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나무를 훔친 남자』는 신예 작가 양지윤의 첫 단편소설집이다. 무의미한 삶을 구제할 휴머니즘을 보여줬다는 평가을 받은 『무생물 이야기』(장편소설)로 2022년 데뷔했다. 표제작 「나무를 훔친 남자」 등 여덟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돼 있다. 저자 양지윤은 이 단편집 『나무를 훔친 남자』에서는 가치와 효용만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로를 이탈한 듯 보이는 ‘이름 없는’ 주인공들이 등장해 ‘우리 시대의 아트’를 새로이 규명하는 매혹적인 이야기를 꾸려 나간다. 단편 작품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별 볼 일 없고 어딘가 이상하고 모자라 보이며 괴짜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 주인공은 선량한 마음씨와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놓지 않는다. 끈질기게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는 이들은 달리 말하면 자신만의 ‘아트’를 행하는 사람들이다. ‘내 걸 찾으면 아트가 된다’는 작품 속 한 인물의 말처럼, 그들은 자신만의 ‘선율’로 규격화된 현실을 돌파하며 끝내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성을 가진 존재로서 빛을 발한다. 저자는 이들의 넘실거리는 에너지를 통해 황폐한 세태의 환멸을 풍자하는 동시에 냉혹한 현실의 벽을 사뿐히 뛰어넘는 희망을 노래한다.
표제작인 「나무를 훔친 남자」는 누구도 물을 주지 않아 서서히 죽어가는 나무를 살리고자 회사 건물에 있는 87그루의 나무 화분을 훔친 남자의 이야기이다. 8년 차 영업사원인 남자의 실적은 회사에서 꼴찌였고 동료들은 그를 무시했다. 그는 언제든 잘리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었다. 마치 나무들처럼. 그가 돌봐주지 않으면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치워질 나무를 외면할 수 없었던 주인공은 정성스레 나무를 보살피지만 회사는 그가 시키지 않은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쓴다고 여기며 화분에 물을 주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익 창출에 기여하는 존재만이 인정받는 시스템 하에서 그는 언제든지 나무처럼 버림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작은 애정과 관심이 죽어가는 존재도 살려낸다고 믿는 사람이다. 나무들이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죽어나가는 걸 보며 부당함과 환멸을 느낀 그는 나무를 구출하겠다고 결심하고, 회사의 나무를 모조리 가짜 나무와 바꿔치기한다. 이 일에 쏟는 그의 열정은 경이로울 지경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구출해낸 나무들 속에서 죽음을 맞지만 ‘진정 이 시대의 고독한 의인’인 그의 이야기는 두고두고 회사 내에서 회자된다.
시도 때도 없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특별한 이유도 없이 박수를 치는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박수 치는 남자」의 주인공 또한 ‘고독한 의인’이라 할 만하다. 「나무를 훔친 남자」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의 이름은 따로 없다. 작품 속에서는 '그', '아이', '남자', '노인' 등으로 명명된다. 이 점에 대해 저자 양지윤은 "괴벽 같지만 나는 인물에 이름 붙이기 어려워한다"고 털어놓는다. "너무 '진짜' 같으면 타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소 모순적일지 몰라도 나는 그들을 가공의 인물로 생각한 적이 없다. 그들은 바로 나이기도 하니까."라며 주인공을 '인칭 대명사'로 서술한다고 설명한다. 주인공인 '그'가 치는 박수 소리는 매우 커서,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박수가 유쾌해서 그와 결혼한 아내는 그가 박수를 쳐야 할 때 치지 않는 데 분노해 그와 이혼한다. 주어진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청년이 다리 위에서 목숨을 끊으려는 순간, 그가 치는 박수 소리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이 든 부부는 청년을 발견하고는 그를 다리 난간 위에서 끌어 내린다. 이처럼 남다른 행태로 인해 그는 가족과 멀어지고 아내한테도 버림받는다. 그렇다고 그 남자의 박수가 말썽만 일으킨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박수 치는 남자가 남긴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입에 올렸고, 그를 한번 보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된다. 그의 박수가 실의와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독자들에게 감동을 남긴다.
그는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고 박수를 치고 다녔다. 강의실에서도, 도서관에서도, 대강당에서도, 학생식당에서도 당당하게 박수를 쳤다. 잘생기지도 않고 특별히 눈에 띄는 외모도 아니어서 그의 행위는 돋보였다. 웬만한 학생들은 이게 다 박수 치는 남자를 알아보았다. 그들은 박수치는 남자가 박수 치는 남자가 지나가면 목소리를 낮추고 쑥덕거렸다.
"그가 또 삶을 축복하러 돌아다니는군."
그는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대기업 연구원이 되었다. 회사에서도 그는 별종 취급을 받았다. 그래도 진지하게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워낙 일을 잘하기도 했고 박수 치는 것만 빼면 깊은 산속에 흐르는 샘물처럼 맑고 고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p.146~147)
「알리바바 제과점」은 사람들에게 가장 저렴한 가격에 보석을 파는 곳이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보석이 아니라 '보석 쿠키'를 판다. 사장에게 보석 쿠키를 제안한 사람은 수석 파티시에인 '나'였다. 사람들은 닥치는 대로 보석, 아니 쿠키를 샀다. 호박 쿠키를 담당하는 직원이 제과점을 그만두자 나는 새 담당자를 구했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력서를 내민 스물세 살 여자였다. 다음 날 그녀가 구운 호박 쿠키는 환상적인 검붉은 얼룩들이 눈을 사로잡는 영롱한 보석, 그 자체였다.
알리바바 제과점은 하루에 약 만 개의 쿠키를 팔았고 그 엄청난 양의 쿠키를 만들기 위해 40명의 직원이 필요했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을 의식한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설명을 달아놓는다. 매장에 쿠키를 진열하거나 완성된 쿠키를 포장하거나 포스기를 작동하거나 보석 쿠키를 홍보하거나(아주 가끔 진품인지 아닌지 깨물어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하는 직원 등 다 포함해서 그 정도 인원은 필요했다고 강조한다. 그들이 나처럼 모든 쿠키를 만들 줄 아는 것은 아니다. 알리바바의 철칙이 있다면 한 직원 당 오직 한 종류의 쿠키만 굽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저기 큼직한 안경을 쓰고 다리를 저는 마흔 살 넘은 여자는 호박 쿠키만 만들었다.
직원들의 면모를 저자는 매우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 터키석 쿠키를 만드는 남자는 눈이 찢어지고 귓볼이 고드름처럼 쳐졌다. 남자는 터키석 쿠키만 칠 년 넘게 구웠다. 초코와 민트로 만드는 그 쿠키 때문에 그는 치약도 박하 향이 없는 것만 썼다. 그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호박 쿠키와 터키석 쿠키를 구웠다. 그밖에 다른 보석들도 그것들은 모조리 내가 개발했다.
알리바바 제과점은 '내'가 들어온 후 곧 주력 품목이 없이 제과점 이름과 달리 일반적인 식빵, 피자빵, 기름이 줄줄 흐르는 크로켓, 푸석한 마들렌을 팔다 '오븐에 들어갈 운명'이었다.(문을 닫아야 할 지경이었다)란 표현으로 이해된다. 내가 보석 쿠키를 제안했을 때 사장은 머리통을 후려 맞은 파리 같은 얼굴로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알리바바를 관둘까 봐 두려워했다. 내게서 헐값에 레시피를 뜯어내려고만 했다. 넘어갈 내가 아니다. 그가 나를 해고했을 때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한 달도 안 돼 사장이 나를 다시 찾아왔다.
호박 쿠키를 굽던 그녀는 알리바바에서 가장 영롱한 과자를 만들어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만들어내는 수량이 적었다는 점이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이 굽는 수량을 절대적으로 고수했고,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사장의 작업 요구량에는 훨씬 못 미쳤다. 갈등은 당연한 일인데, 나도 사장의 편에 섰다. 그녀만의 쿠키는 항상 가장 먼저 동이 났고 더 만들어달라는 나와 사장의 요구는 묵살됐다. 그녀의 쿠키 만드는 작업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지만 누구도 흉내내지 못했다. 그녀의 쿠키는 날로 진보했다. 이젠 진짜 보석 같은 쿠키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쿠키만 사려고 했다.
나는 어느날 호박 쿠키 담당자를 구해내(?} 둘만의 탈주를 감행한다. 쿠키를 전보다 더 ‘진짜 보석’처럼 만들어내는 노동의 한편에는 삶의 존엄이 무력해진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고 하혁진 문학평론가의 문학적 해석을 출판사 측이 소개글에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하혁진 문학평론가는 양지윤의 작품을 “현대인을 ‘활용’하고 ‘훼손’하는 세태를 향해 외치는 파산선고”라고 평하며 지금 우리가 그의 작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라고 밝혔다.
하혁진 문학평론가의 이 같은 평가는 「우리 시대의 아트」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벽들은 때때로 총과 칼이 아닌 낙서에 의해서 허물어지기도 했다”는 평론가의 지적을 상기시키는 작품이다. 노숙자로 살아가나 그림에 특출난 재능을 지닌 ‘뱅크럽시’는 어느 날 미국에서 온 예술가 맥의 초대를 받아 한 달간 미국을 방문한다. ‘뱅크럽시’, 즉 파산이라는 그의 별명은 그를 ‘뱅크시’에 비유했으나 그것이 뒤틀리면서 얻게 된 것이다. 맥으로 인해 뱅크럽시의 그림은 엄청난 주목을 받고 고가에 팔려나가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 거리의 천덕꾸러기가 된다. 보잘것없는 거리의 노숙자 뱅크럽시의 그림이 ‘우리 시대의 아트’가 지닌 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가치와 효용이 있을 리 만무하다. 뱅크럽시에게 갑작스럽게 쏟아진 박수갈채와 돌연한 무관심은 ‘돈’이 예술을 떠받치는 오늘날의 세태를 통렬하게 조명하고 있다.
「롤라」는 바에서 일하는 '나'는 어느 날 롤라라는 한 백인 손님으로부터 호텔로 놀러오라는 초대를 받는다. 거기에는 롤라에게 초대받은 한국 여자 두 명이 더 있다. 롤라는 자신이 꿈에서 그들의 미래를 보았다며 그들의 얘기를 들려준다. 나는 처음엔 롤라가 미친 여자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얘기가 사실인 걸 알고 흥미를 느낀다. 그리고 자기 미래도 어떤지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롤라의 이야기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나는 크게 실망한다. 미래에 자신이 이 이야기를 반전시킬 가장 큰 키를 쥐었다는 걸 모른 채다.
「수조 속에 든 여자」는 한 동네에서 10년을 넘게 살았지만 그 남자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이런 일이 가능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산책하는 것이 일과인 그의 눈에 길가에 버려진 거대한 수조가 들어왔다. 다음 날 그 수조 속에 아리따운 여자가 들어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한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건다. 그녀는 그에게 수조에 한번 들어와 보겠느냐고 꼬드긴다. 그는 곧바로 도망쳤지만 사흘째 되던 날 수조에 들어간다. 그는 졸지에 수조에 갇히고, 그녀는 수조를 집에 가져간다. 수조에 갇힌 그는 오직 그녀만의 ‘애완인간’이 된다.
그 어여쁜 인어는 수조 안에 있었다. 언제부터 들어가 있는 건지 몰라도 그가 볼 때마다 있었다.
"좋아, 들어갈게."
사흘째 되던 날 그가 말했다.
"오늘 밤 자정에 여기로 와."
그녀가 칵테일새우처럼 몸을 둥글게 만 채로 말했다.(p.178)
그는 믿을 수 없었고 다시 생각해봐도 역시나 믿을 수 없었다. 예전에 했던 짓거리들, 예를 들면 아침에 눈을 뜨면 일하러 가고 때가 되면 식사를 하고 저녁에는 산책을 하고 TV를 보고 공과금을 내고 주말에는 뭘 할까 생각하고 영문도 모르고 뭔가를 기다리는 삶. 그 짓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p.198)
「진실의 끄트머리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에서 '그'는 매일 저녁 연못가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그녀에게 말을 걸 기회만 노리고 있다. 어느 날 그녀는 읽다 만 책을 벤치에 두고 떠난다. 그는 그녀에게 그 책을 돌려주려 하지만 그날 이후 그녀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매일 책을 들고 벤치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는 그에게 사립탐정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이 책을 저한테 파시겠어요?” 「인류의 업적」은 미래 시점의 소설이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이 지난 후의 먼 미래. 핵폭발과 전쟁, 폭력, 그리고 자본가와 독재자들의 횡포에 시달리며 자연을 훼손하고 자연과 함께 병들어가던 인류는 마침내 자연을 해방시키고 자신까지 구원했다. 구원의 방법이란 인간의 육체와 숫자를 없앤 것. 인간에게는 영혼과 목소리만 남았다. 주인공인 ‘아이’는 꽃, 새, 짐승들은 다 보이는데 인간의 모습만 보이지 않는 게 이상하기만 하다. 아이는 그 비밀을 풀기 위해 ‘육체를 가진 인간’을 찾으러 떠난다.
잘생긴 사람과 못생긴 사람의 구별이 없어졌다. 돈 많은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없어졌다. 배운 자와 못 배운 자의 차별이 없어졌다. 실수로 손 하나가 잘려나가거나 걷지 못하거나 불치병을 가진 사람들이 없어졌다. 젊은이와 늙은이의 구별이 없어졌다. 생명의 위협이 사라지자 살인자와 강간범들이 사라졌다. 노동과 집안일이 없어졌다. 계급이 없어졌다. 국가와 정치인들이 없어졌다.(p.239)
소설은 가공의 이야기이다. 허구이기 때문에 슬퍼할 필요도, 괴로워할 필요도 사실은 없다. 『나무를 훔친 남자』의 저자 양지윤은 〈작가의 말〉을 통해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가 이 책 한 권에 녹아 들어가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거짓말’은 세상을 견디는 방식이며, 그가 쓰는 소설은 현실보다 좀 더 낙관적인 거짓말이라고도 한다. 진짜가 아니지만 ‘진짜 같은 가짜’ 이야기, 인간과 삶에 대한 진실을 일깨워주는 소설 말이다. 독자들은 우리 자신이기도 할 인물들이 펼치는 여덟 편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로서의 패기와 따뜻함, 짜릿하고 전위적인 예술적 열정을 만날 수도 있다.
저자 : 양지윤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대기업에 입사해 8년간 영업팀에 근무하였으나 그만두고 현재는 소설을 쓰고 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것들에 관심이 있다. 익명의 존재들에 대한 글쓰기를 즐긴다. 록 음악을 즐겨 듣고 틈틈이 그림 전시도 보러 간다. 재미있게 살고 싶다.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