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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신 - 신이 없다면 우린 행복할까?
앤서니 T. 크론먼 지음, 이재학 옮김 / 돌밭 / 2023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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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제3의 신』의 〈서문〉의 제목은 「벽장 속에 숨겨진 신」이다. 쉽지 않은 내용을 다룬 책이라는 느낌이다. 보이지 않는 신을 벽장 속에 숨겼다(숨겨졌다)는 말은 애매모호하다. 아마 독자가 비종교인이라서 그럴지 모르겠다. '신(神)'에 대한 개념은 종교적 범주에서 출발했기에 존재 유무를 독자가 추정한다면 논쟁만 낳을 뿐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신(神, God)이란 무엇인가?라는 개념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 백과사전을 찾았다. 인터넷을 통해서다. 존재 유무가 불확실한 신의 의미에 대해 백과사전은 어떻게 풀이할까? 백과사전이 신에 대한 궁금증을 완전히 풀어줄 것이라고는 생각지는 않는다. 아무도 본 적도 없고, 따라서 형태가 묘사된 적도 없는 것으로 미루어 추상적 개념으로 막연히 붙여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독자는 지울 수 없다. 사전적 풀이로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니고 자연계를 지배하며, 인류에게 화복을 내린다는 신앙의 대상이 되는 '초월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시대와 분야에 따라 그 개념과 성격이 다양하게 정의되었다고 한다. 신의 개념을 문자로 정의한 것은 불과 수천 년의 역사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유사 이전에도 인간은 신을 믿었다고 배운 적이 있다. 그 신은 지역마다 다르고, 존재의 형식도 다르게 표현된다고 교과서에 씌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류는 문자가 없던 유사 이전에는 신에 대해 어떻게 표현했을까? 독자의 짧은 지식으로 판단하자면 아마 하늘을 가리키는 정도의 몸짓이나 손짓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논쟁이 있어 왔다. 이를 긍정하는 측의 대표적인 것에는 다음의 세 증명을 든다. ① 신은 완전한 것인데, 만약 ‘존재’라고 하는 요소가 빠지면 신은 불완전하게 되므로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본체론적 증명. ② 자연계에 있는 것은 모두 인과의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므로 인과관계를 더듬어서 점차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최후에는 제1원인으로서의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우주론적 증명. ③ 천체가 질서정연하게 운행하고 있는 것은 목적이나 의장을 창출한 신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목적론적 증명 등이다. 또한 이들을 비판한 역사적 증명, 도덕적 증명, 체험적 증명 등도 있다고 두산백과사전에는 기술되어 있다. 비종교인인 독자로서는 충분하진 않지만 어떤 의미로 정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실마리를 잡은 것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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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앤서니 T. 크론먼(Anthony T. Kronman)은 윌리엄스 대학을 졸업하고 예일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4년부터 2004년까지 예일 대학교 법과대학 학장을 지냈으며, 현재 예일 대학교 법과대학 석좌교수로 계약, 파산, 법률학, 사회이론과 ‘지도연구 프로그램’을 통해 인문학에 기여하고 있다. 예일 대학교 이전에는 시카고 대학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저서로 『막스 베버의 법률사회학』(공저), 『길잃은 변호사』, 『예일 법과대학사』, 『계약법의 경제학』(공저) 등이 있다. 대학과 저서를 보니 법학자이고 법학 교수 등을 지낸, 종교와는 무관한 삶을 살아온 분인 것 같다. 저자는 왜 종교와 신에 대한 관심을 갖고 책을 썼을까?
이유가 책의 〈서문〉에 적혀 있다. 저자는 신앙심이 깊은 종교인이나 종교에 무관심한 사람이나 모두 어딘가 너무 넘치거나 조금 부족하다 싶다고 느낀 때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한편으론 광신자라 외면하고 다른 한편으론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사는 일에 치여 그런 문제를 곰곰이 따져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기 일쑤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살아왔다. 저자는 우리의 일상을 버텨내는 일이 더 버겁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저자는 열두세 살 무렵 어머니와 나누었던 대화들을 평생 잊지 못했다고 털어놓는다. 이에 따르면 자신이 가진 우주의 처음은 있는가? 아니면 언제나 계속 존재해왔는가? 우주는 소멸되는가? 인간은 광대한 사물의 질서 속에 어디쯤 서 있는가?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에 비추어 인간의 삶에 어떤 지속적인 의미가 있기는 한가?라는 질문들을 그때부터 끊임없이 해왔다.
당시 어머니와의 대화 상황을 서술한다. 어느 날 저녁을 먹고 난 다음 마티니 한잔을 손에 들고 어머니는 집 현관의 계단에 서서 한 말을 전한다. "우리는 오직 잠시 살아갈 뿐이다.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유일한 성취는 이 생애에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 삶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존재하지 않는 신의 도움 없이, 그리고 목적이나 계획이 없는 세상의 어떤 지지도 받지 못한 채"라는 내용이다. 그때 저자의 어머니는 실존철학을 신봉한다고 선언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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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저자의 어머니는는 96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그 철학을 꿋꿋하게 지켜나갔다. 저자는 어머니와 나누었던 그런 대화에 넋을 잃을 정도로 집중했다. 치자나무 꽃이 만개했던 그날 밤도 저자는 결코 잊지 않았다. 아마 그런 기억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저자는 그렇게 수십 년 간 지속해온 독서와 사색의 결과물로 자신만의 독특한 종교관과 인생관을 정리해 이 책을 집필했다. 저자는 이 책에 앞서 2016년 10월 『다시 태어난 이교도의 고백』이란 책을 출간했다. 비록 아브라함의 종교가 가리키는 창조주 유일신은 아니지만 영원불멸의 존재인 세계 그 자체를 하나의 신으로 받아들이게 된 자신만의 신학을 기술한 내용이었다고 밝힌다. 기독교에서 하느님의 아들로 거듭난다는 의미의 다시 태어난(Born-Again)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이 가장 인상적인 책이었다고 설명한다. 이 책 『제3의 신』은 그 후속편이다.
저자에 따르면 전작은 오늘 날 우리의 사고를 형성해온 고대의 위대한 철학 체계들에서 시작해서 어떻게 자신이 현재의 세계관을 갖게 됐는지 하향식으로 설명한다. 철학적 배경 지식이 없으면 결코 쉽게 읽히지 않는 책이다. 반면 이 책 『제3의 신』은 인간의 경험, 저자의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경험에서 출발해 어떻게 자신의 인생관과 종교관까지 나아갔는지 차근차근 비교적 쉽게 설명해 간다. 전작의 해설서 또는 입문서와 같은 책이라 해도 무방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인간이 무한한 시공간을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라는 출발점에서 『제3의 신』을 시작한다. 인간은 그런 점에서 여느 동물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무한한 시간의 존재를 인지한다는 지점에서 동물과 달라진다. 그런 절대 불변의 영원성을 인지한다는 생각이 곧 신이라는 개념과 연결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따라서 인간은 순간을 사는 동물이면서도 영원성을 관장하는 신의 세계에도 '어정쩡하게' 걸쳐 있는 존재라고 한다. 따라서 이 어정쩡함을 인간의 존재 구속적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두 세계의 간극에서 깊은 절망과 삶의 환희를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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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관점에 따른다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 인간이 이성을 발휘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기만 하면 우주만물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는 주장은 오류다. 그렇다고 지상에서의 삶은 아무 의미 없지만 하느님을 받아들이면 천국에서 누구나 우주만물의 이치를 깨닫는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는 아브라함의 종교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한계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또 인간은 그 어느 쪽에도 완벽하게 속하지 않은 경계인의 삶을 살아간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의 질서, 사회적 이상향, 심지어 완벽한 사랑을 찾아가는 단계를 살아갈 뿐, 그 최종적인 단계엔 영원히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상과 천상의 도시 양쪽 모두에 속하는 이중적 시민권을 가진 인간의 삶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른바 '제3의 신'의 개념이다.
이에 따라 이 책은 저자가 사춘기 시절의 자의식을 폄하하고, 설익은 자신만의 철학을 끝까지 천착한 노학자가 이끌어낸 사색의 결과물이라는 종교인들의 반대와 저항에 부닥칠 수도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성을 대단히 중시하지만 만능으로 여기지 않고, 영원성과 영성적인 태도를 중시하지만 인간됨의 포기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누구나 원하는 소중한 목표에 끝내 도달하지는 못한다는 좌절에 시달려도 신을 향해 뚜벅 뚜벅 걸어 나가는 길에 삶의 환희가 있다고 우리에게 속삭인다. 비종교인인 독자가 읽기에는 수용하고 이해하는 일이 가능하지만 종교인, 특히 기독교인이나 무슬림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일 것 같다.
나는, 이 공동체와 나라는, 아니 세계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궁금한가? 무엇이 진정한 사랑이고 그런 사랑과 현대 과학의 학문적 노력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알고 싶은가? 우리는 어떤 종교를 가져야 할지 망설이며, 사회 정의의 구현에 어떻게 기여해야 할지 가슴이 답답한가? 나는 무엇을 하며 왜 살아가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한가? 저자의 이 같은 질문은 이 책의 주제와 연결된다. 저자의 논리에 따른 신은 종교에서 말하는 창조신도 아니고, 무신론자의 믿음처럼 '신은 없다'도 아니다. 그 경계에 선 저자의 신은 이렇게 '벽장 속에 숨겨져 있는, 제3의 신'이 성립을 가져온다. '저자만의 신'이라고 바꿔 말해도 이상할 게 없다. 대학 공부를 앞두고 있거나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청년, 세상을 바라보는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한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일독을 권유할 만한 소중한 책이다. 저자나 출판사 측은 적어도 세 번은 읽어보길 권한다. 본문과 저자 주를 읽을 때마다 무언가 조금씩 더 깨닫고 공감하게 된다는 사실은 먼저 읽은 독자도 느낀다. 사실 어렵다. 그러나 가치 있는 책이다. 어쩌면 인생관이나 세계관, 가치관 등 세상을 살아갈 사람이 가정 먼저 읽어야 할 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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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모두 4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인본주의자에게 찾아온 신」, 2장 「시작과 끝이 없는 시간」, 3장 「아테네와 예루살렘의 미몽」, 4장 「삶의 환희」등이다. 제목으로만 깊이 생각하고, 유추하면 이 책의 절반쯤 읽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독자는 판단한다. 1장에서는 제목처럼 저자 자신은 부모로부터 기독교나 유대교, 이슬람교 등 종교는 결코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고 배웠다고 말한다. 성공을 무조건 떠받드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저자의 어머니는 이성을 기초로 해 수립된 견해들만이 숙고할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저자가 믿기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숙고하기보다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종교가 범죄를 저지른다고 말할 정도였다. 또 신앙을 근거로 했다든가, 혹은 남들이 그렇게 말했다는 이유만으로는 어떤 말도 인정하지 말라고 어린 저자에게 주지시켰다 밝힌다. 어머니는 합리주의자였고, 또한 철학자였다는 저자의 주장이다.
책에 따르면 저자의 종교관은 어렸을(12~13세) 때 부모, 특히 어머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철학자 니체처럼 "신은 죽었다"라는 입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등과도 화합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어린 저자에게 "오직 잠시 살아갈 뿐"이라고 말했다. 이 부분을 잠시 인용해본다. "우리는 죽는다.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유일한 성취는 이 생애에 있을 뿐이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하며, 존재하지도 않는 신의 도움 없이, 그리고 목적이나 계획 없는 세상의 어떤 지지도 받지 못한 채 말이다." 삶의 의미는 스스로 만들어가며, 그마저 덧없다고 저자의 어머니는 말했다. 그런 어머니는 독립적인 정신의 소유자였고, 합리주의자, 실존주의자였다는 것. 저자는 이를 물려받아 대답을 스스로 찾아가려는 노력 덕분에 카뮈와 사르트르에 이르렀다. 어려운 책을 읽어가면서 실존주의에 심취하기는커녕 서서히 실존주의는 무너져갔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종교인과 무신론자의 경계에서 사색의 시간을 많이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신론이 번성하는 최근의 환경에서 무신론자는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가 진실로 영원한 무엇과 우리를 이어주는 그 연결고리에 달려 있지 않다고 말한다. 과거엔 그 같은 연결성이 강조되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착각이었다. 역사적으로 오랜 투쟁 끝에 우리는 이제 이를 더 분명하게 본다.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무엇이 우리 자신들의 삶보다 (조금 더)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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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무신론자를 비난하지 않는다. 무신론자가 조롱하는 영원에의 갈망이 우리 인간성에 가해지는 피치 못할 위협이 아니라 그 구성 요소의 하나임을, 오류가 아니라 그 특징의 하나임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육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더할 나위 없이 표현한 내용이 무신론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들의 이런 반종교적 독단의 가장 정교한 주장을 물리치려면 무신론자의 손아귀에서 인본주의를 구해내야 한다. 신을 부끄럼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유물로 인본주의를 되돌려주어야만 한다. 영원성에의 갈망을 인간 조건의 중심으로 되돌려 놓을 필요가 있다. 그 갈망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곳에 속한다.
2장 「시작과 끝이 없는 시간」은 '영원성'에 대해 살펴본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 과학의 특징은 우리가 시간을 두고 더 가까이 다가가긴 하지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시간을 다 쓰고도 결코 도달하지 못할 목표를 추구한다는 점에 있다. 사실 이런 종류의 모든 추구가 갖는 의미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영원성이라는 단어에 있는, '초시간성'과 '무한한 시간'이라는 두 가지 의미와 개념이 모두 필요하다.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깊은 좌절이라는 인간 특유의 경험과 그럼에도 조금씩 발전하면서 점점 더 커져가는 능력이 주는 환희를 설명하려면 우리에게는 그런 개념이 필요하다. 좌절이 수반되는 그런 환희는 더 많이 이해하고 싶다는 갈망만큼이나 사랑과 정의를 추구하는 우리의 모든 노력에서 얻는 유일한 보상이라고 시간을 풀어헤친다. 현대과학은 인간 조건의 한계와 전망을 무엇보다 더 잘 나타내는 일반적 현상의 특별하고 명쾌한 사례일 뿐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3장 「아테네와 예루살렘의 미몽」은 고대 그리스와 예루살렘에서의 학문과 종교가 가진 헛점을 짚어낸다. 인간만이 우리의 삶에 끝이 있음을 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또한 끝없는 시간의 존재를 안다. 무한한 시간이라는 개념은 어떤 제한된 시간 안에 달성되지 않는 목표를 상상하게 해준다. 우리가 창조주에 비해 얼마나 결함이 많은 존재인지 알게 되면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누리는 상태 이상의 더 나은 무언가를 갈망하게 된다. 우리는 더 신과 같아지기를, 부패와 죽음을 넘어, 우리의 모든 고통의 근원이 되는 시간 그 자체를 초월해 신의 왕국에서 신과 함께 하길 갈망한다. 저자의 논리에 경의를 표할 만큼 이 저서는 독자들의 경이와 경탄을 불러낸다. 이 책의 가치가 영원성 위에 놓일 것이라고 독자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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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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