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줄만 내 마음에 새긴다고 해도 - 나민애의 인생 시 필사 노트
나민애 지음 / 포레스트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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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책 『단 한 줄만 내 마음에 새긴다고 해도』는 문학평론가 나민애의 시평(詩評)을 묶은 시 해설집이다. 저자는 10년이 넘도록 매주 한 편씩 대중들에게 시를 소개하는 칼럼을 연재하며 대중 독자들과 함께 시를 읽는 기쁨을 나눴다. 우리 시 가운데 유명한 시 77편과 나민애의 해설이 담겨 있다. ‘서울대 강의평가 1위 선생님’으로 알려진 나민애 교수는, 오래도록 시를 사랑해 온 ‘시 큐레이터’로도 유명하다. 독자로서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안 사실이지만 저자 나민애는 ‘풀꽃 시인 나태주의 딸’이라고 한다. 시인 나태주의 시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독자가 사회 생활을 핑계로 시를 얼마나 안 읽었는지 반성하는 계기도 되었다.

독자 중에는 모든 칼럼을 오려서 꽁꽁 묶은 종이 뭉치를 가져온 사람도, 손으로 시와 해설을 베껴 적으며 자신만의 필사 노트를 완성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시를 안 읽는다는 신문 기사를 얼핏 본 기억이 있는데 시 평론가를 감동시킬 열성 시 독자들이 있는 점으로 보아 그리 걱정할 단계는 아닌 듯싶다. 저자는 「다만 의미를 찾고 싶을 뿐」이라는 제목의 〈서문〉을 통해 시 독자들 중 누군가는 시를 읽으며 울었고, 누군가는 시를 적으며 위로받았다고 했다. 이런 마음을 전달받은 저자는 ‘곁에 두면 좋은 시’ 77편을 고르고, 감각 있는 해설을 추가해 ‘인생 시 필사 노트’를 만들었다.

이 책은 정지용부터 나태주, 이병률, 황인찬까지 시간과 세대를 넘나드는 시인들의 작품 77편을 주제별로 엮었다. 이 책은 마치 〈시 플레이리스트〉 같다는 출판사 측의 말도 귀담아 들을 만하다. ‘위로가 필요할 때’ ‘사랑 곁에 머물고 싶을 때’ ‘마음이 쓸쓸할 때’처럼 감정의 결에 따라서 골라 읽을 수 있게 구성했다. 저자의 덧붙인 해설은 독자들이 오래도록 그 마음에 머물도록, 그렇게 사유의 폭을 넓혀가도록 도울 것으로 믿는다.

이 책은 모두 5부로 이뤄져 있다. 1부 〈처음 맛보는 시〉, 2부 〈작은 위로가 필요한 날〉, 3부 〈사랑을 곁에 두었다〉, 4부 〈가을이나 바람처럼 쓸쓸한 것들〉, 5부 〈나에게 말을 건네는 시〉 등이다.


“꽃이 피어도 즐길 시간 없고 꽃이 진대도 느낄 여유 없는 당신에게.”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1부에서는 윤진화의 「안부」, 이성복의 「서시」, 신미나의 「이마」, 박성우의 「첫눈」 등이 눈에 띈다. 

"달이 '지는' 것, 꽃이 '지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왜 아름다운 것들은 이기는 편이 아니라 지는 편일까요.

잘 늙는다는 것은 잘 지는 것이겠지요."(p.20)

시인이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는 당신'에게 묻는 안부에 대해, 저자는 “시의 끄트머리를 잡고 일어섰다”고 말했다. 저자는 "시는 3분 만에 읽을 수 있을 만큼 짧지만, 그 안에는 누군가를 일으켜 세울 만큼 강하고 선명한 힘이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시는 처음이라 낯설어도 괜찮다. 어떤 순간에 어떤 시를 읽으면 좋을지 친절하게 안내해 주기 때문이다. 저자의 해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만의 ‘시 플레이리스트’가 완성되어 있을 것이라는 말도 귀에 쏘옥 들어와 박힌다.

“불빛은 강물을 찰바당찰바당 건너오고

눈발은 팔랑팔랑 팽나무 가지를 흔들어 깨운다.”(박성우 「첫눈」 중)

저자는 많은 '첫' 번째 일들은 일생에 단 한 번만 존재하는데, '첫눈'이라는 말은 매년 쓸 수 있다."며 말하고 박성우 시인의 「첫눈」은 이 느낌을 고요하게 간직한다고 말한다. 그날 첫눈이, 작은 요정처럼 강물에게 가서는 가만히 녹아들었다. 첫눈이, 말없는 팽나무를 찾아가 손을 얹었다. 그리고 팽나무에 스며들었다고 밝힌다. 이 시를 읽으면 언제든 첫눈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아직도 '찰바당찰바당'거리는 강물에 있고, '팔랑팔랑'대는 팽나무 가지 사이에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나민애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단어의 중요성’과 ‘말의 감각’을 자연스럽게 배웠다. 시인인 아버지가 시에 쓰일 하나의 낱말을 찾기 위해 너덜너덜해진 사전을 붙잡고 몇 날 며칠 고민하던 모습을 곁에서 쭉 지켜봐 왔기 때문이다. 시는 그렇게 고르고 고른 말들의 결정체였다. 그런 시인의 언어를 손끝으로 따라 써보는 것이 ‘시 필사’다. 문장의 호흡, 단어의 떨림, 쉼표 하나의 여운까지 온몸으로 느끼는 과정은, 섬세하면서도 단정한 글쓰기를 익히는 데 더없이 좋은 훈련이 된다.

또한 시 속 감정을 곱씹으며 쓰는 필사는, 말로 표현하지 못한 감정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내가 이미 느끼고도 미처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을, 시인은 단 한 줄의 문장으로 건네준다. 시를 따라 쓰는 동안 우리는 감각적인 문장을 배우는 동시에, 더 깊어진 ‘나’를 만나게 된다. 이 책에는 〈정지용문학상 수상작〉, 〈현대시학 작품상〉, 교과서·모의고사 수록작부터, 황인찬·육호수·진은영 등 MZ세대에게 사랑받는 시인의 작품까지 폭넓게 구성했다. 저자 나민애가 아버지 나태주의 시를 매우 쑥스러워하며 해설한 것도 있다.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중략)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p.142, 나태주 「시」 중에서)


이 「시」에 해설을 쓰려고 했을 때 저자의 고민이 많았던 듯하다. "동아일보에 매주 한 편의 시를 소개하는 칼럼을 썼다. 10년 가까이 쓰다 보니 힘들었다.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말했더니 왜 내 시는 다루지도 않고 코너를 끝내느냐고, 나태주 시인이 항의한 적이 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작품을 소개하는 것은 쑥스럽고 점잖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500명이 넘는 시인을 소개하면서 가족이라는 이유로 나태주 시인을 빼놓기는 섭섭해 이 시를 실었었다.

사람들은 아버지의 시 중에서 어떤 걸 제일 좋아하느냐고 질문하곤 한다 시인 나태주에 대해서는 「대숲 아래서」, 우리를 위해서는 「행복」, 그리고 아버지 인생 그 자체로는 이 작품을 떠올리게 된다고 기술한다. 꽃 곁에 있으면 향기가 묻고, 햇살 곁에 있으면 온기가 전해지기 마련이다. 맑고 고운 시를 읽다 보면 마음에 새살이 차오르는 느낌을 받는다.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어느 방향으로든 나아가게 해준다. 여기 나태주 시인의 「시」 역시 좋은 차오름을 경험하게 해준다.

내가 알기로 이제 이 시인의 소원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세상이 덜 아팠으면 좋겠다'는 것. 너무 큰 소원을 위해 여든이 넘은 시인은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닌다. 나는 자주 보지도 못한다. 바쁜 시인의 퉁퉁 부은 발을 위해 신발이나 사서 보내야겠다.(p.144~145)

역시 혈육의 정은 무엇보다 진하다는 말은 진리인 듯하다. 자신의 아버지를 평소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시인으로서, 가장으로서, 또 시인의 독자들에게, 모든 동시대 사람들에게 고통없는 세상을 만들지 못해 위로라도 보내는 시인의 아쉬움을 담고 있다. 그나마 한 모퉁이에서 한 사람의 고통이라도 덜어보겠다고 애태우며 여든이 넘도록 동분서주 뛰어다니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한없는 딸의 애정이 한 자 한 자에 깊이 배어 오롯이 전해지는 느낌이다.


시의 소재는 크게 보면 자연과 인간이다. 이 가운데 인간에 관한 것이라면 늘 빠지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이란 단어는 누구나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단어이다. 인간의 감정 중에서도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또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가장 아름답고 순수하게 맺어주는 감정의 발로 아닐까? 그래서 고대 서양에서 시인들은 '사랑'을 노래해 왔다. 사랑은 신(神)의 능력을 제외한다면 가장 강력한 인간의 능력이라고 본다. 물론 동양도 마찬가지지만 서양에 비해서는 드러내놓고 사랑을 예찬하지는 않았다. 아마 남녀 간의 사랑을 신이 내린 축복으로 생각하고 신성시 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아무튼 사랑은 인간이 문명을 이루고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간 본연의 감정이 아닐까? 그리스·로마 시대는 신들도 사랑을 한다. 고대 서양에서는 신을 인격화했다. 사랑의 신도 있다. 사랑 때문에 신들도 다툰다. 서양 사상의 기원이 되는 예수 이후의 시대에 생겨난 기독교는 '사랑'을 최우선 인간의 의무이자 본성이라고 가르쳤다. 로마는 '사랑'의 종교 기독교도의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결국 '국교'로 인정한 후 신들의 세상이 하나님이란 유일신의 나라로 바뀌었다. 그리고 사랑은 서양 사상의 가장 중심 사상으로 자리잡았다. 이 책 3부에 있는 「사랑」이란 양애경의 시가 독자의 눈길을 끈다.

둘이 같이 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문득 정신 차려 보니

혼자 걷고 있습니다

(중략)

뒤를 돌아보니 

참 많이도 왔습니다


인연이 끝나고 계속 앞으로 걸어간다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p.178)


저자는 이 시의 해설을 이렇게 썼다. "이 시의 제목은 「사랑」이지만 본문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도 시를 읽으면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 사랑에 대한 시가 맞다. 시인이 말하기를 사랑이란 둘이 함께 걸어가는 것을 뜻한다. 그와는 반대로, 둘이 걷다가 어느새 혼자 걸어가게 되는 것을 일러 우리는 '이별'이라고 부른다.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를 길 걷는 두 사람의 일로 바꾸니 그 뜻이 참으로 잔잔하다. 잔잔함 속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별 또한 사랑의 일부라는 이 시의 메시지에 있다. 헤어진다고 해서, 이 길을 혼자 걷는다고 해서, 사랑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사랑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시의 화자는 혼자 걷고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날지 몰라서 사랑의 길을 쉽게 이탈할 수 없었다. 이렇게 사랑의 여운을 혼자 걷는 것도 '사랑'이다. 다시 만날 수 없대도 사랑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사랑하면서 걸었던 길을 왔던 만큼 되짚어 가야만 사랑은 비로소 끝이 날 수 있다. 그러니까 외롭게 돌아가는 마음의 복귀까지도 '사랑'이다.

세상에는 이별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성급해지지 말 것을, 이 시는 당부한다. 헤어지면 둘이 같이 만든 길을 혼자서 지워야 하니까 당연히 힘이 든다. 힘들면 원망이 생겨 난폭해지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까지 사랑의 일부라고, 이 시는 이야기한다. 사랑은 소중한 것. 그렇다면 예의를 갖추어 가는 길까지 정중하게 배웅해 주어야 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생의 가장 비참한 순간은 가장 괴로운 순간이고, 가장 살고 싶은 순간이다. 그때에는 할 수 없는 일이 많지 않을 것이다. 죽을 힘을 다해서 몸부림칠 수밖에 없다. 시인은 물고기가 펄떡거리는 그 새벽을 활기찬 시장이라거나 용솟음치는 생명력이라고 표현하지 못한다. 바닥을 치는 온몸의 두드림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p.300, 「육탁」 중에서)


저자 : 나민애


1979년 충남 공주 출생.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교수로 재직 중이며, [동아일보]의 「시가 깃든 삶」 주간 시평을 연재하고 있다. 2007년 [문학사상] 신인평론상을 통해 등단했으며 저서로는 『제망아가의 사도들』 『내게로 온 시 너에게 보낸다』 『책 읽고 글쓰기』 『반짝이지 않아도 사랑이 된다』 등이 있다. 우리 시대의 정신과 감수성에 맞는 시를 찾고 소개하는 ‘시 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다. 나태주 시인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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