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의 역사
최경식 지음 / 갈라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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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assassination)'은 유사 이래 인류와 함께해 온 사실이 수많은 역사 기록에 남아 있다. 유추한다면 인류의 역사 기록 이전에도 암살은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신화로 전해 내려온 이야기들에도 암살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암살이란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비합법적으로 살해하는 행위를 말한다.역사 기록에 의해서 암살은 고대부터 행해진 것으로 확인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s)는 체제의 지도자를 애타적인 지배자와 자기 중심적인 폭군으로 구분하고 그 존재를 악(惡)이라고 정의하였기 때문에 이것이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지배자 암살을 간접적으로 정당화했다. 중세에는 가톨릭교회가 교의를 지지하지 않는 지배자를 폭군이라고 하였으며, 칼뱅 주의자들도 마찬가지로 종교적 제재로서의 지배자 암살과 죄악으로서의 살인간에 일선을 그었다고 정치학대사전은 기록하고 있다. 특히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는 암살도 지도자의 자질 중의 하나라고까지 서술했다.

암살의 주체는 개인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단독범, 특정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비밀결사, 정부가 은밀히 파견하는 공작원 등 다양하다. 체제 측에 따라 반체제 분자의 진압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경우와 반체제측 및 불평분자·광신자·정신이상자 등이 체제측의 권력자를 노리고 이루어진 경우도 있다. 세계사는 물론 우리 역사에도 주요 변곡점마다 암살 사건이 등장한다.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정치적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암살 당시 사건의 원인과 사회적 배경, 행위에 대한 동기 등은 현재 국내외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이 책 『암살의 역사』는 말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저자 최경식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조망한다면 유익한 반면교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집필 취지를 밝히고 있다. 이 책에는 한국사와 세계사에서 발생했던 암살 기록 20편이 담겼다. 등장인물들을 보면 한국사 편에선 혜종, 공민왕, 문종, 소현세자, 경종, 정조, 고종, 김구, 장준하, 박정희 등이다. 세계사 편에선 링컨, 페르디난트, 라스푸틴, 트로츠키, 히틀러, 간디, 케네디, 마틴 루터 킹, 레이건, 사다트 등이다. 이들이 등장하는 시대의 암살 사건과 그 막전막후가 작가의 시각으로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저자는 “한국사와 세계사에서 발생했던 실제 암살 사건, 암살설 미스터리, 암살 미수 등을 다뤘다”며 “해당 사건뿐만 아니라 그 전후의 역사도 폭넓게 다뤄줌으로써 독자들에게 흥미와 지식, 교훈을 동시에 전달하려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조병석(여행스케치 리더, 싱어송라이터)씨는 “암살이라는 상처의 그림자는 쉽게 지워지거나 잊히지 않고 언제나 강렬한 흔적으로 남아있는 ‘역사 중의 역사’”라고 말했다. 이어 ‘역사 중의 역사’인 암살에 대한 저자의 깊이 있는 탐구를 정독해 보기를 권한다. 저자의 전작들인 『숙청의 역사-세계사편』 『숙청의 역사-한국사편』 『정변의 역사』도 함께 읽는다면 더욱 흥미로운 역사 탐구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추천사를 쓴 서정열(전 육군3사관학교장, 제7보병사단장)씨도 "역사를 탐구하는 것은 선조들의 지혜를 배우고 시행착오를 줄이는 최선의 방법"이라며 이 책을 통해 소통과 조율 설득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됐다고 말한다. 특히 암살로 인해 일시적으로 역사가 끊어지지만 새로운 역사가 나타나 다시 이어지는 장면도 인상 깊었다고 추천사를 썼다. 서 추천인은 "개인적으로 링컨의 내용이 와닿았다"며 우리나라에도 갈등을 통합하고 최고의 조율과 설득을 하는 리더가 나타나길 소망한다고 추천사에 덧붙였다. 이 책은 순식간에 페이지를 넘기며 읽을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독자들에게 깊은 통찰력과 분별력을 제공할 것이라 독자는 믿는다.

이 책은 〈한국사〉와 〈세계사〉 편으로 나뉘어 각 역사에서 10개의 사건을 뽑아 각 10개 장(章)씩 모두 20개 장으로 이뤄져 있다. 한국사 편에는 「권력 쟁투에 희생된 왕건의 장자: 고려판 왕자의 난」이란 제목으로 '혜종 암살설'을 다루고 있다. 말 그대로 '설'이지만 여러 가지 정황과 당시 어수선한 국내 사정으로 '설'이 단순 추정이 아닌, 확실한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암살이 사건이 아닌 '설'로 그친 경우는 우리나라를 비롯 세계사에서도 비일비재하다. 정치 권력의 다툼이 심하고 정확한 사건 전모를 밝히기에 한계가 있었던 옛날로 돌아갈수록 '설'이 훨씬 많다. 후세의 기록마저 제대로 남기지 못할 강력한 권한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에 또다른 왕 공민왕은 당초 영민한 개혁 군주로 출발해 백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고려말 '권문세족' 개혁 반대 세력에 의해 개혁의 꿈도 사라지고 결국 고려는 망국의 길로 치닫는다. 공민왕의 암살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막강하다. 나라는 개혁을 멈추면 망한다는 메시지다.



고려보다 조선시대는 암살 사건이 더 많았다. 물론 역사 기록의 엄정함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 낱낱이 기록돼 있기에 더 많은 숫자가 등장했을지도 모른다. 특히 소현세자 암살설은 「승냥이 같은 아비 밑에 범 같은 아들: 급서와 일가족 몰살」이라는 끔찍한 표현이 가능할 정도로 충격적이다. 권력에의 탐욕은 천륜과 인륜으로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인가 보다. 암살설의 중심에 있는 왕은 인조다. 부정적 군주의 대표적인 왕이다. 광해군의 폭정을 뒤엎고 나라를 바꿔야 한다는 인조의 등장은 한민족, 조선의 가장 비참한 결과를 낳았다. 독자들이 잘 알다시피 남한산성에서 농성만 하다 결국은 끌려나와 청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린 왕이다. 나라의 위엄뿐만 아니라 결국 개인적 불행을 초래한 왕으로 역사에 남았다. 인조의 국정 운영 실패뿐만 아니라 성격까지도 왕의 재목으로는 부족했다는 사가의 평가를 받았다. 전임자인 광해군이 영리한 중립외교를 내세워 평화와 실리를 취했던 데 반해 인조는 사대주의 명분에만 집착해 국가와 백성을 큰 위기에 빠뜨렸다. 종국에는 그 자신 스스로 오랑캐라 여겼던 사람 앞에 나아가 전례 없는 치욕을 감당해야 했다. 어리석기만 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수도 있다. 인조는 어리석은 것에 더해 광적인 의심과 잔인함까지 갖췄다. 폭군의 특성까지 내재했던 것이다고 저자는 사가들의 평가를 바탕으로 지적하고 있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 〈인조실록〉 중

반면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는 전도유망한 존재였다. 불모로 잡혀간 청나라에서 좌절하지 않고 국가의 미래를 생각했다. 신문화, 신문물을 열심히 학습해 추후 조선에 이를 적용하고 국가의 반전을 이룩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철 지난 사대주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던 아버지 및 그 신료들과 명백히 다른 길을 걸으려 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너무나 참혹한 결과를 빚은 왕이었기에 만약 소현세자가 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됐다면, 조선은 상당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라고 저자는 책에 적고 있다. 그러나 인조의 역량은 왕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소현세자의 뜻을 헤아리기는커녕 잘못된 길에 빠져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으로 여겼다. 광적인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이런 가운데 소현세자가 석연치 않게 세상을 떠났다. 신체에서 나타난 증상 등 여러 정황들이 소현세자가 암살당했음을 시사했다. 그 배후에 인조가 있다는 의혹이 커져갔다.



볼모 생활 9년 째인 1645년 소현세자는 고국으로 완전 귀국할 수 있게 됐다. 청나라가 중국 대륙의 패권을 장악한 만큼 더 이상 소현세자를 붙들고 있을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하루빨리 조선에 적용시키겠다는 꿈을 안고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그의 짐들 안에는 인조와 신료들에게 전파할 선진 문물들도 한가득 있었다. 편협한 아버지가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는 제대로 파악이 안 된 것 같았다. 이때도 인조는 신료들에게 "청에서 세자를 돌려보내는 조치가 참으로 좋은 뜻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나아가 그는 소현세자의 환영식을 못하게 막았다. 이조에게 있어, 참으로 오랜만에 자신의 앞에 선 아들은 더 이상 아들이 아니었다. 그저 오랑캐에게 영혼을 팔아먹고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정적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현세자의 참담한 비극은 일찌감치 예견된 것이었다. 

1949년 4월 26일, 소현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꿈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온 지 불과 두 달만이었다. 뚜렷한 목적의식에 부풀어 있었던 사람, 그리고 조선의 희망이었던 사람이 허망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국 땅에서 그렇게 힘들었던 시절도 강건하게 이겨냈던 소현세자가 귀국해서 맥없이 급서한 것에 대해 모든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관련한 의혹이 터져 나온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시 사람들과 현재 역사학계에서 제기되는 암살 의혹들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우선 소현세자의 시신 상태가 주목된다. 인조실록을 보면 소현세자의 시신이 까맣게 변했고 눈, 코, 귀 등에서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고 한다. '독살'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던 사람은 "세자가 마치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 같았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p.60~61)

우리 현대사에서도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는 의문의 죽음이 있다. 「그날 약사봉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민주화 투사의 이상한 죽음 전말」이란 제목의 장준하 암살설을 이 책은 9장에서 다루고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한 축을 담당했던 민주 투사의 죽음은 '사고가 아닌 사건'이라고 모든 증거나 정황이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이나 관계 당국의 공식발표는 '실족 추락사'로 결론 지었다. 이 사건은 1993년 장준하 선생 사인규명 진상조사위원회가 결성돼 "장준하가 추락사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다만 국가 기관의 개입 여부는 밝혀내지 못했다. '진상 규명 불능'이라는 결론만 내렸을 뿐이다.



장준하 암살 의혹은 한동안 잠잠하다가 2012년 재부상했다. 당시 폭우로 인해 장준하 묘소 뒤편 석축이 붕괴됐다. 부득이 장준하 유골을 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장 시 유골을 검시해야 했는데, 여기서 두개골 골절 흔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지름 5~6cm 크기의 원형으로 함몰된 구멍과 금이 가 있었다. 이전부터 '사인'으로 지적된 것이었지만 각종 매체를 통해 국민들에게 또렷이 전파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의 여파로 장준하의 사망 원인과 관련한 논란이 다시 발생했다. 장준하의 아들 장호권은 "추락으로 두개골에 그런 상처가 나기는 어렵다는 법의학자의 소견이 있었다. '망치' 사이즈와 같은 크기로 두개골이 함몰됐다. 사인은 망치에 의한 가격으로 보인다"라고 주장했다. 장준하기념사업회도 나서서 전면 재조사에 착수할 것을 촉구했다. 이후 '장준하 선생 사인진상조사 공동위원회'가 구성돼 재조사에 들어갔다. 위원회는 장준하 사망 원인을 '타살 후 추락'으로 결론지었다. 이에 몇 가지 근거를 제시했다고 저자는 책에서 말하고 있다. "머리에 강한 외부 충격이 가해지면서 죽으면 목등뼈에 있는 혈액순환 기능이 멈춰 출혈이 발생하지 않는데, 장준하 사망 시 출혈이 거의 없었다. 추락하면 어깨뼈도 골절돼야 하는데 시신의 어깨뼈는 멀쩡했다. 추락에 의해 두개골이 함몰됐다면 왼쪽 안구 주위 뼈도 함께 손상돼야 하는데 이 부분도 멀쩡했다."(p.150) 그럼에도 장준하 사망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사건이다. 사건과 관련한 조사기록물들이 오랜 기간 비공개로 처리돼 있고 김용환 등 핵심 관련자들이 이미 죽었거나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은 같은 비중으로 한국사의 암살과 세계사 속의 암살을 다루고 있다. 독자 개인적 욕심으로는 조금이라도 더 자세하게 보충해 두 권으로 책으로 재편집하기를 바란다. 한국사에서도 얼마 전 국내를 떠들썩하게 했던 '국정농단' '비선실세'라는 단어가 세게를 놀라게 한 사건이 이 책에 소개돼 있다. 〈세계사〉 13장에 있는 「비선실세 괴승의 최후: 국정논단과 극적 죽음 전말」이라는 제목의 러시아 라스푸틴 암살 사건이다. 러시아의 근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사건이다.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에서는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 사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변방 난봉꾼이었던 라스푸틴은 기묘한 치유 능력을 몇 차례 선보임으로써 러시아 황가의 절대적 신임을 얻는 데 성공하고 이를 계기로 국정에도 적극 개입했다고 한다. 문란한 사생활도 문제지만 그보다는 인사권마저 휘둘렀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제국은 망가져 가고 귀족 지배 계급은 자신들의 재산과 지배권을 지키기에 바빴다. 로마노프 제국의 마지막 상황의 모습을 잘 말해준다. 이 괴승의 부각은 망가져 가고 있는 제국의 종말을 부채질한 격이다. 민생 악화에 분노한 민중들이 대대적인 '2월 혁명'을 일으켰다. 황제 니콜라이 2세의 폐위로 로마노프 왕조는 몰락했다. 이후 발생한 '볼셰비키 혁명'(10월 혁명)은 황가의 멸문지화마저 초래했다. 새롭게 집권한 볼셰비키당의 레닌은 반 혁명 세력의 구심점이 될 것을 우려해 황제의 가족마저 잔인하게 처단했다. 제국의 실정이 비선실세의 국정운영 관여를 불러왔는지, 비선실세가 제국의 실정을 부채질해 결과적으로 황가를 몰락시켰는지 원인과 결과가 어떻든 간에 비선 실세의 국정 개입은 개방화된 나라에서는 망국의 원인임이 되는 점을 보여준 사건이다. 러시아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변방으로 취급받는 세월을 오래동안 겪어왔다. 영토는 세계 제일의 넓이고, 인구 또한 유럽 다른 강대국보다 훨씬 많은 나라지만 문명과 문화 면에서는 뒤졌다는 평가 속에 유럽의 일원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일부 러시아 예술인들이나 정치인들은 탁월한 능력을 보여 세계사에 돋보이는 족적을 남겼지만 20세기 들어와서도 여전히 유럽 국가에서는 러시아는 '골치 아픈 변방'이었다. 러시아가 미국과 세계의 패권을 양분했던 결정적 기회는 두 가지 요인으로 풀이된다. 첫째 로마노프 제국의 실정으로 국민의 대다수가 농노나 농민으로 착취당하는 상태로 소외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나라 상황은 노동자-농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주체가 된다는 마르크스 공산주의 사상이 먹혀 들어간다는 점 등이다. 지금의 공산주의 러시아가 태동한 원인이 됐다. 또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히틀러가 러시아까지 확전시켰다는 점이다. 지금은 러시아가 경제적 위기로 공산주의 혁명에 의한 패권국으로서의 위치는 잃었지만 그들의 군사적 패권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굳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러시아는 자체로서 화약고의 역할을 할 가능성은 여전히 짙게 남아 있다. 


저자 : 최경식


어릴 때부터 역사에 남다른 애착이 있었다. 한국사, 세계사, 전쟁사 등 역사 관련한 책들을 많이 읽었다. 역사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아 한자능력자격증을 취득했고, 한국사능력검정 시험에도 응시, 합격했다. 대학에서 정치외교를 전공으로, 역사는 부전공하다시피 했다. 현재 브런치스토리와 헤드라잇에서 역사 작가로 활동하고 있고, 틈틈이 일반인과 학생 등을 대상으로 한 역사 강의에도 출강하고 있다. 국민일보, 한국경제, 파이낸셜뉴스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국회, 금융위, 금감원, 기재부, 중기부, 한국거래소, 산업은행, 교계, 각종 기업, 시민단체 등을 출입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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