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너는 편하게 살고자 하는가 라이즈 포 라이프 1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요한 옮김 / RISE(떠오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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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대는 스스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제시된 대로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경향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있다." 이 책 『왜 너는 편하게 살고자 하는가』의 편역자 김요한은 지적한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미 우리가 흔히 지칭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칭할 수도 없다. 호모 사피엔스는 지능을 가진 인간이란 뜻인데 '지능'이란 단어와 '생각'이란 말은 동의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비슷한 의미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인공지능(AI)에도 뒤떨어지고 마침내 AI의 로봇의 지배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이는 과학이나 철학의 문제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미래'에 대한 문제이다. 이 책 표제어에서 문득 떠오르는 철학자가 있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와 프리드리히 니체다. 이 두 사람은 거의 19세기를 온전히 살아낸 사람들이다. 독자들도 잘 아시다시피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 철학자로 '삶이 곧 고통'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끝없는 사유로 삶의 지혜를 제시했다. 많은 세계 명사들에게 영향을 미친 니체 역시 삶에 대한 철학적 탐구와 깊은 성찰로 오늘날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또 두 철학자는 19세기 독일 철학자라는공통점도 있다. 세계 어느 대륙이나 전쟁이 잦았지만 유럽은 로마 제국 때부터의 영향인지, 이웃한 각 나라들이 친구처럼, 또는 적처럼 지내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듯하다. 국경이 있지만 오가는 데 큰 어려움도 별로 없다. 개방된 문화 탓이리라. 정확한 원인은 모르지만 백인종으로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자신들이 이어받았다는 자부심 때문이 아닌가 싶다. 

두 철학자가 19세기 독일인이지만 쇼펜하우어가 1788년 생이고, 니체는 1844년 생이니만큼 쇼펜하우어가 더 앞선 세대의 사람이긴 하다. 그러나 독일, 독일인의 정체성이 확립된 시기가 1870년 비스마르크 이후라고 보면 두 철학자가 살았던 독일은 서유럽에서 조금은 뒤떨어진 문명임은 틀림없는 시대다. 상대적으로 넓고 비옥한 영토의 프랑스와 섬나라의 한계를 해외 개척으로 세계 최대의 나라를 확장한 영국에 비해 조금은 뒤처진 국토 환경이다. 산악지형인데다 바다에 접한 해안선이 짧고 그마저 대서양으로 가기에는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을 거쳐야 한다. 해외 진출의 조건이 열악한 셈이다.



두 사람의 철학은 신(神)의 개념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 있었던 배경도 있다. 독일이 유럽의 강대국으로 올라선 것은 프로이센에서 저먼(게르만)이란 명칭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 비스마르크 재상 이후부터다. 독일의 강대국으로 올라선 가장 밑바탕이 된 학문은 철학도 인문학도 아닌, 과학이다. 20세기 들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렀지만 독일은 두 차례 모두 전쟁을 일으킨 침략국이었다. 억눌렸던 그들의 민족성이 과학의 탁월한 발달로 서구뿐만 아니라 세계 패권을 꿈꾸었으니 서양 문명이 호전성을 갖고 있다는 분석도 가능할 것 같다. 

이 책의 역자 김요한은 철학은 '생각과 창조'를 무기로 발달한 학문이고, 유효한 수많은 사상과 지혜를 선도해 왔는데 오늘날 현대인은 미디어가 쏟아내는 콘텐츠와 온갖 정보의 홍수 속에서 '스스로 사유하는 법'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하고 있다. 역자는 생각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을 위해 이 책을 펴냈다. 쇼펜하우어의 수많은 아포리즘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는 니체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오늘의 나를 완전히 죽여야 ‘내일의 나’가 태어난다. ‘새로운 나’로 변하려면 기존의 나를 완전히 버려야 한다.” 니체의 말처럼, 지금 내 삶을 고민하고 있다면 먼저 진정한 ‘나 자신’을 찾아내는 게 최우선이다. 

역자에 따르면 이 책은 니체의 저서 중 핵심적인 내용을 뽑아 우리에게 꼭 필요한 메시지를 담았다. 또한,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짧고 간결한 문장과 쉬운 번역을 택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니체의 번역서가 나왔지만, 니체 철학이 지닌 독특함으로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니체의 핵심 사상에 바로 접근할 수 있으며, 무수한 삶의 위기와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현실에서 올바른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오늘날 현대사회는 복잡하고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역자는 책 앞 부분 〈옮긴이의 말〉을 통해 4차 산업의 혁명과 함께 인공지능(AI)의 발달, 무수한 미디어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현대인의 삶은 버겁고 힘들다고 말한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니체의 메시지’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니체의 번역서가 나왔지만, 니체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논쟁은 독자들에게 ‘읽기 어려운 책’으로 각인된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이 책은 니체의 철학을 현대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하며, 독자들에게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적극적으로 자아를 실현하고,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도록 도와준다. 책의 출간 이유다.

이 책은 세 가지 큰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현대사회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글을 엄선했다. 둘째, 니체 원문의 느낌과 의미를 최대한 살리면서 개인적 해석이나 표현을 최소화했다. 셋째, 글보다 영상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접근성을 고려하여 현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표현을 사용했다. 이 책은 니체가 전하는 메시지를 현대적 맥락으로 재해석하여 독자들이 니체의 메시지를 쉽게 이해하고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따라서 삶 속 모든 어려움과 도전 속에서도, 항상 희망의 빛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는 당신의 여정이 이 책을 통해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이 책은 모두 4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존재의 의미를 찾아서〉, 2장 〈깊은 질문에 답하다〉, 3장 〈깨달음으로의 고통스러운 여정〉, 4장 〈우리, 이해받지 못하는 자들의 삶〉 등이다. 독자가 이 책을 통해 이해하기로는 쇼펜하우어가 삶의 바탕을 '고통'에 두었다면 니체는 '절망'에 두고 있지 않나 싶다. 물론 독자의 느낌이어서 내세울 바는 못 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세상에 대한 근본적 이해를 절망서 시작하게 된다.



역자는 이 책의 〈옮긴이의 말〉을 책 앞 부분에 두고 '서문'을 대신하고 있다. 그 마지막을 책의 이해를 위해 역자가 제시한 문장 「지금 절망 속에 있다면」도 니체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아무리 깊은 어둠 속에 있다 할지라도, / 작은 틈 사이로 비춰 나오는 태양을 추구하라. // 절망은 결코 영원하지 않으니." 4개의 장에는 모두 166개의 문구가 제목을 이루고 있다. 각 장의 제목을 연결해 읽는다면 이 책의 구성이 역자의 니체 철학에 대한 이해에서 선정된 유기적 구성이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현대인은 존재의 의미(생각을 잃어버려서)를 되찾아야 하는 처지에 있다. 깊은 질문을 하고 성찰과 사색을 거듭함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되찾아내야 한다. 그 길의 여정은 고통스럽고 어렵지만 존재하는 한 감내하고 존재의 의미를 밝혀내야 한다. 우리, '이해받지 못하는 자들의 삶'이다. 이 책의 130번째 소제목 「죽음에 대한 생각」을 인용해 본다.

이 거리의 혼란 속에서, 필요한 목소리들의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은 나에게 우울한 행복을 준다. 얼마나 많은 즐거움, 급함, 욕망이 여기서 매 순간 드러나는가. 얼마나 많은 목마름과 흥분이 나타나는가. 그러나 곧 이 모든 시끄러운, 생기 넘치는,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곧 조용해질 것인가. 모두의 그림자, 그의 우울한 동반자가 그 뒤에 서 있다.

이것은 항상 이민선이 출발하기 직전의 마지막 순간과 같다. 사람들은 서롤에게 할 말이 그 어느 때보다 많고, 시간은 촉박하며, 모든 소음 뒤에는 외로운 침묵으로 기다리는 바다가 있다. 그렇게 탐욕스럽고, 자신의 먹잇감을 확신하며 기다린다. 그리고 모두, 모두가 과거는 아무것도 아니거나 사소한 일이었다고, 가까운 미래가 모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래서 이러한 서두름, 이 소리 지르기, 이 자신을 귀머거리로 만들고 자신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있다.

모두가 이 미래에서 가장 앞서고자 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과 죽음의 고요함만이 이 미래에서 모두에게 확실하고 공통적인 유일한 것들이다. 이 확실하고 모두에게 공통적인 유일한 것이 사람들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고 그들이 자신을 죽음의 형제애로 여기는 것에서 가장 멀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가. 죽음을 전혀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나는 삶에 대한 생각을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여야 할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다. 심지어 백 배나 더.(p.179~180)



자본주의가 덜 익숙했던 니체의 시대에서도 당연히 가난에 대해 좋아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가난'에 대한 니체의 생각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무리 애를 써봐도 가난을 아름답게 만들 수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가난함을 필연적인 것으로 아름답게 해석함으로써 우리가 더 이상 그것 때문에 고통받거나 운명을 원망하지 않게 만들 수는 있다."고 풀어간다. 그리고 니체는 "이건 마치 현명한 정원사가 자기 정원의 작은 물줄기를 분수로 만들어 자연의 여신의 손에 맡기는 것처럼 가난함도 어떤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자연의 여신 같은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을까?"라고 되묻는다. 다만 "그 누군가가 당신은 아니길 바란다."(p.41)고 덧붙인다.

25번째 「삶이란 무엇인가?」도 눈길을 끈다. "삶이란, 우리 안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끊임없이 제거하는 것이다. 삶이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약해지고 늙은 모든 것에 대해 잔인하고 무자비한 것이다."라는 가설을 앞세우고 있다. 그렇다면 삶이란 무엇일까? "죽어가는 자, 고통받는 이들, 나이 든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느끼지 말라는 것일까? 우리는 계속해서 타인을 해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지혜로운 모세는 '살인하지 말라'고 가르쳤다.(p.43) 

이 책의 2장 〈깊은 질문에 답하다〉 34번째 소제목은 이 책을 펴낸 역자 김요한의 생각과 가깝게 이해된다. 역자는 현대인의 삶이 생각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전제했다. 34번째 소제목은 「고통에 관한 생각조차 견디기 어려워하는 시대」이다. 이에 따르면 사람들과 시대를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고통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다른가다. 이는 신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영혼의 고통에도 해당된다.

현대인들은 아마도 과거에 사람들이 폭력에 맞서기 위해 스스로 폭력적이 되어야 했던 시대와 비교하면, 신체적 고통에 대해 잘 모르는 허풍쟁이와 환상가일지도 모른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신체적 고문과 박탈을 오랫동안 견뎌냈으며, 고통을 자신의 보존을 위한 필수적 수단으로 봤다. 그들은 고통에 견딜 수 있도록 스스로를 훈련시켰고, 기꺼이 고통을 가하며 다른 사람들이 겪는 끔찍한 일을 보고도 자신의 안전만을 생각했다.

영혼의 고통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그것을 경험을 통해 알든 설명을 통해 알든 간에, 일부는 그것을 고급문화의 징표로 여긴다. 호긍ㄴ 일부는 영혼의 슬픔을 전혀 믿지 않으며, 그것을 언급할 때 신체적 고통의 경험을 떠올린다. 역자의 주석도 명쾌하다. 비관주의적 철학의 출현은 실제 고통이 부족하다는 것을 반영한다. 삶의 가치에 대한 의문은 이미 사람들이 겪는 작은 불편함을 너무나도 크게 느끼는 시기에 나타난다. (중략) "결국, 고통에 대한 해결책은 고통 그 자체다."(p.61~62)



'신은 죽었다' '망치를 든 철학자'로 깊게 각인된 니체는 서구의 전통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세우고자 했다. 그리스도교 도덕과 합리주의의 기원을 밝히려는 작업에 매진했고, 이성적인 것들은 실제로는 비이성과 광기로부터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안티크리스트'에서 유대인들이 그들의 망상으로 도덕이나 종교, 문화, 역사 등을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왜곡했다고 말했다. 이는 유대인 혐오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독설가로 유명한 니체도 '음악'과 '사랑'에는 매우 부드러웠던 것 같다. 157번째 제목 「음악과 사랑」(p.209)에서 니체는 "음악을 강상하는 경험은, 우리가 먼저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뚜렷한 주제나 멜로디를 정확히 듣고 구별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음악은 우리를 사로잡는 연인처럼 느껴질 정도로 매력적으로 다가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황홀하게 한다."고 말했다.


저자 :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9세기 독일의 철학자이자 음악가, 문학가이다. 1844년 독일 작센주 뢰켄의 목사 집안에서 출생했고 어릴 적부터 음악과 언어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집안 영향으로 신학을 공부하다가 포이어바흐와 스피노자의 무신론적 사상에 감화되어 신학을 포기했다. 이후 본대학교와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언어학과 문예학을 전공했는데 박사 논문을 제출하기 전에 이미 명문대인 스위스 바젤대학교에 초빙될 만큼 뛰어난 학생이었다.

니체는 인간에게 참회, 속죄 등을 요구하는 기독교적 윤리를 거부했다. 본인을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부르며 규범과 사상을 깨려고 했다. “신은 죽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라고 한 그는 인간을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주체와 세계의 지배자인 초인(超人)에 이를 존재로 보았다. 초인은 전통적인 규범과 신앙을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인간을 의미한다. 니체의 이런 철학은 바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집대성됐고 철학은 철학 분야를 넘어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까지 영향을 크게 미쳤다.

『비극의 탄생』(1872)에서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 등을 예술적 형이상학으로 고찰했으며, 『반시대적 고찰』(1873~1876)에서는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하고,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를 문화의 이상으로 하였다. 이 사상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1880)에서 더 한층 명백해져, 새로운 이상에의 가치전환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여명』(1881) 『즐거운 지혜』(1882)에 이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를 펴냈는데 ‘신은 죽었다’라고 함으로써 신의 사망에서 지상의 의의를 말하고, 영원회귀에 의하여 긍정적인 생의 최고 형식을 보임은 물론 초인의 이상을 설파했다. 이 외에 『선악의 피안』(1886) 『도덕의 계보학』(1887)에 이어 『권력에의 의지』를 장기간 준비했으나 정신이상이 일어나 미완으로 끝났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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