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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 두런두런
신평 지음 / 새빛 / 2024년 9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이 책 『시골살이 두런두런』은 저자 신평 변호사의 '시골살이'에 대한 소회를 시와 산문으로 쓴 것을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은 자신이 수십 년 간 몸담았던 법조계와 대학 교수직을 떠나 조용히 노년생활을 하면서 떠오르는 단상이나 계절 변화에 따른 시골 풍경을 담담히 써낸 것이다. 요즘 같은 '100세 시대'에 저자의 '노년생활'이라고 표현한 독자의 잘못일 수 있으니 양해를 구한다. 이 책은 시와 산문이 번갈아 가며 페이지를 채우고 있지만 산문은 시의 해설이라기보다 그 시와 관련해 가진 단상 형태의 독백에 가깝다. 어쩌면 과거의 삶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별로 시일의 선후에 따라 그대로 배열하여 계절의 변화를 순차적으로 담으려고 했다."며 "오래된 시골살이의 이모저모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혹은 지금도 여전히 잊지 못하는 그리운 사람에게 속삭이듯이 두런두런 말하려고 했다."고 〈서문〉을 대신한 〈작가의 말〉을 통해 밝히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시와 산문들에는 대체로 시골살이의 서정적이면서도 현실에 기반한 의식이 내장되어 있다. 농사지으며 사는 삶의 생생한 모습, 그리고 내면에 간직해온 사상, 세상을 향한 시선의 방향을 밝히고 있다.
저자는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잘 산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에 관해 끈질기게 의문을 던진다. 도시 생활이든 농촌 생활이든 우리의 삶은 행복을 추구하며, 행복한 삶이란 어떤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것인가를 끝없이 탐구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늘과 구름과 별,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과 여린 풀길, 잠자리, 나비가 어우러지며 답을 찾는 데 도움을 준다고 글에서 밝히지만 중간중간 도시 생활 때의 기억을 드러내기도 한다. 판사, 교수, 변호사 등 남이 부러워할 직업을 두루 거친 지식인의 삶의 기억에서 도시 생활이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니라는 독자의 느낌이다. 저자의 글 안에는 도시 생활 때의 회한이 언뜻언뜻 비치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도시 생활의 포부나 삶의 목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일까?
저자는 대학을 졸업하고 법에 대한 빈틈 없는 지식과 냉철한 이성이 요구되는 사법시험을 통해 판사직에 임용된다.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후 판사직을 수행했으나 판사 재임용 과정에서 탈락하는 등 순탄치 않은 법조계 생활을 시작했다.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됐다는 이야기는 앞으로 판사직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고 한다. 법관 연임제도는 제헌 헌법 제79조부터 규정되어 있었다. 다만 1987년 개헌 때 '법원조직법'으로 옮겨갔다. 이 법에 따라 "법관은 헌법상 10년마다 재임용 심사를 받아 연임할 수 있으며, 국회의 탄핵소추나 금고 이상의 형사 처벌을 받지 않는 한 법관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장되어 있다. 법원조직법에 따라 10년의 임기가 만료된 판사는 인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대법관회의의 재임용 동의를 받도록 되어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 제도는 결격 사유도 법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저자의 경우 결격 사유 중 한 개의 조항에 걸렸다고 재임용 때 탈락됐다고 한다. 정확한 이유는 독자로서 알 수 없으나 대개의 경우 정치적 성향을 문제 삼는다고 알려져 있다.
이로써 저자의 판사직 수행은 끝났지만 고향인 대구로 옮겨 변호사로 개업했다. 그러나 대법원장과 싸우다 나왔다는 꼬리표가 붙은 저자에게 개업 초기엔 사건 의뢰가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고 알려진다. 개인적 일과 재임용 탈락으로 우울증까지 얻을 정도로 힘들었으나 절치부심 노력한 끝에 대구경북 지역에서 사건 수임 1위를 기록하는 대단한 능력을 인정받은 듯하다. 이를 계기로 대학 교수직 제안도 있어서, 변호사직을 뒤로 하고 수입이 10분의 1 정도인 교수직을 수락했다. 어쩌면 돈에 대한 미련보다는 법에 대한 열정이 더 강했기 때문이 아닐까? 독자는 이해한다. 아무튼 낙향 후 변호사 생활과 대학 교수직을 하면서 심적인 안정과 법에 대한 혜안, 깊은 경륜을 쌓는 시기로 볼 수도 있다는 독자의 생각이다. 그의 글에서 세상을 향한 따스함과 어려움에 대한 극복의 집념이 곳곳에서 드러나는 까닭이다. 저자의 글에서 독자들은 삶에서 받는 무자비한 할퀸 상처에 대해 위로받을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나아가서 거친 삶에 길들여 있는 우리들을 평온하게 가라앉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잔잔한 물가에 앉아 눈물 속에 떠오르는 행복의 모습을 바라볼 수도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시와 산문은 사실 조금은 독특하다. 시만 실린 시집, 시와 그림이 함께 실린 시화집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간혹 시와 더불어 '시작 노트'라는 산문을 곁들이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시에 대한 설명이나 덧붙인 감상이다. 그러나 이 책 『시골살이 두런두런』에 실린 산문은 시에 대한 설명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별도'의 에세이다. 독자가 '별도'의 산문이라고 지적하는 데는 시작 노트의 성격을 벗어난 산문들이 많다는 점에서다.
「월성 산책」이란 시에 대한 산문 하나를 여기에 적어본다.
느릿느릿 저녁답
경주 남천에
노을을 지고 가면
월정교 물소리
원효 스님 염불 소리
코 끝 매운 환영에 젖어
이리저리 헤매는데
연꽃 가득 월성 해자에
달 그림자 길게 끌더니
풍덩 물 속으로 빠진다
신라가 멸망한 지 천년을 훌쩍 지났으나, 경주에서 그래도 옛날 신라시대의 분위기를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 월성 주변입니다. / 최근 월정교를 정비해 놓았는데 야경이 특히 멋있습니다. 월정교는 남천을 건너는 다리로 월성의 입구입니다. 옛날 원효 스님이 연인 요석공주를 만나기 위하여 바로 이 다리를 건너 요석궁으로 갔습니다. / 아내는 어린 시절 남천에서 멱을 감고 놀았다고 하는데, 그 추억이 그리고 지금도 그 앞을 오갈 수 있는 것이 참 부럽습니다. 대구의 제 고향은 급격한 도시화로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다시 찾아갈 가능성마저 빼앗겨버린 고약한 실향민입니다.(p.49)
저자에 대해, 그의 이력을 아는 분들은 '그는 시대의 현자인가? 아니면 단순한 삶의 루저(loser)인가?'로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저자를 현세의 ‘태공망’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고, 아니다, 그는 시대와의 불화를 견디지 못하고 시골에서 은둔하는 자에 불과하다는 사람도 있다는 것. 아주 상반된 평가를 받기도 하는 저자가 시와 산문을 합하여 출간한 이 책은 사계절의 변화에 맞춰 시골살이를 엮어낸 조금은 유별난 형식의 책이라는 게 출판사 측의 설명이다. ‘시’만으로 치면 저자의 네 번째 시집이다.
출판사에 따르면 저자의 시와 산문은 어렵지 않은 어구와 단정하고 정갈한 수사, 그리고 풍부한 여백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맑은 지성과 학자적 고고함을 따스하게 표현한다. 흔들리는 자아를 다독여 자아를 통합하고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큰 물줄기에 도달하는 모습을 잘 녹여 낸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다만 시와 산문이 따라붙은 점은 기존의 시집과는 조금은 결이 다르다고 말한다. 이 책에 드러난 저자의 시와 산문의 서정은 현실을 초월해 순수의 진공상태에 있는 게 아니다. 시인과 우리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며 올곧게 살아온 시간, 경륜에서 나온 현실적이며 사실적인 서정이다. 그런 명징한 서정이기에 올곧고 힘이 세다는 게 출판사 측은 강조한다. 저자의 〈작가의 말〉에도 과거를 좋은 추억으로 기억하는 한편 반성과 참회의 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나이가 드니 재빠른 인지의 능력은 내려가나, 자신이 걸어온 길을 좀 더 뚜렷하게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이 생기는 듯합니다. 제가 저지른 과오가, 의도를 했건 아니면 의식하지 못한 채이건 간에 정리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저는 이 과오들을 불편하지만 좀 더 솔직히 바라보며 반성과 참회의 시간을 가져왔습니다. 저는 국가의 통계상 농업인으로 등록된 사람입니다. 농업협동조합에 조합원이기도 하고요. 과거에는 논농사도 지었지만 지금은 집 둘레에 펼쳐진 500평 가량의 밭농사만 합니다. 제초제를 비롯한 농약을 쓰지 않고 비닐 멀칭을 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눈에 보던 고향 대구의 평화로운 전원풍경을 재현하려는 것이 어쩌면 제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온갖 작물이 자라고, 또 여러 종류의 유실수들이 있습니다.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 밤의 별이 있고 바람과 나비와 잠자리, 새가 있으며, 간밤에 내린 논이 살포시 쌓이고 어떤 때는 거센 비가 내리기도 하는 곳입니다. 이런 것들이 서로 어우러져 저와 제 아내에게는 이곳이 작은 파라다이스입니다. 종생(終生)의 아름다운 터입니다."(p.10)
이 책은 계절을 나타낸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4부로 구성돼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계절이 지나가는 순리처럼 책을 만들고 싶었던 저자의 바람일 터다. 봄을 나타내는 시어가 많이 띈다. 「다시 일어서기」, 「봄비」, 「벚꽃 무렵」, 「모란 꽃」, 「오월 어느 날」, 「그리움」, 「종일 내리는 비」 등이다. 2부 여름에는 「여름날의 고백」, 「능소화」, 「매미의 꿈」, 「나팔꽃」, 「썬크림」, 「논일 소묘」 등이 눈길을 끈다. 3부는 가을의 서정이 드러난다. 「가을, 그대」, 「사람 살만한 곳」, 「가을나비」, 「가을 소리」, 「11월 풍경」, 「늦가을 일상」, 「추수」, 「늦가을」 등이 보인다. 4부 겨울엔 「겨울나무」, 「겨울 나그네」, 「겨울소리」, 「시를 쓰는 이유」, 「나이 들어보니」, 「노년의 빛」, 「눈 내리던 날」 등 겨울의 풍경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독자는 읽다가 「가을 소리」와 「겨울소리」에 주목해본다. 가을에도, 겨울에도 그만의 독특한 소리가 있는가? 시인은 가을의 '시끄러운 여운'에 '이마 주름살 하나 더 느는구나'라고 표현한다. 계절이 지는 느낌이 사람이 늙는 느낌과 비슷한 모양새다. 저자만 그렇게 느꼈을까? 어쩌면 대부분의 독자도 같은 느낌일 것이다. "만추가 되면 왠지 미리 쓸쓸해집니다. 곧 황량한 겨울이 닥쳐올 것을 짐작하니까 그렇습니다. 가을걷이가 다 끝나갑니다. 따다 남은 호두와 밤은 지붕 위에 콩콩 떨어지며 적막을 깹니다."
「겨울소리」는 무엇일까.
태양이 산마루를 넘어가며 빛을 잃고
산이 감추어둔 어둠이 어느새 산을 넘어와 세상에 퍼지고
어둠이 깐 정밀(靜謐-고요하고 편안함, 독자 주)의 숨소리가 굴뚝 연기 따라 낮은 하늘로 오르고
이제는 저 처절한 생존의 다툼이 잦아들길 기대하니(이하 생략)
"저울이 되면 뜬금없이 저 멀리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이 생각나는군요. 아버지는 저에게 작고 둥근 오봉(알루미늄으로 만든 탁자)에 저를 앉혀 공부하게 해놓고 라디오 연속극을 들었습니다. 〈섬마을 선생님〉 같은 것이었지요. 그런데 저 멀리 기차가 지나가며 내는 아련한 소리가 어린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라는 산문이 뒤따르고 있다. 저자에게는 가을의 소리든 겨울소리든 모두 추억의 소리인 듯 아득한 그림이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나이가 되어서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보면, 행복의 제1조건은 더 많은 것을 가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작고 소박한 것들에 만족하며 너그럽게 사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끝없는 가짐의 추구는 허무와 낙망의 심연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또 저자는 시골에서 매일 육체적인 노동으로 농사를 지으며 산다고 하더라도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선, 누구도 뭐랄 수 없는 하나의 독립된 존엄한 개체라고 주장한다. 그런 만큼 저자 또한 세상을 향해 열린 호흡을 하며 기꺼이 광대무변한 세계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기완성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고 싶다고 두런두런 이야기한다. 우리는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도록 태어났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경계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저자는 이 책에 담은 글을 통해 아직 창창한 날들을 가진 이들에게 조그마한 위안을 주고 싶어서이다. 그래서 독자들이 자신에게 남겨진, 훌륭한 삶을 향한 가능성을 과소평가하지 않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길 바란다. 우리 자신들의 참된 행복을 위한 공감이 이루어지고 그 동심원이 점점 더 널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저자의 소박한 바람이다.
저자는 “이 책이 과연 그런 의도에 맞게 되었을까요?”라고 스스로 묻기도 한다고 회고한다. 별 자신은 없지만 그렇게 하려고 애썼다는 점만은 이해받고 싶단다. 특히, 먼저 이 책을 읽은 독자는 왜 그가 한국 사회에서 최근 벌어져 온 여러 격랑의 고비를 거의 모두 정확하게 예견했는지를 이 책의 내용에서 유추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가진 ‘시대정신’에 대한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이 이 책에서 읽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시와 산문의 정서를 투영한 다수의 삽화는 시골 출신의 누구에게나 옛날 자신이 살았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그리움이 일 것이다.
저자 : 신평
30년 전,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아이들을 위하여 경주에 집을 짓고 이곳에서 농사를 시작하였다. 농토에 자기만의 작은 파라다이스를 만들어놓고 안분지족의 삶을 살려고 한다. 대구의 경북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서울, 인천, 대구, 경주의 법원에서 판사를 역임했다. 미국의 클리블랜드 주립대학, 중국의 런민(人民)대학 및 쩡파(政法)대학, 일본의 히토쯔바시(一橋)대학에서 연구생활을 하였으며,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외국재판관연구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경북대 로스쿨 교수, 한국헌법학회장, 한국교육법학회장, 앰네스티 법률가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고, 일본, 중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의 헌법학자들을 규합하여 아시아헌법포럼(The Asia Costitution Forum)을 창설했다. 대한민국 법률대상, 국회의장 공로장, 철우언론법상 등 수상했으며, 현재 공익사단법인 공정세상연구소 이사장 재직중이다. 시와 수필 두 부문에서 문단에 등단하였으며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중이다. 지금까지 시집으로 ‘산방에서’, ‘들판에 누워’, ‘작은 길’ 세 권을 출간했으며, 일송정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