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 진주성 - 전라도로 가는 마지막 관문
정용연 그림, 권숯돌 글 / 레드리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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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우리 한민족 역사상 외적으로부터 받은 가장 큰 인적·물적 피해를 입은 전쟁이다. 전 국토(한반도)가 7년 간 유린됐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임진왜란 전 조선의 인구는 1409만여 명(1591)에서 1175만여 명(1598)으로 줄었다. 임진왜란 동안 무려 250만 명 이상이 죽거나 포로로 잡혀 갔다는 이야기다. 농지 또한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없었다. 농사 짓는 인구가 줄어든 데다 수많은 토지가 황폐화됐기 때문이다. 한 조사 통계로는 세종 때 150만 결에서 선조 때는 100만 결, 광해군에 이르러서는 50만 결로 엄청나게 줄었다. 청나라가 침입하기 전에 이미 조선의 경제는 붕괴되었음을 뜻한다.

임진왜란을 돌아볼 때 우리는 으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떠올린다. 역사 교육을 통해 수없이 반복되었고, 이순신은 우리 민족에게 불멸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순신의 업적은 전 세계 해군에서 배울 정도로 뛰어난 전술에 있다고 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일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조선과 우리 민족은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이순신의 애국애민 정신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기린다. 임진왜란 동안 조선군은 주로 패배만 했다. 이순신의 수군 빼고는 열 손가락도 안 된 횟수지만 곳곳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육군도 승전을 한 적이 있다. 가장 큰 전투는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이고 다음으로는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1차 전투)'이다.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꼽는다. 

1592년 제1차 진주성 전투는 김시민 장군과 그의 부하, 휘하 병사들, 진주성 사람들이 힘을 합쳐 전라도로 가는 마지막 관문인 진주성을 사수해낸, 임진왜란의 결정적인 전투라고 군사학자들은 말한다. 당시 충분한 전투 경험이 있는 왜군은 철저한 준비로 부산에서 서울까지 채 한 달도 안 걸렸다. 거의 육지 방어가 힘을 쓰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1차 진주성 전투는 역사 책에 기록된 것보다 큰 의미가 있음을 이 책 『1592 진주성』을 통해 알 수 있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왜군은 끝내 진주성을 넘지 못했고, 조선의 곡창지대 전라도를 차지할 수 없었다. 이는 보급에 차질을 빚고 결국 왜군의 패배로 이어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역사서에도,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배울 때에도 진주성 전투는 김시민 장군 한 사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것은 어느 전쟁이거나 마찬가지지만 임진왜란 당시의 우리 군의 전투는 체계적이지도, 사전 준비도 없었기에 수많은 민초들이 낫과 곡괭이 등 농기구로 전투에 참가하고 행주 산성에서는 아낙네들의 행주에 돌을 날랐기에 승전했다고 기록되고 이곳 전투 현장의 이름도 '행주산성'으로 기록되었다. 수많은 이들이 군적에 이름이 없었기에 희생되고나서도 이름을 남길 수도 없었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천민 등은 이름마저 없거나 이름이라고 특정할 수 없는 보통명사들이기에 이름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적장을 껴안고 함께 남강에 뛰어들어 적장을 죽인 기생 논개의 의절 또한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왜의 지휘 장군을 죽였기 때문일 것이다. 진주성 전투 역시 김시민의 이름을 지우면 떠오르는 것이 많지 않다. 오늘의 우리와 멀어질수록 그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실감하기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 권숯돌은 당시 민초들의 희생정신을 높이 기리는 차원에서 그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놓지 않고 역사 속 사람 냄새를 이 책에 담아냈다.

"진주성에는 한 사람의 영웅만 존재하지 않았다. 김시민을 비롯한 사람들이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아낸 비범한 힘이 노도처럼 밀려들던 왜군의 발목을 붙잡고, 동아시아를 태풍처럼 집어삼키려던 왜군의 야욕을 잠재웠다"고 저자는 진주성 전투를 평가한다. 이 책 『1592 진주성』을 통해 430여 년 전으로 돌아가는 일은 역경에 대처한 우리 조상들의 용기와 삶의 의지를 배우는 좋은 역사적 실증이 될 것이다. 배어 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마음이 되어 돌을 깨고 물을 끓이던 진주성 사람들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처럼 살갑고 친근하게 다가올 것으로 기대되는 이유다.



앞서 언급한 대로 오늘의 우리와 시간과 공간이 멀어질수록 그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실감하기란 쉽지 않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도 마찬가지다. 430여 년이란 시차를 한줄기 역사 의식으로 거슬러 올라가기엔 힘이 부칠 때가 많다. 그러나 이 땅 조선에서 벌어진 전쟁이기에 그나마 정확한 기록을 찾아낼 수 있다. 침략국은 물론 아무리 좋은 우방이라도 우리의 시선과 같지는 않을 터, 이런 점에서 조선의 '기록 정신'은 후손들이 배우고 익혀야 할 소중한 무형의 자산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은 사실 이순신, 선조,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몇몇 주요 인물과 사건명을 지우면 떠오르는 것이 많지 않다. 사료에 기록되기 어려운 말단 병사, 백성이 전란을 어떻게 겪어냈는지 알기란 더욱 어렵다. 전 국토와 전 국민이 전란에 휩싸였는데 모든 병사나 의병, 그리고 부인네들의 조력은 기록 자체가 어려울 것이다. 이 때문에 '역사적 상상력'도 중요하다. 물론 실증된 사실과 인물이어야 한다. 

전 국민이 참여하더라도 그들을 모두 적는 일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의 영웅을 중심으로 역사를 기억하려는 유혹에 강하게 끌린다. 그게 기억하거나 선전하기 간편하고, 선악이 분명해 매력적인 서사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웅 중심의 기억은 과연 얼마나 역사적 사실에 가까울까?하는 생각은 접어두어도 괜찮다. 우리네 삶도 켜켜이 누적되어 언젠가 역사로 남을 것이다. 우리 삶에 신화적 영웅이 있던가? 영웅이 아닌 우리는 그저 영웅을 추종하는 삶을 살다가 잊혀질 수동적인 존재인가? 영웅의 후광이 강하게 빛날수록 우리의 눈은 어두워지고 역사의 다채로움은 가려진다는 것이 이 책의 저자가 가지는 '역사 의식이'다. 

저자의 역사 정신은 이 책을 통해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김시민 장군의 리더십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함께 승리를 일군 평범한 사람들에게 정당한 몫의 조명을 비출 뿐이다. 1592년 제1차 진주성 전투는 김시민 장군과 그의 부하, 휘하 병사들, 진주성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 전라도로 가는 마지막 관문인 진주성을 사수해낸, 임진왜란의 결정적인 전투다. 이때 왜적에 대항해 전투에 참여한 이들을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저자는 여기에 맞춰 이 책을 썼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왜군은 끝내 진주성을 넘지 못했고, 조선의 곡창지대 전라도를 차지할 수 없었다. 수군은 이순신에 의해, 육군은 김시민에 의해 전라도를 점령해 곡식을 확보하려던 보급전은 실패한 것이다. 지금 전투와는 달리 옛날 전쟁에는 보급이 전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다. 인구가 가장 많은 중국 대륙의 통일 황제가 우리나라를 쳐들어 올 때 30만~100만 대군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는 실제 전투병은 3분의 1정도 일 뿐이다. 보급선이 길어질 경우 전투원의 숫자는 더욱 줄어든다. 얼마 전 〈고려거란전쟁〉이란 드라마가 관심을 끌었다. 고려의 자주국방 의식을 크게 부각했다. 거란의 여섯 차례에 걸친 대군으로 침략해 들어온 것을 모두 막아내고 마지막 3차 침입 때는 10만 대군 중 살아 돌아간 사람이 겨우 3,000명 안팎이었다고 하니 말 그대로 궤멸됐다. 거란은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얼마 못 가 멸망에 이른다.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던 점은 군 체제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고려의 자주 국방 의식, 전쟁 수행 능력 등이 잘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군의 전술 능력보다 개별 병사의 전투 의지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 등이 잘 나나탄 것으로 평가된 드라마다. 진주성 전투가 임진왜란 전체의 판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같은 의미로 합리적이고 설득력을 갖춘다. 당시 철저히 준비된 왜군은 여러 전투에서 위력을 떨쳤지만,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게 된다. 진주성에서의 승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아낸 비범한 역사였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1592년 제 1차 진주성 전투 시 왜군은 조선에 침입한 이래 조선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지만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은 점령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처지에 있었던 왜군은 전라도로 가는 경상우도의 대읍(大邑, 오늘날 도시)인 진주를 먼저 점령하고자 하였다. 더욱이 경상우도 조선의 주력 군대가 진주에 주둔하고 있다는 첩보를 가지고 진주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9월 말께 왜장 나가오카·하세가와 등은 2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창원과 함안을 거쳐, 편대를 2갈래로 나누어 진주를 향해 공격해 오고 있었다. 이 당시 진주에는 진주목사 김시민이 이끄는 군사 3,700여 명과 곤양군수의 이광악이 이끄는 군사 100여 명이 고작이었다. 같은 시기 왜군이 진주를 향해 공격해 온다는 소식에 접한 경상우도순찰사 김성일은 각지에 원군을 요청하고 있었다.



10월 5일 왜군 선봉대가 진주에 이르자 김성일 등은 진주의 남녀노소 주민들까지 동원하여 이들까지 무장시켰다. 이튿날 나가오카 휘하의 왜군 약 2만 명은 3개 부대로 편성, 2개 부대는 동문 밖에서 성이 내려다보이는 산 위와 동문를 지나 봉명루 앞에 각각 진을 쳤으며, 나머지 1개 부대는 봉명루 앞의 왜군들끼리 합세했다. 이후 11일까지 조선군과 왜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조선은 진주성 내의 군사와 주민들이 왜군과 정면으로 대치했고, 진주성 밖에서는 응원군인 의병과 지원군들이 배후에서 왜군을 교란했다. 이때 진주성 내의 조선군은 의병장 김시민 등이 동문 북쪽에서 현자포를 발사하면서 적의 심장부를 공격하였고, 판관 성수경 등은 동문에서 군사를 지휘했다. 북문 쪽에서는 전 만호 최득량과 군관 이눌이 분전하였다. 목사 김시민이 왜적의 탄환에 맞아 쓰러지자 곤양군수 이광악이 대신 작전을 지휘해 많은 적을 살상했다.

성 밖에서는 곽재우가 의병 200명을 이끌고 배후에서 공격하고, 임시 고성현령 조응도, 복병장 정유경 등도 군사 500명을 이끌고 진현 고개 위에 올라가 배후에서 왜군을 위협했다. 또한 합천가장 김준민, 별장 정기룡 등이 왜군과 대결하고, 의병장 최경회 등도 2,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진주로 와서 적의 배후를 교란했다. 얼마나 처절한 전투였는지, 결사 항전의 각오로 싸우는 조선 사람들의 전투 의지에 적의 기세가 꺾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진주성 내의 관군민들은 힘을 합쳐 협력하면서 죽을힘을 다해 활·진천뢰·질려포·돌과 불에 달군 쇠붙이 등을 무기로 하여 적의 공격을 줄기차게 막아냈다고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성내에서는 준비한 끓는 물을 적에게 붓거나 적진에 불을 붙이기 위해 짚에 불을 붙여 던지면서 적의 공격을 줄기차게 막아냈다. 이 싸움에서 왜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결국 패퇴했다. 다음해 벌어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은 김천일 장군과 많은 의병장 및 의병 등 7만여 명이 합세해 1차 때처럼 끈질긴 항전을 벌였으나 노련한 전투요원 부족으로 성을 내주고 만다. 진주성 전투는 1, 2차 모두 조선에 커다란 교훈을 안겨주고 막을 내리지만 300년 후 또다시 일본은 조선 정복의 야욕을 드러낸다.



이 책 『1592 진주성』는 1592년 진주성 전투를 그린 그래픽 노블이다. 그래픽 노블은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을 취하는 작품을 이르는 말이다. 일반 만화보다 철학적이고 진지한 주제를 다루며 스토리에 완결성을 가진 단행본 형식으로 발간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책은 1차 진주성 전투가 주 배경이다. 모두 11화로 구분되어 있다. 이는 TV 드라마가 시리즈로 제작되며 각 주제별로 번호를 매기는 것과 같은 형식이다. 다만 사자성어로 이뤄져 독자들에게 쉽게 이해하고 잘 읽히도록 많은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1화 「강구연월」 2화 「마부작침」 3화 「누란지세」 4화 「초미지급」 5화 「연진천리」 6화 「무중생유」 7화 「풍림화산」 8화 「호각지세」 9화 「호마의북풍」 10화 「만천과해」 11화 「당비당거」 등이다. 사자성어를 모르는 독자들도 겁 먹을 일 없다. 각 장(章)의 사자성어에 대한 풀이를 책에 모두 해놓았다. 특히 이 책은 정용연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이 세심하고 풍부한 표정으로 전면에 하지 못한 말들을 대신하는 노련함이 돋보인다. 또 책의 뒷 부분에 「진주성을 그리며 알게 된 것들」이라는 면을 따로 만들어 열 세개의 생소한 단어들을 설명하고 있다. 독자들의 역사 의식과 관심에 진일보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독자도 궁금했던 '임진왜란 참전 왜군의 수'를 기술하고 있다. 배 1,500여 척, 군사 15만여 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당시 왜군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했다. 1차 침입이 1592년 임진년이어서 임진왜란이라고 통칭한다. 또 다시 물러갔다 2차 침입 때도 비숫한 규모의 재침략을 단행한다. 1592년 정유년의 일이다. 이를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햇수로 7년, 만 5년이 넘는다. 1차와 2차를 합쳐 모두 29만 8,700여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1차 때가 15만 8.700여 명으로 약간 많은 정도이다. 진주성 침략 병력은 1차 침입 후 2차 때가 더 많다. 약 6만여 명이 증원됐다고 밝히고 있다. 1차 침략 때 참전한 기무라 시게코레, 하세가와 히데카즈, 가토 미츠야스는 나고야성의 예비대 병력이었다.(p.298)


저자 : 권숯돌


1972년 한국에서 태어나 이십대 후반에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삶의 반반씩을 한국과 일본에서 보내고 있다. 문학과 심리학 공부에 오랜 시간을 쏟았고 지금은 글과 그림으로 소통하는 일을 좋아한다. 글 작가로 참여한 작품으로 여성 의병장 윤희순의 생애를 극화한 『의병장 희순』(휴머니스트, 2020)이 있으며, 『진주성 1592(가제)』이 출간 예정이다. 현재 국학진흥원 웹진 「담담」에서 선인들의 일기를 소재로 작품을 연재하고 있다.


그림 : 정용연


1968년생. 멀리 모악산이 바라다보이는 김제 들녘에서 나고 자랐다. 청소년기엔 서울 청량리에서 신문 배달을 했고, 성인이 된 뒤에는 서울과 경기 지역에 살며 만화와 만화 아닌 일을 함께했다. 기술 문명보다는 사라져가는 것에 관심이 많다. 무너진 돌무더기에서 옛사람들의 삶을 떠올리고, 북한산을 바라보며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느끼곤 한다. 지금은 북한산 국립공원 끝자락인 사패산 아래에서 살고 있다.

[주간만화]에 단편 만화 ‘하데스의 밤’으로 데뷔. 월간 [민족예술], [한겨레]에 만화 연재. 월간 [작은책] 표지그림. 다큐멘타리 만화 [사람사는 이야기]에 ‘나무 이야기’를 그렸고 2012년『정가네 소사』1, 2, 3권을 출간, 이듬해 부천만화대상 우수만화상을 수상했다. 2015과 2016년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談’과 서울시 홈페이지에 조선 시대를 무대로 한 중·단편 만화를 그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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