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행 고려사 : 고려거란전쟁 편 - 알고 봐도 흥미진진한 역사 이야기
박종민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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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수많은 외적의 침입을 받았지만 이를 극복하면서 5,000년을 이어온 역사 깊은 나라다. 태조 왕건이 삼국을 통일해 세운 고려시대에도 외적의 침입으로 전 국토가 전란에 휩싸인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고려는 인류사에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한 몽골의 칭기스칸 제국인 원(元)나라와의 전쟁을 제외하곤 어떤 전쟁에서도 패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려 시대는 옛 고구려 영토를 회복한다는 명분 아래 만주나 몽골 지역을 틈틈이 엿보며 나라의 힘을 키웠기에 가능한 일이지 않았나 싶다. 다만 우리를 침략한 거란이나 원나라도 나름 엄청나게 세력을 키워서 침략했기에 쉽게 이기지는 못했지만, 원 제국과의 전쟁에선 끝내 항복하고 말았다. 고려 시대의 역사는 교과서나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고는 쉽게 접하기 어렵다. 고려사는 조선시대 때처럼 〈조선왕조실록〉처럼 정사(正史)를 다룬 실록인 〈고려사〉가 있지만 역사적 전쟁이나 사실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아 상당 부분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전쟁의 경우 적국(敵國)의 역사서를 참고해야 할 때도 있다고 한다. 이처럼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사건은 기정 사실로 할 수 없게 될 경우 역사서는 물론 소설에서도 함부로 다루기 어렵다. 역사 왜곡 시비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 여부가 확실치 않으니 상상력을 동원하는 것도 쉽지 않을 일이다. 소설가들은 이에 따라 야사나 기타 개인적 기록에 의존하면서 본의 아니게 역사를 왜곡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쉽게 다루지도 못할 것이다. 사극이나 소설에서 조선시대에 비해 전무하다시피 한 고려시대의 사극이나 소설이 로맨스나 풍습에 관한 일이 대부분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 대하드라마로 큰 인기를 끌었던 KBS가 〈고려거란전쟁〉을 방영함으로써 고려시대의 전쟁사가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출판계도 가세했다. 이 드라마에서 다룬 내용은 표제어대로 거란과의 세 차례 전쟁이다. 크게 다룬 대회전 같은 전투만 세 번에 걸쳐 26년 동안 이루어졌으나 국지전을 포함하면 10여 차례라고 알려지고 있다. 드라마는 극적인 부분을 강조해 시청자들의 몰입도를 높일 수 있기에 화면에 비춰지는 대로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기는 힘들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의 침략 세력에 어떻게 싸워 이겼는지를 많은 국민이 알게 해주는 큰 역할을 했다. 이 드라마 방영 기간 앞뒤로 고려-거란전쟁을 다룬 많은 책들이 발간됐다.



이 가운데는 정사를 다룬 책도 있고, 소설로 극화한 책들도 있다.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은 고려-거란전쟁으로 고려가 이김으로써 고려의 국격은 상승했고, 거란은 패전으로 멸망의 길을 걷는다는 점이다. 고려든 거란이든 모든 국력을 쏟아 치러낸 전쟁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 책 『역주행 고려사-고려거란전쟁 편』은 우리 역사를 정사 차원에서 이야기 식으로 전해주는 유튜브 채널 〈역주행-조선왕조실록〉의 유튜버 박종민이 드라마 방영에 맞춰 펴냈다. '역주행'이란 단어 때문에 역사를 비틀어 쓴 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사를 바탕으로 저자 박종민이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매끄러운 구어체와 일러스트로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힘을 쏟았다. 

이 책 『역주행 고려사-고려거란전쟁 편』은 세력을 키워 고려를 침략했던 거란과 고려의 전쟁을 다뤘다. 뿐만 아니라 거란과의 전쟁이 벌어진 배경과 비하인드 스토리도 저자의 시선은 놓치지 않았다. 저자 박종민은 이를 위해 〈고려사〉는 물론 〈고려사절요〉, 〈요사(遼史)〉 등 고전 문헌들에 기록된 정확한 역사적 사실들만을 바탕으로 하여 객관성을 더했다고 밝힌다. 고려-거란 전쟁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태조 왕건과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 왕건이 나라를 세운(918년) 후 100년이 안 돼 일어난 전쟁이기에 건국 공신과 지방호족들이 그대로 세력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1차 침공 때 외교적 성과를 거둔 서희와 3차 침공 때의 주인공 강감찬 장군 역시 고려 건국 때부터 공을 세운 가문의 사람들이다. 고려-거란 전쟁은 고려의 성장 전반과 거란, 중국 등 주변국과의 복잡한 관계가 총망라된 사건으로, 고려사에 끼친 영향 면에서도, 전쟁 자체의 규모 면에서도 역사적 존재감이 크다. 이 책은 고려의 북진정책 및 친송정책과 정안국에 위협을 느낀 거란이 993년(성종 12), 1010년, 1018년(현종 9)의 3차에 걸쳐 고려에 침공한 사건을 정사인 『고려사』를 바탕으로 다룬다. 

책에 따르면 고려 건국 당시, 지금의 몽골과 만주지방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거란족은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916년(발해 애왕 16) 요(遼)나라를 건국하였다.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고려 태조는 북진정책을 추진, 발해 유민을 포섭했다.



거란은 고구려 장수왕 때 출복부(出伏部) 등 일부가 예속되었지만 고려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 922년(태조 5) 야율아보기가 낙타와 말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적대관계를 유지하였고, 942년 거란의 태종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사신은 섬으로 유배보내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에서 굶겨 죽여버렸다. 이는 고려의 태조 왕건 때부터 추진한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으로 그 뒤에도 계승되어 정종 때 광군(光軍) 30만을 조직한 것도 요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송이 건국하고 고려가 송과 화친정책을 실시하자 송은 고려와 협력하여 거란을 공격할 뜻을 비췄고, 압록강 유역의 정안국(定安國)도 송과 화친하면서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요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에 요의 성종(聖宗)은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킨 다음 991년 위구(威寇)·진화(振化)·내원(來遠) 등의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고 고려 침략을 준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바로는 거란의 1차 침공(993년) 때 활약한 고려의 서희는 담판의 대가로, “거란의 소손녕이 고려를 침공하자, 서희가 담판을 벌여 소손녕을 설득해서 물러가게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박종민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말로만 얻을 수 있는 평화가 과연 가능할까? 역사학자로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게 역사 어디를 찾아봐도 말로 군사를 물려 되돌아가는 침략군은 없다. 저자는 오랜 연구와 자료 조사 끝에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장면을 다시 되돌려보도록 복원해냈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의 실제 모습을 살펴볼 때 서희가 적절히 군대를 움직여 거란군의 진격을 막아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담판이 없었더라도 거란군은 물러갔을 것이다.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은 전쟁 후 평화 조건을 정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파악해낸 것이다. 그 담판 때문에 소손녕이 물러간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잊지 않는 것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릇된 역사 서술로 잘못 배운다면 차라리 모르는 게 오히려 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역사 바로잡기의 역할도 함께 해낸 것이다.



이 책은 거란의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빌미로 40만 대군을 앞세워 고려를 침공하고, 고려는 수도 개경을 함락당하는 부분도 잘 기술되어 있다. 이 때가 거란의 2차 침공(1010년)이다. 당시 고려에서 활약한 주요 인물이 바로 양규와 김숙흥이다. 그들이 3,000여 명의 병력으로 40만 거란군을 상대했던 장면은 지금 보아도 눈부시다. 그런데 의문이 있다. 당시 현종은 어떻게 해서 많은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감찬의 항전 건의를 받아들였을까. 어떤 전략이 있었던 것일까. 반면, 말과 낙타, 무기 등 거의 모두를 잃고 사실상 패전과 다름없는 상황에 놓인 거란이 그럼에도 다시 고려를 침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거란은 그 뒤로도 총 일곱 번에 걸쳐 고려를 침입한다). 고려를 둘러싼 당대의 국제정세가 어떠했기에 거란은 이토록 긴 시간 동안 한 나라를 계속 침공했던 것일까. 귀주대첩(1018-1019)에서 고려의 승리를 이끈 사람은 강감찬 한 명이었을까···. 고려와 거란 사이에 벌어진 지난한 전쟁에 대해 품어볼 만한 의문은 이렇듯 한두 개가 아니다. 저자는 바로 이 같은 여러 가지 의문에 주목하여 ‘고려-거란 전쟁’에 대해 잘못 알려져 있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실, 그리고 진실한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썼다. 이 책의 출간 취지이고 제목에 알맞는 책이다.

이 책은 고려와 거란의 오랜 전쟁에 대한 진실과 사실,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를 밝힌다. 드라마를 보는 듯 현장감을 즐기게 해주는 일러스트와 당대의 지리적 요소 및 전투 상황의 이해를 높여주는 지도 배치로 역사서를 소설처럼 재구성한 것도 이 책의 독창성을 돋보이게 한다. 물론 기술도 많은 부분 드라마틱하게 재구성되었다. 물론 우리가 배운 『고려사』를 바탕으로 저자가 작가적 상상력을 가미한 것일 뿐 허구의 사실이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역사적 사건에 몰입할 수 있는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 이해를 돕는 친절한 일러스트 등 영상에서 모두 담지 못했던 이야기들과 지도 등의 보충자료를 풍성하게 더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쉽고 재미있는 역사 도서다. 여러 사건들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정리한 「주요 사건 연표」와 각 전쟁별로 거란의 침입 경로를 지도로 표현한 「거란의 침입로」, 초기 고려 왕실의 복잡한 관계를 한 장으로 알기 쉽게 정리한 「고려 왕실 계보」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이 탁월한 점은 앞서 짧게 언급한 점이 있지만 세밀하게 기록한 정사가 없기에 전쟁의 상황을 자세하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고려사를 쓰는 학자라면 당연히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을 생략한 것은 역사서의 사실 기록을 의문이 들게 하는 원인이 된다. 가령 서희 담판으로 오히려 강동 6주를 얻고, 거란을 물러가게 했다고 역사서에는 기술되어 있다. 당시 서희와 소손녕의 대화로 엮어진 이 책에서는 조금 다른 해석을 기술한다. 80만 대군을 앞세워 1차 침공을 했지만 얻은 것 없이 철군했다는 사실이다. 저자 박종민은 의문을 갖는다. 세계 역사상 8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 나라에서 전투 한 번 없이 다시 군사를 물린다는 역사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는 점이다. 저자는 주변 국가와 상황과 거란의 침공 목적을 제대로 파악하고, 소손녕에게 담판을 통해 조공을 받치고 연호를 사용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은 우리 고려 입장에서 고개를 숙인 일이라는 점에서 슬그머니 빼거나 부각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주변국의 역학 관계 상 1차 고려 침공의 목적은 송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후방의 고려를 두고 전쟁을 벌일 수 없기에 당초 목적이 고려와의 친교였다는 사실이다. 또 거란의 군사 편제상 '도통'이 지휘관으로 갈 경우는 15만 명 이상의 대군일 때 가능한 일이지만 소손녕은 말로 80만 대군이란 말을 하지만 실상 '도통'의 지위가 아니었다는 말도 저자는 첨부하고 있다. 2차 침공시 도통인 소배압의 지휘권을 인정하고 있고, 황제도 함께 나섰다는 점에서 대군임은 틀림없는 것 같다. 이때 거란 측에서 주장한 40만 대군 중 실제 전투 요원은 10만~15만 명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근대 이전의 국가들은 군대 원정엔 보급로 확보, 보급부대 등 전투 병사를 지원하는 각종 잡무 등을 모두 포함하고, 이때 전투 요원은 파견 군대 수의 3분의 1정도로 보는 것이 전쟁사를 다루는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임을 저자는 덧붙인다. 이런 상황이라면 40만 명의 군사 중 실제 전투 요원은 10만 명 안팎이라고 분석하는 것이다. 이 논리는 고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돼 강조가 이끈 40만 명의 군사 중 전투병은 10만 명 남짓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런 셈법은 마찬가지였다. 임진왜란 당시 15만의 수군이 1,500여 척의 배로 침략했다고 돼 있지만 노젓는 잡역부, 취사, 행정, 의료와 잡일 등을 포함한 숫자인 것이다. 한 배에 승선한 인원이 100명 정도라는 것이 이런 계산에서 나온다. 저자의 셈법은 합리적이고 군사 문제를 다루는 학자의 시선이다.



3차 침공 때 소배압은 약 10만 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이들은 강감찬과 대회전을 치를 생각이 아예 없었다. 이는 흥화진 등 강동 6주에 있는 진지가 천혜의 조건에 인공으로 불가침의 공력을 들인 성을 만들어 놓았기에 자칫 지난 침공 때처럼 강동 6주에 발이 묶일 경우 개경에는 침공조차 못하고 시간이 없어 되돌아가야 하는 우려가 있음을 경험 많은 지장 소배압은 아예 군사 1만을 이들 요새 공략처럼 희생시키고 곧바로 개경으로 향한다. 워낙 말을 잘 타는 유목민들이라 생각보다 빨리 개경 앞에 도착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강감찬이 뒤늦게 이를 알아채고 기병 1만으로 뒤쫒게 하고 강감찬도 전열을 정비한 뒤 개경으로 진군한다. 이때 개경 성을 지키는 군사의 수는 3,000명이었다고 한다. 왕 현종도 신하들의 몽진을 거절하고 끝까지 개경을 사수하겠다는 결의를 가진다. 백성들의 협조를 바라면서. 즉 마을의 약탈될 것, 특히 식량 등은 모조리 불태운다. 이 작전은 이른바 진공 작전이라 원정군에게 식량이나 전투에 필요한 물자 조달을 막기 위해 쓰는 '옥쇠 작전'이다. 이를 저자는 현종의 '신의 한 수'라고 말한다. 2차 침공 때 두 달이 걸려 개경에 도착했지만 이번 3차에는 20일 만에 개경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소배압이 아직 개경의 전쟁 대비 상태를 알지 못하기에 진을 친 채 100명의 척후병을 보내지만 이들이 단 한 명도 살아오지 못함으로써 개경 진입을 망설이다 결국 실기한다. 즉 개경까지 쳐들어온 9만 명의 군사를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앞의 적은 얼마만큼의 전력인지 알지 못하고, 뒤를 쫓아온 고려 기병이나 강감찬이 거느린 대군은 바짝바짝 다가오니 그야말로 자칫 전멸의 위험을 느끼게 된다. 

결국 철수를 명하지만 이미 때가 늦었음은 강감찬이 퇴로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편한 길로 가지 않고 일부로 귀주로 돌아가는 험한 길을 택했지만 이번에 강감찬이 미리 쳐놓은 그물 속으로 걸어들어간 셈이다. 불과 수천 명이 뿔뿔이 흩어져 몇 백과 함께 소배압은 처절한 패배를 맛보게 된다. 이후 거란은 고려를 다시 침범하지 못할 정도로 주변국들에게 둘러싸여 명맥을 유지하다가 틈을 노린 여진족(후에 청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전쟁 상황에 대해 설명한 저자는 전후 거란과 고려가 각각 얻은 것과 잃은 것을 정리해준다. 고려 침공해 실패한 거란이 바로 멸망하지는 않았지만 거란 황제 아율용서는 격노하지만 그를 죽이지는 않는다. 패전의 책임을 물어 삭탈관직했다.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말은 언제 어디서나 일치하지만, "잘못 알려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는 말도 있다. 거란 침공에서 고려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교훈으로 삼아야 할까? 


저자 : 박종민


쉽고 재밌게 역사를 이야기하는 역사 전문 교양 채널 ‘역주행-조선왕조실록’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고려와 조선의 역사를 생생한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만들고 있으며, 세계사나 일본사, 고려사를 함께 다루며 그 영역을 점차 넓혀가고 있다. KBS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방영 시기에 고려사 콘텐츠를 업로드하기 시작했으며, 고려사 콘텐츠의 영상 평균 조회수가 수십만 회를 웃돌며, 가파르게 성장 중이다.

가장 떠오르는 역사 유튜브 채널답게 역사적 사실 중에서 핵심만 쏙쏙 뽑아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듯 쉽게 풀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고려 초기 왕실의 복잡한 가계도를 한눈에 이해하기 쉽도록, 직접 만든 ‘고려 왕실 계보’를 일러스트와 함께 설명하는 등 다양한 시각적 자료들을 활용하고 있다. 고려사를 다룬 유튜브 채널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쉬운 영상 콘텐츠가 풍부하다는 평이 쏟아지고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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