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적 경성 - 식민지 경성은 얼마나 음악적이었나
조윤영 지음 / 소명출판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뷰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한일 강제병합으로 주권을 빼앗기고 압도적 통감 정치를 펼친 일본 제국주의는 3·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 정치'를 실시했다. 3·1운동은 중국에서 외세를 내쫒아야 한다는 5·4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일본 총독부는 지나치게 조선을 압도하는 정치가 오히려 반발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하나씩 점령해가던 시절이어서 예전 정치로는 조선에 발목이 잡히는 꼴이 될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병탄 초기 동화정책을 기본으로 삼았던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한국민의 반항을 막기 위해 헌병과 경찰을 통합하여 중앙의 경무총장에 헌병사령관, 각도의 경무부장에 헌병대장을 임명하여 이른바 헌병경찰정치를 통해서 철저한 무단탄압정책을 강행하였다. 1919년의 3·1운동을 계기로 극악함이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헌병경찰은 보통경찰체로 바뀌고 총독부의 정책도 이른바 문화정치로 전환하였으나, 경찰제도는 여전히 총독부의 한국통치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여 비대하여만 갔다.

총독부의 중앙부서는 ‘문화정치’ 이후 내무·재무·식산·법무·학무·경무의 6국으로 개편하였고, 총독관방도 서무·토목·철도의 3부로 개편하였다. 지방제도에서도 도장관을 지사(知事)로 개칭하고, 민선으로 구성되는 도평의회 및 부·면협의회 등 자문기관을 두었다. 이들 자문기관은 도·부·읍회로 개편되어 지방자치제로서의 결의기관으로 발전시켰으며, 중앙의 중추원도 개편하여 고문·찬의·부찬의를 참의로 통합하고, 정원도 65명으로 정하였다. 한국인의 관리임용에서도 그 범위를 넓히고 대우를 개선하였으며, 언론·집회·출판에 대한 종래의 탄압정책을 완화하는 등 회유책을 썼으나, 이것은 모두 표면상의 정치적 제스처이었을 뿐, 음성적인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다고 역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 기간 1920년부터 1935년까지의 '문화 정치' 때 ‘음악회’는 식민지시기 경성의 근대화 과정에 있어 ‘최고의 유행물’이었다고 이 책 『음악적 경성』의 저자 조윤영은 밝히고 있다. 저자는 책의 〈서문〉을 통해 당시 경성인들의 일상을 면밀히 살펴보고, 음악문화 형성의 중심지였던 종로와 혼마치(지금의 충무로 일대)의 다양한 공간에서 펼쳐진 근대 음악회를 정치적, 사회문화적 맥락을 통하여 알아보기 위해 집필 이유를 적시하고 있다.


특히 이 시기는 일제의 문화정치와 일본 유학을 시도한 젊은 음악가들이 귀국하는 시점이 맞물려 음악적으로 중요한 시기라고 저자는 말한다. 1920년대에는 다양한 전공의 양악전문가들이 출현하고 양악을 향유하려는 조선인들이 증가하면서 음악회에 참석하는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것. 같은 시기 총독부의 문화정치와 함께 다수가 모일 수 있는 다양한 공간이 종로와 혼마치를 중심으로 생겨났다. 

저자는 이 책의 주제가 박사학위 논문에 사용될 목적으로 연구하고 수집했던 자료가 대부분이어서 책으로 내기 위해 이 기간에 출간된 다수의 출판물, 즉 신문, 잡지, 음악회 공고문 등의 자료를 통해 수정 보완됐다고 밝힌다. 이 기간에는 다행히 문화정치로 전환하고부터는 일제가 우리의 신문, 잡지, 기타 각종 출판물의 자격과 기준 제한을 크게 낮추었던 듯하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의 역사 서술이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영역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우리의 삶과 밀접한 음악사회에 대한 출판을 기획했다. 독자들 가까이에 식민지 일상의 음악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책의 출간 의미를 두고 누구나 편하게 열어볼 수 있게 쓰고자 노력했다.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이제는 우리의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악'이 식민지라는 환경에 의해 너무나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특히,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세계를 휩쓴 아이돌 그룹이나 성악가 조수미,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같은 국제적 음악 인재들이 나올 수 있는 기반에는 우리가 100여년 전 새롭게 익혔던 서양음악이 현대 한국인들의 이중 음악적 모국어로 형성될 수 있는 근간이었음을 독자들은 공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처럼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였던 일상적인 것에도 우리의 과거를 이해할 수 있는 요소가 가득하다. 이 연구가 시사하는 바처럼 구멍 나 있는 역사의 퍼즐을 맞추어나가는 과정은 앞으로도 스스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p.7~8)

이 책은 경성시대 음악 사회를 분석한 저자의 박사논문이 바탕이 돼 출간되었으며, 조선인과 일본인의 생활공간을 가로지르며 음악이 문화정치적으로 담당한 역사를 들여다본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근대도시 경성의 음악문화와 일상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의 네 가지 양상을 비판적으로 탐구한다. ① 식민지조선의 모던도시 경성이 근대적 문화도시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개괄하고 조선인 중심의 종로와 일본인 중심의 혼마치문화를 비교하여 분석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서구화된 일본의 문화를 탐닉하는 조선인들의 일상생활을 들여다본다. ② 조선인들에게 문화의 상징성을 내포한 공간이자 종로의 대표적 공간에서 열린 음악회를 구체적으로 조사하여 조선인 중심의 음악회 유형과 특성을 밝힌다. 그리고 일제의 지배하에 놓인 이중도시 경성의 이면을 재조일본인(在朝日本人)들의 문화와 혼마치의 대표적 음악회장 위치와 역할, 그리고 성격 등을 파악하여 이분법적으로 나뉘어 있던 식민/피식민, 중심/주변, 고급/저급의 음악사회를 탐색한다. ③ 음악회를 구성하는 다양한─청중, 음악가, 주최자─입장을 다각도로 조망하여 식민지권력과 자본주의 아래에서 근대적 도시 경험인 음악회라는 문화를 수용하는 모습을 분석한다. ④ 조선인들에게 음악회가 어떻게 ‘최고의 유행물’이 되었으며 ‘음악광시대’로 확산되어 가는지, 그들의 담론을 통해 조선인의 문화를 이해하고 식민지경성에서 펼쳐진 음악회의 의미를 그려본다.

이에 따라 기술된 이 책 『음악적 경성』은 지금까지 들여다보지 않았던 음악사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첫째, 조선인들에게 음악회에서 서양음악을 듣고 본다는 것이 어떠한 근대적 경험인가? 제도권 밖 음악문화의 저변층 확대를 둘러싼 의문을 풀어본다. 둘째, 식민지 상황에서 재조일본인들의 영향력과 그들만의 음악문화가 일상에서 어떻게 수용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식민지 사회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지대할 수밖에 없었기에, 교육과 정책 연구에서 확인되지 않는 일반적 적용 사례를 찾아본다. 셋째, 그로 인해 조선인들이 받은 영향과 미친 영향은 무엇이었는가? 일본을 통해 굴절된 서구 근대화가 미국과 일본이라는 두 제국에 의해 한꺼번에 들어와 음악문화를 주재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이 혼재하는 경성이라는 도시의 음악 문화를 근대적 상징인 '음악회'에 집중해서 분석한다. 저자는 음악회를 중심으로 보는 이유는 일회성으로 사라지는 시간예술 장르인 음악이 음악회와 관견된 다양한 자료물을 기록으로 수치화할 수 있어 어느 정도 객관적인 분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책은 모두 4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모던도시, 그리고 이중도시 경성(京城)〉, 2장 〈경성의 서양식 음악회 1920년부터 1935년까지〉, 3장 〈이중도시 경성의 음악회 특징과 음악적 경성의 면모〉, 4장 〈도시와 음악 문화〉 등이다. 1장에서는 「모던도시로 재탄생한 경성」「이중도시 경성에서의 문화탐닉-종로(鐘路)와 혼마치(本町)」 등 2개의 테마로 분석한다. 2장은 「야외에서의 음악」과 「실내에서의 음악」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3장은 「조선인의 문화-종로의 음악회」, 「재조일본인, 그들만의 문화-혼마치의 음악회」로 각각의 특징과 다른 점을 집중 분석한다. 마지막 4장에서는 「조선인의 음악 담론 “음악광시대”」와 「경성 안 두 민족의 음악회」 등 2개의 소제목에 따른 흥미로운 내용이 전개된다. 

이 책의 집필 목적은 사실 식민지경성이 근대도시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음악의 역할이 중요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음악 활동에 관한 중요성을 간과하여 근대의 일상에 대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한다. 특히 재조일본인들의 음악활동을 살펴본 데에는 경성인으로 함께 살아갔던 그들의 활동을 살펴보며 심층적으로 접근하여 근대 초기 경성의 음악문화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데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로써 근대 음악회의 수용과 그 중심지인 경성을 개괄하고 그동안 잊혀 있던 ‘음악과 일상’의 담론을 어떠한 형태로든 복구하여, 현재 우리의 음악문화와 일상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기를 저자는 기대하고 있다.

이 책을 읽어내려 가다 보면 낯익은 이름과 다소 낯선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경성의 음악과 음악회, 음악인들 뿐만 아니라 타 분야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인사들도 책에 이름이 들어 있다. 그만큼 경성의 음악과 음악회는 음악인들과 음악향유층의 관심의 높았고, 대중적 인기도 높았기 때문으로 독자는 풀이한다. 또 서양음악과 서양음악인들의 이름도 자주 나온다. 경성의 음악은 이른바 '서양 클래식'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홍난파는 "우리 사회에는 음악회란 것이 일대 유행물"(1925. 1. 1)이었다고 하나 당시 경성은 주체적으로 음악회를 열어 음악을 연주하고 감상할 수 있는 전문적인 음악홀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실내 음악회는 근대식 건물의 다목적 공간인 공공 강당에서 개최되었다고 저자는 기술하고 있다.


한국 서양음악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홍난파(1898~1941)는 또 뒷날 1940년 5월 19일자 신문 칼럼에 "그때 음악회란 음악전문가들의 예술적 연주회가 아니라 서양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어릿광대들의 소기(素技, 꾸밈없는 기술)에 지나지 못했던 것···"이라고 썼다. 여기서 '그때'란 1915~1920년을 말한다. 그때는 근대음악이 우리 땅에 이식되던 시기라고 볼 때 적절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경성은 일본이 추종했던 서구 음악문화를 우월한 것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혼마치(지금의 명동·필동 일대)의 악기상과 레코드 가게, 음악다방 등을 통해 도시는 점차 음악에 젖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문화충돌이 없던 건 아니다. 마당놀이 같은 야외 연회에 익숙했던 조선인들에게 실내 음악회는 생경했다. 음악회장 연주를 배경 삼아 춤추거나 소리 지르고 담배 피우는 일도 허다했다. 관람에티켓 지적이 늘자 양악은 점차 대중과 멀어졌다. 그럼에도 현진건의 단편 「피아노」가 그려내듯 '피아노만 들여놓으면 신식 가정이 될 것 같은 착각'이 1920~1930년대 경성인을 자극했다. 

책에 따르면 경성에서 열린 대부분의 음악회는 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과 혼마치의 경성공회당에 집중되어 있었고, 지정학적으로 조선인 중심지와 재조일본인 중심지로 나뉘어 있었으므로, 이 두 공간의 음악회를 비교하면 종로와 혼마치 음악회의 특징과 차이를 감지할 수 있다. 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 음악회는 초기에 매우 활발한 활동을 보이지만 192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급격히 감소하는 모습을 보여, 종로에서 열린 음악회의 인기가 시들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반대로 혼마치의 경성공회당 음악회는 공회당이 설립된 1920년부터 차차 음악회가 열리기 시작하더니 1920년대 중반부터 10년간 큰 변화 없이 꾸준히 개최되는 모습을 보인다.(p.146)

식민지배자인 일본인과 피식민자인 조선인의 근대에 대한 사고 차이는 음악문화가 형성되는 음악회 현장을 크게 두 범주로 구분했으며, 이 이중성은 음악적 근대도시 경성의 면모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던 것은 확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에 따르면 경성의 음악회는 공연장이 있는 지역에 따라 조선인과 재조일본인 거주 지역으로 철저하게 구분되었다. 종로의 공연장은 조선인들의 공간으로 서구식 공연의 시작 단계에 있었으며, 일본인들의 거주지인 혼마치에서는 전문음악인들이 참여하는 격 높은 공연들이 기획되었다.(p.149)



제3장 〈이중도시 경성의 음악회 특징과 음악적 경성의 면모〉 「조선인의 문화-종로의 음악회」에서는 식민지배자인 일본인과 피식민자인 조선인의 근대에 대한 사고 차이는 음악문화가 형성되는 음악회 현장에서 두 범주로 갈라진 상황을 자세하게 기술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경성의 음악회는 공연장이 있는 지역에 따라 조선인과 재조일본인 거주 지역으로 철저하게 구분되었다. 1920년대가 될 때까지도 예배당이든 술집이나 기생집이든 찬송가가 유행하였기에 음악회 곡목은 찬송가나 유행가가 주요 레퍼터리였고, 악기 외에 톱도 등장했다고 한다. 톱을 그어 소리를 내는 톱 연주를 악기 연주라 할 수 없지만 안대선(W. J. Anderson)이나 호아재경의 톱 연주는 조선인 중심 음악회에서 종종 공연되었다. 초기의 음악가는 "음악을 전문공구(專門功究)하는 인(人)은 아니요, 흔이는 부업으로써 다소간 이 방면에 소양과 취미를 남보다 더 가졌"(ghdsksvk, 1925. 4)던 사람들이었고, 음악을 생업으로 하는 음악가들도 자신의 전공 분야가 아니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장기를 선보이며 청중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김형준은 작사·작곡, 성악, 나팔까지 섭렵했으며, 김영환은 피아노, 바이올린, 작곡을 겸했다. 박용구는 이를 분업화의 문제로 지적하였지만 당시 소수였던 음악가들이 현실적으로 음악계를 지탱해 나가기 위한 도전과 노력이기도 했다.

근대 유행물인 음악회는 사교의 공간으로 이용되었다는 사실도 당시 작가 현진건의 소설에 나타난 내용을 인용해 저자는 강조한다. "현진건의 소설 「까막잡기」를 보면, 전문학교에 다니는 상춘은 학수에게 여학교 주최로 열리는 청년회관 춘기 대음악회에 가기를 권한다. 음악을 모르니 가지 않겠다는 학수에게 상춘은 하이칼라 여학생은 다 올 것이니 여학생 구경이라도 가자며 일등표까지 사주고 데려간다. 이 소설 속 음악회는 남학생이 여학생을 만나기 위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현진건의 또 다른 소설 「B사감과 러브레터」에서도 여학생에게 기숙사로 남학생의 편지가 오면, 삭람은 '학교에서 주최한 음악회"에서 만났나며 문초하였다. 경성인들에 음악회란 남녀가 만날 수 있는 공개적인 연애 장소로 인식되었다."(p.153) 이에 반해 연극이나 영화처럼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문화 생활에 반해, 음악회는 남녀가 같이 노래하고 춤추고 노는 쾌락이자 여흥이나 오락 격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일 원이나 이 원의 고가의 입장료를 선선히 내는 청중들"은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일석의 유흥기분으로 이것에 만족"(홍난파, 1940. 5. 19)하며 음악회를 다녔다.


저자 : 조윤영


호서대학교 강사.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음악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근대 음악사를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문에 「조선인 중심의 음악회장, 경성(京城) 기독교청년회관」 「왜 식민지조선 음악가들은 관현악단을 만들고자 했는가: 경성방송(JODK)관현악단의 출현과 그 의의」 「식민지조선 음악단체 중앙악우회(中央樂友會) 정체성 연구」 등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