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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불시착』에서는 백석 시인이 이상을 만나 시담을 나누고, 윤동주와도 시를 통해 교감한 장면을 그렸다. 노천명 시인의 시 〈사슴〉과 백석의 시집 『사슴』에 얽힌 스토리와 백신애 소설가와의 가슴 아픈 로맨스도 다뤘다. 손기정 마라토너와 깊은 우정을 나눈 뒤 함께 압록강철교를 달려서 건너는 장면도 등장시켰다. 홍찬선 작가는 『백석의 불시착』의 현장성을 살리기 위해 백석의 숨결이 스쳐 간 지역을 직접 답사했다. 백석이 유학했던 일본 동경의 청산학원(대학)과 졸업여행을 다녀온 이즈반도, 백석이 1940년부터 광복될 때까지 살았던 만주의 신경(현 심양) 안동(현 단동)과 함흥고보학생을 인솔하고 수학여행을 갔던 여순의 203고지 등을 다녀왔다. 백석이 조선일보 기자 시절 다녔던 광화문과 소공동,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뚝섬 등도 빼놓지 않았다.
하지만 『백석의 불시착』은 본문에서 김영한에 관한 얘기는 하나도 다루지 않았다. “김영한의 자서전 『내 사랑 백석』을 정교하게 읽고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과 비교해본 결과, 『내 사랑 백석』에 나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니라 김영한의 창작물”이라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김영한의 자서전이 허구라는 내용은 이 책의 〈부록1. ‘백석과 자야의 러브스토리’는 김영한의 소설이었다.〉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김영한이 『내 사랑 백석』에서 주장한 내용은 창작소설이거나 견강부회한 것이 많아 사실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① 1936년 가을, 함흥의 음식점 함흥관에서 영생고보 영어 선생이던 백석 시인을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고, 백석 시인이 자야(子夜)라는 호를 지어주었으며 ② 김영한은 1938년 말부터 1939년 말까지 서울 청진동에서 백석과 동거했고 ③ 백석의 대표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서 나타샤가 김영한 자신이며 백석의 시 〈바다〉 〈내가 외면하는 것은〉 〈힌 바람벽이 있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등에도 자신이 등장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백석의 고향인 정주와 광복 후에 살았던 평양, 그리고 공산당의 숙청으로 정배(定配) 당한 뒤 죽을 때까지 거주했던 함경도 삼수(三水)의 관평농장 등에 관해서도 소설로 재현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홍찬선 작가는 『백석의 불시착』을 쓰게 된 동기와 취재과정, 그리고 2년 동안 백석이 살았던 곳을 직접 답사하면서 밝혀낸 결과를 이 책에 가능한 한 담았다.

해방 직후 그는 조만식의 비서를 지내며 솔로호프의 『조용한 돈강』 등을 번역하고 김일성과도 가끔 만났다고 전해진다. 한동안 김일성 대학에서 강의까지 하던 그는 6·25 전쟁이 일어나자 중국의 한인촌에 머물다가 휴전후에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숙청을 당해서 고향 가까운 협동농장에서 시달려 오다가 1996년에 숨을 거두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역시 앞서 인용한 『북한문학사전』에 게재된 내용이다.
1938년 봄이었다. 봄이 늦게 오는 함흥에도 진달래가 만발했을 때니 4월 중하순쯤이었을 것이다. 첫 시집 출판기념회 등으로 바쁘게 지낸 천명이 느닷없이 영생고보로 나를 찾아왔다. 얼굴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띠었다.
“천명, 무슨 일이야? 편지나 전보도 없이, 갑자기 함흥에 나타나다니.”
“내가 흰돌을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어, 동남풍을 몰고 왔지.”
“뭐야? 뜬금없이.”
“흰돌의 별명을 사슴에서 당나귀로 바꿔 부르는 것을 상의하려고.”
“웬 당나귀?”
“시치미를 떼도 소용없어. 내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보고 그렇게 정했으니까.”
“아, 그 시?”
나는 1937년 겨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란 시를 썼다. 연이와 배신우가 도둑결혼한 고통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나는 시 초고를 천명에게 보여줬다. 고통은 나누면 줄어들고 기쁨은 같이 즐기면 불어난다는 말처럼, 배신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였다.(p.15, 2권) - 「12. 여문인 3인방」 중에서

다음의 내용을 소설 속에 품어 형상화시키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꿈을 바탕해 2년 여의 각고의 노력으로 소설로 엮어낸 것은 평가할 수 있을 것으로 독자는 기대한다. 다음의 내용은 저자가 〈부록1. ‘백석과 자야의 러브스토리’는 김영한의 소설이었다.〉(2권)는 제목으로 별도 첨가했다.
- 나는 김영한이라는 기생과 깊게 사귀거나 동거한 적이 없다
- 김영한에게 ‘자야(子夜)’라는 호를 지어주지도 않았다
- 김영한이 쓴 『내 사랑 백석』이란 책은 김영한의 ‘창작소설’이다
- 홍 작가가 김영한이 왜곡한 사실(史實)을 바로잡아 나의 억울함을 풀어달라
*백석의 눈과 생각으로 장편소설을 썼다
- 백석의 등단 시 〈정주성〉은 진주성을 묘사한 것이다
- 백석의 첫 시집 제목을 『사슴』으로 지은 것은 배달겨레를 상징한 것이다
- 백석의 대표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나타샤는 박경련이다
- 백석이 1940년 만주로 간 것은 망명이었다
- 백석은 이상과 윤동주를 만나 시를 토론했다

또 저자는 백석이 살았단 곳을 직접 답사했다. 북한에는 들어갈 수가 없어 아쉽게 중단했지만 앞으로 여건이 조성될 경우 저자 홍찬선이 취재를 계속해 시리즈 마지막 3권을 완성시킬 것을 독자들에게 약속하고 있다. 이번 작품에는 다음의 곳을 중점적으로 답사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1, 2권을 작성했다고 밝히고 있다.
- 백석이 유학했던 일본 동경의 청산학원대학과 졸업여행을 다녀온 이즈(伊豆)반도 등
- 백석이 조선일보 기자 시절 다녔던 광화문과 소공동과 뚝섬 등
- 백석이 1940년부터 광복될 때까지 살았던 만주의 신경(현 심양) 안동(현 단동)과 함흥고보학생을 인솔하고 수학여행을 갔던 여순의 203고지 등
- 함흥은 직접 가지 못했지만 영생고보 영어선생 재직 때 자료가 있어 포함시킴
백신애의 노래는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힘든 세상을 어렵게 살아온 체험에다 여성 특유의 애절함이 묻어 나왔다. 경산군 안심면 반야월 과수원에 살면서 뼈저리게 느꼈던 농촌의 가난함이 배었고, 만주와 시베리아를 여행하면서 만났던 동포들의 고통스러운 삶이 스며있었다. 〈아서라 세상사〉는 내가 함흥에 있을 때, 연이와 배신우와의 도둑결혼을 안 뒤 가슴 아프게 불렀던 바로 그 노래였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이란 시에서 나는 “〈아서라 세상사〉라도 들을/ 류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고 절규했다. 내가 겪었던 아픔과 백신애가 체험했을 고통이 겹치면서 나는 울컥했다. 그 모습을 백신애에게 들켰다.
“아니, 동생. 이 좋은 날에 왜 눈물을 보이고 그러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니긴? 눈알이 빨갛고 어깨가 들썩거리는데.”
“누님,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 건가요?”
나는 백신애의 품에 안기며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다.(p.116-117, 2권) - 「16. 백신애」 중에서

“『사슴』을 밤새워 필사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베껴 쓰는 동안 무척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만든 필사본을 늘 갖고 다니면서 선생님의 시를 읽고 외웠습니다.”
윤동주는 그렇게 말하며, 가방에서 『사슴』 필사본을 꺼내 나에게 보여주었다. 필사본은 표지부터 끝까지 『사슴』 그대로였다. 아니 한 자 한 자 정성껏 쓴 글씨는 활자보다 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대단한 열정이었다.
“내 『사슴』을 그렇게 사랑한다니 고맙네.”
“제가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동시를 쓰던 제가 『사슴』을 만난 뒤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쓸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래, 『사슴』에서 어떤 시가 마음에 들었나?”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모닥불〉이었습니다.”
말을 마친 윤동주는 〈모닥불〉을 암송했다.(p.92, 2권) - 「15. 윤동주」 중에서
“조만식 선생님의 비서로 일하는 홍사민이라고 합니다. 선생님께서 백 시인을 모셔오라고 하셔서.”
“고당 선생님께서, 왜 저를?”
“자세한 것은 직접 말씀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한시가 급하니 반드시 모셔오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래요? 고당 선생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면, 서둘러 가십시다!”
나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길을 재촉했다.
“백 시인, 어서 오게!”
“선생님, 이렇게 불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백 시인, 내 곁에서 나를 좀 도와주게!”
“물론입니다. 제가 많이 부족하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맙네!”
나는 조만식 선생이 위원장으로 있는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외사과 소속으로 통역 업무를 담당했다. 고당 선생은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 사령부 군인들과 자주 만났다. 나는 그때마다 고당 선생을 모시고 통역으로 참석했다. 8월26일, 평양에 들어온 소련군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장군과의 첫 만남은 비교적 우호적이었다.(p.210, 2권) - 「20. 조만식과 김일성」 중에서

처음 간 곳은 장춘역이었다. 백석이 이곳에 처음 내렸을 때는 신경역, 그때 역 주변은 이렇다 할 고층건물 없이 한산했을 것이었다. 신경은 일제가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허수아비 황제로 삼아 세운 만주국의 수도였다.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던 곳에 수도를 만들고 남만주철도가 이곳을 지나도록 했다. 남만주철도는 일제가 간도를 수탈하고 대륙을 침략하기 위해 대련과 여순에서 안동을 거쳐 신경과 하얼빈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뒤 청과 1909년, 간도협약을 맺어 간도를 넘겨주는 댓가로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빼앗았다. 우리 땅인 간도를 넘겨주고 간도침략의 고속도로를 만든 것이었다. 을사늑약이 원천무효이기 때문에 간도협약도 원천무효이지만, 힘이 폭력이라서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1940년 1월, 살을 에는 만주 추의는 백석을 꽁꽁 얼어붙게 했을 것이다. 지금은 6월, 한낮은 땀이 날 정도로 더웠다. 백석이 그때 느꼈을 황량함은 없었다. 다시 지은 장춘역은 입장료를 내야 겨우 속을 보여준다며 위압적으로 서 있었다. 역 앞은 넓은 대로를 끊임없이 오가는 자동차 물결과 높은 빌딩 숲으로 바뀌었다. 추위와 외로움에 떨었을 백석을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장춘역에서 '동삼마로 시영중택 35번지 황씨방'으로 향했다. 1940년 서울에서 발간된 문인주소록에 기재된 백석이 살던 집 주소였다. 하지만 당신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곳 동삼마로 33번지부터 42지번까지는 주상복합건물로 재개발됐다. 재개발됐을 때는 장통종합대시장이란 이름이 건물 외벽에 붙었다. 지금은 그 이름도 지워졌다. 삼거리쪽 모서리 1층에 항애대약방이 있어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시인들이 빙 둘러서서 백석의 시 「북방에서-정현웅에게」를 낭독했다. 그가 신경에 와서 처음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시다.(p.258, 2권) - 부록 2 〈「북방에서」부터 「나 취했노라」까지 백석의 만주 현장을 가다〉 중에서
저자 : 홍찬선(덕산 德山 洪讚善)
1963년 충남 아산군 음봉면 산동리 뫼골에서 태어나 월랑국민 음봉중 천안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한국경제신문 동아일보 머니투데이에서 28년 동안 경제기자로 지내면서 서강대 경영대학원(MBA)을 졸업하고 서강대 경영학과 박사과정(재무관리전공)을 수료했다. 일본 주오(中央)대학교 기업연구소 객원연구원을 지냈고 중국 칭화(淸華)대학교 경제관리학원 고급금융연수과정도 다녔다. 머니투데이방송(MTN) 보도국장, 머니투데이 북경특파원과 편집국장을 지냈다. 100세 시대를 준비하려고 2017년 7월에 자퇴(스스로 은퇴)해 시인과 소설가와 희곡작가 되고, 동국대 정치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두 딸과 두 아들을 두었다. 『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2016년 가을호), 제1회 자유민주시인상 최우수상 수상(2021), 제1회 서울시인협회상(2023) 등을 받았다.
소설집 『그해 여름의 하얀 운동화』와 시집 『틈』 『남한산성 100처100시』 『가는 곳마다 예술이요 보는 것마다 역사이다』 『독도연가』 『서울특별詩 1, 2, 3, 4, 5』 등 20권을 출간했다. 기타 경제서적으로 『주식자본주의와 미국의 금융지배전략』 『패치워크인문학』 『임시정부 100년 시대 조국의 기생충은 누구인가』 『20대 대통령을 위한 경제학』 등의 저서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