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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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독자는 이 책 『벌집과 꿀』을 통해 폴 윤이라는 작가를 처음 접한다. '코리안 디아스포라'라는 역사 속 아픈 기억을 되살려낸 작품이라고 해서 독서욕이 타올랐다.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그린 작품 중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를 읽고 감동이 컸었다는 것도 기억해 냈다. 역사에 외면당한 재일조선인 가족의 대서사극을 그렸다는 『파친코』에 대한 강렬한 인상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또 김주혜 작가의 『작은 땅의 야수들』도 독자로서는 차라리 충격이었다. 독자의 독서의 폭은 지금까지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면과 핍박받는 현실을 그린 작품을 주로 봤는데 그 엄혹한 시절에도 한국인의 가슴에는 증오보다는 사랑이 더 많이 남아 있었고, 결국 그 힘이 우리의 해방을 맞이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그렇게 이런 저런 이유로 한반도의 가장 어두운 시기인 20세기의 비극적인 현실을 묘사한 많은 작품 중에서도 최근 나온 이 소설들은 독자의 가슴을 더 찡하게 했다. 물론 일제 강점기 때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핍박을 받았는지 생각하면 아직도 그 분이 풀어지지 않아 일본에 대한 증오심은 독자에게는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책을 읽기 전 출판사 측에서 소개한 글에서 김소연 시인이 추천했다는 점을 알았다. 그의 추천사는 독자의 가슴을 뛰게 했다. "소설이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내게서 잊힌 지 오래된 믿음을 폴 윤은 되살려놓았다. 장면을 살려내는 것으로써. 오직 그려냄으로써. 그것에만 몰두함으로써. 폴 윤이 그린 이미지 너머에는 너무 먼 곳과 너무 오래된 이야기가 낭떠러지 아래의 드넓은 해안처럼 펼쳐져 있다. 자그마한 구슬처럼 둥글게 마모된 영롱한 조각을 해안에서 주워 들고서 본래의 모습을 그려보듯, 폴 윤의 인물들 곁에 나는 서 있다. 무사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무사하다고밖에는 말할 방법이 없는, 아주 오래된 안부들. 포말 속에서 하얀 거품처럼 생겨났다 사라지는 안부들. 어떤 안부는 이런 방식으로만 가 닿을 수 있다. 안부가 닿자, 떠밀려온 해안에서 누군가 몸을 일으켜 다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설레는 마음으로 한 분의 추천사를 더 읽었다. 퓰리처상 수상자, 『트러스트』 작가인 에르난 디아스는 "폴 윤은 감정에서 깊이를 끌어내는 데 대가일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가장 시급한 문제들에서 시간을 초월하는 보편적 핵심을 뛰어나게 포착한다."고 썼다.


저자 폴 윤은 에르난 디아스, 앤 패칫 등 동시대 세계적인 작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로 소개되어 있다. 책을 받아보니 영어로 쓴 소설이었다. 번역자 서제인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처음 생각에는 폴 윤이라는 이름을 보고 '윤'씨 성을 가진 미국 이민 2세쯤으로 생각했지만 번역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미국에서 나고 자란 분이라고 추정할 수 있었다. 그런 분이 어떻게 일제 강점기 우리의 디아스포라를 자세히 알고 소설 작품으로 빚어냈을까 싶다. 아름답게 형상화된 부분은 번역의 솜씨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지만 소재나 주제(단편집이라 각 작품의 주제는 다소 다르지만)를 명확하게 짚어내고 작품으로 형상화했을까 싶은 마음은 소설을 다 읽고도 가슴속엔 의문으로 남아 있다.

이 소설집에는 모두 7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돼 있다. 막 출소해서 낯선 동네에 자리를 잡으려는 청년, 탈북한 뒤 스페인에서 청소 일을 하는 나이 든 여자, 조선인 고아 소년의 고국 송환 길을 호위하는 사무라이, 탈북한 한국인의 2세로 런던에서 살아가는 부부, 러시아 극동 지방의 척박한 고려인 이주지에 임관한 장교, 사할린섬의 교도소에서 일하는 고려인 아버지를 찾으러 나서는 십 대 소년, 한국전쟁이 남긴 상흔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온 남자 등을 통해 20세기 한국의 디아스포라를 형상화해냈다. 

저자 폴 윤은 이 소설집을 통해 실로 광막한 시간과 공간 속에 흩뿌려진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들을 생생한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으로 빚어 시적인 글로 담아냈다. 집을 떠나고 집을 갈망하고 때로는 서로에게 집이 되어주는 이 인물들은 하나같이 쓸쓸한 비애를 담고 있지만 그 비애는 문득 부드럽고 환한 빛이 되기도 한다. 역사의 상흔, 어딘가에 연결되고 싶은 마음과 좌절의 쓰라림을 섬세하고 절제된 문장으로 그려낸 이 소설집은 “디아스포라 문학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는 평을 받고 미국 문단에서 뜨거운 주목을 받는 작가로 떠올랐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소설집 『벌집과 꿀』은 다양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 놓인 한국계 디아스포라들을 비춘다.


일제 강점기 전후로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전쟁, 탈북, 강제 이주 등 역사의 아픔을 개인의 삶으로 떠안은 인물들을 그렸다. 상실감과 비애를 그림자처럼 품고 낯선 곳으로 떠난 그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러저리 흘러 다닌다. 아니 떠밀려 다닌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냉전 시대에 탈북해 남한으로, 독일로, 스페인으로 혈혈단신 떠돌아온 장년 여성(「코마로프」)이나 미국으로 이민 와 교도소로, 낯선 도시로 옮겨 다니는 젊은 남자(「보선」)가 직접적인 경우라면, 종전 후 외진 산골 고향에 돌아와 은둔하듯 살아가는 남자(「달의 골짜기」)는 어디로도 떠나지 않지만 그의 고립은 여전히 세상 속에 그의 자리가 없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목격자의 시선으로 이들의 떠돎을 지켜보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 침략의 와중에 아기 때 붙잡혀 온 조선인 고아 소년의 고국 송환 길을 함께하는 사무라이(「역참에서」)는 뿌리가 뽑힌 채 떠도는 아이의 처지를 자신의 삶과 함께 헤아리고, 19세기 말 연해주에 임관한 러시아인 장교(「벌집과 꿀」)는 낯선 땅에 낯선 이들과 함께하게 된 자신의 신세를 곱씹으며 이국에 집을 지으려는 이들의 몸부림을 기묘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한편 문자 그대로의 디아스포라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이주의 여파 속에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탈북해 영국 땅에 자리 잡은 부모를 둔 한인 2세 부부(「크로머」)나,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섬에 끌려온 할아버지를 둔 조선인 3세인 10대 소년(「고려인」)은 그곳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여전히 이방인으로 혹은 집 없는 이가 되어 지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막연히 어딘가를 떠돈다.

집이 되어주어야 할, 가족이 되어주어야 할 무언가와 연결이 끊긴 이들을 담아내는 저자의 글은 한없이 세심하면서도 시처럼 간결하고 응축적이기도 하다. 저자는 어떤 사건보다는 막연한 예감, 격렬한 감정보다는 희미한 느낌을 정밀하게 포착하는 재주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퍼블리셔스 위클리〉에서 “평범함과 평범함에서 벗어난 것들을 주의 깊게 뒤섞는 단순하지만 인상적인 언어. 삶의 잔혹하면서도 아름다운 순간들을 우아하게 탐구하는 소설.”라는 한 줄 평을 낸 것도 이해된다. 저자의 글은 인물들의 슬픔과 비애가 지닌 깊이와, 삶에서 문득문득 드러나는 진실들을 정확히 가늠해 드러낸다. 이 시적인 문장들은 인물들의 내면과 감정의 결을 밀도 높게 묘사하는 동시에 다양한 역사적 배경 역시 얼버무리는 법 없이 그 세부를 능숙하게 다뤄 이야기에 깊이를 더한다.


이 소설집에서 등장 인물들은 짧은 여행이든 긴 이주든 어딘가로 계속 떠난다. 자리를 잃었기에,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에, 그들은 자꾸만 떠나고 어딘가에서 또 다른 삶을 지을 수 있기를 갈망한다. 집이었던 것에 대한 그리움, 새로운 집을 찾길 바라는 갈망, 이 동전의 양면 같은 허기는 이들에게 떠남이 곧 돌아옴이기도 하다는 걸 말해준다. 집을 떠나고, 그리하여 집이 될 어딘가로 끊임없이 돌아가는 것. 떠나는 자들에게 깊숙이 새겨진 이 갈망은 진정한 집이 생길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와 같은 오랜 지속과 기다림에는 슬픔과 외로움이 깃든다.

그러나 이 책의 인물들이 홀로 외롭게 버티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일곱 편의 이야기에는 짧은 순간이라도 집이 되어주는 이들과 서로 연결되는 관계들이 나온다. 이방인이거나 자기 땅에서도 이방인처럼 살아가는 인물들에게도 신기하도록 아무렇지 않게 곁을 내주고 마음을 써주는 이들이 어디에나 있다. 생면부지의 타인을 돌보는 일을 소설의 인물들은 그저 자연스럽게, 그게 당연하지 않으냐는 듯이 해낸다. 그걸로 타인의 삶을 구원할 수는 없지만 한 번의 친절, 순간의 유대감이 누군가에게는 집이 되어주기도 한다. 한국인의 정과 사랑이 오롯이 전해져 온다. 또 슬픔은 은근하고 끝내 참아내고 즐거움은 함께 나누고픈 한국인의 정서가 짙게 배어나온 덕에 이 소설집에 더 큰 정감이 간다. 

등장 인물들은 그렇게 또 어떤 시간들을 견뎌낼 수도 있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그럼에도 내일이 있다. 그보다 더한 일들에서도 그들은 살아남았다. 달처럼 “뜨고, 기울고, 부서지고는” “스스로를 다시 만들어내”면서 살아왔다. 내일이라는 어떤 희망을 가져봐도 좋은 것이다. 물론 장소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쓰라림은 영영 떠나지 않는다. 그래도 “또 다른 삶을 짓는 방법을 가르쳐줄 사람들”을 찾아내며 삶을 지속하는 이 인물들은 황량한 삶에도 빛과 온기가 깃들 자리가 있음을, 그 자리가 때로는 희망보다 크기도 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책을 옮긴 역자 서제인은 "이 책의 원고를 받아 처음으로 읽었던 날이 기억난다. 그다지 길지 않은 소설집이었는데 읽는 동안 여러 번 한숨을 쉬어야 했다. 이 작가는 문장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 같았고, 이 책을 번역하는 건 문학보다는 미술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 될 것 같았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만큼 걱정이 됐다."고 〈옮긴이의 말〉에 썼다. 또 역자는 "속할 수 있는 장소를 갖지 못한 채 부유하는 사람에게는 세계 어느 곳에서의 경험이든 근본적으로 비슷한 것이 된다. 그것은 어느 방향을 봐도 같은 풍경만 보이는 들판 한가운데를 걷는 듯한 삶이다."고 감정이입의 소감을 밝히고 있다. 역자는 이 소설집에서 저자가 이 작품들에서 보여주는 것-자신이 있을 수 있었던 곳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단절의 느낌과 자신이 앞으로 있게 될지도 모르는 곳에서 마음 깊이 퍼져오는 부드러운 연결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폴 윤의 소설을 읽다가 문득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된다면, 누구에게라도 말을 걸어 이 느낌을 전하고 싶어진다면, 아마도 당신 역시 조금은 길 잃은 사람일 것이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물속을 한없이 떠가는 것 같은 불확실함 속에서도 우리가 가끔씩은 서로에게 집이 되어주고, 타인을 위해 이토록 성실하게 길을 만들어줌으로써 허무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그건 어떤 의지나 결단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 짐승이 새끼를 돌보듯 그저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우리의 본능이라는 것을, 작가는 다채롭고도 능숙한 솜씨로 보여준다. 『벌집과 꿀』은 한 사람의 마음속 빈 곳이 어떻게 위안을 주는 풍경을 빚어내는 거푸집이 될 수 있는지, 그 굴곡마다 들어찬 갈망이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얼마나 놀라운 건축을 해낼 수 있는지 증명해주는 텍스트다.”(p.297~298) 


저자 : 폴 윤


소설가. 이주민 가정에서 성장한 체험을 바탕으로 정체성과 갈망, 시간과 역사 속에 놓인 인간이라는 문제를 독특하고 고요한 서정으로 그려낸다. 2009년에 첫 책인 소설집 『Once the Shore』로 전미도서재단에서 선정하는 ‘35세 이하 작가 5인’에 선정되었으며 [뉴욕 타임스] ‘주목할 만한 책’으로 꼽혔다. 첫 장편소설 『스노우 헌터스』(2013)로 뉴욕 공공도서관 영 라이언스 픽션 어워드를 수상했다. 소설집 『The Mountain』(2017)은 NPR을 비롯한 다수의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으며, 장편소설 『Run Me to Earth』(2020)는 앤드루 카네기 메달 소설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2023년에 출간된 소설집 『벌집과 꿀』은 스토리상을 수상하고 조이스 캐럴 오츠 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며, 그해 [타임] ‘올해 최고의 책 10’에 선정된 것을 비롯해 [뉴요커] 등 유수의 매체들에서 ‘올해의 책’으로 꼽혔다.

『벌집과 꿀』은 러시아 극동 지방, 스페인, 에도시대 일본, 영국 런던, 미국 뉴욕 등 광막한 시공간으로 흩어진 한국계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뿌리와 정체성, 개인에게 날카롭게 새겨진 역사의 상흔, 외로움과 갈망, 연결되고 싶은 마음과 좌절의 아픔을 섬세하고 부드러운 문장으로 묘사해낸다. 이 책은 많은 독자들과 비평가들로부터 호평받았을 뿐 아니라 에르난 디아스, 앤 패칫 등 세계적인 작가들로부터도 극찬받았다.


역자 : 서제인


기자, 편집자, 작가 등 글을 다루는 다양한 일을 하다가 번역을 시작했다. 거대하고 유기체적인 악기를 조율하는 일을 닮은 번역 작업에 매력을 느낀다. 옮긴 책으로 『목구멍 속의 유령』,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300개의 단상』, 토베 디틀레우센 〈코펜하겐 3부작〉,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아파트먼트』, 『노마드랜드』,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등이 있고, 함께 옮긴 책으로 〈로버트 A. 하인라인 중단편 전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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