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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섬과 박혜람 - 제20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임택수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5월
평점 :
이 소설 『김섬과 박혜람』은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의 자화상으로 알려진 〈상처 입은 남자〉(아래 그림)에 대한 묘사와 그림 설명으로 시작한다. "쿠르베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혜람은 상처를 입은 채 쓰러질 듯 나무에 기대어 누워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따금 사내가 반쯤 잠긴 눈으로 그림 앞에 선 사람이 자신을 연민하는지 혹은 조롱하거나 불신하는 눈빛인지 지켜보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었다. 사내의 가슴에 한 손을 얹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베고 누웠던 그의 연인을 상상해 보았다. 화가는 떠나간 연인이 남긴 아픔을 칼과 사내의 흰 셔츠에 묻은 붉은 피를 통해 보여 주고 있다. 만약 전 연인이 모습이 삭제되지 않고 원본 그대로 남겨졌다면 그림은 상상의 여지를 해치게 됐을까. 그럴지도 모른다고 혜람은 생각했다."(p.7~8)
혜람은 미술 해설사(도슨트)다. 이 소설 속 두 여주인공 중 한 명이다. 혜람은 프랑스의 오르세 미술관 해설사로 일하고 있다. 그가 막 해설을 마친 쿠르베의 〈상처 입은 남자〉는 쿠르베가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팔지 않고 말년까지 소장한 작품이라고 한다. 원래 자화상을 그린 것이 아니고, 그의 연인이었던 바르지니 비네가 곁에 있었지만 연인이 떠나자 고쳐 그렸다는 것이 정설이다. 비네가 4살 된 아들을 데리고 떠나버리자 이후 십여 년에 걸쳐 고쳐 그리는 과정에서 연인의 모습은 지워졌고, 쿠르베는 가슴에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모습이 되었다. 화면의 칼자루로 보아 그림 속의 남자는 결투를 하여 중상을 입은 후 홀로 누워 잠이 든 (혹은 죽은) 듯하다. 이는 당대 문학에 자주 등장했던 사랑을 위한 결투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영웅적으로 고통 받는 예술가상이라는 낭만적인 주제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미술사가들은 평하고 있다. 이 작품을 그의 개인사와 연관해서 보면, 그림이 최종적으로 완성되기 2년 전인 1852년에 비네가 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4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떠나버렸다. 이때 입은 상처를 기록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평이다. 쿠르베는 기존 자화상의 관습을 뛰어넘는 허구적인 내러티브를 작품에 도입해, 사적이 경험이 담긴 자화상도 보편적인 주제의 인물화로 읽힐 수 있게 했다고 서양 미술사는 기록하고 있다. 혜람은 이날 유난히 쉴 새 없이 떠들어서 갈증도 심했다. 미술관에서 오가며 얼굴을 익힌 한국 사람들이 눈인사하며 스쳐 지나간다.
쿠르베의 〈상처 입은 남자〉
쿠르베의 상처는 매우 상징적 표현으로 여기에서 박혜람의 시선으로 묘사되고 있다. 주인공 혜람도 연인을 떠나온(떠나버린) 경험이 있음을 암시한다. 최원식 문학평론가는 "관념을 다루는 작가(임택수)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으매, 이 소설을 여는 쿠르베의 자화상 〈상처 입은 남자〉(오르세)는 상징적이다. 지독하게 자유를 사랑한 화가의 자기애를 보여주는 이 그림이 구경(究竟), 함께 자유로운 비-의존(非依存)에 이르는 두 주인공의 운명을 표상하는 것도 그렇지만, 식물적 상상력 또한 종요롭다. 우듬지들은 이웃 나무들과 빛을 골고루 나눈다는 '꼭대기의 수줍음'을 상기컨대, 일체중생의 근본적 상호의존성에 대한 식물적 수락이야말로 두 주인공을 성장시키는 동력이거니, 소설의 처음과 끝을 둥그렇게 감싸는 소나무허리노린재는 그 살아 있는 화두일 것"(p.274~275)이라고 추천평을 썼다.
사랑과 관계, 만남과 이별, 그 속에서 필연적으로 겪는 상처와의 대면은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여정이다. 혜람은 진지한 눈빛으로 수백, 수천 가닥의 중첩된 선으로 채워진 그림을 본다. 안팎이 따로 없고, 공간의 구분도 사라진 선 앞에서 혜람은 어떤 사랑도 모든 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숨겨진 그 무엇이 진실이라고. 혜람과 함께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는 김섬은 타투이스트다. 저자 임택수는 〈작가의 말〉을 통해 "김섬은 상처로 상처를 가린다. 그것은 부활이고, 타투는 그녀의 조언에 다름 아니다."고 썼다. 두 여주인공은 오랜 친구이자 룸메이트였다. 김섬과 박혜람은 각자 사랑과 이별, 공포와 상처를 겪으며 '커다란 바위의 안쪽 같은 어둠'을 경험하지만 종국에는 '기억과 재생'의 자기만의 빛을 만들어간다.
소설가 은희경은 "김섬과 박혜람이라는 두 인물의 사랑에 대한 원근법.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는 공간과 문화의 변주. 도슨트와 타투이스트의 서로 다른 프로페셔널한 미적 탐험.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둘러싼 채 만남과 이별을 직조하는 관계들. 이 소설은 사랑과 관계에 대한 작가의 해석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한편 그 디테일한 여정에 흥미롭게 동참하도록 만든다."고 평가하며 사랑과 관계에 대한 작품의 성격에 중점을 둔다.
소설 속에서는 김섬과 박혜람, 그들의 남편과 연인인 최준오와 홍지표 이외에도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해 짧은 인연을 나누고 헤어지거나 다시 만난다. 한국과 프랑스라는 두 곳의 공간과 문화는 여러 작중 인물의 삶 속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프랑스 유학이라는 저자의 경험이 공간 확장으로 이어질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폭설이라는 재난이 없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인연들은 또 다른 장소에서 또 다른 모양으로 만남과 헤어짐을 이어간다. 이렇게 등장 인물은 유기적 관계를 이루며 소설의 구성을 긴밀하게 도와준다. 소설이 끝에 이르면 비록 우리 모두가 '우주를 떠도는 외톨이 별' 같은 존재일지라도 '단지 가깝게 있거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수렴되는 과정을 거친다. 소설은 결국 '그 하나하나가 한데 어울려' 마침내 성운처럼 장관을 이루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이끌어낼 수 있게 한다.
임택수 작가는 202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오랜 날 오랜 밤」이 당선되며 작가로 데뷔한 뒤 연달아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자는 『김섬과 박혜람』을 통해 “실패한 사람들, 어떤 중단된 삶을 사는 사람들, 계획과는 좀 어긋나게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위로를 건네고픈 마음이었다”면서 “중간에 꺾이더라도 계속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독자에게 전했다. 이제 개화하기 시작한 그의 문학이 활짝 피어나는 모습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하게 한다.
폭설로 샤를 드골 공항이 마비된다. 승객들은 항공사가 제공한 호텔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여러 인물의 만남이 발생한다. 파리의 미술관에서 도슨트로 일하는 혜람도 발이 묶인다. 일과, 남편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자 했던 지난 십여 년간의 프랑스 생활을 뒤로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한국에는 오랜 시간 그녀의 단짝이었던 김섬이 있다. 혜람은 한국에 무사히 도착하지만 자신의 짐이 분실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녀는 예전에 김섬과 함께 살았던 집에 머물면서 김섬의 달라진 일상을 알아챈다.
김섬은 프랑스로 떠났다가 태연히 돌아온 혜람에게 오래 묵혔던 감정을 드러내고, 떨어져 있던 동안 서로에게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마침내 김섬과 홍지표의 연애 사건으로 두 친구의 갈등은 심화하고, 그날 밤 혜람은 그 집을 나간다. 이후 그녀는 강원도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김섬은 동료 소방관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로 힘들어하는 홍지표에게 마음을 조금씩 내주게 된다. 그의 어깨에 있는 화상 자국을 타투로 가려주며 그에게 동거인이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관계를 이어간다. 홍지표는 우연히 본 영화에서 어린 시절 가장 가까웠던 친구에게 가해진 폭력과 죽음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 기억은 그를 급작스레 무너뜨린다. 김섬은 그런 홍지표를 지켜보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 결국 그녀는 홍지표와 헤어지고, 뒤늦게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 김섬은 십 년 만에 본가가 있는 슬구포로 내려가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고, 오랜 고민 끝에 새로운 시작을 위한 결단을 내린다.
두 여주인공은 혜람의 옛 연인 최준오의 부름을 받고 프랑스로 떠나면서 갈라진다. 혜람은 오직 준오 하나만 보고 프랑스로 떠났고,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 수 있을 거라는 꿈을 꾼다. 혜람보다 먼저 프랑스로 건너가 중학교 미술교사로 일하던 준오는 혜람이 오자 한없이 다정하고 친절하게 그녀의 적응을 돕는다. 자신의 보호와 도움 아래서만 혜람이 살아갈 수 있다는 듯이. 그러다 혜람이 어학 과정을 마치고 문화해설사 자격증을 취득해 일을 시작하자 태도가 돌변한다.
누구에게나 오류의 어둠이 시작되는 지점이 있다. 알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제대로 깨달았을 때는 이미 어둠에 빠진 다음이다. 준오만을 생각하고 프랑스로 가겠다고 결정했을 때 김섬은 극구 반대했었다. ‘너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준오의 욕망은 의심과 불안을 낳고 오래지 않아 폭력의 형태로 나타난다. 한번 시작된 폭력은 점점 강도가 높아지고 둘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혜람은 작문 치료를 받으면서 자신의 상처를 직면한다. “고작 두 개일 뿐인 마음인데 왜 서로 못 맞추고 엇갈리는지” 괴로워하던 혜람은 한국에 돌아오지만 김섬과의 관계마저 손상되고 만다. 우정보다 더 진했던 관계가 깨어진 뒤 혜람은 설악산 자락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몸과 마음을 회복해간다.
김섬과 홍지표의 관계도 일반적인 궤도로 진입하지 못한다. 친구 이상으로 생각했던 박혜람이 떠난 후 혼자가 된 시간을 버티기 위해 일상에 최선을 다했던 그녀는 강단 있는 기질로 통념을 위반하며 결핍을 채우려 한다. 하지만 그녀의 세계는 여전히 불편하고 불완전하다. 김섬은 자신이 미래를 꿈꾸며 홍지표와의 만남을 이어 온 것이 아니며, 그가 동거녀와 헤어지길 바란 적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동료의 죽음과 현장 업무에서 비롯된 외상으로 고통받는 홍지표는 김섬과 새로운 출발을 원하지만, 청소년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정신적인 균형을 잃는다. 그와 헤어진 후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김섬은 아이를 지우려 생각했다가 결국 마음을 바꾼다. “지금은 탯줄로 연결되어 있지만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독립된 생을 꾸려 가게 될” 존재, “비록 자신이 품고 있지만 아이는 이미 하나의 개별적 존재”라는 각성 때문이다. 또 하나의 섬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오래 거닌 끝에 재회한다. 오늘의 나무가 어제의 그 나무가 아니듯 천천히 변화한 모습으로.
외국에서 혼자 오래 지낸 남자는 중독된 게 많았다. 술과 담배는 물론이고, 사람에게도 금방 중독되는 것 같았다. 그는 혜람에게 너무 사랑한다면서 혜람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다.
“술은 그렇다 쳐도 애정이 지나치면 집착이 된다.”
김섬이 말했다.
혜람은 그의 관심이 남들보다 좀 유별난 방식으로 표현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과 행동이 가끔은 연기처럼 느껴져 별로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오류의 어둠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다.(p.157)
“목련 알지? 정말 이삼일 만에 진다. 우주적 관점으로 보면 인간의 삶도 그렇겠지?”
“그런 생각 한 적 있어. 꽃은 며칠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생명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다 하잖아.”
“계획 없이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그 또한 나쁠 게 없겠지.”
“돈도 지나치게 많으면 무감각해지고, 예쁜 얼굴도 늘 보면 별거 아니잖아?”
“모자라고 결핍된 것 속에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는데.”
디디에가 휴대전화로 꽃을 찍었다.
“우리 모두의 존재 자체가 그렇지 않을까?”
혜람이 말했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왜냐하면 그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할 테니까”라고 말했다.(p.205)
저자 : 임택수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열네 살까지 살았다. 이후, 서울과 프랑스의 몇몇 도시에서 일과 학업을 이어갔다. 프랑스 폴 베를렌 메스 대학(Paul Verlaine de Metz)에서 불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202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오랜 날 오랜 밤」이 당선되었다. 같은 해 장편소설 『김섬과 박혜람』으로 제20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오롯이 혼자이고 싶을 때, 노트북을 챙겨 공항으로 간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