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위로 - 모국어는 나를 키웠고 외국어는 나를 해방시켰다
곽미성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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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언어의 위로』는 프랑스로 유학 간 저자 곽미성이 프랑스어를 체화하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에세이다. 표제어로만 해석한다면 자칫 우리말로 우리나라에서 우리 삶을 위로하는 메시지가 담긴 것 같지만 사실은 저자의 프랑스어 '해방 일지'다. 또 모국어가 아닌 외국의 언어가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에 관한 저자의 내밀한 기록이기도 하다. 저자는 의미가 되지 못하는 이질적인 소리가 너무나 피로해서 수영장 물속으로 몇 시간씩이나 도망치던 초기 유학 생활의 이야기도 이 책에 담았다. 물속에 들어가면 그야말로 안정감이 들었기 때문이란다. 모든 소리로부터 해방된 유일한 곳이니까. 이 시기 저자 자신에게 프랑스어는 '소음'이고 그들에게 저자의 프랑스어 역시 '소리'에 불과했을 때의 답답함과 두려움, 그리고 외로움도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저자가 모국어와 프랑스어를 오가며 자신만의 세계를 확장해 가는 과정이 눈물겹게 느껴진 이유다. 책에 표현된 많은 부분이 '정말 힘들었겠다'라는 공감을 자아낸다. 

저자에 따르면 유학 생활에 적응하며 또 그들의 감성을 이해하면서부터는 자신의 일상이 훨씬 신선하게 다가온 시기도 있었다. 자신의 프랑스어가 더 이상 프랑스 사람들과의 관계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 정도의 시간을 거쳐서다. 서로의 감성과 감정을 아낌없이 적소적재에 토해내기까지에는 많은 노력이 뒤따랐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와는 많이 다른 프랑스의 문화를 제대로 인지하면서부터 프랑스 사람들과 그들의 말로 감정을 주고받기까지 노력도 돋보인다. 이 때문에 출판사 소개글에 "어떤 드라마보다 감동적이다."고 적어놓은 것으로 이해된다. 이 에세이집은 한 편 한 편이 짧은 에피소드처럼 엮이면서 전제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수십 년간의 프랑스 생활을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저자의 눈에 서서히 들어온 프랑스 문화와 프랑스인에 대한 흥미로운 에피소드는 짧은 글과 생각의 외연을 한층 더 넓혀준다. 다른 삶을 꿈꾸는 이, 외국어라는 미지의 문 앞에 선 이, 이미 그 길을 걷고 있는 이에게 이 책은 속 깊은 ‘언어의 위로’를 전한다.

독자는 외국 유학을 가본 적이 없다. 유학은 집안의 뒷받침이 없다면 쉽게 이루어지기 힘들다. 국비로 가는 것은 쉽게 기회가 오지도 않는다. 거기에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에게는 국비 유학생의 기회가 거의 없다. 독자가 대학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때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산업화에 내몰린 사람들은 예전에 비해 많이 풍요로워지긴 했지만 해외 여행마저도 쉽지 않았다. 국가나 기업에서 해외 업무가 불가피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일반 사람들이 해외로 나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해외에 나가는 돈마저도 제한적이었고, 사실상 오래 머물 수도 없는 돈 정도만 허락했다. 이것은 '해외여행 자유화'가 90년대 들어서야 이루어진 점을 보면 확실하다. 그런데 저자는 영화를 공부하려고 프랑스 유학을 갔다. 책의 내용으로 봐서는 집안이 넉넉해서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이루어낸 유학이 아니었을까 지레짐작해 본다. 초기에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더구나 사고방식이 동양과 다르고, 관습도 다르니 언어에 익숙해지기까지는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라는 짐작은 할 수 있다. 

외국에서의 삶은 많은 이들의 로망이다. 그곳이 ‘프랑스’라면 더없이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저자는 배낭여행으로 떠난 프랑스에서 덜컥 유학을 결심한다. 자신의 도피처였던 ‘영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꿈을 품고, 어떤 고생이든 감수하겠다는 다짐으로. 10대의 저자는 알지 못했다. 외국에서의 삶은, 더 정확히는 ‘삶의 질’은 외국어 능력에 달렸다는 것을. 프랑스어로 인해 자신이 앞으로 어떤 일들을 겪게 될지도. 여행자가 아닌 유학생으로 돌아온 프랑스는 ‘현실’이었다. 

이후 프랑스 생활이 무려 24년. 이방인의 시간은 어느덧 한국에서 나고 자란 세월을 훌쩍 넘었다고 말한다. 생존을 위해 시급히 채워 넣어야 했던 프랑스어를 일상의 언어로 쓰게 된 지금, 저자는 고백한다. "외국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하는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무엇보다 외국어는 모국어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다만 저자는 괴테의 문장을 가져와 외국어를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이 책 『언어의 위로』는 결과보다 ‘과정’에 시선을 두는 책이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오랜 시간과 노력에 걸쳐 몸에 새길 때, 한 사람의 삶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를 밀도 있게 보여준다. 20여 년간 누적된 경험을 모은 저자의 글은 국제 연애, 외국어 공부 등을 다루는 짧은 영상에서는 볼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한다. 단 몇 줄로 정리되는 프랑스인과의 연애 장·단점, 프랑스어 완전 정복 노하우와는 완전히 결이 다른. 최고의 외국어 공부법은 외국인과 사귀는 것이라는 농담 같은 말은 절대 닿을 수 없는 곳까지, 저자의 이야기는 아주 멀리 또 깊이 나아간다.

저자도 프랑스에 오래 있다 보니 연애도 있었으리라. “나는 (프랑스인 남자 친구) R이 자주 쓰는 단어들, 대강의 의미는 알지만 정확한 뜻은 모르던 단어들을 사전에서 찾아 확인하기 시작했다. 더 나다운, 더 내 마음과 닮은, 더 내 생각에 가까운 단어를 고민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어떤 이슈에 대해, 인물에 대해 그의 의견을 들으면, 반문하고, 확인하고, 이해하고, 내 생각을 전개했다. 나만의 세계를 만들고 독립하기 위한 일종의 투쟁이었다. 우리의 관계는 한쪽으로 기울었다가, 다른 쪽으로 기우는 과정을 거치면서 적절한 균형을 찾아갔다. 관계 속 나의 영토가 분리되고 확장되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도 다시 치열해졌다. 우리의 관계도 그때부터 성숙해졌다고 나는 믿고 있다. 각자가 자신의 독립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어른의 관계. 나의 프랑스어도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정말 내 것인, 나의 외국어는 그렇게 말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p.79)

그런데 남자 친구를 알고 그와의 관계를 계속해 나가는 데 언어가 장벽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도 남녀가 연애할 때는 서로의 성장 과정이나 환경이 다르기에 서로 양보하고 서로 맞춰가며 사귀는 일이 시급하다. 그런데 외국에서 생활하며 그곳의 사람과 연애를 한다는 것은 독자로서는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프랑스 생활의 토대 위에 쓰인 이 책은 프랑스어를 모르는 이들마저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직접 부딪치고 경험하며 알게 된 프랑스 특유의 문화와 화법을 곁들여 언어 너머의 풍경까지 생생하게 전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낭만의 나라로 알려진 프랑스의 진정한 낭만은 이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표현에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프랑스 사람들은 내 심장(mon cœur), 내 보물(mon tresor), 내 벼룩(ma puce, 보호해 줘야 할 아주 작은 존재라는 의미) 같은 애칭으로 ‘천연덕스럽게’ 서로를 부른다. 한창 열애 중인 커플이나 신혼부부가 아닐지라도. 이 일은 서양인들이 흔히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긴 할 것 같다. 영화에서도 부부나 연인 사이에서 흔히 말하는 '애칭'을 쓰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가족애를 그리는 영화는 행복하고 별 걱정이 없는 부부 사이에 애칭을 사용하다는 것을 많이 봐왔다. 저자가 결혼 후 시어머니가 시아버지에게 여전히 '새끼 고양이(minou)'라는 애칭을 사용한다니 조금은 오글거린다. 어떻게 부르든 그것은 그들의 생활 방식과 오랜 관습에 의해 특정지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별로 어색할 것은 없다. 사실 우리 시대에도 '자기' '애기' 등 애칭을 사용하는 것을 자주 봤다.

아들, 그러니까 저자의 시동생쯤인가 보다. '벼룩'이라고 부른다고 저자는 말한다. “내 새끼 고양이, 화장실 청소 좀 해”, “내 벼룩, 왜 이렇게 얼굴이 안 좋니? 저녁에 뭐 먹고 싶어?”(p.54) 확실히 오글거리고 그런 말을 사용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긴 하다. 우리도 친구 사이에 '바퀴벌레'라고 호칭하는 것을 본 적도 있다. 왜 바퀴벌레야? 하고 물으면 나름대로 다 이유를 댄다. 

저자는 그렇다고 프랑스어를 낭만의 언어로 속단하긴 이르다고 말한다. 긴 대기 끝에 만나게 된 은행 직원이 자신의 두 눈을 바라보며 건네는 말(이제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Je suis a vous!)을 듣고, 세금 연체나 보험료 인상을 알리는 고지서의 끝인사(당신을 읽을 날을 기다리며, 저의 각별한 감정을 수락해 주시길 간청합니다 Dans l’attente de vous lire, je vous prie d’agreer l’expression de mes sentiments distingues)를 읽으며 저자는 알게 된다. 프랑스 사람들은 별다른 감정을 담지 않고도 이토록 낭만 넘치는 말들을 한다니 확실히 낭만적이고 또 그들의 뜻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프랑스어라고 자긍심을 지나칠 정도로 갖고 있다는 말도 직접 프랑스에 여행 가서 들은 적이 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타국에서, 입을 뗄 때마다 의식적인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한 외국어를 해야 한다면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누구나 외국어를 처음 대할 때는 두려움이 있다. 관광 가서 그럴진대 저자는 공부를 목적으로 유학을 갔으니 어떻게든 말을 배워야 공부도 할 텐데... 어쩌면 수없이 되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저자가 언어를 대하는 태도는 "아니면 말고" 식이 결코 아니란 점에서 오랫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리란 생각이 든다. 사실 외국에선 말을 하지 못하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언어가 서툴러서 혹은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무수한 말들을 삼켰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외국에서 우리나라로 일하려 온 취업 노동자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금세 알 수 있다. 저자라고 프랑스에 유학 갔으니 왜 그런 일을 당했을 가능성도 매우 크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누구보다 노력을 기울인 탓에 지금은 프랑스인이 다 된 듯해 보이기도 한다. 일이런 서러운 현실에도 계속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삶의 고비마다 쓰러진 마음을 끌어 일으켜준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털어놓는다.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도 한달음에 달려갈 수 없어 이미 재가 되어버린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나는 당신을 생각합니다”라며 슬픔을 헤아려준 덴마크 문화원장. 퇴직 전 마지막 진료 날, “우리는 서로가 늙어가는 것을 지켜보았군요”라는 인사를 전하며 15년간 이어온 인연을 실감케 해준 주치의. 이들이 진심으로 건넨 프랑스어가 완벽한 위로로 와닿았던 순간들이, 저자를 지탱해 온 것을 책을 통해 느끼고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지울 수 없는 결핍과 그리움은 모국어로 채운다. 출근 전 새벽마다 모국어로 글을 쓰고, “이미 몸과 마음속에 스며들어” 있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언어”인 모국어로 쓰인 책들을 읽으며. 두 언어에서 받은 위로로 저자는 꾸준히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것이란 의지도 굳세다. 다른 삶을 꿈꾸며 기꺼이 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언어의 위로’를 전하면서 굳센 의지는 빛으로 승화된다.

화법은 사회를 드러낸다. 프랑스에서 초등학생 아이를 키우는 한 한국인 지인은, 아이의 한국어와 프랑스어 구사 방식을 보면서 두 언어의 차이를 크게 느낀다고 했다. 아이가 한국어로 말할 때는 목소리 톤도 높고 감정을 극적으로 발산하는 데 반해, 프랑스어로 말할 때는 목소리가 차분해지고 이성적인 표현을 많이 쓴다는 것이다. 유치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을 때, 아이가 프랑스어로 “나는 ~을 할 권리가 있어” 같은 말을 하기 시작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요즘 한국 드라마에 푹 빠져 있는 나의 시아버지가 떠올랐는데, 최근 이런 질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 사람들이 소리를 많이 지르더라. 실제로도 그러니?”(p.97~98)


옷차림과 스타일뿐만이 아니었다. ‘취향 평가’는 내 전공 분야인 영화에서도, 또 음악, 미술 등 모든 장르에서 계속됐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했다가 지도 교수로부터 “아니, 그런 도덕 교과서 같은 영화를 어떻게…”라는 말을 듣기도 했고, 프랑스 친구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틀었다가 “그 영혼 없는 모조품 같은 곡은 다시 안 들으면 안 되니?”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섬세한 이 도시의 사람들이 부담스러워졌다.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으나, 초라한 취향의 내게 이곳은 ‘춥고도 험한 곳’이었달까.(p.153)


저자 : 곽미성


영화 공부를 위해 파리에 온 이후로 스무 해 넘게 프랑스어를 쓰며 살고 있다. 파리 1대학과 7대학에서 영화학으로 학위를 받았다. 전공과 관련 없는 직장에서 일하게 되면서 매일 새벽에 일어나 출근 전까지 모국어로 글을 쓴다. 파리에서 가장 사랑하는 일은 걷기. 프롬나드(promenade), 플라네(flaner) 등 ‘산책’을 의미하는 모든 프랑스어 단어를 좋아한다. 지은 책으로 『외국어를 배워요, 영어는 아니고요』 『다른 삶』 『외로워서 배고픈 사람들의 식탁』 『그녀들의, 프랑스식, 연애』, 옮긴 책으로 『파노라마』 『파리지엔은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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