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냉담 ㅣ 내일의 고전
김갑용 지음 / 소전서가 / 2024년 6월
평점 :
이 책의 표제어 냉담(apathy)은 영어 사전적 풀이로는 '무관심'을 뜻한다. 국어 사전에는 ① 태도나 마음씨가 동정심 없이 차가움. ② 어떤 대상에 흥미나 관심을 보이지 않음. 으로 풀이돼 있다.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 생활에서 "차갑고 냉담한 태도를 드러내다"는 사례로 쓸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감정의 부재를 일컫는 용어로 쓰인다. 냉담한 사람은 즐거움도 불쾌함도 경험하지 않는다. 냉담한 상태는 긴장이나 성마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권태와는 다르다. 냉담은 종종 정동 결핍이 심하고 오래 지속되거나 스트레스가 아주 심할 때 나타나는 최종적인 결과로 간주된다. 이것은 견딜 수 없는 유기(abandonment)의 감정이나 특히 전시(戰時)에 전멸의 위협에 대한 방어적 몸부림의 결과로 나타난다. 냉담한 개인은 대상 세계를 “포기”하는 분열성 성격으로 가정되기도 하지만, 분석작업에서는 무의식적 애착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는데, 이 사실은 방어적으로 부인되거나 부정된다.고 정신분석용어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이 책 『냉담』은 동정심과 죄의식 그리고 감정의 표현이 쇠약해진 한 남자가 거리에서 불명의 여자를 갑작스레 만나면서 벌어지는 내외부의 변화를 그리고 있다. 공동체 안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지키려 분투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밀도 있는 문장과 다양한 소설 기법으로 나타내고 있다. 진실을 찾아가는 자신의 운명이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알아채는 주인공의 모습은, 냉담하고 속물적인 공동체 안에서 삶의 불완전성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보기'가 된다. 저자 김갑용은 이 작품에서 지금까지 벼려 온 사고의 폭과 깊이를 발휘해 자신의 소설 경력 중 현재에만 쓸 수 있는 이야기를 쓴 뒤,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려 한다.
저자는 이 작품 뒷 부분에 「도래한 미래」라는 제목의 〈부록〉을 썼다. 이 글은 24페이지에 달한다. 〈작품 후기〉나 〈작가의 말〉로 보기에는 길다. 내용은 자작 해설로 추정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작품 구상 전후의 과정 및 작품 해설'로 기능하도록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자신의 '소설 쓰기'에 대한 배경과 취지에 대해 설명도 겸한다. 이 소설 작품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기 시작할 무렵, 거리에서 한 여자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한 남자의 내외부의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소설을 쓰지 못하는 남자는 그에게 끝까지 필요한 영감을 주는 '그녀'를 절대적으로 쫓는다. 이 소설은 작가와 소설 그리고 배경이 되는 도서관이 가진 이미지의 일탈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이상한 쾌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출간 후 예스24와 가진 서면 인터뷰에서 나타난 저자 김갑용의 답변을 중심으로 작품 해석의 몇 가지 단초를 찾을 수 있다. "2015년의 전염병 시기에 나는 오갈 데 없는 대학생이었다. 대학교 인근 지역의 감염자 발생으로 내려진 휴교령 때문에 텅 빈 캠퍼스 건물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숨어 지낸 적이 있었다. 그 며칠 동안 몹시 피폐해졌고 몇몇 극단적인 상상을 했다. 많은 사람이 전염병에 걸리고, 개인이 다수에게 쫓기고, 유폐되고, 격리 시설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상상이다. 『냉담』의 구상 초안은 2019년에 거의 마무리되었다. 당연히 2020년의 전염병 시기는 반영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2020년에 이르러 지난 상상보다 더한 현실이 엄습하면서, 내가 쓰고자 했던 내용의 배경이 더는 현재 지점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전염병이 끝나더라도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마스크를 다시 벗게 되더라도 우리는 앞으로 마스크의 영향 아래서 살 일만 남았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내 소설에 마스크를 씌워야만 했다."
그의 말대로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전염병이 심화되는 시기, 남자는 거리에서 만난 그녀와 한 집에서 살게 된다. 그는 언젠가 그녀와의 여행을 위해, 마스크를 쓴 날 사람들 사이에서 전쟁 같은 출퇴근을 견디고, 회사에서는 마스크 위에 떠오르는 동료들의 의심스런 눈초리를 견딘다. 그러나 어느 날, 그녀가 사라진다. 더 이상 집에 들어갈 수 없게 된 남자는 밤엔 거리를 배회하고, 새벽엔 직장 건물 층계참에서 잠을 잔다. 그렇게 CCTV가 추적하지 못한 사각지대 속의 남자는 역학 조사관에게 지독한 추궁을 당하고, 행방불명되어 어느새 '사라진 고리'가 된 그녀를 결국 찾지 못한 채, 격리된다. 그의 머릿속에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사라졌을 즈음, 남자는 한 도서관에 취직한다. 그런데 새롭고 낯선 그곳에서 남자는 기이한 광경을 목격한다. 관내의 노동자들이 '그녀'라고 부르는 존재를 마주한 것이다. 그곳의 그녀는 거대했고, 중심에 있었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봐요, 어르신. 사람을 찾습니다. 내 이야기를 들어 봐요."
나이가 지긋한 노인은 말 한마디마다 싹싹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내 어깨를 두드리기까지 했다. 자기가 이 바닥을 잘 안다며, 그녀를 찾으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인은 내가 그녀에게 지불한 액수를 상기하기를 권했다. 아! 마침 내게는 탕진할 돈이 있었다. 인근의 편의점 ATM 기기에서 두어 번에 걸쳐 최대한도로 현금을 인출해 노인에게 건넸다. 빗방울이 툭툭 떨어졌다."(p.93)
소설 속에는 '소설이 사라진 미래의 마지막 도서관'이 나온다. 이 도서관은 『냉담』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저자가 상상해 왔던, 그러니까 저자의 머릿속 '바벨의 도서관' 같은 공간이었다. 저자는 미셸 푸코를 인용한다. 푸코는 "도서관이 헤테로피아(Heterotopia)적인 속성을 지닌다"고 말한 적 있다. "모든 시간, 모든 시대, 모든 형태와 모든 취향을 하나의 장소 안에 가두어 놓으려는 의지, 마치 이 공간 자체는 확실히 시간 바깥에 있을 수 있다는 듯 모든 시간의 공간을 구축하려는 발상"이 근대에 이르러 도서관에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냉담』의 '이곳 도서관'은 도서관의 이러한 속성이 노골적으로 불거진 공간이다. 먼 미래가 왜 내게 멀게 느껴지느냐면, 소설이 더는 쓰이지 않을 무렵이라는, 곧 도래할 테지만 현재의 내가 체감하기 힘든 전제가 함께하기 때문이다. 그때는 모든 소설이 도서관에 갇혀 있을 것이다. 도서관은 그야말로 소설의 공동묘지가 된다. 그렇게 소설이 옛 유물 신세로 전락한다면, 더는 쓰이지 않게 된 그 연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소설이라는 장르의 마지막을 상상하며 소설을 쓴다. 사람이 평생 죽음을 전제하며 살 듯이.
그에게 이곳 도서관은 새롭고 낯설었다. 더는 기시감이 없었다. 여느 도서관과는 달리 공공을 위하지 않고 한 개인만을 위하고 반영한 장소라는 특이적 정체성이 전염병으로 인한 무기한 휴관에 힘입어 여실히 드러났다. 내부가 한 사람의 의지와 의도만으로 축조된 공간으로 여겨지는 점을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사용이 아니라 보이기 위한 공간임을 이곳 도서관 사람들은 아주 잘 이해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보안 요원들은 도서관을 지키려고 이곳에 왔다기보다는 내부에서 벌어지는 무엇을 가리기 위해서 역할극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해도, 도서관이라는 공간과 내부 구성원이 이곳에 도사리는 무엇을 숨긴다고 확실히 판단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건 바로 이 공간과 구성원들이 이면 없이 얄팍해 보인다는 것이었다.(p.171~172)
1부와 2부, 그리고 그사이와 뒤에 붙은 두 짧은 소설 속에서까지 '그녀'를 변주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그 정체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켜 뒷모습만 남기고 사라지는 그녀를 끝까지 따라가게 한다. 그녀라는 상징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촘촘히 구성된 세계, 즉 꿈속의 꿈, 소설 속의 소설로 중첩되고 이어진 복잡다기한 세계는 자신의 존재 의미와 진정한 진실을 찾아나서는 한 인간의 운명, 즉 영육의 죽음 위에 포개진다. 남자는 선(善)과 진정성이 결여된, 어쩔 수 없이 관습적이고 속물적인 공동체를 태생적으로 견딜 수 없다.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제도화된 가식의 세계에서 인간은 진심을 다하지 않는다. 수많은 예식과 인사치레가 불가피한 그곳에는 본능적으로 냉담이 깃들어 있다. 그들은 무관심하고, 동정심을 잃어버리고, 죄의식을 회피하고, 감정을 숨겨 자신을 보호한다. 남자는 그곳에서 빠져나와 진정성의 보증자가 되고자 한다.
남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서 끊임없이 진실을 찾으려는 '소설가'이다. 하지만 진실이 입 밖으로 새어나와 공기 중에 노출된 순간 그것은, 진실한 진실이 될 수 없다. 그때부터 가짜 진실을 감추기 위한 연기와 가면이 생성된다. 남자는 자신의 소설에 진실을 담을 수 없음에 계속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반성한다. 진정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공동체'에 속한 다수의 사람들이 비밀하게 느끼지만 절대 드러내지 않는 그 부끄러움을, 남자는 그들의 몫까지 대신하여 느낀다.
소설가인 남자는 진실의 추구가 실패할 것임을 예감하면서도, 진실에 다가설 수 없다는 죄의식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는 독자 앞에서 결백하고자 하고, 자신의 문학에게도 당당한 주인이 되고자 하는 소설가의 운명이다. 진정한 소설 쓰기는 결국 자신을 소각해 버림으로써 예술이 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결국 『냉담』의 작가는 남자에게 죽음을 선고한다. 생존하기 위해 냉담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우리는 이 속물성을 벗어날 수 없다고, 어차피 삶의 끝은 죽음이라고 냉소하는 이 시대에 『냉담』은 이 익명의 남자를 '보기'로 보여 준다. 우리는 소설로서 이 냉담한 시기를 견뎌낼 수 있을까? 이 시대의 필연적인 숙명인 냉담의 다음 단계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냉담』을 통해 던지는 작가의 질문은 그것이 아닐까.
앞서 언급한 〈부록〉 「도래한 미래」의 서두는 "내가 의무 교육을 받던 새천년 전후 무렵에는 첨단 정보 통신 기술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토막글이 교과서나 여타 간행물에 흔했다. 분명 지면에 따라 글쓴이도 제각각 달랐을 텐데, 근미래를 사는 가상 인물의 하루로 첫 문단을 시작하는 점이나 주제, 논조, 미래상이 엇비슷해 나는 마치 한 사람 글을 반복하여 읽은 듯 하나의 인상만을 선명히 기억한다. 특히 첫 문단에 등장하는 가상 인물에 관해서는 굳이 옛날 지면을 뒤적이지 않아도 특유의 전형성을 깬다고 자신한다. 추측컨대 가상 인물은 이삼십 대 연령 중산층 독신이고 화이트칼라다. 이름은 저마다 달라도 당시 기준으로 세련되고 도회적인 인상을 주려다 보니 작위적인 느낌이 역력하다."(p.294)
저자는 지금 자신이 당시(마스크를 쓰기 시작하던 시기-이 글을 쓰고 마치던 시기)에 예견한 근미래 부근을 사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 당시 첨단이던 정보 통신 기술들은 대부분 상용화되었고 핸드폰 없이는 제때 출근도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토막글 속 가상의 그처럼 사는 건 아니다. 그는 자기 육신 무게를 모르는 듯 생활하지만 나는 나 자신의 무게를 압도적으로 느낀다. 미래에는 없고 현재에 있는 나라는 육체, 그러니까 실체 말이다. 저자는 가상의 그 같은 윤택한 생활을 원한다는 사실은 당연하다고 밝힌다. 깡마른 육체를 중력으로 지탱하는 일이 더할 나위 없이 지긋지긋하다. 동시에 내가 짊어질 게 없다진다는 가능성에도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 메타버스라는 용어가 한창 유행했을 무렵, 머지않아 가상이 현실을 대체하리라는 매체들의 호들갑에 저자는 두려움을 넘어 숨 막힘을 느꼈다고 털어놓는다. 어릴 적 죽음을 떠올렸을 때 '나'라는 실체가 사라진다는 예감에 형용할 길 없이 막막했듯이.
저자의 비유는 극단적이기는커녕 지극히 걸맞다. 첨단 과학의 미래가 얼마나 빨리 다가오든 간에, 거기에 저자는 없다고 단정한다. 마치 죽음 뒤에 아무도 없듯이 도래한 미래에 '나'는 없을 것이다. 나의 현재가 지난날들의 미래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앞 문장을 쓸 때 나는 건넛방에서 잠든 동거인이 기침하는 메마른 소리를 듣는 중이었다. 근 몇 년간 동거인은 기침을 멈추지 못하였다. 이런 내용을 기술하는 저자는, 과거의 근미래에 해당하는 지금과는 다른 자아를 말하는 것 같다.
저자의 말 중에는 결정적 추인이 따른다. "여기 쓰인 동거인은 실제라기보다는 당시 내가 사로잡혔던, 동거인을 바라보는 관점이다."(p.312) 이 소설의 구성에 대해 앞서 잠깐 언급을 했지만 이 작품은 특이한 구성을 갖고 있다. 오롯이 한 권의 장편 소설이지만 마치 단편의 연속인 듯한 느낌으로 1, 2부로 나뉜 뒤 각 부를 또 19개의 제목을 붙였다. 이와 함께 19개의 글로 파편화된 이후에 각 부의 뒷 부분에 두 개의 별도의 글 「벽의 틈새」, 「도래한 미래」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인터뷰에 실린 내용을 여기에 인용한다.
"나는 최대한 잘게 쪼개고 싶었다. 많은 소제목을 갖기를, 각 소제목에 할당된 내용의 끝마다 매번 새로운 충격이 나타나기를, 그 어떤 소설보다 클라이맥스가 많은 형식이기를 바랐다. 여기서 쇼팽의 녹턴이 실마리가 되었다. 쇼팽의 녹턴은 정규 번호가 붙은 열아홉 곡과 그 외 두 곡으로 분류된다. 한 연주자가 쇼팽의 전집을 녹음한다면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스물한 곡을 모두 녹음하거나, 정규 번호가 부여되지 않은 두 곡을 제외한 나머지 열아홉 곡만을 녹음하는 것이다. 재밌는 발상이 떠올랐다. 만약 장편소설에 본문 외의 부속 원고가 두 편 있는데, 이 두 편은 본문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서도, 책 내에서 아무 쓸모가 없어서도 안 된다. 동시에 본문과 함께 어우러져 한 권의 책을 이뤄야 한다."
저자는, 나아가 독자는 이 한 권의 책을 어떤 식으로 구분 짓게 될까? 본문과 부속 원고 두 편을 하나의 소설로 볼까, 아니면 한 편의 장편소설과 두 편의 단편소설로 분명히 구분 지어 바라볼까? 그리함으로써 『냉담』은 열아홉 개의 소제목을 가진 본문과 부속 원고 두 편을 갖추게 된 것이다.
저자 : 김갑용
빈틈없는 구성과 마음 깊은 곳을 찌르는 심중한 문장들 사이로 인간 삶의 불완전성과 무지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는 소설가. 1990년 대구에서 태어나 아산에서 자랐다. 10대 때부터 장편소설을 썼고, 201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슬픈 온대」가 당선되어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소설에 담는다는 불가능성에 도전하고 절망하는 이들이 주인공인 8편의 단편 소설집 『토성의 겨울』(2022)이 첫 책이다.
『냉담』은 그의 첫 장편소설로 동정심과 죄의식 그리고 감정의 표현이 쇠약해진 한 남자가 거리에서 불명의 여자를 갑작스레 만나면서 벌어지는 내외부의 변화를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은 겉으로는 공동체를 잠식해 가는 사회에 스민 냉담성에 관한 화두를 던지고 있지만, 독자는 문학에 냉담한 이 시대를 견디는 소설가의 고귀한 분투를 같이 겪게 될 것이고, 결국 자신이 찾고자 하는 진정한 가치와 진실에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과정에 서 있게 될 것이다. 작가는 <소설에서 끝내 말하지 못하는 진실>을 해방시킴으로써 그 진실을 독자로 하여금 마주하게 한다. 그 진실은 모두에게 유익할 리 없을 것이고, 누구에게나 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는 두 인물을 축으로 하는 장편소설을 구상 중이다. 『냉담』이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간 한 사람을 다루었다면, 차기작에서는 두 사람의 이야기, 즉 이원적 관계에서터 출발하여 세상과 공동체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