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럭이는 세계사 - 인간이 깃발 아래 모이는 이유
드미트로 두빌레트 지음, 한지원 옮김 / 윌북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뷰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우리의 국기인 태극기에 관한 상징성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는 초등학교 다닐 때 한국 역사 시간에 배운 정도로 알고 있다. 나라를 대표해 가는 곳에는 어김없이 태극기가 걸려 있고, 국가 수반의 해외 방문 때도 방문국의 국기와 함께 나란히 걸릴 때마다 애국심은 물론 국가에 의한 자긍심도 자극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어려운 여건 하에서 짧은 시간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세계에서 '기적 같은 나라'라고 평가하고 있다. 우리가 해외에서 대접 받는 일이 1990년대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이른바 해외 여행 붐이 일어났을 때 독자로서 첫 해외 여행을 갔을 때 절실히 느꼈다. 물론 '어디서 오셨나?'라고 물을 때 'Korea'라는 답변 앞에 'South'를 붙여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조금만 설명을 더하면 적잖은 사람들이 아는 척해 주었다. 

태극기도 이제는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알아볼 정도로 충분히 잘 알려져 있다. 태극기가 상징하는 것에 대해 완전히 설명하기에는 지금도 무리가 있다. 또 초등학교 때 태극기 그리기 시간에 4귀에 있는 건·곤·감·리를 제대로 그리지 못해 쩔쩔맸던 기억을 제외한다면 그렇게 그리기 어려운 점은 없었다. 그러나 아직도 정확하게 상징하는 것을 완전하게 기억되지 않아 제대로 설명할지는 스스로도 부끄러운 점이 있지만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국이란 나라도 자신들의 국기를 그리는 일이 쉽지 않아 어렸을 때 제대로 그려내는 일이 많지 않다고 한다. 사실 국기에 대해 정확하고 온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어느 나라든 못 그릴 국기는 없다. 상대적으로 굉장히 쉬운 일본 국기나 삼색기는 무척 쉬워 보이기는 하지만 문장이 들어가거나 특별한 의미가 추가돼 바뀐 국기를 그려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많은 국기를 한자리에서 함께 만날 수 있는 곳은 아무래도 올림픽 같은, 나라를 대표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체육대회일 것 같다. 거기서도 상위 입상자에게는 메달과 함께 국기가 게양되고 우승국은 국기와 함께 국가(國歌)까지 울려퍼진다. 선수나 참가한 관객들은 감격스러운 장면이다. 올림픽이 국가 대항전이기 때문에 개인의 영광은 물론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큰 힘을 보탠 '영웅'들에게는 걸맞는 상을 별도로 국가 이름으로 주기도 한다.



이 책 『펄럭이는 세계사』는 “상징의 기원을 찾아 떠나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여행”이라는 설명적 상징성을 덧붙이고 있다. 고대 이후 인류가 국가를 세우고 자신들의 공동체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갖게 된 데에는 아마도 국기의 역할이 컸을 것 같다. 나라의 번영과 멸망을 가르는 전쟁에서도 깃발은 굉장한 상징성이 있고, 그 상징성에 따라 병사들의 단결을 꾀한다. 전쟁터에는 대체로 국기보다는 국기를 변형한 상징성을 갖는 깃발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아무튼 자신이 어느 나라 사람이고, 어디에서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를 명확하게 각인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 책의 저자 드미트로 두빌레트도 “깃발에는 꿈과 의지, 역사와 미래가 깃들어 있다. 깃발은 역사의 미니어처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지만 사실은 국기와 깃발에는 인류 수천 년의 역사가 얽혀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그 변천사를 따라가며 세계를 보는 방식을 뒤바꿀 책으로 지목되는 이유다. 이 책에 200가지가 넘게 수록된 다양한 국기와 상징 속에는 과거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변화의 힘이 깃들어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는 1994년 월드컵 경기를 중계하는 텔레비전 화면에서 우연히 보게 된 국기에 대한 특별한 인상 때문에 국기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다고 밝힌다. 당시 소년이었던 저자는 수십 년 후 우크라이나의 내각 장관이 된다. 정치인이자 기업가가 된 그가 무한한 지식과 사랑을 담아 이제는 깃발 아래에서 소란스럽고 치열하게 벌어졌던 인류의 여정을 책으로 엮어냈다. 깃발의 역사, 그리고 정치와 문화적 상징을 탐구하기 시작한 저자는 전 세계 국기에 자주 등장하는 상징체계를 찾아 그 패턴의 기원과 전파 과정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흥미롭게 이 책에서 풀어낸다.

혁명가의 이성과 마음에 불을 지피며 세계지도를 재편한 삼색기, 제국주의의 물결을 타고 지구 반대편에도 가닿은 영국의 유니언잭, 거대한 공산주의 블록을 견고하게 쌓은 오각별. 역사 속 수많은 장면을 완벽히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색과 무늬의 의미를 알아두면 처음 보는 국기에서도 그 나라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책의 저자 드미트로 두빌레트는 우리나라와의 특별한 인연에 대해서도 책의 앞 부분에서 언급한다. "나와 한국을 깊이 연결해준 것은 다름 아닌 태극기였다. 태극기는 미학적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철학과 역사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어 볼수록 빠져들게 된다. 더구나 점령군에 맞서 저항했던 한국의 지난날은 우크라이나인인 나로서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한복판에서 휘날렸던 태극기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다."(p.11) 

저자는 최근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도 부연 설명한다. "최근 비상계엄 선포의 여파로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가 열렸다는 뉴스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분노한 젊은이들이 태극기가 아니라 인터넷 밈과 가상 단체의 상징이 담긴 깃발을 들고 시위에 나섰기 때문이다. '만두 노총', '화난 고양이 집사 연맹', '일정이 밀린 사람 연합'(집회 나오느라 약속을 다 취소했다는 뜻)처럼 이색적인 깃발들이 인파 속에서 저마다 유쾌하게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국의 집회는 목숨을 걸고 일장기 위로 태극기를 덧칠한 스님부터 인터넷 밈이 그려진 깃발과 케이팝 댄스로 무장한 풍경에 이르기까지, 지난 세기 동안 한국 사회가 얼마나 크게 변화하고 발전해왔는지 선명히 보여준다."고 기술하고 있다.

저자가 깃발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일은 앞서 언급한 대로 월드컵 중계를 시청하면서부터이다. 텔레비전 한구석에 자리한 스코어 옆의 알록달록한 사각형이 어째서 자신에게 그런 따뜻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는지 지금도 설명할 길이 없고, 당시에는 그 깃발 뒤에 숨은 또 다른 세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고 털어놓는다. 심오한 뜻을 갖고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지만 미국과 경기를 펼친 스위스의 국기가 직사각형이 아니라 정사각형의 모양이라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또 이탈리아와 아일랜드가 만난 그다음 경기에서는 이 두 나라가 국기가 몹시 유사하다는 점에 놀라기도 했다. 

물론 월드컵 경기를 시청하면서 불거졌던 놀라움과 의외적 발견을 가슴에 안은 채 자라면서 국가의 장관 자리도 맡고, 기자로 글도 썼으며 여러 사업을 벌이며 바쁘게 움직이는 바람에 잊고 있다가 최근 다시 그때의 충격에 대한 오랜 숙원 해소에 나서서 이 책을 집필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 책은 세계의 국기를 크게 구별하는 방법으로 따로 분류하지 않고, 세계의 국기를 비슷한 상징과 정체성 별로 모두 17장(章)에 걸쳐 각 국의 국기에 대해 펼쳐보인다. 국기의 상징, 제작 원리, 그리고 나라의 정체성을 상징하고 색과 선, 면으로 구성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문의 문장을 사용하기도 한다. 지금의 각 나라 국기는 대개 근대 이후 확정된 국기들이다. 나라의 상징이 될 요소들을 강렬한 이미지를 표현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에 기초하는 듯하다. 

우리는 많이 접하지 못했지만 저자는 특이한 예로 태평양의 아름답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비키니 환초를 먼저 끄집어낸다. 1954년 미국은 이곳에서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을 실행했다. 이때 일어난 폭발로 섬들이 그대로 증발했고 인근 원주민은 방사능에 피폭되면서 미국은 국제사회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바로 이곳, 비키니 환초의 깃발은 미국 국기와 닮아 있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오른쪽 상단에 그려진 검은 별 3개는 폭탄이 터지며 날아간 섬들을 은유한다. 더욱 눈에 띄는 점은 하단에 마셜어로 “모든 것은 신의 손에 달렸다”라고 적힌 문구다. 이것은 미국이 폭탄 실험을 위해 원주민 167명이 이주하도록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하자, 비키니 환초의 지도자가 내놓았던 대답이라고 한다. 수십 년 전 원주민이 겪어야 했던 아픈 역사와 미국이 저지른 과오가 깃발에 박제되어 있는 것이다.

비키니 환초의 국기를 둘러싼 이 인상적인 이야기만이 아니라, 세계의 국기에 담긴 기상천외한 역사는 무궁무진하다고 저자는 밝힌다. 캐나다는 국기에서 대영 제국의 흔적을 지우고 완전한 주권국으로 거듭나고자 단풍잎 국기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여야 간 극심한 대립을 겪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 아프가니스탄은 오랜 내전으로 20세기 들어 열아홉 번이나 국기를 바꿔야 할 만큼 격변의 시기를 거쳐야 했다. 이와 함께 적도기니에서는 광기에 휩싸인 독재자가 나라를 쥐락펴락하며 기이한 국기를 만들어내는 사건도 있었다고 밝혀낸다. "깃발은 한 나라의 정치, 지리, 역사를 보여주는 미니어처"라고 저자가 강조한 까닭이다. 저자는 국기의 변화는 그 나라가 평화로웠는지 혹은 굴곡 많았는지 말해준다고 지적한다. 격동 속에서도 살아남은 깃발 한 장은 수백 년의 역사를 묵묵히 증언한다는 것이 저자가 국기를 살펴보며 탐구한 결론이다.


앞서 저자가 한국 독자들에게 쓰는 인삿말을 책 앞 부분에 썼던 것 중 2024년 12월 3일, 대한민국에 갑작스런 계엄령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이때의 상황을 저자와 함께 다른 시선으로 기술한 내용이 출판사 소개글에 나온다.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민들은 국기 대신 직접 만든 깃발을 들고 시위에 나섰다. 이유는 다양했다. 특정 정치 세력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 우리 같은 사람도 여기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함께하는 이들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아니면 그저 재미있게 즐기고 싶어서. 시위가 확산되면서 그 의미는 더욱 깊어졌다. 각기 다른 깃발이 하나둘 모여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고, 이는 시대를 역행하는 정부를 향한 민주적 분노이자 연대의 상징이 되었다. 집회가 열리는 날이면 이색적이고 웃음을 자아내는 깃발을 촬영해 공유하는 문화가 생겨났고, 날이 갈수록 정교하고 일사불란해지는 기수들의 움직임이 탄식과 함께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깃발이 지닌 힘을 증명하는 사례로 저자와 출판사는 수없이 보고 들었다. 역사적으로는 더 많은 사실을 알아냈을 터이다. 저자는 시리아 이야기도 꺼낸다. 13년간 이어진 시리아 내전이 반군의 승리로 끝났을 때,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국기를 교체하는 것이었다. 또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반대하는 러시아 국민은 국기의 붉은색 줄무늬를 흰색으로 바꾼 깃발을 들고 시위에 나섰는데, 전쟁을 지지하는 세력은 나치 깃발을 연상시키는 Z 표식을 사용하여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불의와 핍박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마다 깃발 아래 모여 저항하고 연대하며 새로운 시대를 선언해왔다. 바람 잘 날 없는 격동의 시기에 출간된 이 책은 전 세계 국기에 수놓인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돋보기 같은 책이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정부의 내각 장관을 역임했으며 30년 넘게 국기와 깃발을 연구해온 저자 드미트로 두빌레트가 중요한 역사의 한 장면들을 세심히 골라 인류의 뜨거웠던 지난날을 펼쳐 보인다. 혁명과 함께 탄생한 삼색기부터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유니언잭,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룬 태극기를 비롯해 백합이나 독수리처럼 익숙한 상징에 깃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역사를 해석하는 힘을 얻게 된다. 길거리 어디서든 마주치는 깃발의 화려한 색과 무늬 속에서 역사적 순간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인간은 정보가 시각적일수록 더 쉽게 인지하고, 더 오래 기억한다고 한다. 이 책 『펄럭이는 세계사』는 역사서라면 으레 그렇듯 기념비적인 사건을 연대순으로 설명하지 않고, 각 장을 대표하는 디자인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전 세계 국기에 자주 등장하는 상징체계를 찾아 그 패턴의 기원과 전파 과정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흥미롭게 풀어내는 것이다. 프랑스 삼색기는 혁명가의 이성과 마음에 불을 지피며 세계지도를 다시 그렸고, 영국 유니언잭은 제국주의의 물결을 타고 지구 반대편에도 가닿았으며, 오각별은 거대한 공산주의 블록을 견고하게 쌓았다. 역사 속 수많은 장면을 완벽히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색과 무늬의 의미를 알아두면 처음 보는 국기에서도 그 나라의 역사를 엿볼 수 있게 된다.

특히 이 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국기는 물론이고 해학과 풍자를 섞어 만든 깃발까지 200개 이상의 이미지를 수록해 세계사의 흐름을 한눈에 펼쳐 보인다. “깃발에는 꿈과 의지, 역사와 미래가 깃들어 있다”고 이다혜 기자가 보탠 추천의 말처럼, 거리 곳곳에서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는 깃발 하나에도 수천 년의 역사가 얽혀 있다. 그 속에 깃든 과거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변화를 구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며, 세계를 보는 방식을 뒤바꿀 책이기에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저자 : 드미트로 두빌레트(Dmytro Dubilet)


우크라이나 드니프로에서 태어나 키예프 대학교와 런던 비즈니스 스쿨에서 공부했다. 기자와 은행가로도 일했고, 2017년 IT 회사인 핀테크 밴드를 공동 설립한 후 모노 뱅크를 출시하였으며, 2019년부터는 젤렌스키 정부의 내각 장관을 지냈다. 구글과 《파이낸셜 타임스》가 선정한 뉴 유럽 100인(The New Europe 100 list)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세계 곳곳의 국기와 깃발을 연구하며 알게 된 역사를 재치 있게 풀어낸 『펄럭이는 세계사』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이 일어나기 6개월 전에 처음 출간되었다.


역자 : 한지원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텍사스대학교에서 커뮤니케이션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좋은 책을 읽고 발굴하고 번역하며 살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코카인 블루스』, 『테스토스테론 렉스』, 『말라바르 언덕의 과부들』, 『멘탈의 거장들』, 『편집 만세』, 『책을 먹는 자들』 등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