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따라 공간 따라 역사 문화 산책 - 신병주 교수의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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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대한민국은 5,000년의 역사를 가진 오래된 나라임에도 역사적인 유적이 많지 않은 점에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 적이 있다. 90년대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유럽 여행을 처음 가서 그들의 문화 유적을 보고 느낀 점이다. 그들은 선진국이었고, 우리는 개발도상국이어서였을까? 아니 어쩌면 우리 마음속에 있는 편견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럽의 문화 유적은 우리와 비슷한, 혹은 우리보다 덜 된 역사임에도 찬란하고 웅장했다. 특히 건축 문화는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대단했다. 학교 다닐 때 교과서나 참고서에서 본 것들이 관광지 이곳 저곳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데 보는 것마다 대단했다. 높이 치솟은 성당, 웅장한 그리스·로마 시대의 공공건물··· 볼수록 주눅이 들 정도였다. 물론 건축물은 해당 지역의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란 인식은 있었지만 돌 건축물에 치장된 장식의 솜씨는 우리의 다보탑에 못지 않았고, 크기는 보는 이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관광객 입장에서 볼 때는 유럽인들은 "조상 덕에 먹고 산다"고 독자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화 유적은? 주변 나라나, 지형, 기후 조건을 따져야겠지만, 우선 외관상 크기는 비할 바가 못 된다는 생각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질투심이었는지, 위축감이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한편으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란 자긍심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도 들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우리의 문화 유적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부족해서 나온 것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부족해 보였다. 이와 반대로 우리 역사마저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배어나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린 역사상 강대국임을 자처한 적이 없다. 먼 과거 고대 삼국시대 때가 유일하게 정복자로서의 나라의 위상이 크게 높았었다. 고구려는 중국의 통일 왕조를 능가하는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고 중국까지 침략해 들어가 정복하려는 침략의 역사는 없었다. 유럽 선진국들은 전쟁에서 이긴 '승전의 역사'였다. 이처럼 유럽의 역사와 우리 역사가 다른 점은 분명하다.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정복해 나라가 부강해지는 일은 우리 민족 역사에 없다는 말이다. 당연히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란 최고의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찬란하고 웅장한 역사 유적을 갖지 못한 점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민족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점에 비춰 본다면 우리도 자랑할 만한 역사 유적이 숱하게 많다. 좁은 영토지만 5,000년 동안 쌓이고, 흔적을 남긴 유적들은 한반도 곳곳에 산재해 있다. 다만 우리가 그 상징성을 제대로 찾지 못한 것이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우리는 근대 이후의 역사가 침략 당해 억압받고, 외부 세력에 의해 이념적으로 분단됐다. 이념이 다른 두 강대국에 의해 영토마저 강제로 분단된 이후 겪은 한국전쟁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 갔다. 그러나 역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일제 강점기의 피지배 민족으로 가혹한 수탈과 우리 민족성의 훼손이었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끊임없이 침략을 당해 왔다. 중국, 일본, 러시아뿐만 아니라 근대 들어 세계 강국으로 등장한 미국도 우리에겐 호의적이지 않았다. 강대국이 가진 힘의 논리에 의해 나라의 운명이 바뀔 수 있는 상황에서 민족성이나 나라에 대한 자긍심은 우리의 자랑할 만한 정신 자산이다. 정신 자산은 유형의 물적 유산을 남기지 않아 눈에 띄이지 않지만 나라가 위기에 처하거나 우리 삶이 파괴될 위험 앞에선 단결력과 끈끈한 유대감, 그리고 남들이 도저히 따라올 수 있는 인내력이 큰 힘을 발휘한다. 바로 우리 민족의 정신적 자산이다. 

이런 민족성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가는 길 곳곳에도 역사적 흔적을 남겼다. 그 역사적 배경을 알고 나면 그 길은 더 이상 그저 그렇고 그런 곳이 아니다. 그때의 인물, 그때의 사건, 그때의 공간이 연결되면서 생생한 역사적 장면과 마주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동안 우리에게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뿐이다. 또 그럴수록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선조들의 정신적 강인함을 찾아내 널리 알려야 하는데 일제강점기 지배는 민족적 정신력을 말살하려 했기에 더욱 잔인한 식민주의라고 배척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 강제된 식민주의 역사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일부 집단의 그릇된 역사관도 이젠 하나씩 정리돼 가고 있다. 이 책 『인물 따라 공간 따라 역사 문화 산책』은 "과거와의 만남도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이라는 주장을 가진 저자 신병주의 신념의 산물이기도 하다. 서사적 인과관계에 치중한 묵직한 역사서와는 또 다른 매력이 이 책에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은 확인할 수 있다.


'그때의 현장'을 실제로 마주하게 함으로써 생생한 진짜 역사를 알게 하는 이 책 한 권을 들고 지금 당장 뛰어나가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거닐어볼 것을 저자는 권유한다. 그 길에 뜻밖의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고, 현재와의 연결선상에서 역사 속 인물과 사건이 멀지 않은 일처럼 느껴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켜켜이 쌓인 역사 이야기를 하나씩 하나씩 따라가면서 선조들의 멋스러운 지혜와 품격을 엿보며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얻게 되는 깨달음은 그야말로 민족적 자산이 될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우리가 역사 공부를 하면서 역사의 흐름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대표적인 활동은 현장 답사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역사를 만들어 간 인물과 공간은 그 존재만으로 생생한 사건의 현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것이 역사 현장 답사의 가치임을 저자는 강조한다. 이 책은 저자가 실제로 현장 답사를 나가 설명한 내용과 그때의 경험과 느낌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의 장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실제 답사가 가능하도록 서울,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제주도 각 지역별로 파트를 나누었다. 둘째, 역사의 현장에서 만나는 인물, 사건, 공간을 키워드로 하여 서술한 만큼 생동감과 현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셋째, 각 장(章)마다 현장을 찾아가는 길과 관련 정보를 박스로 표기하여 쉽게 움직일 수 있도록 했다. 

역사는 씨줄과 날줄로 경험된 사건, 인물, 그리고 공간을 파악한다. 그리고 파악된 내용을 바탕으로 씨줄과 날줄로 빈틈없이 엮어 완전한 원형에 맞추어 낸다. 이것이 역사관이고 역사 기술이다. 이렇게 잘 맞추어진 역사는 우리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힘을 준다. 과거를 교훈 삼아 실수는 되풀이하지 말고, 과거의 장점은 다시 사용하도록 추출해낸다. 공자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앎)이고, 신채호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신념이 우리에게 주는 묵직한 가르침이다. 

저자는 〈서문〉을 통해 "역사의 현장에서 만나는 인물, 사건, 공간을 키워드로 하여 서술한 만큼 보다 생동감과 현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고, 현장을 찾는 안내까지 부기하여 책을 읽으면서 답사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독자들이 현장 답사를 통해 역사가 주는 즐거움과 의미를 얻도록 하는 것이 이 책을 쓴 이유"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역사관과 역사 신념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의 흔적을 모두 7장(章)으로 나누어 기술한다. 1장 〈왕실의 역사, 궁궐 속으로〉, 2장 〈갈등과 변화의 공간, 서울〉, 3장 〈외곽의 역사, 경기도〉, 4장 〈선비의 고장, 경상도〉, 5장 〈유배지에서 꽃핀 학문, 전라도〉, 6장 〈청백리와 천주교의 흔적, 충청도〉, 7장 〈허난설헌과 김만덕, 강원도·제주도〉 등이다. 우리 5,000년의 역사를 다 담을 수 없는 이유는 한민족 역사 중 분단된 후 80년 동안 남한의 역사학자가 확실하게 정사(正史)를 분석하고 고증, 확증할 수 있는 부분이 조선시대 우리 역사뿐이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앞으로 우리 역사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올바른 역사 쓰기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계속될 것으로 독자는 기대한다. 

1장는 근정전·집현전과 같이 익숙한 공간 이외에 내의원, 종친부, 창덕궁 후원의 설경 등 새로운 공간을 주로 다룬다. 2부에서는 칠궁, 왕의 잠저, 흥덕이 밭, 인조별서유긷비 등 조선왕조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수 소개한 점이 눈에 띈다. 3부에서는 추사 김정희와 과천, 정몽주, 조광조와 경기도 용인과의 인연 등을 설명한다. 4부는 안동 하회마을, 한산도대첩과 노량해전의 현장들, 조식과 지리산 산천재 등을 소개한다. 또 5부는 정약용과 강진, 정약전과 흑산도, 유형원과 부안의 학문적 인연 등을, 6부에서는 성삼문과 윤봉길 의사의 당진 솔뫼성지 등을 찾아간다. 마지막으로 7부에서는 허난설헌, 신사임당, 김만덕의 행적을 짚어본다. 

서울 지역은 오랫동안 조선의 수도 역할을 했던 만큼 곳곳에 의미 있는 유적지가 가득하다. 서울 중심지에는 왕과 왕비가 살았던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5대궁뿐 아니라 그들의 신주를 모신 종묘, 나아가 왕을 낳은 어머니들의 신주를 모신 칠궁 등이 모여 있다. 북촌은 양반들이나 고관들이 주로 거주했던 공간이다. 북촌의 헌법재판소가 있는 자리에는 『열하일기』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와 개화파 정치인 홍영식의 집터 표지석이 있고 1885년에 설립된 최초의 병원 제중원 표지석도 있다. 서촌은 조선 후기 양반과 평민 사이에 위치한 중인들이 시와 문장 등의 문화를 즐기는 곳이었다. 대표적인 곳이 시인 천수경이 주인이었던 ‘송석원’으로, 친일파 윤덕영은 그 자리에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리던 ‘벽수산장’이라는 저택을 짓기도 했다. 지금은 박노수미술관으로 흔적이 남아 있다. 박노수미술관 주변에는 시인 이상이 20년간 살았던 집터에 자리한 ‘이상의 집’, 연희전문학교 학생 윤동주가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했음을 알려주는 ‘윤동주 하숙집’ 표지판도 찾아볼 수 있다.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산, 낙산, 인왕산, 남산, 백악산을 연결한 한양도성, 한명회의 화려했던 정치 인생과 권력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압구정동의 유래가 된 정자 압구정, 석촌호수 쪽으로는 아픈 역사를 간직한 삼전도비를 찾아볼 수 있다.


경기도 여주에는 세종대왕의 영릉이 있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무덤 헌릉(서초구 내곡동)의 서쪽으로 자신의 무덤 자리를 생전에 정한 왕이었고 사후 그곳에 묻혔다. 하지만 풍수지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 계속 지적되고 문종, 단종, 의경세자 등 적장자 출신들이 연이어 요절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경기도 여주로 옮겨졌다. 용인에는 성리학의 수용과 실천에 공을 세운 정몽주와 조광조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고양시에 있는 서오릉과 구리시의 동구릉은 왕과 왕비를 모신 대표적인 왕릉군이다. 강화도는 고대 유적인 고인돌부터 고려시대 유적인 고려궁궐 터, 조선시대 유적인 정족산사고와 외규장각 등 시기별 유적을 잘 갖추고 있는 곳이다. 외규장각은 정조 때 지어진 것으로 궁궐 안은 전쟁이나 화재의 안전지대가 아니었기에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지어 왕실의 도서를 보존했다.

경상도 안동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하회마을과 퇴계 이황 학문의 산실로 꼽히는 도산서원 및 퇴계종택이 있다. 근처에는 이황의 후손인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이육사의 생가를 복원한 육우당도 있다. 산청에는 이황과 더불어 영남학파 양대산맥인 조식의 생가, 산천재가 있다. 경의 상징인 방울과 의의 상징인 칼을 찬 선비로 기억되는 조식은 임진왜란 때 활약한 곽재우 등 많은 의병장을 배출하기도 했다. 남해로 가면 이성계의 소원을 들어주었다는 금산의 보리암, 노량해전의 이순신을 기린 관음포, 『사씨남정기』의 작가 김만중의 유배지였던 노도를 만날 수 있다.

전라도 담양에는 호남 선비의 풍류와 멋이 담긴 소쇄원이 있다. 소쇄원은 조선 최고의 민간 정원으로 조광조의 문인이었던 양산보가 스승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자 정자를 짓고 은거했던 곳이다. 흑산도는 정약용의 형이자 『자산어보』의 저자인 정약전의 유배지로 정약전이 제자들을 가르치며 책을 집필한 공간인 사촌서실이 있다.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는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사건인 신유박해로 유배길에 올랐고 그들이 유배 기간 동안 주고받은 편지는 지금까지 전해온다. 강진은 정약용의 유배지다. 정약용은 강진에 다산초당을 짓고 거처로 삼았다. 외가인 해남 윤씨 종택인 녹우당이 인근에 있어 많은 책을 얻을 수 있었고, 근처 백련사에 거처하는 혜장, 초의 등의 고승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정약용은 유배의 시간을 실학 완성의 기회로 만들 수 있었다. 전주는 이성계의 고조부가 살았던 곳으로 전주 한옥마을 안에 위치한 오목대는 황산대첩에서 승리한 후 돌아가는 길에 들러 승전을 자축한 곳이다.


충청도 아산에는 조선시대에 가장 이상적이고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청백리 맹사성 고택이 있다. ‘맹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이 있는 집’이라는 뜻으로 맹씨행단이라고도 불린다. 본래 고려 후기 장군 최영의 집이었는데 손녀사위였던 맹사성이 물려받은 곳이다. 공주에는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의 능인 무령왕릉이 있다. 1971년 도굴되지 않은 원형의 형태로 발견되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옥천에는 「향수」를 쓴 시인 정지용의 생가가 있고, 그 인근에는 육영수 여사의 생가도 있다. 당진에 있는 솔뫼성지는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곳으로 증조부 김진후, 작은 할아버지 김종한, 부친 김제준까지 4대의 순교자를 배출한 천주교의 성지다.

강원도 강릉에는 오죽헌이 있다. 조선 전기까지는 여성이 남성과 거의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재산 상속에서도 남녀가 똑같이 재산을 물려받았고 처가살이가 관행적으로 행해졌는데 신사임당의 친정이자 이이가 태어난 곳이 오죽헌이다. 강릉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인물은 허난설헌이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이기도 했던 허난설헌은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뛰어난 재주에 비해 순탄하지 못한 결혼생활 끝에 27세에 요절했다. 허균은 외우고 있거나 친정에 흩어져 있던 누이의 시를 모아 『난설헌고』를 만들었다. 이 시집은 명나라와 일본에까지 전해져 허난설헌의 이름을 알렸다. 또한 오대산사고를 찾아볼 수 있다. ‘사고’는 『조선왕조실록』 등 국가의 중요한 서적을 보관하던 서고로, 혹시라도 모를 화재나 변란으로 소실될 것을 우려하여 임진왜란 이후에는 보다 안전한 산간 지역에 설치했다. 그중 하나가 오대산사고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은 1913년에 일본에 유출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지만 2023년에 오랜 타향살이를 마치고 오대산에 돌아와 자료적 가치를 더하고 있다.

제주도 애월에는 고려 후기 원나라의 침입에 맞서 삼별초가 최후까지 저항을 했던 향파두리성이 있다. 제주시에는 김만덕기념관이 있는데 김만덕은 1795년 제주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천금을 내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정조실록』에 실린 여성 상인이다. 여성이 재물을 풀어 백성을 구제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이것이 국가적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서귀포시로 가면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화가였던 추사 김정희가 1840년에서 1848년까지 유배생활을 했던 추사유배지를 찾아볼 수 있다. 이곳은 청나라 사신으로 갔다 올 때마다 잊지 않고 책을 보내준 제자 이상적을 위해 고마움을 담아 그린 김정희의 역작 〈세한도〉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저자 : 신병주(申炳周)


서울대 인문대학 국사학과 및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건국대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조선시대사학회 회장, 한국문화재재단 이사, 문화재청 궁·능 활용 심의위원, 외교부 의전정책 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를 전공하고 있으며, 역사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KBS 「역사저널 그날」, KBS라디오 「글로벌 한국사, 그날 세계는」, 「신병주의 역사여행」을 진행했으며,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연산군과 광해군’ 편 외 다수, EBS 「클래스 e」 ‘조선 왕을 만나는 시간’ 시리즈, CJ ENM, 사피엔스 스튜디오의 ‘역사 읽어드립니다’ 시리즈 등에 출연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평전』, 『왕으로 산다는 것』, 『참모로 산다는 것』, 『왕비로 산다는 것』, 『우리 역사 속 전염병』, 『56개 공간으로 읽는 조선사』, 『서울의 자서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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