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 - 자기 한계를 넘어선 열정과 호기심
이종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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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하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거다. 그의 이름은 수많은 학문 분야에서 거론되고, 〈모나리자〉를 그린 화가로 널리 이름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실제 인류가 분류해온 학문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재능을 보였으며, 심지어는 근대 과학의 기틀을 제공한 학자로서도 이름이 올라 있다. 그를 '다재다능' 혹은 '천재'라고 표현하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인 인물이다. 이 책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저자 이종호는 〈서문〉을 통해 그가 남긴 발자취는 다양하다 못해 화려하다고 평가한다. "다빈치에 따라다니는 경력은 화려하다. 해부학자, 건축가, 식물학자, 도시계획가, 의상디자이너, 무대디자이너, 요리사, 엔지니어, 발명가, 물리학자, 지리학자, 지질학자, 수학자, 군사 과학자, 음악가, 화가는 물론 사상가, 철학자 등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뛰어났던 만능인으로 불린다."(p.8)

이 책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다면적인 재능과 인간적인 면모를 풍부한 사례와 함께 조명하고 있다. 예술가이자 과학자, 발명가이자 철학자였던 그는 단순한 천재를 넘어, 인간의 한계를 끊임없이 탐색한 탐구자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다빈치의 과학과 공학, 예술과 철학, 그리고 대표작인 작품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 등을 통해 그의 천재성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한다.

그렇다고 해도 이 책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돋보이는 이유는 다빈치의 내면을 다뤘기 때문인 듯하다. 저자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여러 사회적 제약 속에서도 자신을 끊임없이 갈고닦았고, 끝없는 호기심과 집요한 관찰력, 치밀한 장인 정신으로 오늘날의 명성을 이뤄냈다. 자신을 “성공하지 못했다”고 표현했던 그의 고백은 오히려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특히 이 책은 다빈치의 재능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과 열정으로 이루어진 결과임을 밝힌다. 이는 다빈치를 신격화하는 대신, 우리 모두가 배울 수 있는 실천적 모델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자기 한계를 넘어선 열정과 호기심」이라는 부제가 잘 표현한다. 이에 따라 이 책은 한 천재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가능성과 도전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주는 책이다. 저자는 다빈치의 창의성, 끈기, 호기심이 어떻게 위대한 업적을 이끌어냈는지를 탐구해 독자들에게 전한다.


이 책은 〈서문〉과 〈맺음말〉을 제외하고 모두 7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만능 슈퍼 천재〉, 2장 〈예술가 다빈치〉, 3장 〈불멸의 작품들〉, 4장 〈모나리자〉, 5장 〈천재들의 경쟁〉, 6장 〈다빈치 = 세계 기록〉, 7장 〈후계자가 없다〉 등이다. 책에 따르면 다빈치는 자신의 자기소개서에 "그림도 그릴 줄 압니다:라고 적었다. 당대에는 물론 현대에까지 세계 최고의 예술가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다빈치가 자신에 대해 이렇게 겸손하게 적은 것은 자신을 화가나 조각가로 불러주지 말고 군사 전문가(과학자)로 불러주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그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당대에는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 중 한 명에 지나지 않는 다빈치가 자신을 과학자라고 불러달라는 자체가 머리가 약간 간 이상한 사람의 넋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빈치는 주위의 이같은 시선에 좌절하지 않았다. 만일 자신을 과학자로 불러주지 않는다고 체념했다면 다빈치에 대한 현재와 같은 평가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계속할 것이다." 이 말은 다빈치가 말년에 중얼거렸다는 이 말이 그의 노트에 남아 있다고 저자는 증거한다. 무엇을 계속하려고 한 것인지, 중요한 말은 생략되어 있지만 그 말이 무엇이든 다빈치는 어떤 일을 꾸준히 지속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기록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다빈치가 당대에 평생 계속했던 것은 자신을 표현하는 아웃풋 작업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라고 전한다. 그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모든 것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처럼 실패를 많이 한 사람도 많지 않다는 것이다. 당대에 일단 실패하면 재기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것이 당대의 시대상이라고 한다. 저자는 다빈치의 행동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두 가지 사실을 들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두 가지 사실을 죽을 때까지 견지했다고 설명한다. 

① 조사를 기반으로 노트에 끊임없이 기록한다.

② 그림을 계속 그린다.

다빈치는 사망할 때까지 이 두 가지를 단순하게 반복하며 이어갔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의 전 생애를 통해 모든 위업이 창출된 이유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애를 이야기할 때 어린 다빈치는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어릴 적 행동을 심리학자들은 전형적인 ADHD로 진단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ADHD는 주로 아동기에 시작되어 학령기를 전후해 흔히 관찰되는 신경 발달 장애다. 대부분 주의 산만, 과잉 행동, 충동 조절 어려움 등을 나타낸다고 한다. 다빈치는 주위의 어른들을 붙잡고 납득할 만한 답을 얻을 때까지 계속 질문했다고 책은 언급한다. 다만 다빈치가 다른 ADHD 어린아이와 달랐던 것은 어른들에게 질문하는 것으로만 끝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빈치는 의문점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자연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실험을 계속했다는 것. 다빈치가 얼마나 많은 의문을 갖고 있었는지 그의 노트에 적혀 있는 글을 인용한다.

"인간이라는 한 종류가 형성하는 행위만 해도 얼마나 많으며 다양한가.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종류의 동물이 있으며 또 나무와 꽃이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다양한 언덕과 평지가 있으며, 샘과 강, 도시, 공공건물과 개인 건물이 있는가. 또 인간이 쓰기에 적절한 도구는 얼마나 다양한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해답을 찾으면서 시골길을 거닐었다. 어째서 흔히 바다에서 발견되는 산호초와 식물과 해초의 흔적 그리고 조개껍데기가 산꼭대기에서도 발견될까? 왜 천둥은 그것을 일으키는 시간보다 여운이 더 오래 지속될까? 그리고 번개가 치면 어째서 천둥이 그 뒤를 따라 이어지는 걸까? 돌이 떨어진 수면 위로 생기는 원은 얼마나 다양하며 새는 어떻게 공중에서 버틸 수 있을까? 이런 이상한 현상들에 대한 질문이 평생토록 내 생각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p.21~22)

저자는 이런 생각을 하는 다빈치가 살던 시대는 15세기에서 16세기 무렵(1452~1519)이다. 다빈치 연구의 권위자로 알려진 영국의 케네스 클라크는 다빈치를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 가운데 가장 호기심이 많은 사람'으로 평했다고 저자는 전한다. 당시는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태동하기 직전이다. 과학은 아직 학문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천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태어나기도 전이다. 다만 탐험가들은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인도제국과의 무역을 위한 항로 개척에 나선 때다.

또 ADHD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갖고 있다고 현대 의학은 밝혀 냈고, ADHD가 삶을 영위하지 못할 정도의 병은 아닌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다빈치가 그림 재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사람은 부친 세르 피에로였다. 아들의 재주를 인정한 부친은 친구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제자가 되도록 주선했다고 알려져 있다. 베로키오는 당시 회화, 조각, 금속공예, 주조 외에도 건축공학, 산수, 음악에까지 조예가 깊은 만능천재였다고 많은 백과사전은 서술하고 있다. 덕분에 다빈치에게는 베로키오가 더없이 이상적인 스승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자연스러운 짐작이다. 실제 다빈치는 베로키오 밑에서 회화에서의 원근법을 배웠고, 빛의 전파나 음영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저자는 기술한다. 베로키오 집 옆에 롤라이우올로 형제의 스튜디오가 있었는데, 다빈치는 이곳에서 해부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화석을 공부한 것도 이 무렵이다. 당시 피렌체 상공업조합에서는 14세부터 도제 수업을 시작해 6년 만에 졸업하므로, 이 규칙에 따라 20세가 되던 1472년 다빈치는 피렌체의 산 루카 화가조합에 등록되었다.

물론 많은 독자들이 잘 알다시피 다빈치가 화가가 된 것은 그의 천부적인 재주도 있지만, 사생아이기 때문에 존경받을 만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때문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당시 미술은 창조적 예술이 아니라 농노나 직공의 아들에게나 적합한 하루 계층의 직업이었다는 것. 우리나라 조선 시대에 신분 제도와 비슷한 모양새다. 1471년 '일 모로(il Moro, 무어인)'라는 별명이더 유명한 밀라노 공국의 섭정 루도비코 마리아 스포르차가 피렌체를 방문했는데, 마침 베로키오가 그의 접대를 맡았다. 다빈치는 일 모로의 환영회에서 하프를 연주했다고 한다. 이때 피렌체의 실력자 로렌초 데 메디치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메디치가의 미술고문으로 임명했다. 다빈치에게는 인생의 새 전기를 맞는 셈이다. 르네상스를 연 가문으로 잘 알려진 메디치가는 예술과 학문을 중요하게 여겨 그리스나 로마 시대의 회화와 조각을 많이 수집했다. 당시 인간 유럽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기독교의 영향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는 그리스나 로마 시대의 나체 조각이 기독교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발견하는 대로 파괴당하고 있었다. 세계 최고의 부를 갖고 있던 메디치가는 귀한 미술품을 거리낌 없이 사들였다. 이때 메디치가의 미술고문으로 그 작품들을 감상한 것이 다빈치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독자가 이 책에서 주목한 것은 그의 과학적 사고력이나 관찰력, 과학을 하는 방법에 대한 신념은 근대 과학의 시초라고 한 점에서 비롯됐다. 그는 의학에서의 해부학뿐만 아니라, 생물의 관찰력, 과학을 이용한 군사 무기 등에 광범위하게 그의 관심이 갔다. 특히 실험을 통한 입증이나 상상력을 증거해 내는 방법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운 이유이기도 하다고 독자는 생각한다. 그는 화가로서 서양 미술사에 많이 등장하지만 실제 그의 그림은 유명한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 등 20편에 불과하다. 

저자 이종호는 〈모나리자〉에 대해 〈서문〉과 4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작품은 모델이 누구인가?부터 가격은 얼마나 될까? 등 많은 추측이 많고, 또 많은 부분이 밝혀지긴 했지만 아직도 이설(異說)이 있을 정도로 해묵은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서문〉에 따르면 '모나'는 유부녀 이름 앞에 붙이는 이탈리아 경칭이며, '리자'는 초상화의 모델이 된 여인의 이름이다. 〈모나리자〉를 팔면 루브르 박물관도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독자는 파리 여행 중에 루브르 박물관에 간 적이 있는데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줄을 30분 정도 서 있다 그냥 쭈욱 떠밀리며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크기도 예상보다 작았으며 그마저 멀리서 형태만 보고 온 셈이다. 워낙 유명한 그림이라서 제대로 보지 못한 점에 못내 아쉽다. 언젠가는 다시 가서 좀더 충분한 시간을 갖고 볼 것이란 계획을 가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임에는 틀림없지만 〈모나리자〉가 파격적인 명화로 부상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저자는 언급한다. "과학이 모든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자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한 평가도 달라진다. 그가 평생을 두고 작성한 8,000장에 달하는 '다빈치 노트'도 함께 빛을 보기 시작했다. 노트로 인해 다빈치가 위대한 예술가이자 과학자로 자리매김하자 〈모나리자〉가 자연스럽게 세계에서 최고의 명화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1994년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는 다빈치가 남긴 수많은 기록, 즉 '다빈치 노트' 중 단 72페이지 분량의 「코덱스 레스터」를 3,080만 2,500달러(약 425억 원)에 낙찰받았다. 앞서 2017년 11월 15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 나온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살바토르 문디(구세주)〉는 무려 4억 5,030만 달러(약 6,200억 원)에 낙찰돼 세계 예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저자는 「〈모나리자〉는 누구인가」에서 별도의 글을 통해 이탈리아 화가이자 도시계획가인 주세페 팔란티가 '리자'는 1479년 피렌체에서 태어나 16세에 부유한 비단 상인인 조콘도의 두 번째 아내가 된 리자 게라르디니라고 주장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미술사학자 실바노 빈체티는 〈모나리자〉의 실제 모델은 15세기 보비오 지역의 실력자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딸 비앙카 조반나 스포르차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빈체티는 모나리자가 리자 델 조콘도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발표를 듣고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다. 여하튼 '모나리자'라는 이름도 의미심장하다. 다빈치는 1519년 프랑스에서 숨질 때까지 이를 간직했으면서도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다.(p.193) 

〈모나리자〉에 앞서 〈최후의 만찬〉은 더욱 많은 의문점을 낳고 있다. 이 그림은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식당에 벽화로 소장되어 있다. 크기도 엄청나 가로 880cm, 세로460cm나 되며 총 열세 명이 그려져 있다. 예수와 열두 제자가 주인공이다. 책에 따르면 〈최후의 만찬〉이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은 그의 몇 안 되는 완성작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그의 작품 중 가장 손상이 심한 그림으로도 알려져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최후의 만찬〉의 주제는 성경의 일부분이라 할 정도로 기독교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복음서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예수가 체포되기 전날 밤 열두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을 담았다. 옛는 제자들 가운데 배신자가 있다고 말하고, 떡과 포도주를 들어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을 담았다. 이 최후의 만찬에 쓰인 잔이 성배라는 전설은 잘 알려져 있다.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너희 가운데 하나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제자들이 깜짝 놀라는 순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최후의 만찬〉이 가장 세계적인 화제를 모은 일은 2003년 작가 댄 브라운이 소설 『다빈치 코드』를 발표한 뒤였다.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 아직까지 후손이 이어지고 있다는 설정 때문이다. 그의 또 다른 소설 『천사와 악마』와 함께 두 소설이 영화화돼 상영을 앞두고 기독교계에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신성모독'으로 법정에 고소당한 후 법원에서 '표현의 자유'에 의해 기각되자 오히려 영화에 대한 인기만 높여주었다는 것이 한국 영화계의 귀띔이다. 


저자 : 이종호(李鍾鎬)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페르피냥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와 과학국가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문부성이 주최하는 우수 논문상을 수상했으며 해외 유치 과학자로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KIER) 등에서 연구했다. 과학기술처장관상, 태양에너지학회상, 한국발명교육학회 논문상, 고려대학교 이정덕 건축상, 국민훈장 석류장 등을 받았다. 프랑스 유학 시절부터 세계의 여러 유적지를 탐사하며 연구해 기초 없이 빌딩을 50층 이상 올릴 수 있는 ‘역피라미드 공법’을 비롯해 특허 10여개를 20여 개국에 출원하는 등, 이론과 실제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과학저술인협회장(과학저술가)으로 신문, 잡지 및 인터넷에도 활발히 기고하는 등 과학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인의 뿌리』, 『로봇, 사람이 되다』, 『피라미드』, 『미래과학, 꿈이 이루어지다』, 『21세기 교양키워드』, 『미래과학, 세상을 바꾼다』, 『시크릿 방사능』, 『2030년 미래 한국에서는 어떤 일이?』, 『영화 속 오류』, 『유네스코 선정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세계 7대 불가사의』, 『유적으로 보는 우리 역사』 ,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한국 7대 불가사의』, 『과학으로 찾은 고조선』, 『황금보검의 비밀』, 『과학으로 증명된 한국인의 뿌리』, 『천재를 이긴 천재들』, 『로봇, 인간을 꿈꾸다』, 『4차 산업혁명과 미래 신성장동력』, 『유네스코 선정 한국의 세예문화유산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장편소설 『피라미드(전 12권)』, 『레전드클레오파트라(4권)』 등 총 130여권의 과학기술분야 저작을 출간하여 ‘출판 센츄리 클럽(100권 이상 저자)’ 일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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