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가장 충만한 관계는, 친구·연인·부모·형제자매·스승·뮤즈처럼 우리의 삶에 존재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전형적 관계에 딱 들어맞지 않을 때가 많다. 이때 우리는 자신을 확장하는 성장통을 감내하며 이 유일무이한 관계에 맞는 형태로 새로운 틀을 힘껏 만들어내야만 한다. 아니면 돌처럼 굳고 만다."
이 책 『낭만적 우정과 무가치한 연애들』의 저자 라이나 코헨이 〈서문〉에 들어가기 전 마리아 포포바가 『진리의 발견』에서 서술한 문장을 인용해 책의 맨 앞 페이지에 수록한 내용이다. 또 코헨은 〈작가의 말〉에서는 "버젓이 드러나 있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어느 관계를 조명하고자 사람들의 사적 영역에 깊숙이 들어간다"고 선언한다.
표제어에서 암시하듯 이 책은 보편적 관계의 공식에서 벗어나 친구와 함께 다른 길을 걷기로 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친구 M을 만나서 더 깊은 우정의 가능성을 깨달은 저자 코헨은 자신과 비슷하고도 다른 형태의 깊은 우정을 맺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이 친구들은 서로의 돌봄 제공자이자 유언 집행인이며, 공동 명의자이자 공동 양육자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관계에 대한 관념을 다시 생각하고 새로운 각도에서 샅샅이 파헤친다.
저자는 우리가 로맨스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 그 관계를 약화시키고, 우정에는 기대를 너무 안 해서 발전시키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우정을 대하는 역사적인 관점의 변화, 우정이 받는 제도적 차별과 제약 등을 세밀하게 살펴봄으로써 관계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자신에게는 어떤 관계가 필요한지 생각해보게 한다.
새로운 연애 상대와 데이트를 하기 시작하면 친구와의 연락이 뜸해지고, 10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보다 한 달 남짓 사귄 연인이 더 중요해진다. 아무리 친한 친구가 있어도 연인이 없다면 ‘영혼의 반쪽’이 없는 상태이기에 언젠가 생길지도 모를 연인을 위한 자리를 늘 비워 두어야만 한다. 그렇게 우리는 은연중에 친구보다 연인을, 우정보다 로맨스를 우선해야 한다고 여긴다.

일대일 로맨틱 관계가 정상적이며 필수적이라는 ‘강제적 커플살이’ 관념은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이런 관념이 정말로 당연할까? 연애와 결혼이라는 하나의 관계 모델이 모두에게 맞는 틀일까? 우리는 어린 시절 타인과 관계 맺는 법을 배우며 친구를 사귀고, 자라면서 친구와의 관계가 어느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를 지난다. 그 시기를 지나 성인이 되면 친구는 뒤로 밀려나고 연인이 가장 중요한 관계로 급부상한다. 성인기의 로맨틱한 관계는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이며 로맨틱 상대가 없는 사람은 아직 불완전한 반쪽짜리이기에 사람들은 자신을 완성시켜줄 단 한 명의 소울메이트 찾기를 꿈꾼다.
로맨틱 파트너 하나만 있으면 외로움이 사라지고 성적 만족도 얻을 수 있고 가정도 꾸릴 수 있고 아이도 함께 키울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한 명에게 과도한 역할과 기대를 부여하는 만큼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집중하느라 다른 관계에 소홀해진다. 친구를 사귀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친구와의 관계도 깊어지기가 쉽지 않다. 기대를 충족해주지 못하는 연인과는 더 쉽게 헤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더 외로워진다.
저자 라이나 코헨은 M을 만났을 때 남자친구인 마코와의 연애를 시작했을 때와 비슷한 열정을 느꼈다. 저자는 M과 급속도로 친밀해졌고 모든 것을 공유하는 친구가 되었다. 우정이 이렇게까지 강렬하고 확장될 수 있다는 알게 된 저자는 다각도에서 우정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로맨스가 우정보다 먼저여야 한다는 통념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던 진리가 아니었다. 과거에는 배우자 이상으로 친구와 마음을 나누는 것이 중요했고 그런 태도가 이상하지도 않았다. 사랑과 우정은 서로 동등한 개별적 관계였으며, 우정은 얼마든지 깊어질 수 있었다.
출판사의 '소개글'에 나타난 앞의 글에서 저자 코헨이 왜 마리아 포포바의 말을 인용해 첫 페이지에 썼는지 이해가 간다. 『진리의 발견』에 소개된 사랑은 한 가지 형태에 머물러 있지 않다. 성별과 나이, 신분과 직업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영혼의 깊은 교류를 이어간 ‘연인’의 모습이다.

우리가 사랑의 종류에 붙이는 그 어떤 꼬리표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 이 모습에서 저 모습으로, 다시 이 모습으로 끊임없이 활기차게 형태를 바꾸는 사랑을 절대 정의할 수 없다. 포포바의 『진리의 발견』에는 마리아 미첼, 마거릿 풀러, 해리엇 호스머, 에밀리 디킨슨, 레이철 카슨 등 주요한 인물들 외에 랠프 왈도 에머슨, 찰스 다윈,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허먼 멜빌, 프레더릭 더글러스, 캐럴라인 허셜, 너새니얼 호손, 월트 휘트먼 등 수많은 주변 인물들의 삶도 실려 있다. 이들의 삶이 펼쳐 보이는 태피스트리는 음악과 여성주의, 과학사, 종교의 성쇠, 그리고 천문학과 시와 초월주의과 환경 운동까지를 아우른다. 한 인물의 삶은 친구, 우연한 만남, 모임, 편지, 심지어 연인이라는 예기치 못한 연결고리로 다른 인물의 삶과 연결된다.
마리아 포포바는 기본적인 저술과 전기뿐 아니라 편지와 메모 하나하나 모두 살펴 인물들의 복잡한 연결고리를 치밀하게 재구성했다. 그 덕에 이 책이 다루는 주제와 이야기의 다면성을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진리의 발견』은 결국 여러 인물의 교차된 전기이자 과학사이자 문학사이며, 마침내 사랑 이야기로 완성된다. 우주의 무작위성이 어떻게 상호 연결되어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진리의 발견』이 연애보다 우정이, 애인보다 친구가 더 소중하다고 이분법적으로 말하거나 구분하는 건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견고한 이분법적 구분이 문제라는 걸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재밌고 분명하게 지적한다. 이 책은 다양한 관계를 상상하고 여러 방식을 시도해 보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포포바와 똑같은 이유는 아니지만 저자 코헨은 아주 깊은 친구 관계를 맺은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인종, 종교, 성별, 섹슈얼리티가 모두 다른 각계각층의 사람들은 그 우정의 형태는 모두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가 삶의 중요한 부분들을 친구와 함께하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살며 아이를 키우고 병원에 함께 다니며 유언 집행을 맡겼다. 친구란 어떤 역할을 해야 하고 우정은 어디까지만 가능하다는 통념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새로운 관계 공식을 써 내려갔다.

이 책 『낭만적 우정과 무가치한 연애들』은 모두 8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관계를 정의한다는 것 : 과거와 현재, 플라토닉한 사랑의 가능성들〉, 2장 〈다른 반려자들 : ‘운명의 짝’을 넘어서〉, 3장 〈섹스가 무슨 상관? : 다시 생각하는 파트너 관계〉, 4장 〈저마다의 남자 되기 : 남성성과 친밀성의 길을 찾아서〉, 5장 〈가족다운 가족 : 친구에서 공동 양육자로〉, 6장 〈긴긴 세월 동안 : 나이 들며 맞춰가는 생활〉, 7장 〈애도를 허하라 : 플라토닉한 사랑을 잃었을 때〉, 8장 〈친구들에게도 권리를 : 결혼이 독점한 세상에서 우리가 치르는 대가〉 등이다.
이 책은 각 챕터별로 각각의 우정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해병훈련소에서 만난 캐미와 틸리는 캐미의 남자친구와 틸리의 갈등 때문에 잠시 멀어졌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 사이다. 캐미는 이제 데이트 상대에게 자신에게는 언제나 틸리가 1순위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오랜 친구인 아이네즈와 바브는 자식의 죽음을 서로 의지해 견뎌냈다. 이제는 같은 집에 살며 노년기를 함께 보내며 늙어가는 서로를 돌본다. 나이가 20살 가까이 차이 나는 존과 에이밀리는 서로를 ‘비로맨틱 생활동반자’로 소개하며 어느 파티든 함께 참석하는데, 존의 유언장에는 에이밀리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 누구보다 깊이 헌신하고 있지만 로맨스가 없다는 이유로 쉽게 간과되고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도에서 배제된 관계들이다.
이들은 사연만으로도 우정의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저자는 거기서 끝내지 않고 우정과 친구를 둘러싼 담론을 다각도에서 깊이 있게 탐색한다. 왜 우리는 로맨틱 관계에 있는 사람과 양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왜 친구와의 결별은 연인과의 이별만큼 슬퍼할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을까? 결혼에 부여된 수많은 특권을 다른 관계에게도 부여할 수는 없을까? 동성애자 남성인 아트와 이성애자 남성인 닉의 우정을 통해서 동성애에 대한 시선이 남성 사이의 우정에 끼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싱글맘인 너태샤와 법적 공동 양육자인 린다의 관계를 통해서 로맨틱 관계와 양육을 둘러싼 법적 권리 변화를 탐구한다. 점점 더 외로워지고 있는 사회에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관계 모델이 필요하다. 우리는 타인과 우정으로 더 깊이 연결될 수 있다. 보편적인 관계 공식 밖으로 나아가는 길은 쉽지 않겠지만, 친구와 함께 가는 그곳에는 새로운 풍경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플라토닉하게 헌신하는 장기적인 관계로 자신들을 이끌어줄 수 있는 미리 정해진 틀도, 올릴 기념식도, 본보기가 될 모델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된 친구들을 다룬다. 3장 〈섹스가 무슨 상관? : 다시 생각하는 파트너 관계〉에서는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2020년 연구에서는 무성애자인 응답자가 무성애자가 아닌 퀴어 남성과 여성보다 더 강한 사회적 낙인을 체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한때 성생활을 했다고 해도 어딘가 잘못된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은 매한가지다. 어디서나 보이는 비아그라 같은 약품 광고는 남성에게 나이를 먹어서도 정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력을 넣는다. 이런 평가와 압력은 섹스가 '정상적'이고 만족스러운 삶을 이루는 결정적 요소이며 섹스를 원하지 않는 건 자연스럽지 않다는 생각을 부추기는 일단의 통념, 강제적 섹슈얼리티가 작동하는 사례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강제적 커플살이와 한 사슬을 이루는 고리로 이 개념을 생각해 보자고 주문한다. 섹스가 충만한 삶의 필수 요소라는 관념을 떠받치는 주장은 떨어지는 법이 없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책에 따르면 섹스는 두 사람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나아가 새로운 삶을 만들어줄 가능성까지 품은 위대한 결합체로 여겨진다. 섹스는 친밀성을 길러준다. 맨몸이 되어 특정한 사람에게만 은밀히 자신의 욕망을 내보이고 그 앞에서 억제되지 않는 쾌락을 표출하는 건 취약함을 드러내는 일이다. 종교적 맥락에서 섹스는 일반적으로 신성한 행위다. 현대에 상상되는 섹스의 역할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섹스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네 권짜리 연구인 고전 『성의 역사』에서 철학자 미셸 푸코는 19세기가 서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본다. 그 전까지 섹스는 결혼하고 가족을 이뤄 사회에서 한 개인의 자리를 확보하게 해준다는 의의가 우선시되는 행위였지만, 이대를 기점으로는 그런 의미가 아니게 되었다. 각 개인이 하는 섹스의 유형, 특히 그 섹스가 용납되는지 거부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정체성이 형성되고 도덕적 가치가 지각되었다.
푸코는 섹수얼리티를 해방의 열쇠로 보는 것이 모순이라 생각했다. 푸코의 관점에서 섹스란 언제나 권력과 사회 규범에 얽혀 있었다.(p.124~125)

가까운 친구 수의 감소는 외로움과 연관되고, 외로움은 고혈압부터 우울, 인지 저하에 이르기까지 건강에 초래되는 각종 부정적 결과와 이어진다. 남편을 잃은 여성과 비교하면 배우자를 잃은 남성에게서는 외로움과 우울감이 확연하게 치솟고 그 상태도 오래 지속된다. 이들은 여성에 비해 자살로 생을 마감할 확률이 높다. 연구자들은 이 차이가 여성의 사회적 지지 체계가 더 다양하다는 데서 기인한다고 본다.(p.176~177) - 「4. 저마다의 남자 되기」 중에서
조이는 해나의 자리가 비고 나서야 그 우정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알았다. 해나가 죽은 뒤에 조이는 두 사람이 나눈 우정이 얼마나 드물고 귀한 것인지 이해했다. “누리고 있을 때도 특별하단 건 알았지만, 얼마나 특별한지는 해나가 다른 세상으로 떠나기 전까지 몰랐어요.” 여기에 박탈된 애도의 어두운 아이러니가 있다. 조이가 겪는 슬픔의 깊이는 그 우정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되어야 맞다. 조니 미첼의 명곡 가사처럼, 내가 뭘 누렸는지는 그게 사라진 뒤에야 알게 되니까. 하지만 조이는 애도해도 인정받지 못했다. 회사와 정부 정책으로도 그랬고 제일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그랬다.(p.292) - 「7. 애도를 허하라」 중에서
저자 : 라이나 코헨(Rhaina Cohen)
NPR 다큐멘터리 팟캐스트의 프로듀서 겸 편집자다. 주로 사회적 연결에 초점을 맞춘 코헨의 프로그램은 수많은 팟캐스트와 라디오 쇼에서 방영되었고, 〈더 애틀랜틱〉, 〈워싱턴 포스트〉 등에 글을 기고했다. 미국 국립인문기금National Endowment for the Humanities의 장학금을 받아 노스웨스턴 대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했고, 그곳에서 마셜 장학생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낭만적 우정과 무가치한 연애들』은 라이나 코헨의 첫 책으로, 연애 밖의 관계들을 탐구한다. 평소 깊은 우정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남다른 친구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친구라는 개념을 둘러싼 사회적 통념을 조사해 우정을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고찰한다.
역자 : 박희원
연세대학교 생활디자인학과와 언론홍보영상학부에서 공부하고 제품 개발 MD로 근무했다. 이야기를 만지며 살고 싶어 번역 세계에 뛰어들었다. 글밥아카데미 출판번역 과정을 수료하고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바이닐』 『에이스』 『무법의 바다』 『여자만의 책장』 『사물의 표면 아래』 『아케이드 게임 타이포그래피』 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