언’이라 불리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면서 가나안 사람들의 언어를 자신들의 언어로 만들어 사용한 것이 히브리어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함락된 이후(B.C. 586년경) 히브리어는 주로 문서 등 문어체로 사용되고, 일상 생활에서는 대부분 아람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다 보니 나라를 잃고 뿔뿔이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의 후손들은 점차 히브리어를 잃어버려 성경을 읽기도 어려웠다. 이에 따라 70명(정확하게는 72명)의 유대인 학자들이 애굽에 있는 지중해 연안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모여 각처에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헬라어로 된 구약성경을 번역하게 된다. 이 성경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셉투아긴타’(Septuaginta, ⅬⅩⅩ)이다. ‘셉투아긴타’는 라틴어로 70을 뜻하는바, 성경 번역 학자들이 70명인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② 『신약성서』는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다.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광대한 헬라 제국은 지중해 연안을 비롯하여 소아시아, 애굽, 인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라에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헬라어는 대부분 나라에서 공용어처럼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이 헬라어 중에서도 보편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쓰고 읽는 ‘코이네’로 기록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코이네는 헬라 사회에서 대단한 문학적 가치를 지닌 수준 높은 고급 언어는 아닐지라도 모든 사상을 충분하게 전달하고 문법 체계가 단순하며 가장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여 복음 전파에 아주 유리한 특징을 갖고 있어 신약성경의 언어로 채택된 것 같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은 장(章)과 절(節)로 구분되어 있다. 하지만 성경이 처음부터 장과 절로 구분된 것은 아니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과 헬라어로 된 신약성경은 원래 장과 절이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여기에 장(章) 구분을 한 최초의 인물은 영국 캔터베리(Canterbury) 대주교인 스티븐 랭튼(Stephen Langton, 1150-1228)이다. 이것을 영어성경에 최초로 적용시킨 사람은 영국 종교개혁자 위클리프(Wycliffe)로서 ‘위클리프 영어성경’(John Wycliffe’s Version, 1382)이 바로 그것이다.

한편 절(節)을 최초로 구분한 인물은 프랑스 궁정인쇄사 스테파누스(Robert Stephanus)로 그는 1551년 헬라어 신약성경에 처음으로 절을 구분하고 그것을 인쇄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적용시킨 최초의 영어 신약성경은 『제네바 성경』(Geneva Bible, 1500)이다. 하지만 이렇게 장과 절을 구분하는 것은 성경본문을 인용하기에는 아주 편리하였지만 때론 인위적으로 끊거나, 문법 체제에 맞지 않게 잘못 끊어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폐단도 있었다. 그리하여 절 구분을 하지 않고 이전의 절 구분을 난외주로 처리한 성경이 나왔는데 곧 NEB(New English Bible, 1961-1970)가 그것이다. 한글성경의 장과 절 구분은 전통적으로 영어성경의 장과 절 구분법을 따른 것이다.

이 책 『초역 예수의 언어』는 『신약성서』를 텍스트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 탄생 이후는 『신약성서』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네 복음서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등은 『신약성서』에 포함되어 있다. 철학사전에 따르면 『신약성서』는 일종의 고대문헌으로 간주하는 한 단일문서가 아니며 저자, 성립한 시기, 장소 등도 다양한 27개나 되는 여러 문서의 집성이다. 저자 문제는 복잡해서 동일 저자에 귀속될 수 있는 것도 몇 개 있지만(누가, 파울), 저자가 분명치 않은 것도 많다. 또 복음서 저자는 전승(傳承)을 편집한 사람으로 볼 수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저자는 아니다. 성립시기는 기원전 50년경부터(데살로니카인에게의 제1편지) 2세기 중반경 것(「베드로의 제2편지」)까지 포함되어 있다. 성립장소는 대부분 명확치 않지만 팔레스티나를 중심으로 해서 고대 지중해 세계에 분포되어 있다고 추정된다. 이들의 문학 유형도 다양해서 복음서, 서간, 묵시문학 등으로 나뉜다. 더욱이 서간이라 해도 구체적인 상황과 연결되어 있는 것, 또는 일반적인 성격의 것도 있다.



또 「사도행전」은 역사서라기보다 오히려 「누가에 의한 복음서」로 이어지는 일종의 복음서라 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신약』은 『구약』과 함께 「경전」, 즉 교양과 신앙생활의 기준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신약』에 담긴 여러 문서는 반드시 처음부터 경전을 의도하고 씌어진 것은 아니고, 또 이들 외에도 같은 종류의 여러 문서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 문서들에서 현재의 경전을 뽑아내고, 그 외를 「외경」이라고 한 것은 최종적으로 4세기의 교회였다.

당시 교회는 『신약성서』는 전체가 하나의 기준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역사적 비판적 방법에 기초한 연구는 『신약』에 담겨져 있는 각종 문서에 있어서는 성립사정이나 문학 유형뿐만 아니라 사상도 다양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경전 이외의 각종 문서의 연구로 이들 사상이 각기 특정 사상조류에 속하고 있는 것도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신약성서』로서의 사상을 구하는 입장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경우에도 그 내부의 사상의 다양성은 인식되어진 위에 통합을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종래 대잡파(大雜把)로 파악되어온 기독교사상은 개개의 문헌으로 재음미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저자 김학철에 따르면 예수는 2,000년 전 팔레스타인 땅을 걸었던 한 인간이자, 동시대를 살아간 이들에게 직접 말을 건넨 존재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의 말은 종교적 해석과 전통 속에서 여러 겹의 의미로 덧입혀졌다. 저자는 그 겹겹의 해석을 걷어내고, 문자 그대로의 번역을 넘어 오늘의 삶과 맞닿은 초역(抄譯)으로 다시 풀어냈다. 초역은 단순히 단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 사회적 맥락을 고려해 지금 우리의 삶에 울림을 주는 언어로 되살리는 일이다.

예수의 언어가 이토록 위대한 이유는 모든 이를 일깨우는 참된 지혜이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예수의 한마디 한마디는 특정 종교에 속한 사람들만을 위한 말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성찰할 수 있는 삶의 원리로 이어진다.



예수의 언어는 시대를 넘어 오늘의 자리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고, 우리 각자가 마주한 현실 속에서도 깊은 울림을 던진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이 책은 교리를 따르기 위한 성경 해설서가 아니다. 신앙의 유무와 관계없이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예수를 절대적 존재라기보다 삶을 성찰하게 하는 멘토이자 길잡이로 바라보며, 그가 전하려 했던 생생한 메시지를 오늘의 자리로 불러온다. 저자는 예수의 한 문장 한 문장을 곱씹어 우리 내면 깊숙한 갈증을 비추는 거울로 삼는다.

"내가 미리 말해둘 것이 있습니다. 내가 떠난 후 그대들은 지역 회당에서 쫒겨날 겁니다. 회당에서 주도권을 잡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박해하고 그대들을 죽이려고 할 겁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고, 그분에게 제물을 드리려는 것으로 생각하겠지요.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하느님을 거스르면서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착각하다니요. 그러니 그들은 하느님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고 할 수 있지요. 내가 미리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말하는 것은 그대들이 이 박해 때문에 흔들려 스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지요. 고통의 때가 왔을 때 낙심하지 마세요. 악을 행하면서 선의 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어디든지 있기 마련입니다.(p.222) - 「요한복음」 16:1-4 - '하느님을 위한다는 착각' 중에서

저자 : 김학철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교수, 연세대학교 교양교육연구소 소장, 한국기독교교양학회 부회장, 한국신약학회 편집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연세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신약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기독교 교양을 학문의 주제로 삼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 기독교 교양학 및 신약성서를 주제로 한 수십 편의 논문 외에도 《허무감에 압도될 때, 지혜 문학》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이 입 맞출 때》 《마태복음서: 고전으로 읽는 성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 사도 바울과 새 시대의 윤리》 《렘브란트, 성서를 그리다》 《손으로 읽는 신약성서》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세바시〉, JTBC 〈차이나는 클라스〉, CBS 〈잘잘법〉, 〈삼프로TV〉 등 방송과 유튜브에 출연해 성서와 기독교 교양을 소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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