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 상 - 고려의 영웅들
길승수 지음 / 들녘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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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극 시대가 열리는가? 공영방송 〈KBS〉가 대하 사극 시대를 연 것은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0년대다. 방송가에서는 이때부터를 '정통사극의 시대'라고 꼽고 있다. 사실 우리에게는 〈태조 왕건〉이 훨씬 더 알려져 있다. 현재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바람과 구름과 비〉, 〈파천무〉가 크게 유행하고 〈삼국기〉가 인기를 끌면서 정통사극은 전성기를 맞이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KBS1에서는 〈야망의 세월〉과 〈먼동〉과 〈김구〉를 제작, KBS2에서는 월화정통사극 시리즈였던 〈한명회〉, 〈장녹수〉, 〈서궁〉, 〈조광조〉를 제작, 인기를 끌었다. KBS 대하드라마는 〈찬란한 여명〉을 시작으로 〈용의 눈물〉과 〈왕과 비〉가 방영되면서 시청률을 50% 이상으로 끌어올리면서 대하드라마 시대를 지속시켰다. 2000년대 김대중 정부 때에도 사극의 전성기는 이어졌고, 특히 KBS 대하드라마인 〈태조 왕건〉은 지금도 우리 국민들에게 큰 궤적을 남기고 있을 정도다. '최고 전성기'를 맞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심지어는 각 방송국이 사극을 연속으로 기획해 한국의 방송은 매일 사극을 방영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KBS의 성공적 사극 시대를 이끌었다는 평가에 MBC는 거의 퓨전으로 전환했는데 〈허준〉이 방송사의 자존심을 지키며 정통 사극의 맥을 이었다. SBS는 〈연개소문〉, MBC는 〈주몽〉으로 정통사극 시대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대조영〉을 끝으로 '퓨전사극'의 약진에 눌리는 상황으로 바뀌었지만 KBS는 〈정도전〉을 시작으로 정통사극을 다시 부활시켰으며〈광개토태왕〉, 〈불멸의 이순신〉으로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퓨전사극도 꾸준히 시청자들의 인기를 끌면서 이어졌다.

대한민국이 왜 정통사극이 인기를 끌 수 있었을까? 한마디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일 것이다. 독자는 아마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빼어난 역사 기록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우선 정통사극의 스토리를 구성하기 위한 재료로서의 실록은 극을 쓰는 작가들의 화수분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본다. 물론 작가들의 각고의 노력과 연출, 배우, 스탭들의 노력이 뒷받침했지만 역시 왜곡 없는 정통 사극이 국민들의 마음을 크게 감동할 수 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조선왕조실록』 때문으로 독자는 판단하고 있다.

 


소손녕과 외교 담판을 벌이는 서희(942~998년). 사진 출처 : 전쟁기념관

 

이 책 『고려거란전쟁』은 고려 역사에서 잊혔던 영웅들과 그들의 위업을 다시 한번 기리는 소설 작품을 원작으로 한다. 이 책은 지난 11월부터 방영되는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의 원작으로 전작 〈고려거란전기:겨울에 내리는 단비1, 2〉를 대폭 개정한 것이며, 고려와 거란 사이의 긴 전쟁을 유일하게 다루는 정통 ‘역사소설’이라고 한다. 특히 대하드라마, 정통사극 등이 인물(영웅) 중심의 드라마인데 비해 이 책은 '전쟁'이라는 표제어가 암시하듯 역사에서 잊혀지는 많은 영웅들을 되살리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대하드라마 정통사극과 결을 달리한다. 이 책의 저자 길승수는 고려거란전쟁을 다룬 〈JTBC 평화전쟁 1019〉에 대본 작가와 자문으로 참여했으며,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에도 원작자와 자문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작품은 ‘1010년 거란의 2차 침공’을 다루고 있으며 ‘1019년 구주대첩’으로 이어지는 그 후속 이야기도 곧 선보일 예정으로 알려졌다.

소설의 배경은 10세기 초, 신라가 쇠퇴하며 왕건이 세운 고려가 한반도의 지배 세력으로 떠오른다. 〈고려거란전쟁: 고려의 영웅들〉은 그 시절 고려와 거란의 긴밀한 대립 구도 속에서 벌어진 전란 중, 특히 거란의 두 번째 고려 침공(1010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당대 고려를 둘러싼 주변 상황과 주요 사건, 그리고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인물들을 충분한 고증과 연구 끝에 흥미진진한 이야기 안으로 불러냈다는 점, 서희와 강감찬 뒤에 가려졌던 고려의 명장 양규를 재조명하여 이순신 장군에 버금가는 또 한 사람의 명장을 회자하게 했다는 점은 이 소설만이 가진 커다란 매력이다. 또한 이 소설은 양규 외에도 김숙흥, 강감찬, 조원, 강민첨 등 고려의 중요 장수들은 물론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르자마자 전란을 마주한 고려 현종에 대한 살아 숨 쉬는 듯한 묘사를 통해 그들의 고뇌와 충정을 가슴으로 읽게 해준다고 방송사 측은 설명하고 있다.

 


 

저자 길승수는 조선 후기까지 거의 잊혔던 인물들의 업적과 역사적 사건을 『고려사(高麗史)』, 『요사(遼史)』, 『송사(宋史)』 등의 신뢰할 수 있는 사료를 근거로 철저히 연구하고 재구성해 현대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고려거란전쟁』을 통해 독자들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 전란의 현장, 그리고 인물들의 감정과 고민에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역사적으로 주요한 이슈나 사건을 재평가하고 현대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데 특화한 이 책은 “고려 거란 전쟁에 관한 유일무이한 원천 콘텐츠”로서 앞으로 다양한 장르로 개발하는 데 있어서나 학술적 토론, 그리고 일반 독자들의 이해를 넓히는 데에도 큰 몫을 담당할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소설의 상권 시작 부분에서는 강조(康兆)라는 인물이 중심이 된다. 고려시대의 무신으로서,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이 왕위에 올린 인물로 알려져 있다. 현종 즉위 후 중대사(中臺使)라는 벼슬에 올랐다. 거란(요)의 성종이 침략해 오자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가 되어 싸웠다고 한다.사망 연도가 1010년으로 거란과의 전쟁 중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강조는 왕을 시해하고 다른 왕을 왕위에 올리는 등 무력을 행사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는데 목종 때는 중추사우상시(中樞使右常侍)로서 서북면도순검사가 되었다. 우리가 역사로 배워 알고 있는 바, 1009년(목종 12)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가 외척 김치양과 더불어,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를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대량군(大良君) 순(詢: 현종)을 옹립하고 목종을 시해하였다. 현종 즉위 후 중대사(中臺使)가 되었고, 이듬해 거란의 성종이 목종을 시해한 데 대한 죄를 묻는다는 명분으로 4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는 빌미를 제공했다. 물론 이는 거란의 침략 명분이었지 고려는 주권국으로 거란에 왕의 재가를 받아야 할 이유도 없는 나라다. 30만의 고려군을 이끌고 통주(通州)에서 거란과 맞서 싸우다 사로잡혔다. 거란의 성종으로부터 자기의 신하가 되라는 회유와 압력을 받았으나, 끝내 거절하고 살해되었다.(일부 두산백과 참조)

 


 

앞서 언급한 대로 고려는 자주국으로 조선시대와 달리 왕권 계승 때 당시 중국이나 여타 강대국의 허락을 받는 나라가 아니다. 송나라와 친교를 맺고 대국으로서의 대우와 맞물려 송나라는 상업 정책 등 내치에 힘을 기울여 속국이나 고려에 간섭하지 않는 국가 대 국가의 관계였다. 그러나 거란이 세를 불리다 압도적 기병의 군사력으로 점차 송나라는 물론 배후국으로 고려의 힘을 먼저 약화시키기 위해 고려를 침략해 들어왔던 것이다. 이는 태조 왕건 때부터 이어진 고려의 북진 정책과 친송 정책이 거란의 침입을 부른 원인이 되었을 것이란 역사적 판단도 있다. 태조 왕건 이후 고려는 4대 임금인 광종 때 중국을 통일한 송나라와 정식으로 국교를 맺으면서 송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나라 이름을 고려로 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를 잇고자 했던 것으로 고려는 강한 군사력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에도 갖추지 못한 30만 대군을 강조가 이끌고 거란의 40만 대군과 맞섰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이다. 고려가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북쪽으로 영토를 넓히는 북진 정책을 꾸준히 진행시켜 온 반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려의 친송 정책과 북진 정책은 거란을 자극했을 것으로 보인다. 압록강 유역에 살고 있던 거란은 늘 고려가 송과 군사 동맹을 맺어 자신들을 공격할까봐 초조해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송보다 먼저 고려와 외교를 맺으려는 까닭이다. 그러나 고려는 문명이 뒤떨어진 야만족으로 거란을 싫어했다. 독자가 TV에서 어느 사학자가 한 강연을 들은 바에 따르면 태조 왕건은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라고 생각해서 무척 경계했다고 한다. 942년 거란이 고려와 친해지기 위해 낙타 50마리를 사신과 함께 보낸 적이 있었는데, 태조는 그 낙타들을 다리 밑에 묶어 굶겨 죽여 버리기까지 한 사실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저자 길승수가 소설 첫 머리에 〈일러두기〉를 통해 1010년 당시 고려의 군사 편제를 밝혔는데 중앙군 6위가 정예부대로 상설 운영되는 군사들인 것 같다. 이에 따르면 전투부대, 치안 유지, 의장대, 수문 부대 등 약 3만 명이다. 이 밖에 국경의 주·진에 주둔하며 방어를 담당한 주진군, 노동을 담당한 사역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확한 숫자는 명기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기록에 없는 듯하다.

 


 

당시 상황과 교통로, 해안과 군사들의 무기도 자세히 그림과 함께 책 앞 부분에 새겨 넣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검차(劍車)'다. 이는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 때 엄청난 힘을 발휘한 무기라고 한다. 검차란 많은 검(劍)을 실어 다연발로 쏘는 이동이 가능한 무기라고 한다. 거란병이 쳐들어올 때 강조가 검차를 진에 배치하여 가까운 산에 진을 치고 또 하나의 부대는 성에 의지해 진을 쳐서 방어했다고 한다. 특히 검차는 이때 무더기로 쳐들어오는 검차는 위력을 발휘한 무기로서 기마병을 거꾸러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거마창' '골타' '철질려' '목만 또는 포만' '야차뢰' '낭아박' '첨두목려(충차)' '투석기' '운제' 등이 수성과 공성 무기로 쓰였다고 한다. 자세히 그림과 함께 본문에도 사용하는 방법이 자주 언급되기에 독자들의 전황 읽기에도 좋은 시도로 보인다.

저자는 이 책을 전작을 드라마에 맞게 개작을 했다고 말했다. 아마 드라마로 제작한다는 방송국 방침을 전해 듣고 좀 더 스토리의 긴박성과 극적인 장면에 첨삭을 가했을 것이다. 스토리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했으니 바꿀 게 없을 것이지만 전투 장면이나 각 인물의 성격, 업적 등에는 조금씩 고쳐 썼을 것으로 판단된다. 글로만 읽으면 독자가 상상한 대로 몰입해 읽을 수 있지만 드라마로 제작 방영되면 독자들의 상상력을 압도할 만큼의 화면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긴장감과 극적 상황이 없게 될 경우 스토리 전개는 마치 우리가 교과서를 읽는 것처럼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소설의 주요 인물을 고려와 거란으로 나뉘어 책을 읽기 전에 시대 배경과 전쟁 국면을 제대로 파악하기 전에 미리 알아두면 좋을 것으로 판단해 몇 명씩을 소개한다. 고려 측의 주요 인물 중 우리 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인물과 유명 인물이 함께 섞여 있으나 아마 주요 활동을 고려해 저자가 나열해 놓은 듯하다. 이에 따르면 양규는 서북면 도순검사(압록강 국경지역의 최고위직)로서 거란군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김숙흥은 구주(龜州,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시) 별장(무반 정7품)으로 양규와 함께 거란군에 맞선다.

 


 

또 조원은 통군녹사(문반 정7품)로서 중하급 관료이나 중책을 맡게 된다. 강민철은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했으며, 1010년 전쟁 당시 애수진장(문반 7품)으로 역시 중하급 관료였다. 왕순은 당시 고려의 왕 현종을 가르키며 순은 이름이다. 18세에 강조에 의해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 여기서 강감찬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관료였으나 위기의 순간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상권보다는 하권에서의 활약이 기대된다. 아내에게 핍박받는 요령 없는 인물로 드라마에서는 배우 최수종이 역할을 맡았다. 마지막 강조는 앞서 언급했듯 고려의 주력군을 이끌고 거란군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지만 방심으로 적군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한다.

거란군의 주요인물은 우리가 잘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어서 드라마 방송사 KBS의 소개로 대신한다. 물론 저자 길승수는 책 앞 부분에 고려 주요인물 다음에 거란의 주요인물을 배치해 놓았다. 이 가운데 '야율융서'의 첫 등장 신에서는 차가우면서 이성적인 모습으로 나왔다. 인물이 어떻게 묘사되던 간에 복장이 야만족처럼 묘사되었던 천추태후보다는 영향력이 큰 이민족처럼 묘사되었다.

고려 장수들의 복장은 태종 이방원과 정도전에서 사용한 여말선초 찰갑 소품을 기반으로 송나라 양식의 봉시식이 달린 투구를 착용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KBS는 밝히고 있다. 고증에도 엄청난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여말선초와 여요전쟁은 거의 수백 년 가까이 차이가 나지만, 찰갑은 제작 방법의 특성상 형태의 기본적인 큰 틀은 고대부터 중근세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점, 불화나 불탑 부조, 고려도경이나 몽고습래회사 속 묘사 등을 참조해보면 고려군은 송나라와 매우 유사한 양식의 투구를 썼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등을 감안해 설득력 있는 고증을 마쳤다고 한다. 특히 고려시대는 실제 유물이나 벽화 등이 많이 남아 있는 삼국시대, 조선시대 갑옷과는 달리 시각적 자료가 부족한 탓에 사극에서 판타지 갑옷을 입힌 경우가 대부분이었음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러하다고 KBS 측은 밝혔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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