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든 세계가 하나였다 ㅣ 픽셔너리 1
박대겸 지음 / 북다 / 2025년 8월
평점 :

<리뷰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수개월 전 『외계인이 인류를 멸망시킨대』란 장편소설을 출간해 문단의 주목을 받았던 김대겸 작가가 이번엔 『모든 세계가 하나였다』란 중편소설을 발표했다. 출판사 〈북다〉의 새로운 중편 시리즈 '픽셔너리'의 첫 번째 작품이다. ‘픽셔너리’는 ‘픽션(Fiction)’과 ‘딕셔너리(Dictionary)’의 합성어로, ‘나’를 픽션화하는 A부터 Z까지의 이야기를 담아낸 일종의 가상 사전이라고 출판사 측은 설명한다. 저자 김대겸은 이전 작품들을 통해 ‘소설을 쓰는 사람’과 ‘소설을 읽는 사람’ 간에 작동하는 소설의 원리를 집요하게 탐구하며, 그 관계 속에서 문학이 어떻게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지 보여주었다.
이번 작품에서는 삶과 허구, 픽션과 메타픽션의 과감한 패치워크를 통해 ‘소설을 쓰는 나’와 ‘소설로 쓰여지는 나’의 내밀한 역학관계를 드러내며 “말 그대로 ‘선 넘는’ 이야기”를 선보인다. 또한 패치워크된 이야기 조각을 또 한 번 비틀며 독자의 예상을 과감하게 넘어선다. 김대겸 특유의 비틀림과 혼돈의 소용돌이를 뚫고 나오는 경쾌하고 뻔뻔한 유머에 낯선 독자로서는 사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박대겸 소설에 매력을 느낀 독자들에게는 이 작품을 통해 그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는 매력에 다시금 빠져들게 한다. 『이상한 나라의 소설가』 『부산 느와르 미스터리』에 이어 이번에 출간된 『모든 세계가 하나였다』는 ‘소설가 박대겸 3부작’의 완성이자, 픽셔너리 시리즈의 시작이라고 출판사 측은 밝힌다.
SF소설에 익숙지 못한 독자는 이 소설의 〈차례〉를 펼치는 순간 무척 당혹스러웠다. 중편소설 한 작품에 무슨 제목이 이렇게 많을까? 작은 책 한 권에 무려 13개의 낯선 문구들이 나열돼 있다. 순서도 「프롤로그」의 번호를 '0'번으로 잡았다. 이어 장(章)을 나누는 듯한 제목에서 소설에서는 생경한 단어들이 줄을 잇는다. 1장 「메타픽션은 안 됩니다」, 2장 「그것이 에세이와 자전소설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3장 「일상 미스터리 장르에 나올 법한 이야기」, 4장 「'소설가 박대겸 3부작'을 집필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등 에세이에서도 잘 쓰지 않는 단어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제목이 횡설수설하는 듯, 무의식이나 가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연속적으로 이어붙인 듯하다.

몇 개만 더 적어 본다면 5장 「갭모에라도 느낄 수 있으면 좋았겠건만」, 11장 「어떻게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인가」, 12장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살아남아」로 이어지더니 급기야 마지막 장인 13장에서는 「작가 후기를 겸해서」라며 소설이 끝난다. 첫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부터 독서량이 적은 독자로서는 다행이다 싶다. 왜냐하면 아날로그 시대의 필법과 문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몇 년 만에 다시 서울에 올라와서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니면 기왕 상경하기로 마음먹었으면 혼자 힘으로 살 생각을 해야지 하필 마침맞게 제안해 온 에른스트의 호의를 넙죽 받아들여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p.7)
페이지를 넘기자 분위기가 돌변한다. 그리고 저자 특유의 (신비주의 혹은 가상세계) 전략이 나온다.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질문과 응답이 섞인다. 집 안에 엎드린 채 쓰러진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어떻게 집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을까. 독자의 느낌으로는 앞 문장에서 연결되는 글로 보아 동거인 에른스트를 생각해낸 말인가 싶다. 그러나 에른스트는 아니라고 판단한다. 그는 늘 어깨 아래까지 내려가는 장발을 선호했으니까. 상황을 바라보는 사람은 주인공이자 저자 박대겸의 시선이다. 주인공은 지금 사태 파악을 위한 관찰자이기도 하다. 지금 집 안에 엎드린 채 쓰러져 있는 인물은 누구인가. 주인공 박대겸은 문득 자신이 집을 잘못 들어왔나 고개를 들어 거실을 살펴본다. 거실 가운데 직사각형 목재 테이블과 의자 두 개, 벽에 걸린 동그랗고 하얀 시계, 그 앞에 갓이 씌어진 키가 큰 전등으로 미루어 확신한다. "여긴 내가 사는 집이 맞아." 그러나 혼자 있는 방 안에서 누구와 대화하는가? 스스로 묻고 답하지만 의식 속인가. 혼잣말도 아닌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독자는 받는다.
독자들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한 번 자문해 보면서 이 소설을 읽어나가는 것도 무척 재밌을 것 같다. "잠깐, 112에 신고를 해야 하나 아니면 119에 먼저 신고를 해야 하나. 바닥에 쓰러져 있긴 하지만 아직 목숨이 붙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러면 119에 신고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지만 도저히 저 사람 목에 손가락을 대고 아직 숨이 붙어 있는지 아닌지 확인해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대화는 과연 ‘소설가 박대겸’의 진짜 목소리일까, 아니면 ‘소설 속 박대겸’의 허구적 목소리일까. 의문이 들지만 저자 박대겸은 이미 그런 반응을 예견한 듯, 첫 장면부터 미스터리적 상상력을 덧입힌다. 독자의 기대를 과감히 비틀기도 한다. 자정이 넘어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온 ‘박대겸’이 현관 바닥에 엎드린 채 쓰러져 있는 “낯익은 얼굴에 낯익은 복장”의 또 다른 박대겸과 마주하면서 소설은 마치 사건의 현장으로 독자를 이끌고 있다. 갑자기 에른스트의 침실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설마 이렇게 만든 또 다른 사람이 집 안에 숨어 있던 건가. 침실 손잡이를 잡자 안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린다. 인기척은 침실 문 쪽으로 다가왔고, 박대겸의 가슴은 쿵쾅거렸다. 침실 문이 열리려는 순간, 현관의 전등이 자동으로 꺼진다. 당황한 박대겸은 허공을 휘휘 젓어 휘적거린다. 침실 문이 열리면서 사람 형태의 누군가가 나타난다. 시야에 들어온 건 에른스트이다.
이때 에른스트의 반응이 거실 안의 상황을 파악한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봤다가 다시 박대겸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이 세계까지 왔나 보네."
이 세계까지 왔다? 박대겸은 에른스트가 뱉은 말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려 했으나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의 의미지. 이 세계까지 왔나 보다."
박대겸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무언가 알아챘다는 듯 가까이 다가온 에른스트에 물는다.
"여기 쓰러져 있는 사람, 혹시 아는 사람이야?"
"당연히 알지."
"누군데?" (중략)
낯익은 얼굴에 낯익은 복장.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박대겸 자기 자신이었다.(p.11)

독자의 머리가 혼동되고 혼란 속을 헤매지만 소설은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사건 현장을 말끔히 지워낸다. 2장 「그것이 에세이와 자전소설의 차이점이기도 하다」에서는 출판사로부터 청탁받은 원고 구상에 골머리를 앓으며, 신인 소설가로서 발돋움하기 위해 출판사들이 밀집한 서울에 머물러야 할지 아니면 경제적 사정을 고려해 부산의 부모님 댁에서 살아야 할지를 두고 갈등하는 모습을 담아낸다. 실제 주인공과 저자 박대겸이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저자는 이 같은 두 개의 자아를 붙였다 떼어놓다를 자유자재로 시도하는 사이 주인공의 현실 세계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독자들이 소설가로서의 주인공이 갖는 고충에 공감하려는 순간, 박대겸의 친구이자 탐정인 에른스트를 등장시키며 소설은 또 한 번 장르적 비틀기를 시도한다. “소설에 탐정이라는 존재가 나오는 순간, 아무리 에세이처럼 써봤자 완전히 픽션이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한국에서 탐정이라는 직업은, 비유하자면 유니콘 같은 존재니까.”(p.31)
이처럼 이 작품 『모든 세계가 하나였다』에서 저자는 삶과 허구, 픽션과 메타픽션의 조각들을 능숙하게 이어 붙인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패치워크 원단은 소설가라는 자기 정체성을 중심으로 재단된다. 저자는 “소설과 현실이란, 언제든 뒤섞이고 뒤엉키고, 분리되는가 싶다가도 다시 뒤범벅되는 무언가”(p.87)라고 말하며, 어떤 세계를 믿지 못한다면 그 어떤 세계도 결코 쓰일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저자는 또 한 번의 ‘선’을 넘어선다. “그렇다면 우주 어딘가에 우리와 조금 다른 시간대의, 우리와 조금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세계가 있지 않을까, 상상해보는 것이 완전히 허무맹랑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발상은 더욱 부풀어 올라 어쩌면 내가 창작한 ‘소설가 박대겸’ 역시 다른 평행우주에서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다른 세계의 ‘나’ 역시 소설을 쓴다면?”(p.48)라는 물음으로, 소설은 확장된 상상력으로 나아간다.
저자 박대겸은 능란하게 직조한 ‘불일치의 세계’를 통해, ‘소설을 쓰는 작가’에게도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도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소설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창조된 세계를 진심으로 믿는 일이라고. 이것은 곧 작가가 소설이라는 허구적이면서도 진정성 있는 세계에 품는 깊은 이해와 애정으로 다가온다.

이 소설에는 서울 우이천변에 있는 저자의 집필실에서의 일상 등 현실에서의 자신의 활동을 포함해 글을 쓰는 이야기부터 메타버스, 소설가, 탐정, 유니콘, 평행우주 등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넘나드며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때로는 SF소설 같고, 한편으로는 현실 세계를 힘들게 살아가는 소시민의 모습도 보여준다. 그의 소설관도 일반 소설가와 다소 차이점이 있다.
"어떤 세계를 믿지 못한다면 그 어떤 세계를 쓸 수 없지 않겠는가. 소설 속 세계가 아무리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한들, 소설가는 소설을 집필하는 동안 자신이 창조한 허구의 세계를 진심으로 믿을 것이다. 소설을 써본 적은 없지만 벌써 20년 넘게 소설을 읽어온 경험을 바탕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살아가는 동안 소설이 현실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고, 반대로 현실이 소설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p.86~87)
돌고 돌아 다시 온 현실에서 저자는 13장 「작가 후기를 겸해서」에서 "나는 이 마지막 챕터를 일본 사가현 사가시 복합쇼핑몰 유메타운 2층에 있는 푸드코드 창가 자리에서 쓰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이번 소설에서는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기성 작품이 아니라 친구들이나 지인들과의 대화에서 아이디어를 얻거나 참조한 부분이 있다고 밝힌다. 새로운 소설 결말도 떠오르지 않고 새로운 집도 못 구하는 진퇴양난의 시기, '나'는 사실상 현실도피를 하고 만다고 고백한다. 그가 일본에서 현실로 돌아온 후 공교롭게도 갑작스러운 계엄 사태에 다시 일본에 못 가는 건 아닌지 마음을 졸이며 국회 상황을 라이브로 지켜보았다고 덧붙인다. 다행히 자정을 넘긴 새벽에 계엄이 해제되었다며 소설은 막을 내린다. 표제어 '모든 세계가 하나였다'라는 경험을 에세이 형식을 빌어 결말에 이르면서 현실 인식이 뚜렷해진다. 형식과 내용, 허구와 현실, 가상세계와 현실이 하나로 묶여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추천사〉를 통해 문학평론가 박인성은 "자전적 에세이조차도 메타픽션으로 다시 쓰는 시도는 작가의 뇌절마저 문학으로 승화한다. 패치워크(patchwork) 스타일로 기워진 복잡한 옷감처럼, 이 소설은 삶과 허구, 픽션과 메타픽션의 원단조직을 과감하게 짜맞춘다. 누군가에게는 섬세한 조각맞추기 유희처럼 보일 수 있는 이유다. (중략)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에고이스트적인 이 세계가 나는 그리 싫지 않은 것 같다."고 썼다.(p.174~175)
저자 : 박대겸
소설집 『픽션으로부터 멀리, 낮으로부터 더 멀리』, 장편소설 『그해 여름 필립 로커웨이에게 일어난 소설 같은 일』 『부산 느와르 미스터리』 『외계인이 인류를 멸망시킨대』, 중편소설 『이상한 나라의 소설가』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