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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예찬 - 문학과 사회학의 대화
지그문트 바우만.리카르도 마체오 지음, 안규남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4년 9월
평점 :
이 책 『문학 예찬』은 유대계 폴란드 출신의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 한 세대 뒤인 이탈리아 문학 편집자로 유명한 리카르도 마체오가 주고 받은 편지를 근간으로 엮은 책이다. 이 책은 두 사람이 사회학과 문학의 역할에 대해 논의하면서 관련된 문화를 분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독자처럼 문학 이론이나 사회학 공부를 하지 않은 분들이 이해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 두 사람의 대화가 깊어지면서 은유와 심층적 지식이 자주 튀어 나와 쉽게 읽히지 않는다. 문학이나 사회학에 관련된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해하기가 어렵지만은 않다. 이유는 리카르도 마체오가 현대 사회의 다양한 현상을 질문으로 꺼내면 지그문트 바우만이 그에 답하는 서한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문학의 역할이나 사회학적 현상을 대하는 질문이 중심이 됐기에 응답자 역할을 하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사상이 문학을 중심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책의 표제어가 '문학 예찬'이 된 까닭이다. 다만 사회학자이자 세계적 석학인 지그문트 바우만이 쓴 편지 중에는 사회학의 역할과 문학과의 관계에 대해서 통찰력 있는 응답에 오늘날 문학의 위기라 일컬어지는 시기에 매우 의미 있는 문학의 미래를 제시하는 글이 자주 눈에 띈다. 이 책의 부제 「문학과 사회학의 대화」로 정한 이유일 것이다.
인문적인 문학과 과학에 바탕을 둔 사회학이 매우 이질적인 분야로 여겨지는 가운데 현대에는 두 카테고리가 한데 묶여야 할 운명임을 슬며시 내비친다. 문학과 사회학은 비슷한 문제를 다루기도 하지만 한데 묶일 수 없는 각각의 영역을 가진 분야로 독창적 분야로 오랫동안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현대로 접어드는 시기에 두 개의 분야를 한데 묶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깨달음이 양쪽 분야 모두에서 발아한다. 이로써 문학과 사회학은 매우 논쟁적인 문제가 된다. 많은 논평가들이 문학과 사회학을 근본적으로 다른 분야로 보았지만, 바우만과 마체오는 이 두 분야가 공통의 목적과 주제로 함께 묶여 있다고 주장한다. 즉 문학과 사회학은 연구 방법과 결과를 제시하는 방식에서는 차이가 많을지라도 결코 그 목적까지 상반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두 저자(이하 저자)는 오히려 그 차이점 때문에 서로 보완적이고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는 것으로 본다.
소설가와 사회학자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자기 세계를 탐구하고 각기 다른 유형의 '데이터'를 찾고 생산하지만, 그 생산물에는 공통된 기원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들은 의제·발견·메시지의 내용 등에서 서로에게 자양분을 주며 의존한다. 새로운 감각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와 소비의 물신주의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그들은 근본적인 실존적 질문을 다시 공적 의제로 가져온다. 문학과 사회학이 상대의 연구 결과에 주의를 기울이고 계속 대화하며 협력할 때, 비로소 인간 조건의 진실이 드러난다. 문학과 사회학은 함께해야만 전기와 역사, 개인과 사회의 복잡한 얽힘을 풀고 밝혀내는 어려운 과제에 도전할 수 있다고 저자는 의견을 제시한다.
저자는 책의 〈머리말〉에서 문학과 사회학이 사명과 사회적 영향뿐만 아니라 탐구 영역, 주제, 소재도 공유한다는 주장을 제시하면서 이러한 주장이 옳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책을 펴낸다고 밝히고 있다. "문학과 사회학은 양자의 친족관계와 협력의 특징을 밝히려 시도할 때, '서로를 보완·보충하고 풍부하게 해준다. 문학과 사회학은 적대 관계는커녕(···) 경쟁 관계에도 있지 않다. 알건 모르건, 문학과 사회학은 같은 목적을 추구하고 그런 점에서 둘은 같은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에 따라 섣부른 판단이나 주입되거나 자신이 만들어낸 잘못된 생각들로 짜인 베일을 찢고 인간 조건의 수수께끼를 풀어내고자 하는 사회학자라면, 그리고 '시험관에서 태어나고 길러지는 호문쿨루스(homunculus)*의 오만하고 미심쩍은 '지식'으로 채워진 '진리'가 아니라 '진정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그 실마리를 프란츠 카프카, 로베르트 무질, 조르주 페랙, 밀란 쿤데라, 미셸 우엘베크 같은 작가들에서 찾는 것이 가장 좋다"고 강조한다. 문학과 사회학은 서로에게 자양분을 제공하고 또한 둘은 서로의 인식의 범위와 한계를 밝히고, 서로가 저지르는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협력한다고 역설한다.
*호문쿨루스(homunculus) : 르네상스 시대의 연술사 파라켈수스의 저작에 나오는 아주 작은 인간. 시험관 속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며 모든 지식을 갖춘 상태로 태어난다.
저자는 자신들이 주고받은 편지가 주로 사회학적 관심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문학 이론을 펼쳐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문학 이론의 장구한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고 말한다. 저자가 다루고자 한 것은 예술과 인문사회과학 간의 생생한 다면적 관계 자체라고 단언한다. 이에 따라 저자는 인간 조건에 대한 이 두 종류의 탐구가 공유하고 있는 목표, 서로에게 제공하는 자극, 서로 주고받는 것을 추적해 기록하기 위해 뜻을 함께했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기쁨과 슬픔, 기대와 좌절 등 인간의 세계-내-존재 방식들을 추적해 기록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어 문학과 사회학이라는 두 종류의 문화적 생산물은 각각 자기 영토에 들어오려는 모든 신청자들에게 엄격한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각기 유일무이한 정체성과 영토적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엄격하고 까다롭고 부담스러운 규정과 추방 조항을 성문화한다고 비판적 시선을 보인다. 규칙에의 순응이라는 기준에 따라 경계선 방책과 빗장을 엄청나게 높이 설치함으로써, 충분히 훈련되지 않았거나 계급 특권을 침식할 우려가 있는 신청자들은 아예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저자는 게오르그 루카치가 일찍이 1914년에 이러한 이원성을 멋진 표현으로 포착했다고 그의 문장을 인용한다. "예술은 항상 삶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한다. 형식의 창조는 불협화의 존재에 대한 가장 심원한 확인이다. (···) 그 존재가 완성된 형식 내에 있는 다른 장르들과는 대조적으로, 소설은 생성 과정에 있는 것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많은-아마도 대부분의-사회학적 연구는 완벽·최종·종결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루카치가 말하는 '다른 장르들'의 집단에 속한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또 사회학과 문학의 관계는 '형제나 자매간의 경쟁'에서 불 수 있는 온갖 특징들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비슷한 모굪를 추구하면서 비교 가능한 상이한 유형의 결과들을 근거로 판단·평가·인정·불인정을 피할 수 없는 존재들 사이에 협력과 경쟁이 혼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임을 강조한다. 소설과 사회학은 동일한 호기심의 산물로 비슷한 인식적 목적을 갖고 있다고도 주장한다. 이로써 소설가와 사회학자는 말하자면 공유주택에 산다고 비유한다.
이 책은 별도의 구분 없이 모두 12장(章)으로 구성돼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을 중심으로 각 장을 나눴다. 1장 「두 자매」, 2장 「문학을 통한 구원」, 3장 「진자와 칼비노의 비어 있는 증상」, 4장 「아버지 문제」, 5장 「문학과 공위기」, 6장 「블로그와 중개자의 소멸」, 7장 「우리 모두 자폐인이 되어 가는가?」, 8장 「21세기의 은유」, 9장 「트위터 문학의 위험성」, 10장 「마르고 습한」, 11장 「'일체화' 안에서의 건축」, 12장 「교육·문학·사회학」 등이다. 4장 「아버지 문제」는 마체오가 바우만에게 보낸 편지다. 마체오는 "오늘날 나약하거나 아이 같거나 부재한 아버지 안에 권위적인 존재로서의 아버지라는 옛 모델이 근근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머리를 잡는다. 마체오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내용 중 '아버지'의 이미지와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2판 〈서문〉의 내용을 교차 제시하며 아버지의 영향을 이야기한다. 강한 아버지, 책임감 있는 아버지로 듣고 보고 자랐는데 지금은 자식의 입장이 많이 변했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자식은 모욕을 당하고도 가만있는 어머니는 거부하지 않지만, 모육을 당하고도 가만있는 아버지는 자식으로부터 "아버지답게 행동하고 있지 않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 그리고 사랑이나 정의만이 아니라 완력이나 폭력도 사회관계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자식은 "아버지가 공정과 사랑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강함의 측면에서도 자신과 가깝다"고 느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서양의 전통은 패자로 간주되는 공정한 아버지보다 세상 사람들에게 승리한 불공정한 아버지를 선호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역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리어왕』에서 힘과 위신을 잃고 버림받은 아버지의 원형을 창조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p.89)
저자는 1968년 운동의 결과 중 하나는 아버지의 공격성 약화라고 지적한다. 68세대는 권위적인 아버지상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아버지는 지배적인 공격성을 버리고 다정하고 이해심 많은 친구로 자식들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약한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강한' 아버지를 찾는 경향도 남아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권위는 민주화되었고, 아버지의 권력은 많은 측면에서 해체되었다. 하지만 수천 년 동안 잠재의식을 지배해 온 것이 몇 세대 만에 제거될 수는 없다. 아버지가 부재하고 새로운 질서로 전환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서구 사회는 적어도 잠재의식적으로는 여전히 가부장적 사회로 남아 있다."(luigi Zoja, 2 gesto, 2,000)
사회학(sociology)은 인간 사회와 인간의 사회적 행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프랑스의 대표적 지식인인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가 창시했다. 콩트는 인간 사회도 자연세계처럼 자연과학적 방법과 동일하게 연구될 수 있다고 보고, 인간 사회를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새로운 과학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사회학을 ‘사회 질서와 진보의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명명했다. 콩트는 청년 시대에 생시몽의 비서였다. 그의 '실증주의 철학'은 현상의 표면적인 모습을 기술하는 것에 한정시키는 것을 '과학'이라 칭하기 때문에 자연과학이 축적한 대량의 데이터를 종합하는 데 노력했다. 그러나 그 입장은 결국, 주관적 관념론과 불가지론이 결합한 것으로, 그 종합도 정당한 것이라 할 수 없었다.
그의 견지는 자본주의를 인간역사의 정점으로 보고, 그 조화를 달성하는 길을 새로운 종교(인류교)의 선전에 있다고 해, 19세기 전반에 이미 고양된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노동계급의 운동, 이를 유지하는 사상에 대하여, 자본주의를 수호한 인물이다. 그의 사회학은 오늘날 마르크스와 루카치 등이 내세운 이론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평가되고 있다. 후에 마르쿠제는 그의 저서 『이성과 혁명』에서 콩트가 헤겔을 파시스트 국가 건설에 도움을 주었다고 주장한 것을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문학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법 가운데 널리 알려진 것으로 마르크스주의 비평이 있다.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은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와 독일의 사회주의자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논리에 이론상의 근거를 두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비평은 작가가 사고하고 작품의 방향을 결정하는 경제적·계급적·이데올로기적 요소에 관심을 두는 한편, 그 결과물인 문학작품과 마르크스주의자가 그 시대의 사회적 현실로 보는 것과의 관련성에 특히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비평은 보통 전형적인 문학의 모방이론에 입각한다. 즉, 그것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라고 불리는 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작가가 무엇을 모방해야 하는가를 말해 준다.(두산백과)
이 책의 번역자 안규남은 책 뒷 부분에서 〈옮긴이의 말〉을 통해 "바우만은 체험의 중요성을 역설하기에 그의 사회학적 작업에 문학과 예술이 중요한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하다"고 말한다. 문학과 예술은 사회과학과 달리 대상의 진리를 그들의 실제 삶의 모습 속에서 포착하기 위해 개인이 주어진 상황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예리하고 구체적으로 표현·전달하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개인의 삶, 각자의 전기가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의 구조적 과정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학·예술과 사회학은 서로 대화하고 협력해야 하는 형제 또는 쌍둥이라고까지 말한다고 밝히고 있다.
"근본적인 실존적 문제를 공적 의제로 만드는 것이 문학과 사회학의 공동 소명이다. 이런 문제를 찾아 제시한다는 점에서 문학과 사회학은 일치한다. 즉 둘은 끊임없이 서로 보완하고 자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p.265) - 12장 「교육·문학·사회학」 중에서
저자 :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년 폴란드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도피했다가 소련군이 지휘하는 ‘폴란드의용군’에 가담해 바르샤바로 귀환했다. ‘폴란드사회과학원’에서 사회학을, 후일 바르샤바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54년에 바르샤바대학교 강사가 되었고,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활동했다. 1968년에 공산당이 주도한 반유대 캠페인의 절정기에 교수직을 잃고 국적을 박탈당한 채 조국을 떠나 이스라엘 텔아비브대학교에서 잠시 가르치다 1971년에 리즈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하며 영국에 정착했다. 1989년에 발표한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며, 1990년에 정년퇴직 후 탈근대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며 명성을 쌓았고, 2000년대에는 현대 사회의 유동성과 인간의 조건을 분석하는 ‘유동하는 현대Liquid Modernity’ 시리즈로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다. 1992년에 사회학 및 사회과학 부문 유럽 아말피상을, 1998년에는 아도르노상을 수상했고, 2010년에는 ‘지금 유럽 사상을 대표하는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아스투리아스상을 수상했다. 2016년에 최후의 서한집 『문학 예찬In Praise of Literature』을 내고, 2017년 1월에 타계했다. 주요 저서로 『액체 현대』 『리퀴드 러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소비사회와 교육을 말하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레트로토피아』 등이 있다.
저자 : 리카르도 마체오
1955년 이탈리아 레체에서 태어났다. 볼로냐대학교 현대 외국어 및 문학과를 수석 졸업한 후 아스픽 모데나에서 상담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오랫동안 에릭슨 출판사의 편집장으로 지내다가 2014년 은퇴했다. 지그문트 바우만과 함께 『교육에 관하여』 『문학 예찬』 등을 썼다.
역자 : 안규남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칼 마르크스』 『간디 평전』 『민주주의의 불만』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위기의 국가』 『인간의 조건』 『평등은 없다』 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으며, 『철학 대사전』 편찬에도 참여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