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회사 3부작
임성순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뷰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책 『구원』은 표제어부터 종교적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기독교적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독자들에게 '구원'(救援)'이란 단어의 뜻을 명확히 이해하면 좋겠다고 제안해 본다. 구원이란 기독교 등 서양의 종교에서 주로 쓰던 말이다. 국어사전은 ①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 줌. ② [기독교] 인류를 죽음과 고통과 죄악에서 건져 내는 일.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 임성순이 〈작가의 말〉에서 쓴 대로 소설을 쓴 것은 '이상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작가의 말'이 두 번 씌어 있다. 하나는 초판을 낼 때 쓴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개정판'의 〈작가의 말〉이다. 저자는 모든 작가들이 그렇듯이 첫 작가의 말에서는 작품의 내용에 집중했다. 작품의 주인공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가장 오래된 고전 중 하나이자 베스트셀러(성경을 말하는 것)에서 송두리째 별려 왔음을 밝힌다. "고급스럽고 고상해 보이는 부분들은 지난 2,000년간 그분(예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든 학문과 생각들,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낸 딜레마들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 작품은 종교의 입장이나 교리를 대변하기 위해 쓴 게 아니라, 교리나 이론, 철학이 아닌 '사람'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새로 쓴 작가의 말은 뉘앙스가 다르다. 정확하게는, 작품 내용에 대해 변화한 저자의 의식이나 신념에 일어난 변화를 덧붙이고 있다. "당시에는 생각했습니다. 안일하게도. 이미 일어난 일일 뿐이라고. 세상은 분명 더 나아지고 있을 테니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잔혹한 현실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낙관적이었던 모양입니다. 일어났던 일이라 믿었던 비극이 최근 다시 일어났거나, 또다시 일어나려 하고 있으니까요.(p.361) 새로 쓴 저자의 말 주제는 '이상한 시대'라는 의문을 담고 있다. 과거 이뤘다 믿었던 시대정신이 다시 시험대에 오르고, 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가치관은 극단으로 치닫는 시대라는 저자의 지적은 묘하게도 우리 사회에 다시 일어날 일이 아닌, 적어도 저자가 그렇게 믿었던 일이 다시 일어났다는 뜻이다.



저자 임성순은 본격 문학과 미스터리 스릴러의 절묘한 접합으로 주목받는 작가이다. 저자는 만화영화 같은 포복절도할 스토리와 기법, B급 영화 같은 키치적인 유머 속에 순문학의 깊이 있는 문제의식을 담은 신(新) 하이브리드 문학으로 한국 문학의 스펙트럼을 더욱 넓히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독창적인 소재와 날카로운 문장으로 우리 사회를 파헤치는 소설가로 더 알려져 있다. 모두 정확한 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 임성순이 쓴 말은 아마도 지난 겨울 12·3 비상계엄 선포를 지목하는 것으로 독자에게는 읽힌다. 의료계 공백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전직 의사였던 범준. 그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자들을 돕는 회사를 설립해 그들의 장기를 시한부들에게 이식해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을 한다. 그러던 그의 앞에 과거 만난 적 있던 신부(神父) 현석이 나타난다. 그들이 처음 마주쳤던 것은 15년 전 내전이 끊이지 않던 아프리카에서였다. 의술로 사람들을 구원하려 의료봉사를 하러 온 젊은 의사 범준과, 신에게 헌신하며 종교 활동을 통해 사람들을 살피고 돌보고자 주임신부를 담당하게 된 신부 현석은 모두 거룩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만의 이상적인 구원론을 펼치고자 도달한 그곳에서 그들은 자신 내면에 숨겨진 모순과 마주하게 된다.

어느 날 노동자 한 명이 현장에서 사고로 병원으로 실려 왔다. 범준이 수술을 맡았다. 범준에게 수술 명령이 떨어졌다. 환자를 본 범준은 그러나 당혹스러웠다. "가슴을 열자 환자의 상태가 한눈에 들어왔다. 철근은 심장을 아슬하슬하게 빗겨나 있었지만, 무명동맥을 찢었다. 외막뿐만 아니라 내막까지 손상된 동맥에서는 심장이 뛸 때마다 울컥울컥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꽂힌 철근을 빼지 않고 절단해 온 응급 요원의 처치는 훌륭했다. 이 상태라면 빼는 즉시 1분 내에 출혈 과다로 사망할 터였다."(p.45)


범준은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찢어진 무명동맥 주변의 혈류를 차단하고, 손상된 혈관을 벗겨낸 후, 인공 혈관을 봉합하면 환자를 살릴 수 있었다. 수술 경험이 많은 레지던트 3, 4년차라면 어렵긴 해도 불가능한 수술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피로 얼룩져 미끈거리는 동맥을 얼마만큼 세기로 단단히 잡아야 하는가부터 레지던트 1년 차인 그에게는 경험해본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시간도 그의 편이 아니었다. 환자 상태가 계속 악화되면서 혈압이 지나치게 떨어지고 있다. 범준은 심호흡을 하고 '겸자'를 들었다. 겸자의 끝이 가늘게 떨렸다. 시선을 마주치자 주임 간호사는 미소를 지었다. 처치가 훌륭하다는 뜻이었다. 그녀 역시 범준이 집도하는 첫 수술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풋내기 이사에게 능숙한 간호사만큼 의지되는 존재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범준이 필요한 수술 도구를 말하기도 전에 넘겨주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처음 해보는 수술치고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과장이 들어와 처치를 잘못했음을 알아챈다. 범준이 어려움을 겪었던 겸자의 끝을 너무 꽉 잡아맸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과장은 범준의 실수를 탓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집도했다고 말하겠다고 한다. 이날 이렇게 범준은 의료사고로 한 생명을 죽게 한다. 그러나 그 죽은 생명의 장기로 세 사람의 목숨을 살린다. 과장은 범준의 실수를 비밀에 부치고, 세 사람의 생명을 살린 사실만 세상이 떠들썩하게 드러낸다.

철근을 뽑아낸 사내의 심장은 다시 뛰었지만, 환자의 의식이 돌아오지 못했다. 우려했던 대로 과다 출혈과 심정지로 뇌세포에 제대로 산소가 공급되지 못한 것이다. 범준은 틈만 나면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그 환자를 보러 갔다. 환자의 곁은 중학생 딸이 지키고 있었다. 몇 년 전 뺑소니로 어머니를 잃었다는 열넷의 여자아이는 범준이 찾아오면 기대가 가득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아버지가 언제 깨어나느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범준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차라리 침대에 누운 환자가 자신이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는다. 이제 문제는 환자의 뇌사 상태를 검진해 선언하는 일이다. 신경외과에서 검사를 시작했고, 잠정적인 결론이 나온다. 남은 것은 보호자의 동의를 얻어 정식으로 뇌사자의 처리 절차를 밟아가는 것뿐이다. 


수술 중 실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법도 했지만 스태프들이 입을 다물었으므로 과다 출혈에 대한 진실은 침묵 속에 묻힌다. 그는 그저 응급실에 너무 늦게 도착해 목숨을 잃어야 했던 수많은 안타까운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과장이 수술실을 나가며 말했던 자신이 집도한 것으로 하라는 한마디의 숨은 의미를 그제서야 범준은 깨닫는다. 과장은 이미 빈맥이 일어났을 때부터 환자의 회생 가능성이 작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뇌보다 심장이 산소 없이 오래 버틴다. 그래서 과장은 일치감치 포기한 채 심장만을 되살린 것이다. 보호자인 여자아이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지만 어린 여자아이가 사실의 정황을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것이다.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할 뿐 뇌사로 치료를 계속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점은 의사로서 잘 안다. 때문에 어린 소녀에게 보호자의 삶을 위해서라도 엄청난 병원비 대신해 장기 이식을 위해 기증을 권하기도 한다. 

과장과 함께 범준이 갔던 곳은 6인용 병실이다. 회진 시간이 아닌데도 찾아온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과장은 자신을 바라보는 환자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가장 안쪽의 창가에 누워 있는 한 부인에게로 간다. 

"오늘은 좀 어때?"

방금 전까지 장기 기증을 권하던 목소리와 너무 다른 말투에 범준이 오히려 민망할 지경이었다. 살집이 있는 창백한 안색의 아주머니가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자 침대와 창문 사이의 보호자 침대에서 두 개의 작은 사람 형상이 따라 일어난다. 아이들이다. 일곱 살과 다섯 살 남짓의 아이들은 행색이 꾀죄죄하다. 목에는 씻지 않아 검은 줄이 있고, 입은 옷은 언제 빨았는지 다섯 살짜리 옷소매는 흰 콧물 자국으로 얼룩덜룩하다. 과장이 환자에게 다가가 '좋은 소식'이라며 전한다.

"기증자 찾았어. 내일 검사하고, 몸 상태가 나쁘지 않으면 바로 수술 잡자고."


과장의 눈에는 노골적인 혐오감이 드러났지만 환자 아주머니는 기쁨에 겨워 눈치채지 못한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연신 굽실거릴 뿐이다. 벌레를 내려다보는 듯한 과장의 시선과 아주머니의 비굴함이 만들어내는 대비가 너무나 극적이다. 범준은 애써 시선을 돌린다. 어리둥절한 막내 아이는 그 상황에서도 연방 흘러내리는 콧물을 소매로 닦고 있다. 병실은 나온 과장은 기분 나쁘다는 듯이 복도에 비치된 손소독제로 손을 닦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범준의 눈빛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투로 과장은 말한다. "자넨 저 아줌마를 죽일 수 있나?"

"예?"

"이제 자네가 돌아가 수술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면 저 아줌마는 죽겠지."

갑자기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머릿속이 윙윙거리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네의 자기만족이, 그 잘난 윤리가 저 가족을 희생시킬 만큼 가치 있나?"

열린 병실 문 너머로 아주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아주머니는 아이들과 얼싸안고 엉엉 울고 있었다. 서럽게 우는 큰아이 옆에서 막내는 목을 감은 엄마의 팔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숨이 막힌 것은 범준 자신이었다. 


의술이 인술이라고? 개뿔. 의술은 기술이다. 수십, 수백만 명의 목숨을 발판 삼아 지금까지 발전한 거야. 알량한 도덕 나부랭이가 의학 발전에 기여한 것은 없어. 한 명을 실수로 죽이면 그렇게 배운 기술로 열 명을 살리면 돼. 그게 의학의 도리지.(p.58)


저자는 이 소설에서 인간 본성을 진중하고 깊이 있게 파헤친다. 모순으로 이지러진 세계에서 인간은 얼마만큼 악해질 수 있을까. 성(性)의 세계를 대변하는 신부 박현석과 속(俗)의 세계를 표상하는 의사 최범준. 두 명의 인물은 처음에는 선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제3세계에서 마주한 참혹한 광경을 겪으며 변화를 맞이한다. 이들에게 시시각각 주어지는 문제들은 독자들 역시 자신을 반추해 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독자는 기대한다. 저자는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비합리적인 사회와 시대를 향한 묵직하고 처절한 메시지를 작품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출판사 측이 제공한 작품 소개글에 이 말이 나온다. "각자의 부끄러움을 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그곳에서의 기억은 끝없이 그들을 괴롭힌다. 그 지옥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범준과 현석은 무엇을 목격하고 느꼈는가. 이처럼 이들의 포부가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이야기는 선과 악이 뒤섞인 모순적인 사회를 고발한다. 소설은 홀로코스트, 불법 장기 적출 및 이식, 자살 문제 등과 같은 사회적 사안에서부터 개인의 윤리와 도덕에 기대는 사소한 문제들까지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러한 도덕적 딜레마와 성과 속의 혼재를 통해 우리 안에 숨겨진 비열한 면모를 통감하게 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유리창 너머의 저 신부는 어쩌면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그곳의 기억을 공감하고 이해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도 15년 전 그곳에 남았을 터였다. 그리고 자신처럼 그 지옥을 어떻게든 겪어 나왔으리라. 그는 무엇을 보았던 걸까? 그리고 그 이후에 삶을 어떻게 견뎠을까? 그 기억이 그를 괴물로 만들었던 것일까? 마치 자신처럼.(p.156)


저자 : 임성순


1976년 전라북도 익산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학창시절 대부분을 경기도 안양에서 보냈다. 어릴 때부터 공부와는 담을 쌓고 만화, 영화, 게임 등 늘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았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처음 접한 디지털 1세대이자 미완성형 오타쿠로서 작가를 꿈꾸었으나 대학 시절 영화 「친구」의 곽경택 감독의 영향으로 연출부 생활을 하게 되어 여러 작품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였다. 장편소설 『컨설턴트』로 제6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자본과 인간의 관계를 그린 「회사 3부작」과 제2차 세계대전 중 선상 반란을 소재로 한 『극해』, 40대 기러기 가장의 은밀한 즐거움을 그린 『자기 개발의 정석』과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SF 장편소설 『우로보로스』 출간하였다. 2018년 단편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포식자들』로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수상하였으며, 독특한 상상력과 능숙한 스토리텔링으로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늘 새로운 소재와 주제로 화제를 모았다. 지금도 늘 주류가 아닌 주변부에서 투철한 B급 정신으로 세련된 아큐(阿Q)의 삶을 살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