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하지 말아요, 곧 밤이 옵니다 : 헤르만 헤세 시 필사집 쓰는 기쁨
헤르만 헤세 지음, 유영미 옮김 / 나무생각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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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는 한국에서도 어떤 작가 못지않게 유명세를 누린다. 그는 1946년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과 괴테상을 동시에 수상하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의 정점에 올랐다. 독일 국적의 시인이자 작가이지만 1923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함으로써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는 않은 듯하다. 그의 유명세는 이미 1904년 장편 소설 『페터 카멘친트』가 발표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소설의 발표 전 이미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하여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와 산문집 『자정 이후의 한 시간』을 1899년 출간했다. 그는 시와 소설, 산문 등을 넘나들며 명작으로 손꼽히는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했다. 독일 문단에서도 국적 변경에 개의치 않고 그를 독일의 자랑스러운 대문호로 떠받들 정도였으니 그의 문학적 업적과 명성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삶의 이정표로서의 역할도 했다. 특히 그의 시는 낭만적 사조를 띠고 있음에도 도덕적, 윤리적 타락을 느낄 수 없이 밝고 명랑하다. 그의 정서는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지만 선동적이지 않고 오히려 삶의 길이 혼탁할 때 이정표로 삼을 만큼 깊은 깨달음과 위로, 안식이 담겨 있다. 1877년 독일 남부 뷔르템베르크 출신이지만 아홉 살 연상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했으나 1923년 이혼했다. 스위스 국적은 이때 취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시는 당시 독일 문단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로부터 대단한 칭송을 받았다고 알려진다. 정해진 목적지도, 반듯하게 뻗은 길도 없는 곳들을 떠돌면서 헤세 또한 무수히 많은 번민과 방황을 했으며, 죽는 날까지 실존적 고민을 결코 멈추지 않은 흔적이 그의 시와 글 많은 곳에서 발견된다. 그런 흔적은 많은 독자들을 확보하는 데도 큰몫을 했다는 것이 문학평론가들의 일관된 평이다.

헤세는 바람 한가운데서 얼어붙은 보리수나무의 딱딱한 줄기를 베고 누워서도 부드러운 꿈을 꾸었다고 말하고, 수백 번 가지가 잘려나가도 참을성 있게 새잎을 내는 떡갈나무처럼 ‘이 미친 세상’을 누구보다 사랑했다고 고백한다. 헤르만 헤세만큼 삶을 치열하게 살고 사랑한 사람이 또 있을까? 헤르만 헤세처럼 신의 섭리에 순종하면서도 진리에 대한 탐구적 자세를 견지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가 타계(1962)한 지 62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문학적 향기는 고고하게 전 세계에 울려퍼지며 그를 느끼게 해준다. 이 시집 『슬퍼하지 말아요, 곧 밤이 옵니다』는 그의 삶에 대한 애정과 존재적 고민이 오롯이 담긴 그의 시 100편을 골라 실은 필사집으로 출간됐다.

 


 

이 필사집의 〈추천사〉를 쓴 시인 장석주는 "중학교 때 국어 부교재로 구입한 『문장의 기쁨』(반 세기도 지난 일이라 제목이 정확한지 모를 정도지만)에서 헤세의 글을 처음 읽었다"고 말하고, 그 책에 실린 단편 「나비」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었다고 털어놓는다. 정석주 시인은 나비 수집에 몰입한 한 소년이 실수를 저지른 뒤 느낀 죄책감과 회한을 토로하는 그 단편 소설에 감응해서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는 것. 이후 헤세 전집을 구해 밤새워 탐독한 건 한참 뒤의 일이라고 말머리를 꺼낸다. 시인은 추천사를 통해 "100편을 단숨에 다 읽었다. 헤세의 시들이 청춘과 행복의 덧없음, 계절의 순환이 우리 감각에 일으키는 작은 파문, 아름다움과 멜랑콜리에 반응하는 마음의 결을 하나로 아우른다는 점을 새롭게 발견했다"고 밝혔다. 시인은 이어 헤세의 시들은 "이성과 감성의 균형, 자연과 인생에 대한 관조, 자연스러운 운율, 언어의 조탁에서 매우 인상적이다. 고향, 정원, 집, 나무를 노래하는 헤세의 시들은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고, 사물과 조응하는 천진한 소년의 정서를 고스란히 드러낸다"고 말한다.

흐드러진 꽃들은 지고, 청춘은 빨리 쇠락한다. 만물은 낡고, 시들고, 바스라지고, 부서진다. 거기에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다. 지혜와 미덕은 물론이거니와 가장 아름다운 것조차 조락과 소멸의 운명을 피할 도리는 없다. 남는 것은 만물이 변화한다는 진실과 한 줌의 무상뿐!이란 시평을 남긴다. 「시든 잎」의 일부를 소개하면서···.

 

모든 꽃은 열매가 되고 모든 아침은 저녁이 되려 한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건

변화와 무상뿐!

- 「시든 잎」 중에서

 


 

시를 읽는 독자들의 마음은 시처럼 아름답게 변한다. 대체로 그렇다. 감명 받은 시에서도,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시를 읽는 마음은 순수함을 돌아간다. 그래서 시에서 받은 감동은 오래 지속되나보다. 이 책의 표제어가 된 「방랑을 하며」란 시에 쓴 싯구다. 싯구가 그대로 시집의 제목이 된 예다. 이는 아름다운 싯구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감동하고,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는지 충분히 추정할 만하다. '슬퍼하지 말아요, 곧 밤이 옵니다'다. 이에 대해서도 장석주 시인은 한 줄의 평을 남긴다. "인생이란 영원한 원무(圓舞)! 우리는 사는 동안 쉬지 않고 춤을 춘다. 또한 인생이란 빈약한 기쁨과 가혹한 슬픔, 그리고 기도와 구애와 비탄으로 짜인 피륙이다. 가을 지나면 한파가 몰아치고 빙점 이하의 기온에서 물은 결빙한다. 삭풍에 어린 나뭇가지는 꺾이고 시든 잎들은 우수수 떨어진다. 봄의 훈풍을 그리워하며 방랑하는 자여, 세상이 삭막해도 실존의 불안에 꺾이지는 말자. 결국 이 모든

사태는 지나가고, 밤이 이것들을 삼켜 평정하리라.

슬퍼하지 말아요, 곧 밤이 옵니다

밤이 오면 우리는 빛바랜 땅 위로

서늘한 달님이 살포시 웃어주는 것을 바라보며

서로 손을 잡고 쉴 거예요

 

슬퍼하지 말아요, 곧 때가 옵니다

때가 오면 쉬게 될 거예요

우리의 작은 십자가 두 개가 나란히

밝은 길가에 서 있을 거예요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오갈 거예요

- 「방랑을 하며」 - 크놀프를 생각하며, 전문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시집은 필사용 시집이다. 장석주 시인은 〈추천사〉를 통해 이 점에 대해서도 한마디 거든다. "헤세의 시들이 시대를 넘어서서 운명에 대한 깊은 통찰로 우리 생의 감각을 쇄신하는 까닭이다. 꼼꼼하게 읽어보니, 헤세는 생명과 봄과 소년의 시인, 재에서 불꽃이 솟구치듯 신생하는 시인이다. 봄의 푸른 공기와 새들의 노랫소리를 찬양할 때 헤세의 시적 감성은 더욱 영롱하게 반짝인다. 자, 「봄이 하는 말」을 읽어보자.

 

아이들은 모두

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요

살아라, 자라라, 피어나라

희망하라, 사랑하라

기뻐하라, 새싹을 틔워라

너 자신을 내어주어라

그리고 삶을 두려워하지 마라

- 「봄이 하는 말」 중에서

 

시인은 “실패와 좌절로 우울이 깊어질 때마다 저녁의 문설주에 근심 많은 이마를 대고 이 시를 읊조리면 위안과 힘을 얻으리라. 불안이 찾아올 때 머리를 수그리고 가만히 생각하자. 별이 지면 그 빈자리에 세로운 별이 떠오른다는 것을! 인생에서 단 하나 숭고한 의무는 우리에게 주어진 별의 순간을 꽉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이라며 말을 맺는다.

 


 

시집을 번역하는 일은 소설이나 산문을 번역하는 것과 또다른 어려움이 있다고 이 시집의 역자 유영미는 말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를 번역한다는 것은 보통의 텍스트를 번역하는 것과 사뭇 다른 작업이다. 보통은 한 번 문장을 만들고 나면 그다지 손볼 일이 없지만 시는 낱말을 자꾸 이리저리 교체해 본다"고 밝힌다. 왜 이런 단어를 여기에 넣었을까? 왜 이렇게 노래했을까? 저자의 시상을 내 것으로 느끼려 하면서 시상에 가장 맞는 단어를 떠올리기 위해서다. 때문에 산책을 하면서도 시를 읊조리는 경우가 많다고도 말한다. 특히 헤세를 번역하고 있다는 역자의 말에 많은 지인들이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보인다고도 털어놓는다. 어떤 친구는 「시든 잎」을 줄줄 외워 보이기도 해서 저으기 놀란 적도 있다고 회고한다. 사실 역자는 대학 때 도서관에서 헤세 시 전집을 빌여온 날, 헤세가 남긴 수많은 시들을 보면서 헤세의 부지런함에 혀를 내둘렀다고 고백한다. 소설과 산문을 그렇게 많이 쓰고, 시도 이토록 많이 썼단 말인가.

고요히 테이블에 앉아 헤세의 시를 필사한다는 건 시대정신을 거스르는 행위가 아닐까 싶다는 고백도 한다. 그러나 시 필사는 소요 시간보다 얻는 것이 훨씬 많다는 자신의 결론에 이른다. 시대를 거슬러 느림과 주의 깊음, 마음 챙김으로 나아가는 행위일 것이라 믿는 이유다. 헤세의 시에 몸을 푹 담그고 헤세의 마음과 공명하는 귀중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독자들에게 권유한다. 또 "그렇게 위로받고, 헤세처럼, 또 헤세의 시를 좋아했던 많은 독자들처럼 다시 기운을 내서 일상을 살아가기를 바란다”고 말을 맺는다.

이 필사 시집은 모두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뜰 안의 바이올린〉, 2부 〈시집을 손에 든 친구에게〉, 3부 〈그는 어둑한 곳을 걸었다〉, 4부 〈저녁 무렵의 집들〉 등이다. 각 부의 제목은 그 파트 안에 들어 있는 시의 제목에서 뽑아왔다. 새해 첫 선물처럼 받은 헤세의 필사시집이 오랜만에 독자의 방에도 문학적 향기를 듬뿍 전해 준다. 이 책의 향기가 농익은 과일향처럼 짙어 매우 오래 갈 것이란 예감에 기분이 들뜨기도 한다. 멋진 필사시집이다.

 


 

저자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년 독일 남부 뷔르템베르크의 칼프에서 태어나 목사인 아버지와 신학계 집안의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1890년 신학교 시험 준비를 위해 괴핑엔의 라틴어 학교에 다니며 뷔르템베르크 국가시험에 합격했다. 1892년 마울브론 수도원 학교에 입학했으나 기숙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시인이 되기 위해 도망쳐 나왔다. 1899년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하여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와 산문집 《자정 이후의 한 시간》을 출간했다.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인정을 받았고 문단에서도 헤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후 1904년 장편 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통해 유명세를 떨치면서 문학적 지위도 확고해졌다. 같은 해 아홉 살 연상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했으나 1923년 이혼하고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다. 1906년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를 출간했고, 1919년에는 자기 인식 과정을 고찰한 《데미안》과 《동화》, 《차라투스트라의 귀환》을 출간했다. 인도 여행을 통한 체험은 1922년 출간된 《싯다르타》에 투영되었으며, 1946년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과 괴테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1962년 8월 9일 뇌출혈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기실현을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꾸준히 노력했다.

 

역자 : 유영미

 

연세대학교 독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아동 도서에서부터 인문, 교양과학, 사회과학, 에세이, 기독교 도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더 클럽』, 『삶이라는 동물원』, 『안녕히 주무셨어요?』, 『부분과 전체』, 『소행성 적인가 친구인가』, 『지금 지구에 소행성이 돌진해 온다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감정 사용 설명서』, 『인간은 유전자를 어떻게 조종할 수 있을까』, 『내 몸에 이로운 식사를 하고 있습니까?』, 『엄마, 나는 자라고 있어요』, 『여자와 책』, 『평정심, 나를 지켜내는 힘』, 『나는 왜 나를 사랑하지 못할까』 등이 있다. 2001년 『스파게티에서 발견한 수학의 세계』 로 과학기술부 인증 우수과학도서 번역상을 수상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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