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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와 생각
이광호 지음 / 별빛들 / 2024년 7월
평점 :
"파리는 나에게 많은 지식을 전해 주었지만 실제 예술에 대한 영감을 주지는 않았다." 20여년 전 독자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썼던 메모이다. 독자는 당시 첫 해외 여행이었다. 여행이라기보다 관광에 가까웠다. 계획하지 않았지만 계획된 여행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주어진 관광성 여행이라 미리 짜여진 일정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짧은 기간에 많이 보는 게 목적인 '여행지 순례'에 가까웠다. 파리에서는 3일간의 여정이었다. 대표적으로 많이 가는 곳에 들르는 일정이어서 여러 곳을 갔고, 특별히 기억에 남는 좋은 곳은 느끼지도 못한 채 일정을 마쳐야 했다. 많이 가보고 싶었던 루브르 박물관도 일부만 둘러봤다. 반나절 동안 모나리자를 보느라 기다리고, 고생고생하다 줄을 따라 거기 걸려 있다는 것만 확인한 채 나와야 했다. 니스도 들르고 칸에도 갔다. 모나코도 갔고,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공연 관람도 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이었다. 어쩔 수 없이 파리를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남긴 메모대로 아무런 영감을 받지 못하고 파리와 작별했다. 아쉬움에 한 줄 더 썼다. 꼭 다시 넉넉한 시간과 더 자세한 계획을 세워 오겠다고. 그 메모는 아직도 실현되지 못한 채 버킷리스트에 남아 있다.
이 책 『파리와 생각』은 독자가 직접 파리에 갔을 때보다 훨씬 많은 감동과 파리에 대한 영감을 줄 것으로 기대했다. 당연히 오랜 계획과 기간을 머물러야 했기에 독자처럼 관광차 며칠 갔다 온 것과는 비교하지 못할 만큼 많은 곳을 여유 있게 둘러본 여행 일정이 마음에 들었다. 목차에 나온 대로 '파리 산책'이 어울릴 듯한 일정이다. 또 저자 이광호는 처음 접하는 분이지만 성격보다는 글을 쓰는 태도가 마음에 쏘옥 들었다. 나도 저렇게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모든 여행은 일회성 같아 보이지만 첫사랑 같이 오래 남아 나를 내내 성숙하게 한다.”는 저자의 말대로 작가와 파리 사이의 시 같은 여행 에세이는 감명도 주고 영감도 주었다.
흔히 파리는 '예술의 도시'라고 잘 알려져 있다. 그만큼 '예술의 수도'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왔기에 얻을 수 있는 별칭일 것이다. 저자는 시인이며 에세이스트로서, 파리에 가고 싶은 이유가 너무나 단순하다. 첫 번째 글 「저지르기」에 적혀 있다. "오랫동안 프렌치라든지 파리지앵이라든지의 환상을 주입받으면서 자란 탓도 있겠지만, 이상하게 살아갈수록 내가 멋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나 물건들 모두 파리로부터 흘러나와서."(p.18)
저자가 파리 여행을 '저지른' 후, 파리와 저자 사이의 대화 같은 사진과 파편으로 이루어진 기억들 사이를 헤매며 파리를 걸었다고 밝힌다. 거기서 저자가 본 것은 무엇일까? "고풍스러운 상앗빛 거리, 몽환적인 정원, 도시를 장악한 사람들, 풀 향을 밴 석양빛, 결정적 순간······." 저자는 파리를 걸으며 '새로운' 자신을 발견한다. 오랫동안 담겨있던 상자로의 해방이자 남은 삶의 시작 같은 문이었음을 털어놓는다.
저자의 파리 여행은 오랫동안 별러 왔고, 계획하고 실천을 위해 경비도 모아서 이루어졌다고 고백한다. 요즘에 파리 한 번 다녀오는 게 무슨 인생의 큰 일이라고 오랫동안 계획하고 돈을 모으기까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한 가정을 책임지는 생활인이다. 일상의 루틴이 확실한 사회 생활 중에 여행, 그것도 부부동반으로, 짧지 않은 기간 파리에 머물기까지 하려면 적잖은 경비가 들 것이다. 이 경비를 마련하는 일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어려워진다. 저자의 말에 독자는 공감한다. 파리에 다시 간다는 독자도 쉽게 실천하지 못하고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버킷 리스트에 들어가 있다.
"시간이 지나 아는 것이 늘어갈수록, 파리라는 희미한 무늬들은 내 안에서 계속 번져 나갔다. 마치 그곳에 몸을 두게 해 달라는 몸의 시위처럼. 파리를 다녀온 사람들은 항상 내게 '광호 씨는 파리랑 정말 잘 아울려요.'라며 오랫동안 파리의 이야기를 해줬는데, 정말 그들의 말처럼 낭만이 무성한 파리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곳에서 나의 영혼은 껍질을 깨고 순수한 빛을 얻을 것 같다는 착각도 들었다."는 저자의 고백은 독자에게 절절하게 설득력을 높인다.
저자의 갈수록 굳어져 가는 생활 속에서 '나'라는 인간이 더 딱딱하게 굳어지기 전에 "삶의 모양을 송두리째 흔들어 볼만한 여행"을 하고 싶었다는 저자의 심정은 연민의 정까지 생기려 한다. 충분한 공감이 가서다. 여행 계획은 오래 묵힐수록 떠나야 하는 의지보다 떠나지 못할 이유들을 더 응시하게 된다. 저자 역시 오랫동안 '떠나지 못한 이유'들은 분명했고 단호했다고 「저지르기」에서 쓰고 있다.
저자의 파리 여행은 '노후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 적지 않았던 듯하다. 오래 별러 왔기도 했거니와, 살아갈수록 하고 싶은 일에 대해 고려해야 할 것들은 계속 늘어만 갈 것이라는 초조감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주저감 때문에 계속 미루다간 결국 하지 못 할 거라는 주저함을 과감히 떨쳐 낸 것은 아직 도전하는 열정이 남아 있다는 증거이긱도 하니까 '저지르는' 데 성공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이 일에 대한 변명처럼 저자가 늘어놓은 말들이 쓰여 있다.
"가늠되지 않는 큰 지출 앞에서 돈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이래서 돈이 많아야 되는구나 싶다. 다른 생각도 좀 많이 하게. 돈과 여행. 저울에 올릴 수 없겠지만, 여행을 삶의 사치라고 말하던 사람이 떠오른다. '그래······ 이 돈이면······ 많은 걸 할 수 있지······'라는 쇠해지는 생각을 하다가 '여행을 가지 않는 게, 삶을 사치롭게 쓰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맞은편에서 반박하며 등장한다."(p.22)
이 책은 모두 20편의 에세이를 20개 장(章)으로 나누어 담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각 제목만 보아도 여유와 진정한 여행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잘 정제돼 있다. 여행이고, 글이고, 책이고 모두 다 그렇다란 느낌이 든다. 첫 글 이외에 「흥(excitement)」「시간을 넘어」「진짜 파리」「실전, 카페 드 플로르」「오랑주리와 수련」「강과 빛과 와인」「도시의 주인」「빌라 사보아 산책」「베르사유에서」, 「열흘」「오르세 미술관에서」「파리의 밤」「에펠탑 아래에 누워」「시차」「여행과 생활 사이의 체류」「뤽상부르 공원에서의 결정적 순간」「방브 벼룩시장」「마지막 센강」「긴 꿈」 등이다.
해외 여행을 하게 되면 대부분 '시차'가 발생해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경도가 같은 일직선에 있으면 시차가 적용되지 않아 적응의 시간이 필요없지만 우리나라에서 경도가 차이가 나는 유럽이나 아메리카 지역으로 갈 때는 비행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시차 때문에 하루 이틀은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저자는 파리행 비행기 안에서 슬기롭게도 시간에 대한 하나의 사유를 끌어내기도 한다.
"우리는 매일 '몸' 앞에 놓여진 시간을 '시간'을 관통하며 몸 뒤로 '기억'을 만든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한 생(life)의 구조이자 규칙이다. 이 어찌할 수 없는 단순한 구조와 규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간단하다. 어떤 시간을 어떻게 관통할 것인지. 우리는 이 허무할 정도로 간단한 삶의 요구를 사실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생이 너무 복잡하게만 느껴지는 건, 우리가 만들어 낸 너무 많은 준비 운동과 요식 행위,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생과의 비교 때문일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해 단순해지기로 한다. 몇 번째 파리행인지도 모르는 저 중년 남자의 기내 지루함은 환희로 가득 찰 나의 기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테니까. 지금 내 앞에 놓인 새로운 시간을 쾌활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관통하자. 그것만 생각하자. 분명 내 몸 뒤로 새로운 기억의 조각들이 반짝일 것이다."(p.36~37)
「진짜 파리」에서 저자는 '진짜'란 단어를 굳이 집어 넣어 생생한 느낌을 더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분 상태도 은근히 독자들에게 알리는 시그널로 사용하는 글솜씨을 보이기도 한다. '이국의 향이 반겨주는 진짜 파리에 왔다.'로 시작하는 이 글은 파리를 걷는 기분이 들 정도로 실감난다.
"고풍스러운 상앗빛 오스만 양식의 건물들. 직선의 거리에서 느껴지는 힘과 멋. 그 길 따라 빗살처럼 늘어선 석조 외벽과 연철 발코니, 맨사드 지붕 장식들의 조화. 무엇보다, 모든 건물 1층에서 '우리 모두 인생을 즐깁시다.'라고 담합한 듯 여유롭게 테라스에 앉아 와인잔을 짤랑이는 파리 사람들의 정오 운치가 나를 사정없이 홀린다. 차분하면서도 활기가 느껴지는 도시. 길의 사람들은 경주하는 도시인들 같지 않고 대부분 읽거나 말하거나 뭔가를 즐기고 있는 듯한데, 차림새도 참 멋있다. '그래, 거대한 조각 같은 도시에 살면 누구라도 대충 입을 수 없지.' 괴상하다 생각했던 불어의 발음도 너무 멋들어지게 느껴진다. 음운들 간의 흐름이 유려하다고나 할까, 가만히 불어를 듣다 보면, 언어에도 장식이 달려있는 듯 우아해 보인다. 파리, 정말 예술 그 자체 같은 도시. '파리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까, 이 아름다운 것들의 합이 파리를 아름답게 만든 것일까' 같은 생각을 하며 목적 없이 한참을 걷는다.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특별한 뭔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저자는 파리를 걷다가 건물 외관 장식을 재현한 것으로 알고 만져보다 깜짝 놀란다. 재현이 아니라 원형이어서다. 백 년 단위의 나이를 가진 건물들 사이에서 구정물이나 퀴퀴한 냄새 등을 생각하고, 아주 오래전 파리의 〈베르사유의 장미〉나 〈레미제라블〉 같은 것들을 연상해 내기도 한다. 울퉁불퉁 돌길을 사색하며 산책했을 수많은 예술가들을 떠올리는 저자는 이제 파리의 정체에 다가선다.
저자는 루브르 박물관 대신 〈오랑주리 미술관〉 이야기를 꺼낸다. 자비 없이 쏟아지는 햇빛에 완전하게 노출됐고 모든 것을 선명하게 내 보이는 날 저자는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향한다. 멀리 공원의 사람들이 보이고, 돌바닥의 질감을 느낄 수 있으며, 테라스의 식기, 노인의 솜털까지도 보이는 너무 환하거나 너무 쨍한 날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 넓은 앞마당에도 미술관이라는 단서 같은 조형물 하나 없다. 미술관의 무심함에 실망을 해야 하나 허위를 걷어낸 당당함에 기대를 해야 하나. 대기 줄 맨 끝에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장 시작을 알리는 불어 소리에 맞춰 미술관 안으로 들어간다.
"'띡!' 출발 신호 같이 티켓을 스캔하는 소리에 맞춰 심장은 단거리 달리기를 시작한다. 모네의 〈수련〉 연작을 향해서. 아무래도 메인 테마이다 보니 전시 가장 한가운데 아니면 끝 쪽에 있겠지 생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입구 모퉁이를 돌았는데··· 거대한 빛이 쏟아진다. 아주 순도 높은 빛이. 흑백의 세계에서 색채의 세계로 넘어가는 듯한 황홀감이 밀려온다. 장엄하게 펼쳐진 모네의 〈수련〉 연작. 순간 압도하는 아름다움에 치여 탄성이 나온다. 공간을 공명하는 환한 빛과 둘러싸듯 아름답게 펼쳐진 어스름한 새벽의 몽환적인 정원. 이곳의 시공간은 완전하게 다른 차원처럼 느껴진다. 모네가 살던 때의, 지베르니 정원이 눈앞에 있는 듯이. 조금 전 통과했던 좁은 통로가 판타지에 나올 법한 차원문이었나 싶다."(p.66~67)
저자는 「오랑주리와 수련」이란 글에서 모네의 〈수련〉에 놀라고 사진을 찍을 때 파리의 '톨레랑스'에 다시 한 번 놀랐다고 한다. 모네의 〈수련〉 연작의 배치는 미술관의 노련한 스킬이지만, 작품 사진을 찍을 때 불가피하게 관람객의 모습이 함께 찍혔는데 당사자에게 사정 설명을 하니 '괜찮으니 원하는 대로 하라'는 답변해서 놀랐다고 저자는 말한다. 작품 촬영에 대한 배려는 우리나라의 관람 시스템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는 거의 모든 작품의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는데, 아마 우리 미술관 입장에서는 그림을 빌려오기 때문에 손상될 우려가 있는 사진 촬영을 금지하나 싶다. 20편의 수필 중 겨우 3개만 노출시켰다. 독자들의 양해 구한다. 훨씬 많은 훌륭한 글들이 있다. 여행에세이인지, 예술 에세이인지 분류할 필요도 없다. 이 책은 지식과 영감, 그리고 저자의 글쓰기 능력의 탁월함에 독자들을 놀라게 한다.
저자 : 이광호
2014년 출판사 생각나눔을 통해서 데뷔했다. 2015년부터 독립출판을 시작해서 「당신으로 좋습니다」, 「그 당시」, 「이 시간을 기억해」, 「사랑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간직할 수 있도록』, 『숲』, 『우리는 영원을 만들지』, 『숲, 광장 사막』(숲 증보판), 『아름다운 사유』, 『흰 용서』 등의 작품을 발행했고 2014년에는 『파도를 일며』라는 음원 앨범을 발매하면서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