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 다녀온 단테 - 후회와 절망을 기회와 희망으로 바꾸는 신곡 수업
김범준 지음 / 유노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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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점점 더 살기가 힘들다"라고 입을 모은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고, 모든 시장에는 먹을 것을 비롯해 생활에 필요한 필수 물자들이 차고 넘친다.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세상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풍요를 즐기는 데 덜함이 없다. 코로나 팬데믹도 다른 어떤 나라보다 훨씬 지혜롭게 넘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왜 살기가 어렵다고 할까? 사실 어느 시대 어느 곳을 막론하고 "살기 좋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시대마다 특수 계층에게는 살기 좋을지 몰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늘 부족함으로 느끼며 온몸으로 일해서 겨우 하루 먹고 살 정도였다. 흔히 말하는 '지옥'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지옥이란 사실 종교적 개념의 말이다. 기독교에서는 '천국'의 반대 개념으로, 불교에서는 '극락'의 상대적 개념이다. 누구도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다녀온 적 없는 현실에서 말하는 '상상의 세상'일 뿐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지옥은 현실에서 지은 죄에 맞춰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기한 없는 고통의 세상이다. 이 책 『지옥에 다녀온 단테』 표제어로 보면 '단테'가 지옥에 다녀왔다. 단테(Dante Alighieri)는 1265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서양의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시기다. 단테는 몰락한 귀족 가문의 출신으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중세의 신학과 철학, 자연과학 등을 두루 배웠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싹튼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을 평생 간직하며, 창작과 영감을 주고 영혼을 구원으로 이끄는 존재로 삼았다. 

단테는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피렌체의 행정과 외교, 군사 방면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정쟁에 휘말려 1302년 추방당했다. 이후 세상을 뜰 때까지 다시는 피렌체로 돌아가지 못하고 유랑했다고 전해진다. 대표작 『신곡』은 1304년부터 1320년까지 구상하고 썼으며,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이 각각 따로 출판되면서 계급을 초월하여 폭넓은 인기를 누렸다. 망명 유랑 시절에 쓴 『신곡』은 장편 서사시로 서가(序歌)를 포함해 모두 100개의 노래(시편)로 이루어져 있다. 3부작 1만 4233행에 이른다. 제명(題名)을 중세의 관용에 따라 『희곡(喜曲)』(Commedia)이라 붙인 것은 비참한 인상을 주는 것은 〈지옥편〉뿐으로, 나머지 〈연옥편〉, 〈천국편〉에는 쾌적하고 즐거운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표면에 나타난 주제는 사후의 세계를 중심으로 한 단테의 여행담이라고 한다.



이 책 『지옥에 다녀온 단테』의 저자 김범준은 「삶의 어둠을 밝히는 지혜의 빛으로」란 제목의 〈서문〉에서 신곡은 종교적 관점에서 인간을 죄악과 고통에서 구원하는 여정을 다룬다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사후 세계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불안과 혼란으로 가득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고 밝힌다. 단테 역시 승승장구하던 삶이 한순간에 모너지는 아픔을 겪었다. 피렌체에서의 추방은 그에게 절망의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세속적 욕망과 허영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구원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즉 가장 어둡고 어려운 시기에 『신곡』이 쓰여졌다는 말이다. 

이에 따르면 신곡에서 단테가 지옥과 연옥, 천국을 순례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물질 세계에서 수행해야 할 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추구한 것은 내세의 안락함이 아니라 현세에서 정의로운 공동체를 이루며 올곧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단테에게 구원이란 천국만이 아니라 지옥과 연옥까지 아우르는 총체적 세계관 속에서 이뤄진다. 고통과 시련을 마주하고,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구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고전은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을 품은 '살아남은 지혜'다. 그 깊이에 압도되기보다는 고전의 지혜를 자기 삶에 투영해 읽고 음미할 때 비로소 고전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신곡 역시 마찬가지다. 신학적, 철학적 세계관에 경도되기보다는 작품 자체에 집중하고, 그 속에서 마주한 구절과 장면들을 내 인생의 좌표 위에 자유롭게 투사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p.6~7)

이에 따라 저자는 이 책 『지옥에 다녀온 단테』 역시 기존 신곡에서 나타난 지옥, 연옥, 천국의 이야기 흐름에 매몰되지 않고 신곡이 전하려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내용 흐름을 구성했다고 말한다. 다만 단테의 메시지를 정돈해서 전달하기 위해 전체적인 흐름은 지옥 편의 지옥 순서를 빌렸으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지옥, 연옥, 천국의 순서가 아닌 메시지와 연관 있는 소재를 가져와 이야기를 전개했다고 밝힌다. 또 본격적으로 단테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전에 7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만난 단테와 현시대의 독자 사이의 거리감을 좁혀 주고, 단테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내용의 흐름들을 파악할 수 있도록 차례의 제목들은 신곡의 대사를 참고하여 재구성했다고 알려준다.



이 책은 모두 6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지옥의 문턱에서 죽었다 살아난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2장 「탐욕 지옥에서 버릴 줄 알아야 비로소 채워진다」, 3장 「분노 지옥에서 자만을 멈춰야 나를 살린다」, 4장 「폭력 지옥에서 말의 무게를 알아야 현재를 지킨다」, 5장 「배신 지옥에서 진실된 인생이 거짓된 인생을 이긴다」, 6장 「지옥 밖 문턱에서

희망으로 가득한 인생을 위해서」 등이다. 각 장마다 3~6개씩 모두 30개의 소항목의 글이 단테의 싯구와 문장 등에 대한 풀이를 곁들이고 있다.

『신곡』에는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루치아(시칠리아 섬에서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로 사망한 순교자), 카론(바닥이 없는 쇠가죽 배에 죽은 자들을 태워 아케론 강에서 스틱스 강까지 건네주는, 즉 지옥행 배의 뱃사공), 미노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크레타 섬의 왕으로 지하 세계의 심판관), 게리온(그리스 신화에 등장ㅇ하는 상상의 동물로 머리와 몸이 각각 3개인 괴물) 등 다소 낯선 신화적 인물들부터 헥토르, 카이사르, 호메로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같은 실존 인물들까지 수많은 등장인물이 나온다. 저자는 이 인물들 하나하나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신곡』을 읽고 감상하는 입장에서 연구자로 탈바꿈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심지어는 작중 주인공 단테 역시 독자들에게 이를 강요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전한다. 오히려 단테는 『신곡』에 담긴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기만을 바랄 것이라고 저자는 알려준다.

그래도 세사람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주인공인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베아트리체 등이다. 『신곡』은 단테가 33세에 사후 세계로 순례를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단테는 빛이 비치는 언덕을 향해 가려하지만, 정욕을 상징하는 표범, 교만을 상징하는 사자, 탐욕을 상징하는 늑대에 의해 가로막힌다. 이때 단테 앞에 고대 로마의 시인이자 그가 평소 존경하던 '베르길리우스'의 영혼이 나타난다. 그는 단테를 지옥과 연옥까지 안내한다. 이어서 단테의 뮤즈이자 사랑의 대상이었던 베아트리체가 천국으로의 길잡이가 되어 주고, 여기에 '성 베르나르'의 도움까지 전해져 단테는 마침내 어둠의 세계에서 벗어나 낙원에 다다를 수 있게 된다.



단테의 여행은 지옥에서부터 시작된다. 역사상 최초로 '지옥 여행가'라고 말해도 될 듯하다. 단테가 말하는 지옥은 한마디로 '희망이 없는 곳'이다. 그 희망 없음의 강도는 잔인하다. 지옥에서의 희망 없음이란 죽음의 희망조차 없음을 말한다. 즉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 곳이 지옥이다. 지금 우리에겐 어떤 희망이 있는가? 희망의 종류는 일단 무관한다. 희망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최소한 지옥 같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를 '지옥'으로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저자의 암시다. 

지옥과 관련 예술품이라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상이다. 이 조각상은 1871년 프랑스 정부가 화재로 타 버린 파리의 감사원 청사 자리에 미술관을 지으면서 탄생한 작품이다. 우리도 잘 알고 있듯이 르네 프랑수아 우귀스트 로댕의 작품이다. 로댕은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어 수백 명을 조각했는데, 특히 지옥에 관련된 조각을 많이 해서였는지 〈지옥의 문〉으로 이름 붙여졌다. 출입구 위쪽 끝에 걸터앉은 사람이다. 웅크리고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이 남자의 정체가 단테라고 한다. 지옥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단테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생각의 결과가 우리가 읽고 있는 『신곡』의 〈지옥편〉일 것이라고 저자는 귀띔한다. 단테는 수백 년이 지나 자신을 모델로 한 조각상이, 그것도 〈지옥의 문〉으로 이름 붙여진 출입구에 만들어질 걸 예상했을까? 신곡의 지옥 편에 나오는 지옥 입구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 모두 희망을 버려라."

저자는 지옥이란 '희망 없음'과 동의어라는 걸 다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고통이 심해도, 괴로움이 극에 달해도, 희망만 있다면 그곳은 절대 지옥이 아니라는 반대 등식도 성립된다. 반면 즐거워도, 기뻐도, 희망이 없다면 그곳은 지옥 그 자체다. 지옥에서 처절하게 울부짖는 자들을 보며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에게 "어떤 고통을 받기에 지옥에서 이들이 이토록 처절하게 울부짖는지요?"라고 묻자 들은 대답 역시 그러했다고 저자는 전한다. "여기 있는 이들은 죽음의 희망조차 없다. 앞을 볼 수 없는 생할이 너무도 절망스럽기에 언제나 다른 운명만을 부러워한다."



다음 다다른 지옥에는 머리가 세 개 달린 사나운 개가 있었다. 그 개는 일단 자기 영역으로 들어오는 자는 막지 않는다. 하지만 한번 들어오면 그 누구도 나가지 못하게 막는다.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음울하고 서늘한 기운마저 감도는 이곳에는 눅눅한 비가 사정없이 내린다. 비는 우박이 되고 눈이 되어 어두운 하늘에서 쏟아지기도 하는데 이 비를 머금은 세상의 땅에선 이상하게도 악취를 뿜어낸다. 이곳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들어오는가? 

탐욕스럽게 먹는 자들이 이 지옥에 떨어진다고 단테가 적었다. "너무하다, 먹는 것 까지 죄가 되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먹을 때는 마음대로 먹지만 나갈 때는 편안하게 나가지 못하는, 소화 안 되는 음식을 먹은 느낌이 들 것이다. 소화가 되질 않으니 그 음식들은 고스란히 부패하여 몸속에서 차가운 기운만 남긴다. 그러니 그토록 지독한 악취를 풍긴다. 단테를 향해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 시작했다.

"단테, 당신이 살던 도시에 한때 나는 아주 평온한 생활을 누렸소. 그곳 사람들은 아네게 '차코(돼지)'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그 정도로 잘 먹었다는 말이오. 하지만 그 빌어먹을 탐식은 결국 내 비참한 영혼의 이유가 되었소. 그리고 보다시피, 지금은 이놈의 비 때문에 녹초가 되었소." - 〈지옥편, 제6곡〉

이 지점에서 단테는 탐식이란 오만과 시기 그리고 탐욕이 인간의 마음에 남아 있을 때 생기는 죄악의 표출과도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은 비가 차갑게 내려 질척대는 지옥의 땅에서 뒹굴게 되는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배고픔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살피지 못하고 최소한의 따뜻한 시선조차 보내지 않는 사람들이 받아 마땅한 벌인 것이다. 당시 중세 유럽은 일부 지배계층은 먹을 것이 남아돌았겠지만 대부분의 피지배층은 매일 굶주림과 싸워야 했다. 20세기 들어오기까지 인류는 끊임없이 기아와 싸우고 먹을 것이 모자랐다. 식량 부족은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단테와 그를 인도하고 있는 베르길리우스가 "탐식으로 즉각적인 기쁨의 순간을 얻은 사람들은 그만큼이나 선명하게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데 의견이 같음을 보여준다. 늘 교훈적인 이야기,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동양 고전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이야기.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을,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내가 풍부하게 가진 여유를 부족한 그 누군가에게 돌려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탐식의 반대말은 금식이 아니라 '나누기'라고 저자는 말을 보탠다.




"일단 버린 것에 관해서는 권리가 없는 법이지요. 각자 자기가 해쳐 버린 육신은 나무가 되어 슬픈 숲에서 영원히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지옥편, 제6곡〉에 들어 있는 싯구다. 단테가 이야기한 곳은 지옥이었다. 일단 죽은 사람은 식물로 변신하여 숲에 떨어지게 된다. 식물로 변한 사람들이 살아야 하는 숲은 삭막하다. 나뭇잎은 온통 검붉고 나뭇가지는 뒤틀려 있다. 자기 육체를 버린 사람들도 싹을 틔우긴 한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본겨걱인 고통이 시작된다. 일단 하르피아가 등장한다. 하르피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기물이다. 여자의 얼굴에새의 몸뚱이를 했는데 날카로운 발톱으로 자기 목숨을 스스로 버린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다. 낮 동안 새순을 틔우고 열매를 맺으면서 노력하지만 밤이 되면 하르피아는 자살한 사람이 변신한 나무의 노고를 무시하고 갉아 먹는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없다. 결실을 기대할 수 없다. 스스로 목숨을 포기한 자에게는 자기 몸에 대한 권리가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부분이다. 저자의 주석을 통해 뜻을 확실하게 각인해둔다.

"생명이란 살아 있음을 명령받은 것이다. 생명의 주인은? 하늘이다. 인간은 자기 몸에 대한 주인이 아니다. 인간은 하늘의 것을 살아 있는 동안 위탁받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니 인간의 몸은 그 자체로 신성하며, 신성하기에 자신을 포함한 그 누구도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물리적이나 윤리적으로 빼앗거나 상해를 입힐 권리가 없다."(p.121)

지금까지 이 책에 나오는 30개의 메시지 가운데 2개의 주제를 이야기했다. 메시지가 전달되었을지 독자의 글 전달력 부족으로 자신은 없다. 다만 『신곡』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무슨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언제든 『신곡』에 도전할 것을 추천한다. 물론 이 책은 『신곡』으로 들어가기 전 미리 읽는다면 『신곡』에 대한 이해는 절반은 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 : 김범준


고려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한국기술교육대학교 테크노인력개발전문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말투와 태도에 대해 연구하며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삼성그룹, SK그룹, 현대기아차, KB금융 등의 기업과 서울시, 경기도, 한국과학기술원, 국방부 등의 지자체와 공공기관 그리고 고려대, 이화여대 등에서 강연을 진행했다.

《인생의 오후에는 적보다 친구가 필요하다》는 방대한 데일 카네기의 책 가운데 평생 적을 만들지 않는 불멸의 원칙만을 모아 지금 시대에 맞는 가장 현실적인 시선으로 정제하여 담아냈다. 소통, 관계에 대한 유쾌한 통찰로 정평이 난 김범준 작가는 직접 ‘데일 카네기 코스’에 참여한 뒤, 여기서 얻은 통찰을 바탕으로 현대인들이 최우선적으로 읽고 실생활에 즉시 사용할 만한 24가지 삶의 해법을 엄선했다. 인생의 시곗바늘이 오후를 향해 갈수록 타인을 향한 다정함이 낯설고 더는 혼자가 외롭다고 느껴진다면 지금 당장 이 책을 꺼내어보기를 권한다.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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