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백석의 불시착 세트 - 전2권 - 진짜 백석의 재발견
홍찬선 지음 / 스타북스 / 2025년 2월
평점 :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윤동주이다. 설문조사 결과다. 그리고 한국 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백석이다. 이 책 『백석의 불시착』은 신문기자 출신의 작가 홍창선이 쓴 소설 작품이다. 시인이기도 한 저자 홍찬선은 백석의 시에 매료된 분인 것 같다. 사실 백석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의 우리 시인으로서 꽤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윤동주가 찾아와 시에 관한 대화를 나눈 사이다. 윤동주가 1917년생인데, 백석은 1912년생이니 다섯 살이 많은 나이다. 한참 시인을 꿈꾸던 윤동주가 어느 날 백석의 시를 필사한, 너덜너덜한 노트를 들고 찾아왔다고 한다. 그때 윤동주는 아마 백석이 처음이자 일제강점기 시기 마지막 낸, 시집 『사슴』을 구할 수 없어 필사해 읽고 쓰고 했던 모양이다. 그의 정성에 감동했는지 이들은 이날 시에 관한 많은 토론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인 백석은 해방 이후 북한에 있었기에 분단과 전쟁을 겪은 후 다시 서울로 오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적대 국가에서 활동하는 바람에 우리 국민들에게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점이 있을 것 같다. 백석은 외모가 준수해 많은 여성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도 있다. 사실 사상의 문제로 북한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조만식 선생의 일을 돕기 위해 선생의 부름을 받고 한걸음에 달려갔다고 한다. 그러나 분단이 되고, 전쟁까지 겪었으니 서울로 올 수도 없었을 터다. 평북 정주군 갈산면 출신이니 굳이 서울로 올 특별한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시와 시인으로서의 백석은 일제강점기 이후의 소식은 별로 전해진 것이 없었던 듯하다.
그의 본명은 기행이며, 백석은 문단에 나오면서 사용하게 된 필명이다. 그의 부친은 한국 사진기술사의 초창기적인 인물로 〈조선일보〉에서 사진반장을 지냈으며 퇴임 후에는 낙향하여 정주에서 하숙을 경영했다고 알려진다. 백석은 개화한 집안의 분위기에 걸맞게 일찍부터 정규 신식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918년 오산 소학교에 입학해 1924년 졸업과 동시에 오산학교에 진학했다. 19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함과 동시에 조선일보사 후원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했다. 일본 도쿄의 청산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1934년 그의 나이 23세 때 귀국, 조선일보사에 입사했다. 그는 조선일보에 근무하면서 자매지 〈여성〉의 편집을 보던 중인 1935년 8월 31일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백석은 첫시집 간행 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의 영생여고보 교사로 있다가 1938년에는 교원직을 사임하고 서울을 거쳐 만주 ‘신경’으로 갔다. 이후 만주의 안동에서 세관업무에 종사했고, 해방 후 귀국하여 그의 고향 정주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 책 『백석의 불시착』은 세 권짜리 장편소설로 기획했다. 백석이 해방 이후 주로 북한에서 활동하고 머물렀기에 북한에서의 행적은 일부 알려진 것이 우리가 알 수 있는 거의 전부인 셈이다. 그것도 남북이 휴전 상태이니 왕래는 말할 것도 없고 편지도 오갈 수 없는 완전한 적대국으로 남아 있는 상태다. 이런 시대적 상황은 아름다운 시, 민족의식이 담긴 시를 발표해 같은 시대 시인·문인들로부터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백석에 대한 온전한 평가가 불가능하다. 특히 그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는 주로 우리말(토착어)과 우리 농촌 풍경이 날것 그대로 표현되는 절창으로 모더니즘 시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평가도 받았다고 한다. 백석은 시인이나 문인, 화가 등과도 잘 어울렸으며 훤칠한 키와 희고 빼어난 외모, 그리고 친화력 있는 성격으로 대인 관계도 원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 홍찬선은 우선 서울과 통영 등 국내는 물론 중국 연길시 등 백석의 행적을 찾아 갈 수 있는 모든 곳을 찾아 헤맸으나 정작 북한에 대한 정보는 크게 얻지 못했다. 이에 따라 저자는 우선 두 권을 발행해 지금까지 백석의 발자취를 찾아 취재한 정보를 바탕으로 소설 작품으로 형상화했다.
저자 홍찬선은 이 소설 작품을 통해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백석은 왜곡되어 잘못 알려졌다."고 단언한다. 다른 면에서는 몰랄도 최소한 기생 김영한과의 애틋한 사이였다는 말은 왜곡돼 잘못 알려진 것"으로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이 소설 작품의 탄생은 저자 홍찬선의 어느 날 꾸었던 꿈으로부터 비롯됐지만 "백석은 김영한이라는 기생과 깊이 사귀거나 동거한 적이 없고, 그녀에게 ‘자야’라는 호를 지어주지도 않았다."는 주장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일제강점기 백석의 있었던 흔적을 모조리 찾아다니며 현장답사를 통해 왜곡된 부분은 바로잡는 데 많은 지면을 배정하고 있다. 물론 그럴 만한 사건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김영한은 당시 권번의 기생이었다고 한다. 당시 기생은 예술인으로서, 지금의 기생과는 꽤 다른 사회적 위치였다고 한다. 사실 조선 시대 기생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들 중에 참된 예능인, 예술인들이 많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처럼 『백석의 불시착』은 신문기자 출신 시인인 홍찬선 작가가 백석의 꿈을 꾸고 2년 동안 백석이 살았던 곳을 직접 답사하면서 심혈을 기울여 쓴 다큐멘터리 장편소설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및 남북 분단기를 살아온 백석 시인의 삶을 불시착의 연속으로 보고, 그의 삶의 궤적을 쫓고 그가 남긴 시들이 어떤 배경에서 쓰였고, 어떤 뜻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홍찬선 작가는 “백석 시인은 한글사용이 금지되고 많은 지식인들이 친일로 돌아선 일제강점기에 오로지 한글로만 시를 썼다”며 “백석 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끊임없이 유랑한 그의 삶과 그가 처했던 상황을 바르게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백석의 데뷔시 「정주성」은 홍경래 난이 있었던 평안북도 정주성에 대해 쓴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하지만 홍찬선 작가는 「정주성」이 경남 진주의 ‘진주성’을 노래한 것으로 해석한다. 「정주성」은 제목만 정주성일 뿐 실제 장면은 ‘진주성’이며, 내용도 임진왜란 때 김시민 장군이 왜군을 물리친 뒤 허물어진 모습을 아파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또 백석 시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이 된 시집 『사슴』의 제목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견해를 제시한다. “시집에 「사슴」이란 시도 없고 사슴이란 시어도 등장하지 않는데 『사슴』이라고 한 것은, 일제의 검열을 피하면서 배달겨레를 상징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일제가 배달겨레의 상징인 범을 멸종시키고, 말도 범 대신 호랑(虎狼)이란 한자말로 바꾼 상황에서 범을 쓸 수 없어, 신라 때부터 임금을 상징한 사슴으로 일제의 검열을 피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 어느 누구도 제기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각이다.
백석의 시에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초기에는 이미지즘에 연결되는 모더니즘의 경향을 드러냈다. 즉 그는 모더니즘 문학운동의 중요 과제인 지적 통제에 의한 감정의 절제에 성공했던 것이다. 첫 시집 『사슴』에 대한 논평에 있어서 오장환은 백석을 비판하면서 그가 스타일만을 찾는 모더니스트에 불과하다고 하였지만 김기림, 박용철은 향토 취미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명료하게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다른 모더니즘 시인들과 구분되는 백석의 특징은 그러므로 철저히 도시문명을 외면한다는 점이었다.

모더니즘이 일반적으로 근대 도시문명을 근거로 하는데 반해 백석의 경우는 고향의 재현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의 시가 지닌 유소년 회상과 동심지향성 등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 또는 추억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고향상실에 대한 기본 정조로 시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의 시에 가득차 있는 외로움·쓸쓸함·슬픔·서러움 등이 결국은 외로움의 정서라는 ‘향수’로 집약이 된다.
어늬 아침 계집은
머리에 무거운 동이를 이고
손에 어린 것의 손을 끌고
가퍼러운 언덕길을
숨이 차서 올라갔다
나는 한동일 서러웠다
- 「절망」 중에서
오늘 고향의 내 집에 있는다면
새 옷을 입고 새 신도 신고 떡과 고기도 억병먹고
일가 친척들과 서로 모여 즐거이 웃음으로 지날 것이언만
- 「적막강산」 중에서

이 책과 직접 관련이 없지만 지난 1995년 출간된 『북한문학사전』에 기록되어 있는 백석 시의 특질로는 산문시로의 가능성과 표현 기법으로서의 직유의 뛰어난 사용이다. 이것은 토속적이고 진솔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효과적으로 이용된다. 백석의 시는 일제강점하의 국권상실 시대에 민족정서와 혼의 상징인 민족어의 완성을 위해 진력한 데서 소중한 의미가 드러난다고 하겠다. 민족공동체, 문화공동체로서 모국어를 사용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그 나라 공동체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시가 현실에 맞서서 개척하고 이겨 나아가려는 치열하고 능동적인 대결과 미래지향의 역사의식이 부족하더라도 식민지 땅이 유린당하는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 민족적 삶의 원형성을 내면적 의식 속에서 추구해 온 시인이라고 실려 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힌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p.251-252, 1권) - 「10. 나타샤」 중에서

나는 공손히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하지만 이상은 별다른 표정 없이 앉아 있었다. 흔한 인사말조차 하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고 김기림이 너스레를 떨었다.
“이 시인, 백 시인 알지? 시집 『사슴』을 출간하고 출판기념회까지 열어 장안의 화제가 됐잖은가?”
정지용도 거들었다.
“한국 시단의 위대한 탄생을 알린 백 시인이 『시와소설』에 작품을 내기로 했다네.”
그제야 이상이 고개를 들고 인사했다. 하지만 여전히 건성이었다. 정지용과 김기림, 두 선배의 체면을 봐서 어쩔 수 없이 인사한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선배의 소설 〈12월12일〉과 연작시 〈오감도〉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자기가 쓴 소설과 시가 나오자 이상의 눈빛이 달라졌다.(p.170, 1권) - 「7. 이상」 중에서
예쁜 꽃은 오래 가지 않고 좋은 사람은 늘 함께 하지 않았다. 나의 함흥 생활이 그랬다. 영생고보 영어 선생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1년이란 세월이 후다닥 흐르고 다시 봄이 왔다. 하지만 1937년 봄은 봄 같지 않았다. 나에게 청천벽력으로 다가온 봄은, 배신의 해가 시작됐음을 알려주는 서곡이었다.
“아니, 진이! 자네가 여기 웬일인가?”
1937년 4월7일 수요일 오후였다. 조선일보 기자로 한참 기사 쓰기에 바빠야 할 벗, 이진이 영생고보로 나를 찾아왔다. 불원천리하고 찾아온 벗이 반가웠다. 하지만 주말이나 공휴일도 아닌 평일에 이 먼 함흥까지 찾아온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틀림없이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나는 이진의 얼굴이 상당히 굳어 있는 것을 보고 ‘큰일이 일어났다’고 직감했다.(p.195, 1권) - 「8. 배신」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