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 작품 『붉은 강 세븐』(원제: Red River Seven)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를 깨운 것은 총성이 아니라 비명이었다." 저자 A.J. 라이언은 아포칼립스의 세상을 그리는 것으로 이미 명성을 얻은 작가다. 그러나 그의 명성을 알기에는 첫 문장으로만 만족하기 어렵다. 분위기는 감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비명이 인간의 비명소리가 아니라고 다음 문장을 받치고 있다. 뒤의 서술은 앞 문장을 설명한다. "총소리가 났다는 건 알았다. 소금기를 머금은 보슬비에 따가운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을 때, 희미하지만 익숙한 총성이 귀를 쿵쿵 울려댔다."(p.9) 비명의 진원 쪽으로 몸을 홱 돌렸고 그는 다시 들린 비명 소리에 두개골을 관통하는 통증을 느낀다. 그는 의식을 다잡고 주위를 살핀다. 갈매기가 잿빛 물 위를 빠르게 미끄러져 날고, 그의 시선은 갈매기의 궤적을 따라간다. "바다···."라는 말이 바짝 마른 혀를 긁어대며 입술을 빠져 나왔다. "난 바다 한가운데 있는 거야." 아무 이유도 없이 이 말이 터무니없을 만큼 웃겨서 그는 폭소를 터뜨렸다." 소설 속 인물의 행동은 아무래도 정상적이지 않다. 총소리에는 무감한 듯하지만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비명으로 들리고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깬다. 그리고 배의 갑판 위에서 상항 파악을 하자 배를 움켜쥐고 구르듯이 웃는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갑판 위에 웅크리고 앉아 미동도 하지 않는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드디어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 파악에 들어간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눈에 들어온 광경은 그에게서 웃음기를 거두어버린다. 시체는 격벽에 기대어 쓰러져 있었고, 격벽의 짙은 회색 페인트는 죽은 남자의 두개골에서 최근 쏟아져 나온 게분명한 검붉은 핏자국으로 변색해 있었다. 시체는 평범한 군복에 군화 차림이지만 재킷에는 휘장도 이름도 없다. 고개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얼굴을 낯설다. 하지만 턱 밑을 관통한 총알이 두개골 윗부분을 뚫고 나가면서 남자의 얼굴을 많이 바꾸어 놓았을 터였다. 한쪽 팔은 옆으로 축 늘어져 있고, 다른 팔은 손에 권총을 쥔 채 무릎 위에 놓여 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와 주변 상황이지만 그의 기억 속에는 "M18, 지크자우어."라고 떠오른다. 이 총은 미국 군용 권총이다. 17발 장전 가능한 유효 사거리 50미터의 우수한 총기다. 이때 그에게 다가온 사실이 예사롭지 않다. 그가 권총의 이름은 알면서, 자신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시작 부분을 짧게 어랜지했지만 이 소설은 출간되기 20개월 전에 이미 메이저 영화사들의 치열한 경쟁 끝에 영상화 판권 계약이 체결될 만큼 압도적인 서사를 인정받은 화제작이라고 한다. 저자는 우리나라에는 처음 소개되는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인 A. J. 라이언이다. 저자의 작품이 아포칼립스를 그리는 소설이 많아서 그렇겠지만 가장 참혹한 현장을 그려내는 데 특화된 작가로 명성이 자자한가 보다. 첫 소설 『피의 노래』(Blood Song)와 이후 발표한 『타워 로드』(Tower Lord), 『불의 여왕』(Queen of Fire) 등으로 수많은 독자를 이미 확보한 작가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까마귀의 그림자〉(Raven’s Shadow) 시리즈와 『깨어난 불』(The Waking Fire), 『화염의 군단』(The Legion of Flame), 『재의 제국』(The Empire of Ashes) 등 〈드라코니스 메모리아〉(The Draconis Memoria) 시리즈 등도 공전의 히트를 친 작품들이다. 『늑대의 부름』(The Wolf’s Call), 『블랙 송』(The Black Song) 등 〈까마귀의 칼날〉(The Raven’s Blade) 시리즈, 『버림받은 자』(The Pariah), 『순교자』(The Martyr), 『반역자』(The Traitor) 등 〈강철의 언약〉(The Covenant of Steel) 시리즈는, 본명인 앤서니 라이언(Anthony Ryan) 이름으로 출간했다. 책의 제목만 들어도 궁금하고 잔혹함이 예상될 정도다.
이 책 『붉은 강 세븐』은 세계 종말이 언젠가 다가올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시대에 일어날 법한 파국을 보여줌으로써 긴장감을 고조시킨다다. 온통 붉게 변한 서양 문명의 심장부인 영국 템스강을 따라 일곱 명의 기억을 잃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무슨 이유로, 어떤 임무를 띠고 가는지 모른 채 오로지 생존을 위해 함께한다. 이 여정은 당연히 숨 막히는 액션, 거대한 스케일의 스펙터클, 좀비·전염병·변신 등의 소재를 화려하게 펼치며 멸망 직전의 세계, 어둠의 심장부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 런던의 템스강을 배경으로 인류 멸망이 임박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그린 아포칼립스 스릴러다. 읽는 것만으로도 뇌리를 떠나지 않을 강력한 공포물의 시·청각 이미지가 넘쳐나는 이 책은 박진감 넘치는 전개와 최고의 몰입감을 자랑하는 밀실 미스터리인 동시에, 배를 타고 미지의 세계를 항해하는 현대판 오디세이라 할 수 있다. 신화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과거의 승리와 돌아갈 집을 기억한 채 표류하던 것과 달리 『붉은 강 세븐』 일곱 전사들은 목적지는 물론 어떤 개인사도 기억하지 못한 채 한배를 타고 닥쳐올 운명에 대처해야 한다는 점이 다르다. 그만큼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이다.
이 작품은 오늘날 인류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부상한 전염병과 뇌과학의 한 과정으로서 기억을 서로 연결한 점도 작품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앞서 잠깐 언급한 소설 도입부의 한 남자가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 채 깨어난다. 자신의 신원에 대한 유일한 단서는 팔에 새긴 ‘헉슬리’라는 문신과 총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감각뿐이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를 포함해 일곱 명의 낯선 이들이 바다 위의 같은 배에 함께 있었고,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동시에 깨어났다. 여섯 명 전부 자신이 누군지 기억이 없으며, 어째서 이 배 위에 있는지, 이 배가 어디를 지나고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또한 이들은 평범한 군복과 삭발한 머리, 신체 부위에 수술한 흔적을 공통으로 지녔고, 팔에는 이런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콘래드, 리스, 골딩, 플라스, 디킨슨, 핀천. 배는 원격으로 조종되고 있고, 그들이 직접 통제할 수 없으며, 많은 양의 총기들을 싣고 있다. 그들은 앞으로 닥쳐올 상황에 대비하여 협력하기로 합의하고, 각자 잘 알고 있는 분야가 무엇인지 대화를 나누고는 자신들이 의사, 탐험가, 역사가, 군인, 물리학자, 형사로 이뤄진 전문가 집단이리라는 결론에 이른다. 자신의 이름은 모르지만 전문가다운 지식을 비춰볼 때 전문가 집단임을 추정해 낸다. 그리고 누군지는 모르지만 여섯 사람은 어떤 목적을 위해 이 배에 배치됐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한다.
“무슨 이상한 실험 같은 건가 봐.” 헉슬리가 제안했다. “기억을 지운 다음 무기를 장전한 배에 태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자는 거지.” (중략) “기억이라는 게 뇌의 깔끔한 개별 영역에 은밀하게 들어앉아 있는 게 아니거든. 개인사를 기억하는 능력은 없애버리고 축적된 지식과 기술은 그대로 남겨둔다, 그건 내가 지금껏 읽은 모든 신경과학 저널에서 주장하는 이론을 다 뛰어넘는 거야.” 그녀는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아니면 내가 읽었다고 생각하는 저널이겠지. 지금은 단 한 건의 검사나 환자 상담도 기억해낼 수 없지만, 어쨌든 난 내가 그런 일을 했었다는 걸 알아.”(p.27~28)
갑자기 제어판에 불이 들어와 지도가 표시되고 그들이 영국의 수도 런던으로 바로 이어지는 템스강에 접근 중이라는 사실이 확인된다. 시간이 지나도 그들의 항로에서 걷히기는커녕 점차 짙어지는 분홍빛 안개의 정체가 수상하다. 모두의 의구심이 커지는 가운데 비행기 한 대가 공중에서 비컨을 떨어뜨리고 그 안에서 위성 전화가 발견된다. 수화기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그들에게, 무엇이든 개인적인 것을 기억해내는 사람을 사살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러지 않으면 나머지 일행의 목숨이 위험해질 것이라는 협박성 발언도 남긴다. 어째서 그들은 아무것도 기억해선 안 되는가? 그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은 누구이며, 그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안개 저편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비명 소리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궁금해지만 누구 하나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결국 명령 받은 대로 지시 사항을 수행키로 한 일행은 수행할 수 있는 명령이 떨어질 때 난감해진다. 갈등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개인 신상 기억은 없지만 상황 인지, 판단 능력은 그대로 남겼다. 사용하는 모든 총기나 무기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보아 분명 군사 전문가 집단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사적인 기억을 떠올리는 구성원은 무조건 위험 요소로 간주해야 합니다. 배로 돌아가 그녀를 사살하십시오.”
“그럴 순 없어.” 헉슬리는 전화기를 꽉 움켜쥐고 입술에 바짝 가져다 댔다. 분노가 신중함을 넘어 폭발하면서 침이 튀기 시작했다. “잘 들어, 대답을 들을 때까지는 우리 중 누구도 아무 짓도 하지 않을…….”
배에서 울려 퍼진 소리는 굉음과 건조한 균열이 뒤섞여 있었지만, 그 출처만은 분명했다. 총소리였다.
“배로 돌아가십시오.” 목소리가 전과 마찬가지로 단조롭게 말했다. “그녀를 사살하십시오.”(p.68~69)
이 책 『붉은 강 세븐』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끔찍한 전염병의 원흉이 되고, 불안과 공포로 촉발된 나쁜 기억이 감염자를 자신의 악몽의 이미지로 변형시킨다는 설정을 담고 있다. 인류의 마지막 세상을 그려내지만 그 인간의 사랑과 연대야말로 종말 직전의 위기 상황을 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종말의 예고 사항을 미리 훑어보게 하는 진지함을 작품 속에서 녹여낸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배경이 된 세상은 이미 감염병이 창궐해 아포칼립스 상황에 처해진 지구의 일부분, 영국 템스강과 바다로 이어지지만 이미 전 세계가 이해할 수 없는 감염병으로 서서히 저물고 있는 상황이다. 이 소설은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들의 자발적 희생을 끌어내는 요인이 그들이 더 이상 기억해낼 수 없는 각자의 가족들에 대한 사랑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며 예방과 해결의 단초를 제공한다. 소설가로서 기억을 통해 감염되는 전염병이라는 독창적이고 탁월한 아포칼립스를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역시 작가 라이언"이라는 칭송이 잇따르는 것이다. 특히 이 독창적 서사에 인간의 숭고함의 색채를 더했으니 이보다 더 돋보이는 아포칼립스 작품이 나올까 싶다. 물질적 풍요로움과 과학 기술의 눈부신 진보의 다른 한편으로, 그릇된 집착과 망상으로 어디를 향해 가는지 불확실해진 이 시대에 대한 강렬한 우화로 남을 『붉은 강 세븐』은 장르적 쾌감과 더불어 잊지 못할 감동의 여운을 안겨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지금까지 들었던 비명 중에 가장 격렬한 불협화음으로 해독이 불가능했다. 적어도 십여 개의 목구멍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이라고 할 수 없는 길게 늘어진 단어들이 혼란과 고통과 불가사의한 황홀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조된 감정과 공명하며 울려 퍼졌다. 불협화음임에도 불구하고 헉슬리는 그 소리에 기묘한 통일성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물론 음색에 일관성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각 음량은 마치 합창단이 각자 다른 노래를 부르고 있음에도 같은 지휘자를 따르는 것처럼 조화를 이루면서 상승과 하강을 반복했다.(p.148)
“이 사람들 흉터는 우리 것과 달라.” 헉슬리는 손전등 빛을 여자의 면도한 두개골 쪽으로 더 가까이 움직여 귀 위쪽에 봉합된 2.5센티미터짜리 절개 부위를 비추었다. (중략)
“그렇다면 이름은?”
리스는 손전등으로 여자의 팔뚝을 비추었다. 살점이 여기저기 변색된 탓에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지만, 리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신을 해독했다. “칼로.” 남자의 것은 좀 더 알아보기 쉬웠는데, 리스는 피가 그의 팔이 아닌 양손에 응고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터너.”(p.181~182)
저자 : A.J. 라이언
1970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성년이 된 이후엔 런던에서 살았다. 역사학을 전공하고, 영국 정부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았던 그는 첫 소설 『피의 노래Blood Song』가 성공을 거둔 이후 전업 판타지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이윽고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름을 올렸다. 대표작인 『피의 노래』, 『타워 로드Tower Lord』, 『불의 여왕Queen of Fire』 등 ‘까마귀의 그림자Raven’s Shadow’ 시리즈, 『깨어난 불The Waking Fire』, 『화염의 군단The Legion of Flame』, 『재의 제국The Empire of Ashes』 등 ‘드라코니스 메모리아The Draconis Memoria’ 시리즈, 『늑대의 부름The Wolf’s Call』, 『블랙 송The Black Song』 등 ‘까마귀의 칼날The Raven’s Blade’ 시리즈, 『버림받은 자The Pariah』, 『순교자The Martyr』, 『반역자The Traitor』 등 ‘강철의 언약The Covenant of Steel’ 시리즈는, 본명인 앤서니 라이언Anthony Ryan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예술과 과학, 완벽한 리얼 에일에 대한 끝없는 탐색이 주요 관심사다.
역자 : 전행선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2007년 초반까지 영상 번역가로 활동하며 케이블 TV 디스커버리 채널과 디즈니 채널, 그 외 요리 채널 및 여행전문 채널 등에서 240여 편의 영상물을 번역했다. 그 후 바른번역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현재 바른번역 회원으로 활동하는 출판전문 번역가이다. 옮긴 책으로는 『와인의 세계』, 『이웃집 소녀』, 『템플기사단의 검』, 『살인을 부르는 수학공식』, 『무조건 행복할 것』, 『지하에 부는 서늘한 바람』, 『3~7세 아이를 위한 사회성 발달 보고서』, 『허풍선이의 죽음』, 『마지막 별』, 『아도니스의 죽음』, 『미라클라이프』, 『예쁜 여자들』, 『전쟁마술사』 등이 있다.
『개의 마음을 읽는 법』 책을 번역한 전행선, 구세희, 고빛샘, 김경희, 전혜상은 ‘꿰어서 보배’ 소속 번역가들이다. ‘꿰어서 보배’는 소설, 인문, 경영, 심리, 교육 등 각 분야의 실력파 번역가들이 독자들에게 빈틈없고 유려한 번역을 선보이고자 뜻을 모아 만든 팀으로,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우리 속담에 착안해 이름을 지었다. 옮긴 책으로는 『창조의 순간』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