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이상·백석·윤동주 소장용 세트 - 전4권 - 민족의 암흑기를 저항과 서정시로 위로한 한국인이 사랑한 시인들 전 시집
정지용 외 지음 / 스타북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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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2025년은 광복 80주년이다. 갑자기 해방을 말하는 것은 시인 윤동주를 말하기 위함이다. 윤동주는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해 1945년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독립운동 혐의로 옥사했다. 때문에 윤동주 타계 80주년이 되는 해가 2025년이다. 이를 기념해 윤동주가 사랑한 3명의 시인들과 이들 4명의 시집에 수록하지 못한 시들을 신문, 잡지 등에서 발굴하여 '전 시집'으로 출간됐다. 이 시집과 시인들은 우리가 잘 아는 『카페 프란스』의 정지용, 『건축무한 육면각체』의 이상,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백석,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윤동주다. 이들 4명의 시인들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들로 이제는 해외에서도 인기를 더해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 4명의 시인은 윤동주와 함께 일제 강점기인 우리나라와 민족의 '암흑기'를 함께 하면서 시를 통해 민족의 아픔과 설음을 대변했던 분들이다.

이들 시인은 때로는 저항의 시로 울분을 토하고 때로는 서정의 시로 위로해주기도 했다. 특히 이상과 백석은 윤동주가 너무 좋아하는 시인이고 정지용은 가장 존경하는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정지용은 해방 후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있으면서 강처중이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며 건내 준 윤동주의 시를 읽고 부끄럽다며 절필선언까지 한 시인이다. 그는 윤동주를 적극적으로 세상에 알린 「향수」의 시인으로 일본 도시샤대학의 선배이기도 하다. 정지용은 1948년 윤동주 시집의 유고집이 나올 때 서문을 써가며 윤동주를 소개했던 인물이다. 정지용은 언론과 교육과 문학을 넘나든 인물이다. 특히 이 4권의 전 시집 시리즈는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이근배·나태주 시인과 4대 시인협회장이 추천해 주신 인문학 시집으로 초판본의 오리지널 이미지를 살렸고 양장본으로 소장가치를 더했다고 출판사 측은 밝히고 있다.

이동원, 박인수가 불러 유명한 노래의 가사 「향수」는 정지용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윤동주는 살아생전에 정지용에게 문학적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 인간적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정지용 시집』은 윤동주 사후에도 여전히 보관되어 있을 만큼 윤동주는 정지용의 시를 아꼈다. 이 시집은 『정지용 시집』 『백록담』, 그리고 시집에 실리지 않았던 시들을 신문과 잡지 등에서 새로 발굴해 『카페 프란스』에 「미수록 작품」들로 구분하여 새로 실었다.



이들 가운데는 ‘천재’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두 명의 시인이 있다. 천재 이상과 백석이다. 그리고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윤동주. 윤동주를 가장 아껴 그의 사후에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펴낸 주인공인 정지용. 이들에겐 동시대를 살았다는 것 말고도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펜을 들고 꿋꿋하게 자유를 눌러 썼다는 점이다. 이상 전 시집 『건축무한 육면각체』는 『이상 전집』 제2권 초판본 순서 그대로 정리하여 첫 발간 당시의 의미를 살리되 표기법은 기존의 초판본 시집의 느낌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게 현대어를 따름으로써 불편함이 없도록 만들었다고 출판사 측은 밝히고 있다.

이상은 시 「오감도」와 단편소설 「날개」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시는 난해하기 그지 없어 당시 신문에 연재하다 독자들의 항의로 중도하차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상은 건축학을 전공한 '문화예술계의 이단아'로 천재라는 수식어가 '박제'돼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시어를 무한 반복함으로써 독자들은 물론 당시 시인들에게도 문학론으로 구설에 오른 적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를 잘 이해하고 그를 끝까지 곁에서 지켜준 화가 구본웅의 보살핌이 있었다. 화가 구본웅과의 관계는 영화 〈금홍아, 금홍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영화는 천재 시인 이상과 야수파 곱추 화가 구본웅, 그리고 기생 금홍의 삼각 관계의 로맨스를 그린 시대극이지만 두 사람의 친분을 확인할 수 있다. 

시인 '이상' 하면 떠오르는 단어 '천재'와 '날개'다. 그의 시는 여전히 지금의 독자들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어쩌면 소설 「날개」의 작가로 더 익숙하다. 이 소설로 '박제된 천재'라는 말이 그를 칭하는 별명처럼 붙어다닌다. 이번 4인의 '전 시집' 중 이상의 『건축무한 육면각체』 「건축과 문학, 외국어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던 천재」란 제목의 〈서문〉에서 "이상의 작품들은 난해하고 지나치게 추상적이라는 이유로 생전에는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다. 이상의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오감도(烏瞰圖)」 역시 처음 조선중앙일보에 실렸을 때도 그 난해함과 추상성으로 인해 독자들의 거센 반발을 받았고 결국 15편을 끝으로 연재를 중단했다"고 썼다. 이 서문은 또 "그의 대표작 날개의 첫 줄인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글에서 묻어나오듯 이상은 자신을 여러 방면에서 천재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를 아는 지인들은 이상을 천재로 평가했으나 그때 당시엔 그의 천재성이 주목받거나 널리 알려지진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독자 생각으로는 이 서문은 명문을 하나 남겼다. "문학을 사랑하는 이상의 시대, 이상의 천재성, 이상의 개인사들을 탐색하며 한 발 한 발 그의 작품세계로 걸어나간다"며 "난해해서 읽히지 않았는데 이젠 그 난해함 덕분에 읽히고 있다."는 문장이다. 이에 따라 이상의 시에서 정답을 찾으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이 4인 시집 기획시리즈를 펴낸 출판사 측의 설명이다. 시가 어려운 이유는 정답이 있다고 믿고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정답이 없는데 찾으려고 하니 당연히 시를 읽는 게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이 서문은 말하고 있다. 시의 답은 시인에게 있지 않고 독자에게 있다. 독자들이 저마다의 답을 내리고 이상이 생전에 발표한 글, 그의 유고, 이상의 습작 노트, 그 외의 발굴 자료 등을 편안하게 읽어내려 가기를 당부하고 있다. 

이상은 그 천재성만큼이나 기행도 잦았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아니면 꿈도 꾸지 못한다는 서울공대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학과를 수석 졸업하고, 디자인 공모에도 1등으로 당선됐다. 예술 분야에서 독창적인 의식으로 시, 소설, 수필, 그림까지 유명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 당시 이상과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이상은 '건축가 이상'으로 최근 재조명 되고 있기도 하다. 스물일곱이라는 짧은 생에서 그가 한 일은 너무나 많다. 다방과 술집을 경영하고, 떠들썩한 금홍이와의 사랑과 구본웅 화가의 사촌인 변동림과의 결혼(이상과 이혼한 뒤 김환기 화백과 재혼했다) 등 다사다난하고 바쁘게 살았다. 아마 지병 치료차 일본에도 갔던 것 같다. 그때 쓴 수필 「동경(도쿄)」가 남아 전해진다. "우리같이 폐가 칠칠치 못한 인간은 우선 이 도시에 살 자격이 없다. 입을 다물어도 벌려도 척 가솔린 냄새가 삼투되어 버렸으니 무슨 음식이고 간에, 얼마간의 가솔린 맛을 면할 수 없다. 그렇다면 동경 시민의 체취는 자동차와 비슷해 가리로다. (중략) 나는 택시 속에서 20세기라는 제목을 연구했다. 창밖은 지금 궁성호리 곁-무수한 자동차가 영영(營營)히 20세기를 유지하노라고 야단들이다. 19세기 쉬적지근한 내음새가 썩 많이 나는, 내 도덕성은 어째서 저렇게 자동차가 많은가를 이해할 수 없으니까 결국은 대단히 점잖은 것이렸다."(p.246~247)



이상은 그러나 동경제국대학 부속 병원에서 1937년 4월 17일 새벽 4시에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변동림이 그의 유해를 화장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었으나, 돌보는 이가 없다가 6.25 전쟁 후 미아리 공동묘지가 사라지며 유실되었다고 한다. 이 책 『건축무한 육면각체』에는 「미발표 유고」 9편과 「기타 시」로 분류되는 3편의 시, 대표소설 「날개」와 대표 수필 「권태」 등 3편이 함께 실려 이번 시리즈 기획 출판의 의미를 더한다. 시에 대한 지식이 '문외한급'인 독자의 독서로는 그의 시 가운데 비교적 이해가 되는 시는 「거울」 한 편뿐인 것이 몹시 아쉽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 「거울」 중에서



공교롭게도 해방 전에는 서로 친하게 지내던 사이인데도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다시 못 본 채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이들 4명의 시인들이다. 이상은 1937년, 윤동주는 1945년, 정지용은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사망, 백석은 1996년까지 삼수군 관평리에서 농사를 짓다가 사망했다는 내용이 드러났지만 정확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시인들의 마지막이 안락하거나 비극적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 가운데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백석의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을 것으로 판단되는 많은 징후들이 보인다. 먼저 그의 시의 색깔이다. 안도현의 『백석 평전』에 따르면 백석이 1963년 북한 문단에서 종적을 감춘 뒤, 한때 숙청설과 사망설까지 떠돌았다. 최근에야 그가 1996년 85세로 생을 마쳤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백석 평전』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에서 태어나 1996년 삼수군 관평리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84년의 세월을 다룬다. 비록 1963년에서 1996년까지 30여 년의 세월은 알려진 자료가 없기에 공백으로 남겨뒀지만, 안도현 시인이 재구성해낸 백석의 삶을 따르다 보면 그의 문학 작품과 문학관은 물론 굴곡 많았던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다.

안도현은 "백석의 시는 여러 책을 통해 독자에게 알려졌지만, 산문은 그렇지 않다"며 "그래서 가능하면 전문을 다 수록하려고 했다. 산문으로 백석이 살아온 시간을 더듬을 수 있다. 스키장 탐방기라든지 양을 키우면서 쓴 산문을 보니 역시 백석은 천상 시인이다."고 평가했다. 

"어느 해’볕 따사로운 이른 봄 산 밑 감자밭에 두엄을 내노라고 소발구를 몰고 가던 나는 엄지들을 따라 방목지로 나온 수많은 새끼양들이 즐겁고 발랄하게 뜀질을 하고, 개닥질을 하고, 또 엄지들의 흉내를 내여 마른 풀’입사귀를 뜯고, 풀뿌리를 들추고 하는 것이 눈에 띄였다. 나는 이 때 나도 모르게 소를 내버리고 방목지로 달려 갔다. 그러자 매애애 소리치며 놀라 달아나는 새끼양들을 붙들어 안아 보고, 그 볼에 내 볼을 가져다 비비고, 등을 쓰다듬고...... 이렇듯 감격에 잠겼던 것이다. 그것들은 바로 내가 태’줄을 끊은 것들이며, 그것들은 바로 내가 구정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것을 안고 따스한 난로’가를 찾아 갔던 것들이다. 나는 이 새끼양들이 어서 무럭무럭 자라기만 간절히 념원하며, 그것들의 자지러진 울음 소리에 온 조합의 산과 골짝과 최’둑과 밭들이 한결 더 밝아 오는 것을 깨닫는 것이였다." (『백석 평전』 p.370에서 재인용)



한국전쟁 후 북한에서 활동했던 시인이었기에 백석은 철저히 가려진 인물이었다. 이념으로 갈라진 같은 나라 같은 겨레지만 북한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이유로 남한에서는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았던 인물이다. 이념 대결 상태를 지속해온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대' 때의 이야기다. 그러나 나라가 안정되고 소련이 붕괴된 후 백석은 비로소 일제 강점기 시와 함께 본연의 모습에 조명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백석은 동료 시인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높은 시인으로서 기억되고 있다. 우선, 잘생긴 외모 때문일 것이다. 서울을 시끄럽게 했을 정도의 연애담의 주인공 자야 여사뿐만 아니라, 최정희. 모윤숙 같은 모던 걸이 궁금해하던 대상이 백석이었다. 연애사는 다소 과장된 면이 있지만, 백석의 연애사는 자야 여사가 『내 사랑 백석』을 내면서 더 널리, 세부적으로 알려졌다. 안도현의 『백석 평전』에는 "사랑하면 데리고 살아야지, 부모가 기생이라고 반대한다고 포기했으니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화가 났는지, 3번 결혼하고 돌아왔다고 썼는데 아무리 읽어봐도 2번이다. 2번 결혼하고 돌아왔다는 것도, 증언할 사람이 자야 여사밖에 없다. 자야 여사와 연애를 인정은 하겠지만, 결혼 횟수는 2번으로 줄였다. 평전에 쓴 대로는 백석은 4번 결혼했다." 

백석의 사랑에는 시가 있고 슬픔과 그리움 그리고 평생을 기다린 시간뿐이었다고 그를 회고하는 시인들이 많다. 백석이 사랑했던 기생 김영한과의 러브 스토리는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더한 애절함이 백석을 좋아하는 이들을 슬프게 한다. 또한 ‘자야’라는 애칭과 함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가 탄생하여 평생 만나지 못한 그들의 이별 끝자락에 〈길상사〉가 세워진다. 시세가 수백억 원에 이르는 터와 건물을 포함한 요정 대원각을 자야 여사가 시주함으로써 〈길상사〉로 바뀐 것이다. 이때 자야 여사가 “그까짓 1000억 원은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말했다고 하니, 과연 세기의 연애라 할 만하다. 

시인 백석은 인간의 삶에 직접 와 닿는 시어들을 사용하였는데, 그가 쓴 시어들을 보면 우리 전통의 생활과 풍습에 대한 시인의 애정이 드러나는 시들이 많다. 여러 지방의 고어와 토착어, 특히 평안도 방언을 시어로 가져와 썼고 이 책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는 시인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고어와 토착어, 평안도 방언을 그대로 살려 각주와 해설을 달아 이해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해 놓았다. 본문에서 비슷한 시기의 발표작임에도 단어의 표기를 다르게 한 경우가 있는데 맞춤법을 통일하던 당시의 혼란에 따른 것으로 이해된다고 출판사 측은 밝히고 있다.



『카페 프란스』는 한때 이름 없는 시인이었던 정지용의 시집이다. 그의 시 「카페 프란스」를 그대로 표제어로 썼다. 정지용은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하던 시인으로 해방 후까지 시작과 시집 발간에 몰두했으나 6·25 전쟁 중 납북되어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 시단에 모더니즘 시인으로 활동하며 적지 않은 시를 남겼다. 한국문단사에도 큰 업적을 남긴 당시 우리 시단의 대표적 시인이었다. 일도 많지만 6·25전쟁 중 납북 이후 북한에서의 활동과 사망이 확인되지 않을 때까지는 시인의 이름은 '정O용'으로 표기됐다. 그는 시인이지만 정치색이나 친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어 어쩌면 북한 인민군이 자신들의 선전용으로 납치해 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지용은 특히 윤동주와의 관계가 돈독했고, 윤동주보다 연배여서 선배로 많은 역할과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해방 후 윤동주의 시집 발간에 앞장 서고, 윤동주의 일제 때의 행적을 가장 소상하게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쓴 시보다 윤동주의 시집을 펴내는 데 더 힘을 쏟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시인 이상을 문단에 등단시키기도 했으며, 조지훈, 박목월 등과 같은 청록파 시인들을 등장시키기도 한 주인공이었다. 그는 해방 후 경향신문 주간으로 재직하면서 윤동주의 시를 알리는 데 앞장섰으며 윤동주의 시집이 나올 때 윤동주를 대신해서 〈서문〉을 쓰기도 했다. 이 〈서문〉은 한국문단사에는 명문으로 기록되고 있다. 윤동주는 살아생전에 정지용에게 문학적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 인간적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의 첫 시집 『정지용 시집』은 1935년 발간됐다. 이 시집 『정지용 전 시집-카페 프란스』 1부에 그대로 전재됐다. 이 시집은 윤동주 시인의 유품으로 남겨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만큼 윤동주는 정지용의 시를 아꼈다. 책에는 1936년 3월 19일 ‘동주소장’이라는 글귀가 친필로 쓰여 있다. 윤동주 시인이 평양 숭실중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정지용 시인은 절제된 언어와 우리말을 감각적으로 활용한 신선한 시 작품들을 발표하며 이후 한국 시에 확연한 변화를 일으킨다. 이 책에는 정지용 시인의 작품들을 원본 그대로의 표기를 살려 실은 이유도 그에게서 탄생한 시에 담겨 있는 풍성한 우리말을 가능한 생동감 있게 전달하고자 한 데 목적이 있다고 출판사 측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지금과 다른 표현에는 각주로 설명을 해 놓아 이해에 어려움이 없도록 출판사가 배려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한국문단사에 따르면 정지용 시인은 절제된 언어와 우리말을 감각적으로 활용한 신선한 시 작품들을 발표하며 이후 한국 시에 확연한 변화를 일으킨다. 이 책에는 정지용 시인의 작품들을 원본 그대로의 표기를 살려 실은 이유도 그에게서 탄생한 시에 담겨 있는 풍성한 우리말을 가능한 생동감 있게 전달하고자 한 데 목적이 있다고 출판사 측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지금과 다른 표현에는 각주로 설명을 해 놓아 이해에 어려움이 없도록 출판사가 배려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이 시집 『정지용 전 시집-카페 프란스』는 1부 〈정지용 시집〉, 2부 〈백록담〉 그리고 시집에 실리지 않은 잡지 등에서 새로 발굴한 작품과 〈미수록 작품〉들로 구분하여 실었다. 1부에는 우리 전통의 서정성과 이국정취가 배합된 시들이 좀 더 특징적이라면, 2부는 자연의 신비와 경이로움이 그려져 정지용 시인의 변화도 알 수 있다. 한편 이 책은 가톨릭 신자인 그의 신앙이 드러나는 작품들을 통해서는 그가 받아들인 천주와 성모에 대해서 느끼도록 해 준다.

우리는 대부분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그의 시를 처음 알게 됐다. 그가 납북된 이후 그의 시를 소개하는 것도, 그의 이름을 밝히는 것도 매우 어려웠던 남북의 극한의 대치 상황 속에서 우리 역시 납북인사인지, 월북인사인지, 이후 북한에서의 활동 여부가 드러나지 않은 인사들의 이름을 밝힐 수 없었기에 일어난 분단의 비극이 여실히 반영된 증거이기도 하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친일이나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사상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시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터였는데도 말이다. 정지용의 시를 읽으며 당시의 분위기 속으로 빠져들다 보면 한국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인정받는 그의 삶이 여실히 전달되는 감상을 하게 되면서 마음의 위로도 받을 것이다. 그의 시는 모더니즘 경향의 시들을 주로 발표했지만 향토색 짙은 우리의 언어와 사투리, 자신의 신조어 등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등 시작에 한계를 두지 않았다. 

우리는 대부분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그의 시를 처음 알게 됐다. 그가 납북된 이후 그의 시를 소개하는 것도, 그의 이름을 밝히는 것도 매우 어려웠던 남북의 극한의 대치 상황 속에서 우리 역시 납북인사인지, 월북인사인지, 이후 북한에서의 활동 여부가 드러나지 않은 인사들의 이름을 밝힐 수 없었기에 일어난 분단의 비극이 여실히 반영된 증거이기도 하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친일이나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사상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시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터였는데도 말이다.



한국시사에 그의 시는 크게 세 시기로 특징이 구분된다. 첫 번째 시기는 1926년부터 1933년까지의 기간으로, 이 시기에 그는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이미지를 중시하면서도 향토적 정서를 형상화한 순수 서정시의 가능성을 개척하였다. 특히 그는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다듬은 절제된 표현을 사용하여 다른 시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지금까지도 널리 사랑을 받는 「향수」가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두 번째 시기는 그가 〈가톨릭청년〉의 편집고문으로 활동했던 1933년부터 1935년까지이다. 이 시기에 그는 가톨릭 신앙에 바탕을 둔 여러 편의 종교적인 시들을 발표하였다. 「그의 반」, 「불사조」, 「다른 하늘」 등이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들이다. 세 번째 시기는 1936년 이후로, 이 시기에 그는 전통적인 미학에 바탕을 둔 자연시들을 발표했다고 한국시사는 기록하고 있다. 「장수산」, 「백록담」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들로, 자연을 정교한 언어로 표현하여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고 해서 산수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정지용은 이처럼 참신한 이미지와 절제된 시어로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한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분단 이후 오랫동안 그의 시들은 다른 납북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다 수많은 문인의 청원으로 1988년 3월 비로소 해금되어 대중에게 다시 알려지기 시작했고, 1989년에는 〈지용 시문학상〉이 제정되어 박두진이 1회 수상자로 선정된 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향수」 중에서


이 책의 표제어가 된 「카페 프란스」는 정지용이 지상(紙上)에 발표한 최초의 작품이자 그가 쓴 초창기 시 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향토적 서정의 상징인 「향수」와 상반되는 모더니즘의 색채를 띠고 있다. 


옴겨다 심은 종려나무 밑에

빗두루 슨 장명등,

카페·프란스에 가쟈.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뻣적 마른 놈이 압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 처럼 가는데

페이브멘트에 흐늙이는 불빛

카페·프란스에 가쟈. 


- 「카페·프란스」 중에서



마지막으로 국민시인 윤동주의 시집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서시」의 원제(原題)이다. 윤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 실험으로 살해당한 이후 그의 시집을 낼 때 강처중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서문 성격에 맞는다고 해서 서시로 바꾸고 제목까지 함께 바꿔 냈다. 윤동주 시인은 이 시집의 제목을 『병원』이라고 지었다. 초판본에 보면 병원이라는 한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걸 볼 수 있다. 윤동주 시집은 초판본 이후 증보판이 나올 때마다 서문과 발문이 교체되거나 추가되었는데 이 책에는 모두 한곳에 모아 9부에 실었다. 모두가 윤동주에 대한 회고와 존경을 담은 명문들이다.

한글로 시를 쓰는 것이 '죄인 시대'에 윤동주는 오로지 한글로만 시를 썼다. 게다가 윤동주는 자신이 일본식 이름으로 바꾼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시 「참회록」을 남겼다. 시대의 강요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윤동주는 그러지 않았다. 부끄러워하고 참회했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런 그들의 시를 알지 못하는 것 역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윤동주가 사용한 시어들은 '순결하다'는 점에서 생명력을 얻는다. 그것은 그의 품성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이 순결한 시어들은 윤동주의 시를 더욱 빛나게 해준다. 생애가 짧아 많은 시를 남기지 못한 윤동주 시인을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하고 아쉬움이 많지만 남아 있는 것이라도 잘 보존해 수시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읽는 것만이라도 다행스럽다. 윤동주의 시는 일제 지배에 저항하는 저항 시인의 시어들처럼 격렬하거나 힘이 들어가 있지눈 않다. 순수하고 여린 심성이 드러나는 고결하고 순결한 단어를 자주 사용하기 때문에 더욱 끈질긴 생명력을 갖는 것이라는 생각은 독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도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서의 윤동주는, '시'를 꼽는 설문조사에도 그의 시 몇 편이 꼭 들어간다.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우리나라도 이른바 참여 문학 논쟁이 가열됐다. 이른바 순수문학이냐 참여문학이냐에 대한 논쟁이었다. 70~80년대까지도 이어진 문학논쟁이었다.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닌데 굉장히 오랫동안 서로를 반목할 정도였다. 이때의 논쟁에 참여한 시인이나 문인들의 주장의 끝에 이미 윤동주의 시가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1941. 11. 20)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중 「서시」 전문


저자 : 윤동주(尹東柱)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노래한 민족시인. 우리 것이 탄압받던 시기에 우리말과 우리글로 시를 썼다. 윤동주는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 실을 가슴 아파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사상은 짧은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윤영석과 김룡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윤동주는 청춘 시인이다. 절친한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의 시 「동주야」에 의하면 아직 새파란 젊은이로 기억되고 있었다. 한글을 구사하면서 작품을 발표한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만주 용정과 경성 신촌 일대에서 문학청년들과 몸을 부대끼며 시를 썼기에 청춘의 고뇌가 담겨 있다. 1925년(9세) 4월 4일, 명동 소학교에 입학했다. 1927년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했다. 1931년(15세)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16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934년(18세) 12월 24일, 「삶과 죽음」, 「초한대」, 「내일은 없다」 등 3편의 시 작품을 썼고 이는 오늘 날 찾을 수 있는 윤동주 최초의 작품이다. 

1935년(19세)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로 편입했다. 같은 해 평양 숭실중학교 문예지 〈숭실활천〉에서 시 「공상」이 인쇄화되었다. 1936년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숭실학교를 자퇴하고 〈카톨릭 소년〉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를, 1937년 〈카톨릭 소년〉에 동시 「오줌싸개 지도」, 「무얼 먹고 사나」, 「거짓부리」를 발표했다. 1938년(22세)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했고 1939년 조선일보에 「유언」, 「아우의 인상화」, 〈소년(少年)〉지에 「산울림」을 발표하였다. 처음 윤동주 시들은 노트에 봉인된 채, 인쇄되지도 않았고 신문 지면에 발표되지 않았다. 그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지고 난 후 동문들이 그의 노트에 있던 시를 모아 정음사에서 출판한다. 유해가 안치된 지 3년 후, 그러니까 1948년, 조선은 대한민국으로 국호가 바뀌어 혼란한 시기에 청춘 시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광복 후에 정병욱과 윤일주에 의하여 다른 유고와 함께「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만주 북간도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에 「달을 쏘다」, 「자화상」, 「쉽게 씌어진 시」를 발표하였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복역 중이던 1945년 2월 16일 광복을 여섯 달 앞두고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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