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톨랑의 유령
이우연 지음 / 문예연구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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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오르톨랑의 유령』은 저자 이우연의 세 번째 소설 작품이다. 독자로서는 그의 책을 처음 읽는다. 표제어의 '오르톨랑'도 프랑스의 어느 한 지역 이름인 줄 알았다. 그 지역의 전설적 유령 이야기나 혹은 지역과 관련 있는 사람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SF소설, 스릴러나 호러소설쯤으로 생각했다. 독자의 이 같은 추측은 이 책의 첫 페이지를 펴자마자 여지없이 깨진다. 달달하거나 공포 체험 소설이 아니다. 그런데도 분위기는 심상찮다. 저자 이우연은 소설 본문 앞에 〈서문(들어가며)〉를 먼저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이 글은 혼자에 관한 글이다. 동시에 혼자일 수만은 없는 것들이 혼자 이상을 원하는 장소들에 관한 글이다. 이곳, 비현실적인 악몽 속에 거주하는 것들은 누군가에게 가 닿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것들은 더럽고 비좁은 틈새에서 불가해한 중얼거림을, 도저히 믿기 어려운 악몽들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언어로 번역하려 몸부림친다. 그 언어가 마침내 누군가에게 전해지기를 간절히 원하면서."(p.4)

첫 문장을 제외하고는 쉽게 와닿지 않는다. '호러적' 분위기는 읽히는 것 같은데 구체적이지 않은, 온통 상징과 은유로 뒤섞인 듯한 미로에서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할 것 같아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이제서야 '오르톨랑'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고 자각한다. 놀랍게도 새의 이름이다. 우리말로는 '멧새'로 번역된다고 사전은 밝히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백과사전에서 멧새를 찾았는데 '멧새 요리'에 관한 설명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멧새란 참새 크기의 조그만 새인데 요리 재료라니...

멧새과에 속하는 깃털 달린 수렵육으로 고대부터 가장 고급스럽고 섬세한 맛을 지닌 새로 여겨졌다. 본래 이름이 브뤼앙 오르톨랑(bruant ortolan)인 이 철새는 점점 희귀해져 현재는 유럽뿐 아니라 캐나다에서도 공식적으로 보호되고 있다. 캐나다에서 멧새는 인적이 드문 북극 빙하지대 변방에 서식하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 남서부, 특히 랑드(Landes) 지방에서는 레스토랑에서 멧새를 서빙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호가들 사이에서 이 새를 생포하여 살찌우는 일이 암암리에 계속 행해지고 있다. 새가 먹는 먹이(베리류 열매, 싹, 포도 알갱이, 조, 작은 곤충)는 살에 진한 풍미와 섬세한 맛을 만들어준다. 이렇게 살을 찌우면 포획 시에 30g이던 무게는 한 달 사이에 네 배로 늘어난다.

멧새는 대부분 꼬치에 꿰어 굽거나 오븐에서 로스트 하며 자체 지방으로 익힌다. 이 기름은 굽는 동안 아래에 받쳐둔 빵 조각 위로 떨어져 모인다. 어떤 이들은 이 빵에 로크포르 치즈를 발라 먹을 것을 추천하기도 한다. 또한 이 작은 새에 송로버섯을 넣은 푸아그라 퓌레를 채운 뒤 천연 창자로 감싸 익히는 조리법도 있다.(그랑 라루스 요리백과)



다시 〈서문〉으로 돌아간다. "이글은 유령들이 태어나고 머무는 장소에 관한 이야기며 그곳에서 짖어대는 소통불가능한 울음이다. 이곳의 목소리들은 감실에서 태어났다. 아직 무한한 밤을 탈출하지 못한 짐승들이 이곳에서 몽유한다." 한 문단이 끝나자 저자는 "이곳의 짐승들은 혼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쓰고 있다. "홀로 내는 소리는 홀로 사그라든다. (중략) 이런 소리들의 파동 속에서 짐승들은 살아 있다. 그들은 겁을 먹거나 죽음을 결심하고, 절망에 안식한다. (중략) 그들은 망상증자이며 그것들의 고독은 사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거짓을 닮은 방식으로, 그들만의 진실로서 살아 있다. 짐승들 자신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을 당신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만이 그들이 희망하는 불가능이다."

이 소설은 〈서문〉을 제외하고 두 개의 장(章)으로 나뉘어 있다. 1장 「교실 속의 미로는 새들의 우주를 닮았다」와 2장 「그녀는 TV 앞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여자를 꿈꾸었다」 등이다. 200여 페이지의 장편소설이다. 각 장마다 수많은 장소들이 작은 항목의 제목으로 쓰였다. 1장의 경우 '청소도구함' '방 안' ' '미로' '조종실' '교실' '다락방' '서커스장' '동아리실' '우주' '고래의 뱃속' '교실' '유원지' '광장' '지하철' '교실' '침실' '교무실' '울타리 안' '지하철 계단' '바다사자의 저택' '교실 책상' '달' '버스 안' '교실' '독방' '하굣길' '주방' '생일 파티' '천국' '교실' 등이다. 살펴보면 '교실'은 중간중간 5번이나 등장한다. 굳이 장소로 지목하기 어려운 것은 '생일 파티'뿐이다. 이 제목을 가진 각각의 글들은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그저 유령이 이곳 저곳을 부유하듯 저자의 펜끝에 따라 부유하는 듯한 느낌이다. 2장은 장소라고 보기엔 한데 모아 말하기 어렵긴 하다. '아파트' '29번 채널' '회의장' '꿈 속' 'TV 앞' '교실' 'TV 앞' '연습실' '나무 위' '교실' '거리' 그리고 마지막 제목은 '빗길'이다. 

장소의 연관성이나 의미를 찾기 위해 첫 번째 제목 '청소도구함'으로 눈길을 돌린다. "소녀는 청소도구함 안에 웅크린 채 눈을 감고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그녀를 꺼내주기를, 그녀를 잊어버렸다면 다시 돌아오기를. 청소도구함은 죽은 새들로 가득 차 있다. 죽음의 가스로 배가 희고 퉁퉁하게 부어오른 새들. 부리를 벌린 채 알 수 없는 액체를 질질 흘리고 있는 소녀는 이곳에 갇힐 만한 잘못을 한 적이 없다. 그럴 정도로 미움을 사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소녀를 이곳에 가두었다."(p.11)



이 부분을 줄거리만 요약해 보면 한 소녀가 청소도구함에 갇혀 있다. 아이들이 와서 자신을 구해주기를 바라지만 아무도 오지 않는다. 시간은 점점 지나지만 아무도 소녀가 청소도구함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 모두들 소녀를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소녀의 기다림이 길어지면서 소녀는 좁고 어두운 청소도구함 안에서 아이들이 자신을 찾고 발견한 순간을 상상하며 아이들을 기다린다. 그리고 저자는 내레이션처럼 쓴다. "기다림은 끝조차 없이 너를 살해할 거야. 살인자 없는 살인. 희생자는 옷장 혹은 청소도구함 속 침묵에 기댄 채 과거가 미래를 휩쓸어가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다." 상황은 흘러가지만 아무도 오지 않아 소녀의 상태는 여전하다.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면 도움을 원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뒤늦게 깨달은 소녀가 외치지만 구원자는 없다. 지친 소녀는 이내 "어쩌면 모든 소리가, 기다림이, 기대가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이 떠나간다. 

찢긴 침묵, 훼손된 언어. 소녀는 고개를 들고 이제는 신적이기까지 한 어둠을 응시한다.(p.17)

첫 번째 '교실'에서는 전학 온 지 얼마 안 된 앨리스의 이야기다. 앨리스는 교실 가장 앞자리에 앉아 있는 단발머리 여자아이를 보았다. 앨리스는 그녀가 수업시간에 자유롭게 일어나 출입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외에 수상한 점들을 하나하나 적는다.

① 그녀가 등교할 때 아무도 그녀에게 인사하지 않았다.

② 아무도 그녀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선생님마저도! 

③ 쉬는 시간에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았다.

④ 급식을 혼자 먹었다.

⑤ 피구를 할 때 처음부터 금 밖에 있었다.

⑥ 짝의 얼굴을 그리는 시간에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그려지지 않았다. 유령인가? 독자의 눈은 비로소 책의 표제어로 되돌아간다.



'우주'에서는 생과 사의 이야기가 훨씬 자연스럽다. 화자(話者)는 우주비행사 이야기를 자처한다. "생은 우주보다 깊은 환각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생은 입체가 아닌 평면이라는 걸, 모든 방향으로 끊임없이 증폭되고 복제되는 종이들이라는 걸 당신도 알고 있겠죠."(p42) 화자가 이어가는 우주비행사는 토성의 고리 끝자락을 보고 싶어 손가락을 깨물고 유치한 피를 삼키고 유치한 눈물을 흘렸던 사내다. 하지만 우주에서 토성의 고리를 염원하는 우주비행사라니! 그 소원이 부끄러워 입 밖에 내지도 못했던 사람임을 강조한다.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화자가 원하는 사항이다. 토성의 고리가 황홀한 먼지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에 유념하고 우주의 원리와 현상을 표현해 낸다. "무한처럼 광대한 유한 속에는 유리수를 닮은 무리수도 자연수를 닮은 허수도 분명 있을 텐데. 물론 무리수는 영원히 유리수가 될 수 없고 허수는 영원이 자연수가 될 수 없겠지만. 아마 우주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있지 않을까요."(p.44)

'독방'에서도 앞뒤가 매우 어색한, 현실에서는 엄연히 존재하는, 부조리가 독자의 눈을 잡아 끈다.

사형수가 독방에서 기다리고 있다. 오직 그만을 위한 처형인이 찾아오기를. 문을 열고 그의 내부 깊은 곳으로 들어오기를. 그를 찢거나 꺾어버리면서 그의 마지막 비명을 들어주기를. 사형수의 바람대로 마침내 누군가 들어온다. 사형수는 그를 보고 황홀에 찬 눈물을 줄줄 흘린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처형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단지 소식을 전하러 온 직원일 뿐이라고. 

그게 무슨 말이죠? 사형수는 직원에게 묻는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지금 여기 오기로 예정되어 있는 것은 처형인뿐이니까. 그런데 처형인은 처형 당해서 올 수 없고 직원이 그 말을 전하러 대신 왔다니.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더욱이 오늘 처형을 애타게 기다리던 사형수의 마지막 소원을 무참히 짓밟은 격이다. 거기다 오늘 사형수의 방에 찾아올 수 없다는 처형인은 오늘뿐 아니라 다음날에도, 다음날뿐 아니라 그 다음날에도,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사형수를 위해 예비된 다른 처형인들은 모두 다른 일정이 있으므로 사형수를 위해 도저히 시간을 내어줄 수 없다고 직원은 긴 대사를 단숨에 읊어내리며 리허설 하는 배우처럼 말한다.



"집행은 언제든 마음대로 해도 돼요. 직원은 선심을 쓰듯 말했다. 이쪽 책임도 있으니 그 정도는 배려해 드려야죠. 원한다면 당신은 자연사할 때까지 살 수도 있을 거예요. 아무도 당신이 집행을 했는지 확인하러 오지 않을 테니까.(p.123)

어처구니없는 말에 사형수는 제발 자신의 사형을 집행해 달라고 흐느끼며 애원한다. 무릎을 꿇고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다른 이상은 없는 걸로 알고 나갈게요. 직원은 끔찍하게 건조한 어투로, 닳고 닳아버린 문장을 말한 뒤 문을 닫고 나가버린다. 이제 그곳에는 분홍색 여벌 바지와 독방, 그리고 사형수밖에는 없다. 직원은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기다림은 이제 불필요한 것, 심지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주방'에 이르러서야 이 책의 표제어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 화자는 내레이터처럼 설명한다. "나는 지옥에서 훔쳐낸 이미지들로 글을 쓴다. 이미지들은 파편적인 비명만을 내지르고 있기에 아무도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이미지들은 불완전하고 심지어 거짓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거짓은 진실들의 단편이다. 유일하게 존재 가능한 방식의 이미지들. 날카로운 균열들, 네거티브 필름들, 공포로 흔들린 이미지와 비대한 빛으로 부풀어오른 희미한 영상만이 그곳의 단편이다. 불가능성으로 구부러진 세계에서 나는 이미지를 사유한다.(P.130)

이미 '인공지옥'인 '주방'에서 어린 새처럼 건강한 아가에게 엄마는 오르톨랑 요리를 하는 방법을 설명해준다. 듣기만 해도 소름이 기칠 정도로 잔혹하다. 그것도 조그맣고 약한 생명체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린 새를 어떻게 요리해 먹는지 아니? 그들은 살아서 바둥거리는 오르톨랑의 작은 두 눈을 뽑는단다. 깊은 곳에 연결되어 있던 신경 다발들이 비어져나와 흘러넘치고 검은 피가 흐르는 두 개의 암흑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아. 어려운 것과 불가능한 것은 다르단다. 작은 상자에 갇은 어린 새는 검은 두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부르짖는단다. 그들은 상자 안에 무화과를 계속 퍼붓는 거야. 오르톨랑은 무화과를 다 먹으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계시와도 같은 음식을 모조리 먹어치우면 밖으로 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단다."



무화과를 먹고 또 먹은 오르톨랑은 비대해진다. 네 배 다섯 배 될 때까지 먹고 또 먹는다. 숨이 가빠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아 또 먹는다. 그들은 오르톨랑의 부드럽고 비대한 두 허벅다리를 붙잡고는 아르마냑 통에 빠뜨린다. 황금빛 액체 속에서 오르톨랑은 공기 중의 물고기처럼 비명을 지른다. 물고기처럼 침묵한다. 뻐끔거리는 공기 방울들이 위로 위로 올라가는데 오르톨랑은 점점 가라앉는다. 황금빛의 달콤한 액체가 오르톨랑의 폐와 위장에 스며들었고 오르톨랑은 물고기처럼 침묵한다. 단순한 침묵이 아니다. 저자가 말하려는 것은 거대한 사회 부조리, 인간들의 잔인함, 교실마저 이것들에 적응하는 법을 배우는 곳으로 바뀐 우리 사회 현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마치 유령처럼 약자의 혼백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뿐, 제지하거나 소리 지르거나 어떤 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저 침묵으로 지켜볼 뿐이다. 하나는 피해자의 유령이고, 또 하나는 가해자의 유령이다. 그리고 그 둘은 자세히 보면 같은 몸에서 나왔다. 저자가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뜻이 있는지 몰라도 독자에겐 경고로 이해된다. 삶의 태도와 방식을 바꿔야 살아 남는다는 것을. 그것은 '우주'에에서도 '고래의 뱃속'에서도 세상 어느 곳이든 발견되는 부조리이다.


나는 상상할 수 있었어.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기 위해 나는 죽었단다. 말할 수 없음에, 상상할 수 없음에, 소통할 수 없음에, 그 쉬운 말에 인간을 삶을 신을 의탁하지 않기 위해. 나는, 살해자는 오르톨랑의 죽음을 증언했단다. 살해자는 오르톨랑의 몸의 기억과 사물의 기억과 익사의 순간, 잊힘, 충격, 오아시스처럼 솟아나는 검은 피의 울림을 증언했단다. 나는 살해자지만 죽은 오르톨랑들에 대해 썼단다. 오아시스처럼 솟아나는 검은 피. 진실의 순간들. 하얀 대징 위 검은 시체들의 시차. 검게 타버린 오르톨랑. 오르톨랑. 오르톨랑의 날개를 찢는 동안 아무도 울어주지 않았지. 나는 그 와해된 몸에 얼굴을 끼워넣는 대신 얼굴 없음을 노래하려 했어. 얼굴을 강요하는 폭력들에 지쳐버렸으니까.(p.137)


저자 : 이우연


2021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2022년 장편소설 『악착 같은 장미들』, 2023년 소설집 『거울은 소녀를 용서하지 않는다』를 출간했다. 고용되지 않은 배우들, 유령들, 실종자들, 아이들의 불가능한 언어와 함께 산다. 그들을 위한 이상한 공간을 만들고 그 속에서 (그 속을 벌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 틈새에서 갈망하고 소리치고 애원하는 글들을 쓴다. 그들을 원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 없음에도 살아있는 틈들을 너무나 원하기 때문에 쓴다. 절박하게, 용서받을 수 없을 정도로 원하기 때문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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