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발견 - 사랑을 떠나보내고 다시 사랑하는 법
캐스린 슐츠 지음, 한유주 옮김 / 반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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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상실과 발견』은 우리 일상의 경험이 때론 삶의 전부를 흔들수도 있고, 때론 삶의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는 상반된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았다. 이 책은 표제어부터 상반된 개념의 단어를 배치시킴으로써 책의 내용 이해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저자 캐스린 슐츠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나보내기 얼마 전, 결혼하게 될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누구나 언젠가 한 번은 하게 되는 경험, 사별과 만남이라는 경험을 거의 동시에 겪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저자 슐츠는 우리의 삶이 온통 상실과 발견으로 빚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밝힌다. 

우리는 지갑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사랑하는 가족을 죽음으로 잃기도 한다. 또 네 잎 클로버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평생의 반려자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 책 『상실과 발견』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안내서이자, 아주 평범한 경험 속의 빛나는 경이를 발견하는 섬세하고 따뜻한 에세이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죽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들이 현혹적이게만 느껴질 뿐 위안이 되지는 않는다고 말머리를 잡는다. 첫 문장에서 저자는 "나는 죽음을 완곡하게 이르는 표현들이 늘 싫었다."고 강한 톤으로 썼다. '돌아가셨다(passed away)'라거나 '더는 우리 곁에 없다(no longer with us)', '세상을 떠났다(departed)' 같은 표현들은 비록 선의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내게는 위안이 된 적이 전혀 없다. 이런 표현들은 요령껏 말한다는 미명으로 죽음의 충격적인 둔탁함을 외면하고,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아름다움이나 그리움을 불러내기보다 안전함과 친숙함을 택하는데, 내게 그런 선택은 언어적으로 회피하려는 것처럼, 얼버무리는 것처럼 여겨진다."고 강조한다. 

독자가 영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지만 무슨 뜻인지 저자의 내용이 그대로 와서 가슴에 담긴다. 독자의 경험으로도 저자의 말에 공감이 가기 때문이다. 독자도 가족의 죽음을 경험했고, 또 친한 지인의 문상을 가서도 저자의 생각과 비슷한 경험이 많았다. 위로의 말을 해야 할 때는 적절한 단어들을 찾지 못했고, 반대로 누군가의 위로를 받을 때도 상대의 모습에서 느껴진다. 그냥 그 모습 자체로 서로 알기에 서로 절을 함으로써 말을 삼가는 것을 암묵적으로 해왔다. 저자의 비난에 가까울 정도의 무게감으로 '전혀 위로되지 않은 말'에 대한 폭격에 독자가 쉽게 공감하고 동의하는 것은, 동서양의 문화 차이가 있지만 적절한 말이 없을 경우 차라리 우리의 형식처럼 '말 없는 맞절'이 효과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가족의 사망은 사실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공황 상태에 빠뜨리기도 한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고, 고인의 체취가 아직 남겨진 집에서 그가 쓰던 물건을 바라보며 극한의 슬픔을 참아내려는 사람들은 쉽게 패닉 상태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상태를 오랫동안 홀로 감내해야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독자의 경험으로 볼 때는 적어도 우리의 일상이 가족의 죽음을 애도할 그렇게 여유 있는 시간을 내주지 않는다. 저자의 경우 아버지가 중환자실로 옮겨진 다음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어가는 동안, 저자의 직장에서 비밀번호를 변경하지 않으면 이메일에 접근할 수 없다는 자동 경고 메시지들을 연달아 보냈다고 한다. 이 규칙적인 메시지들은 저자의 접근 권한이 열흘 안에, 아흐레 안에, 여드레 안에 만료되리라는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저자는 결국 접근 권한을 잃었고, 아버지가 사망한 뒤 고객센터 직원에게 이 문제를 제때 처리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느라 "제가 지난주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라는 말을 했다. 상을 치르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어서 이런 표현이 나왔는데, 죽음을 에둘러 말하는 여느 말과는 달리 면피한다거나 공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저 슬픔 그 자체처럼 단순하고, 애달프고, 쓸쓸하게 들렸다는 것. 사별이 남긴 황폐함과 혼란스러움에 맞춤한 말이었다고 '발견'을 언급한다.

저자는 이후에 '잃었다(lost)'란 말이 그토록 적확하게 느껴졌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밝힌다. 저자에 따르면 '잃다(to lose)'라는 동사는 '슬픔(sorrow)'에 그 뿌리를 곧게 뻗고 있었고, '허망한(forlorn)'이 품은 '적적한(lorn)'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동사는 사별을 의미하는 고대 영어 단어에서 나왔는데, 그 단어는 분리 혹은 쪼개기를 뜻하는 더 오래된 단어에 기인한다. 대상이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현대적 의미는 그 후인 13세기에 출현했고, 그로부터 100여 년 뒤, '패배하다(to lose)는 승리하지 못하고 실패했다는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우리가 실성하기(lose our hearts)' 시작한 건 16세기였고, 17세기에는 실의에 빠지게(lose our hearts)'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잃을 수 있는 것들의 연결고리가 우리 자신의 삶과 서로의 삶으로부터 시작되어 꾸준히 확장되어온 것이다. 

저자는 상실에 관한 생각에 잠기고 어떤 유형의 상실은 사실상 긍정적이라는 점을 깨닫고 놀랐다고 털어놓는다. 상실은 살면서 경험하는 수많은 낙담의 즐거운 예외에 속한다는 저자는 상실의 극단적인 한계까지 더듬어 본질에 다가간다. 이런 사항들은 본질적이고 탐욕스러운 성질이다.



상실의 영역을 확대해 들어가고 본질에 대해 사유한 가운데 어떤 상실은 왜 그토록 충격적으로 여겨지는가?에 대해 탐구해 들어간다. 저자의 가계(家係)를 중심으로 가까운 조상들의 삶을 역추적하고 사유를 지속한다. 저자 캐스린 슐츠는 근대사에서 벌어졌던 가장 전면적이고 끔찍한 끔찍한 상실을 야기한 사건인 제2차 세계대전 중 자신의 할머니는 폴란드 중부 우치 외곽의 부락에서 나고 자랐다. 그곳은 전쟁 전에도 유대인으로 살아가기 가장 위협적인 장소였다고 알려진 곳이란 말을 전한다. 저자의 아버지가 태어나 아직 걸음마를 떼지도 않았을 무렵에 키부츠*로 보내져 몇 년간 낯선 이들 사이에서 성장했다. 아버지가 그곳에 있는 동안, 그의 가족에게는 앞으로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될 중대한 상실이 두 번 일어났다. 먼저 그의 친부가 사망했고, 어머니는 재혼했다. 이 사실을 아버지는 20년이 훌쩍 지난 후에야 당신이 결혼하던 날 밤에 알게 되었다. 두 번째는 폴란드에 남았던 할머니의 가족 전부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것이었다. 

할머니의 부모는 거기서 사망했고, 열 명의 형제 중 아홉 명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1월 27일, 수용소가 해방되었을 때 제일 맏이였던 저자의 고모할머니 에지아만이 살아서 걸어 나왔다. 이런 사실이 언제, 혹은 어떻게 할머니에게 전달되었는지, 텔아비브까지 이름별로 하나씩 도착했을 나머지 소식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저자로서는 알지 못한다. 할머니가 우치를 떠날 때 그곳에는 거의 25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작 9,000여 명 정도만이 전쟁에서 살아 남았다고 책에 기록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상실의 경험한 자신의 가계도를 거슬러 올라가 상실의 의미를 확대하기 위해 돋보기를 들이댄다. 다시 내려오며 저자는 한 유대인 가계 전체가 잃어버린 삶이 기억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애도'의 근거로 작동한다고 설명하는 것 같다. 3부로 이뤄진 이 책 1부 〈상실〉에서 저자는 "사라진 것들을 전부 한데 모으려고 애쓰는 건 인간의 마음이 오랫동안 지녀온 '별난 습관'이라고 잘라 말한다. L. 프랭크 바움이 쓴 『즐거운 나라의 도트와 토트』에 나오는 「잃어버린 물건들의 계곡」을 생각해 낸다. 그리고 대부분의 필멸자들과 달리 잠시 명부로 출입하는 것이 허락되었던 오르페우스나 단테와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사랑했으나 잃어버린 물건들, 그리고 사랑했으나 잃어버린 사람들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들에게 내세를 내어준다. 최소한 이 세계에서는 우리가 그들을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는 달콤씁쓸한 깨달음으로."(p.53)



"사랑하던 이를 잃는 경험이란 너무나 어마어마해서 한 번에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p.95) 이 문장은 쉽고도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상실의 슬픔 뒤에 오는 애도라는 드높은 파도가 물러나고 내적 해변에 온갖 이상한 것들만 남겨둔 채 뒤늦게서야 저 스스로를 온전히 드러내기 시작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 뒤에 남겨진 모든 부재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부재는 그저 달리 느껴지기 시작할 뿐, 마침내 마음이 슬픔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채워지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저자는 여전히 거의 매일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 모든 곳에 시선을 보낸다. 사진에서, 읽던 책에서, 내가 쓴 문장이 내는 소리와 내 생각들의 형태에서, 어머니와 언니에게서,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서, 낯익은 아버지 지갑(이제 아버지 곁에 있지 않게 되었으므로 안전해진)을 보면서 아버지의 부재를 마주친다. 그중 몇몇은 내 아버지였던 사람에 대해, 잠시 멈추어 아버지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들게 한다는 말은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는 증거와도 같다. 저자는 또 몇몇에 대해서는 여전히 우울하고 애매한 감정이 든다고 말한다. 의자처럼 일상과 관련된 기념물은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환히 빛나고 있기에 저자가 밝힐 필요가 없는 '양초'라고 표현한다. 아버지와는 다르게 이런 것들은 아직 여기 존재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들을 만들어낸 사랑처럼 지속적으로. 이것이 상실의 근본적인 역설이다.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p.104)

책의 2부는 〈발견〉에 대해 저자의 사유를 정리하고 있다. 『트릭 미러』의 저자 지아 톨렌티노는 "슐츠는 익숙한 관념을 이리저리 돌려보아 우주적이고 경이로운 것이 되도록 한다. 그러면서 사랑과 죽음에 관한 이 회고록은 우연이 운명이 되고, 슬픔이 감사와 얽히는 방식에 대한 탐구로 전환된다. 책을 읽으며 마치 손바닥에 그려진 대륙의 지도를 발견하는 것처럼 조용히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고 추천사를 썼다. 죽음에 관해 말하는 책은 많다. 사랑에 관해 말하는 책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상실과 발견』이 그토록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은 이유는 저자의 세심한 '관찰력'과 '남다른 관점' 때문이라고 출판사 측은 밝히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보편적인 경험을 낯설고 새롭게 들여다보기 위해 독자과 함께 여러 곳을 방문하며 자신의 경험과 사유를 들려준다. 발단은 사별할 때 상투적이거나 비유적인 표현들에 대한 낯섦과 바로 잡으려는 저자의 깨달음에서 비롯됐다. 소설 속에서 다루어져 온 ‘잃어버린 물건들의 계곡’, 메논의 역설, 베아트리체와 마주치는 순간 사랑에 빠졌던 단테까지, 먼 길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오롯이 자신만의 시선을 확보한 채 머뭇거림 없이 나아간다. 호기심과 다정함, 지성과 재치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슐츠의 친절한 안내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자신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또 경험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 책 『상실과 발견』은 단순히 회고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더 생생하게, 충만하게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는 안내서가 된다. 상실을 통한 발견, 즉 익숙한 경험을 새로이 바라보는 눈을 열어주고 있다. 

저자는 우리의 평범한 삶이 경이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며, 평범한 비극과 슬픔이 우리를 무너뜨려 '발견'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리고 평범한 발견이 가져다주는 기쁨과 경이를 알아챌 수 있다면 삶은 또 다른 데로 이어질 거라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앤디 보로위츠는 "사랑과 상실에 대한(그리고 운석과 단테와 곰에 대한) 깊은 감성과 정교한 글쓰기가 돋보인다. 캐스린 슐츠는 자신의 삶에 관해 썼다. 여러분의 삶을 바꿀 만한 방식으로."라고 찬사를 보내고 있다. 보로위츠는 이 책을 “가장 대담한 종류의 책이며, 바로 ‘행복한 사람의 회고록’”이라고 평가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회고록'이라는 장르는 고통과 아픔을 다루는 장르로 알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러나 좀처럼 희망과 회복을 말하지 않다가 책의 끝에 가서야 결말처럼 등장한다. 우리는 다른 이가 겪은 역경에서는 무언가를 느끼고 배울 수 있다고 기대하지만, 행복의 이야기에는 좀처럼 그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 『상실과 발견』은 이런 회고록의 전형을 깨부수는 책이라고 앤디 보로위츠는 보고 있다. 이로써 저자가 묘사하는 아주 일상적인 행복과 기쁨 속에서, 독자들은 자기 자신만의 행복과 기쁨을 찾아낼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넘쳐나는 냉소주의와 절망의 바다에서 이 책만 한 선택은 없다.”고 찬사를 보냈다. 이 책은 상실을 경험해본 모든 이에게 함께 애도해 나가도록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주는 책이다. 어두운 현재에 절망하고, 포기를 선택한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변화를 안겨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책의 마지막 3부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제목으로 썼다. 저자는 이 단순한 접속사의 놀라운 힘을 이야기한다. 한 단어가 다른 단어와, 한 개념이 다른 개념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우리가 세계와 연결될 때 빚어지는 풍요로운 세상을 만드는 단어가 '그리고'라고 강조한다. '그리고'가 어두운 현재에 대한 절망과 포기를 희망과 변화를 바꿔 줄 단어로 저자가 채택한 단어다. 책의 역자 한유주는 책의 뒷 부분 「옮긴이의 말」에서 "이 책은 〈상실〉 파트가 끝나고, 이어지는 〈발견〉, 그리고 〈그리고〉 파트에서(여기서도 '그리고'가 두 번이나 등장한다. 나는 이 접속사가 이토록 아름다운 권능을 지녔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새삼 깨달았다.- 역자 주) 우리의 삶은 예기치 못한 상실로도 가득하지만, 예상할 수 없었던, 그래서 경이가 배가되는 발견으로도 충만해진다는 것을 알려준다.(p.311)"고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살아가면서 어떤 상실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삶은 찰나이기에 “인생을 잘 산다는 건 보이는 모든 것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것"임을 유감없이, 그리고 망설임 없이 알려준다.


대체로 나는 놀라움 쪽이 좋다. 나는 연못처럼 단순한 대상조차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놀라움을 느끼는 사람이다. 수목원에서의 그날, 나는 다음과 같은 점을 깨달았다. 가차 없는 상실에 직면했을 때 우리를 가장 잘 대접하는 건 슬픔이나 묵인이 아니라 주목이라는 사실을. 최소한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 바꾸는 세계는 우리의 소유이고, 그걸로 됐다.(p.298)


저자 : 캐스린 슐츠


작가, 저널리스트, 비평가. 프리랜서로 글을 써오다 지금은 《뉴요커》 필진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5년 태평양 북서부 지진 위기를 다룬 기사로 내셔널매거진어워드와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상실과 발견』은 전미도서상과 앤드루카네기상 파이널리스트에 올랐으며, 2023년 람다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오류의 인문학』이 있다.


역자 : 한유주


1982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미학과 대학원을 수료했다. 2003년 단편 『달로』로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2009년 단편 『막』으로 제43회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했다. 시, 희곡과는 다른 소설만의 고유한 장르성이 어떻게 획득되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소설을 쓰고 있다. 소설집으로 『달로』(2006), 『얼음의 책』(2009),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2011) 등이 있다.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에서 세계문학강독을,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에서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텍스트의 경계를 실험하는 문학동인 ‘루’ 활동을 하고 있다. 『지속의 순간들』, 『작가가 작가에게』, 『교도소 도서관』, 『눈 여행자』 등을 번역했다.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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