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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지아 -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 ㅣ 서양근대사총서 6
김장수 지음 / 푸른사상 / 2025년 2월
평점 :

[이 글은 도서를 제공 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유럽의 여러 국가 중 오스트리아만큼 부침을 거듭한 나라는 드물다.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불릴 만큼 독일의 일부 영토까지 아우르며 강대국으로서 존재했다. 유럽에서 힘깨나 썼다는 의미다. 독일과 함께 일으킨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과 함께 합스부르크 가문이 멸문에 이르면서 오스트리아 제국 역시 산산조각 났다. 오스트리아는 1921년 오늘날의 국경선을 형성하게 된다. 더욱이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 히틀러의 나치에 강제 병합된 채 침략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가 다시 패전함으로써 국세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기울어 1945년 독일이 항복한 후 독립국가로서 인정을 받았고, 1955년 영세중립을 선언하고 국제적인 승인을 얻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서로마 제국 멸망 후 500년이 지난 즈음 996년 「오스타리치(Ostarrichi)」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유럽 역사에 언급되었다. 처음에는 바이에른 공국의 국경지구에 속했다가 1156년부터 1806년까지 (대)공국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의 독립적 구성국가였다. 〈오스트리아 왕가"(Haus Osterreich〉라 불리며 광대한 꿈의 지배권을 얻었던 합스부르크 왕가 아래서, 수 세기 동안 오스트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왕을 배출하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중심이었다. 1804년 선언된 오스트리아 제국(당시 헝가리와 보헤미아까지 포괄)은 제국의 서쪽 부분이 1815년부터 1866년까지 독일 연방의 일부였고, 1867년부터는 그때부터 독립국가가 된 헝가리 왕국과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왕조를 구성했다.
이 책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에 소개된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으로서 부제(父帝) 카를 6세의 장녀이며, 토스카나 대공(大公) 프란츠 슈테판과 결혼(1736)했지만, 부제(父帝)가 갑자기 사망(1740)함으로써 합스부르크가의 모든 영토를 상속받았다. 그러나 엄청난 영토 이익을 노린 유럽 각국이 이의를 제기하여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아헨조약에서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에 대한 각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정치적 능력이 뛰어났으며 부역의 경감, 수도원영지의 몰수, 교육제도의 개혁 등에 성과를 거둔 여제(女帝)로 오스트리아에서 칭송받고 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카를 6세의 생존 당시의 상속법인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 즉 '국본조칙(國本詔勅)'이 이미 각국의 승인을 받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각국이 그 상속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여 오스트리아 제국 영토를 둘러싸고 벌인 3차례의 계승전쟁(1740∼1748)이 일어났다. 이 전쟁으로 프로이센(독일)에 슐레지엔 지역을 넘겨주었으나, 숙적 프랑스와 대립하는 영국과 손을 잡아 교묘하게 일을 처리함으로써 아헨조약(1748)에서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에 대한 각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전쟁 중에 남편을 황제(프란츠 1세)로 세워 공동통치자가 되었으나, 남편에게는 정치적 능력이 없어 그녀가 모든 국정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 후 재정(財政)의 재건과 군사력 증강에 주력하여 슐레지엔 수복을 목표로 프로이센과 7년전쟁(1756∼1763)을 일으켰으나, 프랑스와의 동맹을 맺은 영국이 등을 돌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강화조약을 맺었다. 테레이자 여왕은 남편의 사망(1765) 후로는 아들 요제프 2세와의 공동통치로 바꾸었다.
내정 개혁에는 친독일의 급진주의적인 요제프 2세를 견제하면서 부역의 경감, 수도원 영지의 몰수, 교육제도의 개혁 등에 성과를 거두었다. 원래 아들의 탄생을 기대하여 딸의 제위 상속은 생각하지 않았던 카를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가정적인 교육만 베풀어 얌전한 여성으로 자라게 했으나, 마리아는 정치적 국면에서 비상한 재능을 발휘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자녀를 16명이나 두었으며, 프랑스왕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그녀의 딸이이다.(두산백과)
특히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의 계몽절대주의 체제를 처음으로 도입한 군주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최초로 의무교육 제도를 실시하여 계몽절대주의 체제를 견고히 다지고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뿐만 아니라 문화적 단일화를 구축했다. 아울러 행정, 재정, 외교 분야에서 개혁정책을 강력히 추진했고, 군제 개혁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 책은 모두 5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카를 6세와 국사조칙〉, 2장 〈마리아 테레지아의 성장과 결혼〉, 3장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4장 〈계몽절대왕정체제 구축〉, 5장 〈말년의 활동〉 등이다.

1장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왕위계승권을 부여한 국사조칙의 제정 원인과 그 진행 과정을 다루었다. 아버지 카를 6세의 부친(테레지아의 조부) 레오폴트 1세는 우울한 눈빛과 돌출된 아랫입술이라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특징을 가진 군주였다. 그는 1640년 오스트리아 왕국의 통치자 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인 마리아 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후 그는 성직자, 즉 파사우 주교가 될 목적으로 교육을 받았짐반 그의 형 페르디난트 4세가 1654년 갑자기 사망했다. 이에 따라 레오폴트는 1658년 오스트리아 국왕 및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등극했다.
레오폴트는 플루트를 잘 부는 전문가적인 솜씨의 음악에 취미가 있어 국사보다는 음악에 더 몰두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오스트리아와 경쟁국인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국제적 위상 증대에 관심이 컸고 그것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방법 강구에도 능독적인 자세를 보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루이 14세(부르봉 왕조)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과 그 과정에서 야기될 수 있는 영토 획득을 대외정책의 근간으로 설정했고 그것을 실천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실제로 루이 14세는 라인 강을 넘어 신성로마제국의 영역을 자주 침범했고 이교도 국가인 오스만튀르크와 협력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을 괴롭히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고 유럽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오스만튀르크의 150년 간 4차례에 걸친 오스트리아 침범으로 결국 옛 헝가리 왕국 영토 대부분을 넘겨주었다. 오스만튀르크는 마지막 관문인 오스트리아 빈의 점령을 위해 원정에 나섰지만 국정에 관심이 별로 없어 보였던 레오폴트 1세는 뛰어난 외교와 훌륭한 장군을 발탁, 전세를 뒤집고 옛 헝가리 왕국의 수도 부다페스트까지 빼앗아오며 옛 영화를 지속시켰다. 장군 오이겐과 가톨릭 국가들을 끌어들여 위기를 넘긴 레오폴트는 이후 국가개혁에도 적극적이었고 종교적인 관용 자세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의 국왕을 배출한 합스부르크는 가문의 영광을 지속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근친결혼을 이어왔기 때문에 선천적 장애를 가진 후손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왕위 계승에 오히려 큰 장애가 되기도 했는데 유럽의 많은 나라가 합스부르크 영향력을 피해갈 수 없기에 얽히고설킨 혈연 관계는 왕위 계승에도 많은 문제점을 드러낸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결혼 문제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서구 각 나라의 국왕이 조약으로 맺은 왕위 계승과 상속권, 영토 분할 및 상속자 선정 등이 시간이 흐르면서 나라 간의 이해관계로 달라지고, 또 불리한 조약서는 감춰지는 등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결국 현재의 이해 관계에 맞아 떨어지지 않을 경우 십중팔구 전쟁으로 이어졌기에 오히려 족보 관계는 더욱 혼란을 낳게 됐다. 이 책에서 저자는 별도의 3장에서 3차에 이르는 왕위계승전쟁을 조명하며 프랑스, 영국, 프로이센 등 주변국과의 관계를 살펴본다.
제 2장에서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탄생 및 성장, 프란츠 슈테판과의 결혼 및 자녀 양육, 남편 프란츠 1세의 갑작스러운 서거 이후 아들 요제프 2세와 15년간 왕국을 통치하며 겪는 갈등을 역사에 기록된 바를 바탕으로 서술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여성이 왕으로 추대된 것은 오스트리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 적지 않은 반대와 이에 따른 주변 각국의 갈등 관계로 쉽지 않았다. 그러나 카를 6세의 급서로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겸하는 막중한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는 탓에 누군가의 조력 없이 왕의 자리에 저절로 앉을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마리아 테레지아는 요제프 1세의 미망인인 태후 빌헬미네 아말리에 폰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를 자주 방문했고 거기서 두 사람은 매우 친밀하고 격의 없는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고 전한다. 아말리에는 테레지아를 자신의 친손녀와 같이 귀여워했고 특히 테레지아가 홍역과 천연두에 걸렸을 때 정성을 다해 보살폈다고 한다. 이 점에 대해 카를 6세는 아말리에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고 저자는 이 책에 기록하고 있다.
아말리에는 테레지아가 여왕으로 등극한 이후 벌어진 상속전쟁에도 자신의 사위인 바이에른 제후 카를 알브레흐트가 지향하던 친프로이센 정책을 강력히 비판하고 그것의 수정도 강력히 요구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테레지아에 대한 애정과 강력한 지지자였던 것 같다. 또 테레지아 교육을 전담한 폭스-몰라드 백작부인은 그녀의 천부적 재능을 확인하고 그것의 효율적인 확산에 신경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어머니 엘리자베스 크리스티네 황후는 1736년 백작부인을 테레지아의 궁내부장관으로 임명했고, 로다운에 위치한 작은 성도 선물했다고 한다. 테레지아는 그녀를 '자유분방한 암여우' 또는 '사랑하는 어머니'라 칭하기도 했다는 말도 저자는 이 책에 쓰고 있다. 이는 테레지아가 친모 엘리자베스 크리스티네 황후보다 더 믿고 따랐다는 말로 독자에게는 읽히는 부분이다. 실제로 테레지아는 크리스티네 황후가 1750년 사망했을 때 특별한 슬픈 감정을 보이지 않았고 상투적인 미사여구로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한데 반해 4년 후 백작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극도의 슬픔을 경험하고 극복하기까지 상당 기간 필요했다는 데서 증명되는 일화다.
40년 동안 오스트리아의 내정과 군제 개혁을 추진하고 오스트리아 최초로 의무교육제 실시 등 계몽군주로서 강력한 오스트리아를 재건해 오늘날까지 '오스트리아의 국모'로 일컬어지는 그녀의 국정 운영과 제도 개선은 계몽군주로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그녀의 국왕으로서의 업적은 제4장 〈계몽절대왕정체제 구축〉과 제5장 〈말년의 활동〉에 자세히 기록되고 있다.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군주로서 확실히 입지를 다진 테레지아는 정책적 효율성을 갖춘 정부 및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이고 정례적인 징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에 따라 일반 조세제도의 도입도 강력히 추진하고 귀족계층과 가톨릭교회의 교회령 및 성직자들은 더 이상 면제 대상이 아니었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일반 조세제도의 도입에 따라 귀족 및 성직자 계층은 그들 수입의 18.75%를 세금으로 납부해야 했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국가는 징집, 군대 무장 및 유지비를 부담하기로 한데서 국정 운영을 원활하게 한다. 이러한 세금 제도는 경제적으로 활성화된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지방에서 집중적으로 시행되었다고 역사 기록에서 찾아낼 수 있다. 이처럼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신(神)의 뜻을 따른다는 자세로 자신이 신으로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를 보존하는 의무를 위임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정국 운영의 확신도 가지고 있었다고 후의 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신앙심이 돈독하던 여왕은 평소부터 로마 교황을 비롯해 빈의 대주교를 존중하며 미사나 성채배령 등의 가톨릭 의식에도 예를 다했다고 한다. 그녀의 가톨릭교에 대한 신앙심은 의심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가톨릭 국가인 오스트리아에는 수도원을 비롯한 교회 관련 영지가 지나치게 많았던 때다. 게다가 교회는 면세 대상이었기 때문에 국가권력의 징세권 행사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테레지아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지 않을 경우 자신이 주도하던 국가개혁 역시 실효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대해 가톨릭 세력은 '교회의 면세특권'을 부각시키면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개혁안에 동조하지 않았다. 가톨릭 세력의 이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테레지아는 예수회의 활동을 제안하고 금전과 시간의 낭비에 불과한 성지순례도 중지시킬 정도로 강력한 추진력도 갖춘 군주였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책에 따르면 교회 내부의 화려한 의식을 폐지시키자 로마 교황청은 여왕의 개혁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던 계몽사상의 확대로 상황은 이미 테레지아의 편이었다. 가톨릭교회에 의해 유지되던 국가 운영 체계나 법 제도 개선을 합리적 이성을 갖고 판단해 추진했으며, 이에 따른 각종 법률도 통과시켜 법제를 확립시켜 나갔다. 이를 위해 1766년 『테레지아 법전』 간행을 통해 집대성했고 이를 토대로 법률의 일원화도 시도되었다. 당시 테레지아는 사법제도의 운영 과정에서 이우스티티아와 클레멘티아를 적절한 안배하려고 했다는 점이 뒤늦게 평가되고 있는 대목이다.
이우스티티아는 법률의 엄격성과 동등성을 지칭하고, 클레멘티아는 감형을 통해 이런 엄격성을 다소나마 완화시키고 거기서 예외 규정도 인정한다는 것이는데 테레지아 형법전은 중세의 중죄인을 다루는 행사재판소법에 불과하다는 당대 법학자들은 부정적 평가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테레지아는 이미 시대를 앞서 법의 미래까지 내다보고 개혁을 추진했다는 데서 오스트리아의 근대화와 국가 체제의 안정을 꾀했으니 개혁군주의 타이틀을 획득할 수 있었다고 독자는 이해된다.
재위 말년에 시행한 의무교육 제도는 오스트리아로선 처음이었다. 재임 초기부터 교육에 관심이 컸지만 여러 가지 현안에 밀려 재위 말년에 들어서서야 대부분을 아들 요제프 2세에게 위임하고 직접 교육 개혁을 시도했다. 외교나 영토 등 국정 전반에서 갈등을 보이던 요제프 2세도 의무교육 제도 실시에 대해서는 찬성을 했다고 저자는 책에서 적고 있다. 가톨릭 국가이고 신자인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신교 국가인 프로이센의 교육 개혁에 관심을 더 보였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학생들이 단순히 가톨릭 교리문답서를 읽고 암기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창의성 계발을 위해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해 듣고 교육 개혁의 내용과 오스트리아의 현재의 상황을 접목시킨 교육 개혁을 모색했고, 그 과제를 프로이센에서 유명한 교육자 펠비거에게 맡겼다고 한다. 이렇듯 개혁을 추진하는 테레지아는 혁명적인 방법보다 점진적 개선을 택했을 정도로 말년의 개혁 정신의 원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저자는 이를 두고 40년 동안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며 강한 결단력과 여성성을 겸비한, 위정자로서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모습을 재평가하게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저자 : 김장수(金長壽)
한양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베를린 자유대학교 역사학부에서 석사 및 철학박사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Die politische Tatigkeit F. Palackys(팔라츠키의 정치활동)』 『Korea und der ‘Westen’ von 1860 bis 1900(1860년부터 1900년까지의 조선과 서방 세계)』 『Die Beziehungen Koreas zu den europaischen Großmachten, mitbesonderer Berucksichtigung der Beziehungen zum Deutschen Reich(한국과 유럽 강대국들과의 관계, 특히 독일 제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프란티셰크 팔라츠키의 정치활동』 『독일의 대학생 활동 및 그 영향』 『서양의 제 혁명』 『비스마르크』 『중유럽 민족문제』(공저) 『유럽의 절대왕정시대』 『주제별로 들여다본 체코의 역사』 『주제별로 살펴본 서양 근대사』 『체코 역사와 민족의 정체성』 『슬라브 정치가들이 제시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존속 방안』 『후스로부터 시작된 종교적 격동기(1412~1648)』 『19세기 독일 통합과 제국의 탄생』 『메테르니히』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독일 통합의 비전을 제시한 프리드리히 2세』 등이 있다. 프란티셰크 팔라츠키의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와 19세기 오스트리아 제국의 민족 문제를 다룬 많은 논문도 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이며 한국세계문화사학회(구 한국서양문화사학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