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로해 주는 것들
이병일 지음 / 문학수첩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 『나를 위로해 주는 것들』은 시인 이병일의 에세이집이다. 등단 이후 적지 않은 세월 동안 그의 문학은 시와 에세이 희곡 등 장르에 구애받지 않은 활동으로 숙성돼 왔다. 마치 맛있는 간장이 햇빛과 바람, 그리고 시간에 의해 발효되는 것처럼... 이제 그의 글 한 줄 한 줄은 영혼이 깃들어 있고, 언어는 햇빛이 비치면 '쨍' 소리나며 부설질 것 같은 잘 빚어진 도자기와 다르지 않다. 특히 자연의 생명력과 서정이 깃든 어휘는 순우리말로 표현돼 한층 멋스러움을 보여준다. 이런 그의 독창성 있는 어휘 사용은 저자 이병일의 특유의 감성과 함께 녹아 있는 시 〈녹명(鹿鳴)〉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녹명'이란 중국 고전 『시경』에 나오는 말로 사전식 풀이로는 '사슴의 울음소리'를 의미한다. 먹이를 발견한 사슴이 다른 배고픈 사슴을 부르기 위해 내는 울음소리란 시의 제목으로 완성됐다. 이 책 『나를 위로해 주는 것들』 4장(章) 〈살아 있는 것들의 안부를 묻다〉 중 「나는 왜 동물의 언어에 집착하는가?」에서 저자 이병일은 자신의 시 〈녹명〉에 대한 언급을 한다.

 

저 흰빛의 아름다움에 눈멀지 않고 입술이 터지지 않는

나는, 눈밭을 무릎으로 밟고 무릎으로 넘어서는 마랄사슴이야

결코 죽지 않는 나는 발목이 닿지 않는 눈밭을 생각하는 중이야

그러나 벳구레의 갈비뼈들이 봄기운을 못 견디고 화해질 때

추위가 데리고 가지 못한 털가죽과 누런 이빨이 갈리는 중이야(p.223~224) - 〈녹명〉 부분

 

시인 이병일은 이 시에 대해 현대의 우리들이 이로운 정보와 먹을 것을 발견하면 숨기기 급급하고 혼자 먹기 바쁜데, 사슴은 오히려 울음소리를 높여서 "이리 와, 우리 같이 먹자"고 정을 나눈다는 점에 착안해 이 시를 완성시켰다고 말한다. 우리의 옛 서정을 사슴의 울음소리를 통해 형상화시킨 것이다.

 


 

“사소하고 시시한 아름다운 것에 매혹당하는 사람을 우리는 시인이라고 부른다”는 저자의 말로 이 에세이 『나를 위로해 주는 것들』에는 저자가 자연과 일상에서 발견한 ‘사소하고 시시한 아름다운 것’에 대한 기억들과 단상들이 펼쳐져 있다.

책의 〈작가의 말〉을 통해 저자는 “작고 눈부신 동식물들, 눈에 보이지 않거나 아직 말해지지 않은 아름다움에 대한 엉뚱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며 “신통찮은 문장으로 아름다움이 사는 반대쪽까지 내다볼 심산이었으나 괜히 아는 척하다가 눈꼴사납게 될까 봐 차돌 같고 옹이 같은 눈으로 지구를 바라보고 싶었다”고 털어놓는다. “목숨 가진 것들의 안위를 살피는 질문이 ‘시’가 된다”(p.284)는 저자의 시론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알 수 있는 글편들을 통해 독자들은 사유와 감성의 진수를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이처럼 이 에세이 『나를 위로해 주는 것들』에는 저자 자신이 위로를 받은 대상뿐만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들,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들과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저자가 말하는 “사소하고 시시한 아름다운 것”은 “여러 층위를 가진 빛이 있고 색이 있”는 ‘봄산’(p.10)일 수도 있고, “엎드린 자가 벽 너머를 생각하고 누워있는 자가 천장 너머를 보는” ‘시골집 방’(p.26)일 수도 있다. 또 “너무 깊어 아홉 자식의 눈물을 모아 쏟아부어도 다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아버지의 쇄골’(p.98)일 수도 있다. 어릴 적 시골집에서 칡소와 돼지를 키웠던 일, 사슴벌레와의 만남, 거미줄로 만든 잠자리채에 관한 추억들은 그 일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에게도 온기와 위안을 전한다.

꽃가루 날리는 버드나무는 불곰에 관한 상상으로 이어지고, 접붙이기에 대한 생각은 존재와 몽상에 대한 사유로 확장되며, 시인 자신의 어린 시절과 대구를 이루는 어린 아들의 존재는 어른이 되어버린 시인을 자연과 연결해 준다. 자연과 일상에서 끌어낸 아름다움과 사유, 가족을 비롯한 사람들과 가축 또는 곤충, 벌집, 나무 같은 자연물에서 위로받은 소소한 기억들은 극적이거나 화려하진 않아도, 누구나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를 건드린다.

 


 

1장 〈숨은 위로 찾기〉에서 「팥」을 통해 팥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흰 얼굴과 붉은 얼굴을 가진 돌멩이인데, 그 돌멩이에겐 냄새와 감정이 있고, 목소리도 있다. 항상 주름으로 가득한 세상을 담고 있어 단단한 것인데, 그것이 내 몸속으로 들어와 순간에 집중하는 힘을 주었다. 팥은 나를 지나 어디로 가는지 한 숟가락 떠서 씹지도 않고 목으로 넘겼는데,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건 위로였다. 목을 마르지 않게 하는 힘이었다. 어릴 적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팥죽에 대한 그리움과 팥의 의미를 함축해 보여준다.

“가장 은혜롭고 연약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주장이 없는 것들의 언어를 읽어내고 싶었다”(p.57~58)는 시인은 그러한 대상들 내부에 숨겨져 있는 저마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평소엔 보이지 않던 것들에 집중하면 아득한 환상이 보이는데 이런 상상들은 시인을 ‘나’이면서 동시에 ‘타자’가 되게 한다. 그리고 이 순간이 바로 시인에게 ‘회복의 순간’을 선사한다. 이는 이병일 시인 시세계의 중심을 이루는 ‘녹명 정신’과도 이어진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혼자만 잘사는 법을 배우는 데 익숙해진 각자도생의 시대에 시인은 굳이 ‘녹명’이란 말을 불러낸다. 은근히 녹명의 시대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치기도 한다.

3장 〈오래 달라붙어 있어도 좋을 감촉〉의 「자두와 마법에 걸린 사과나무를 생각함」이란 글에서 시인은 어릴 적 동네 자두나무에 관한 기억과 동화 〈마법에 걸린 사과나무〉 이야기, 성인이 된 후 지인의 자두나무밭에 들렀던 일을 차례차례 펼쳐놓는다. 자두 서리해 가는 아이들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쥐어뜯어 놓은 동네 아주머니와의 일화에 이어지는 동화 속 마음씨 좋은 사과나무 주인 이야기, 그리고 훈훈하게 마무리되는 지인 자두밭에서의 경험은 시인의 녹명 정신이 어떻게 물꼬를 트게 되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책의 어디를 펼쳐도 시인 특유의 표현과 시적 형상화를 통해 독자들의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냄으로써 감성과 아릿한 추억의 그리움을 극대화시킨다. 독자들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련한 추억의 시간을 가질 수 있고, 때로는 비슷한 경험의 기억을 떠올리며 조용히 지난 세월을 반추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앞서 잠깐씩 언급했지만 이 책은 모두 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숨은 위로 찾기〉, 2장 〈내가 사랑하는 것들〉, 3장 〈오래 달라붙어 있어도 좋을 감촉〉, 4장 〈살아있는 것들의 안부를 묻다〉 등이다. 1장의 각 제목에 등장하는 어휘들만 봐도 자연 속, 자연과 함께하는 삶,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움을 생각나는 단어들로 꽉 차 있다. '봄산' '밤나무와 달항아리' '담장' '방' '수각화' '팥' '나무' '산벚나무' '풀피리' '버들피리' '사슴벌레' 등이 그것이다. 유일한 이색적 동물은 '기린'뿐이다. 그것도 시인 자신의 경험보다는 아이를 보살피던 아이와 자신의 기억에 의해 이 장에 등장한다. 아이를 데리고 어린이대공원에서 봤던 기린에 대한 관찰에서 깨달음의 일부다. "기린의 힘은 일곱 개의 목뼈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중략) 기린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마음을 읽으면서 모가지에서 나오는 힘으로 기린이 걷는다는 것을 발견했죠."(p.48)

2장은 시인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물론 시인의 시적 대상이 주가 되겠지만)에 대한 이야기다. 「보리수나무」에서는 평생 산 가까이 붙어사는 부모님 덕에 시인은 시각, 청각, 촉각, 미각, 그리고 후각으로 자연과 동식물을 이해하고 소통하며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술회한다. 여기서 보리수나무는 일상적인 정경이지만 보리수나무를 관찰하면 다른 것이 보인다는 의미로 쓰인 것 같다.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 홀연히 어떤 대상을 응시하고 의미 있는 어떤 순간을 포착할 때, 아름다운 인간이 된다고 믿는다. 보리수나무는 나무로만 머물지 않는다. 과거를 잊지 않되 현실에 몸담을 수 있으며 앞으로 해야 할 삶의 일이 무엇인지 고찰하게 해준다. 끝없는 일상에 대한 기억을 미각으로 말하기. 저 보리수나무는 어디에나 있겠지만 그 어디에도 물돌 같은 파리똥은 없을 것이다."(p.85) 2장에는 또 「나의 시론」이 두 편 나온다. 「나의 시론 1」에서는 ① 투명한 깊이 ② 거머리 시학 ③ 나의 시적 질료는 자연물이라는 번호를 붙인 작은 제목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시론 2」에서도 ① 무턱대고 걷는 산길 ②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③ 핏줄 도드라지는 자리, 시란 소제목도 있으니 역시 일독을 추천한다. 시인이 쓴 시에는 번호를 붙이지는 않을 것이다. 시인은 에세이에 자신의 시론임을 확인하고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고 기억해 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썼을 것이다. 특히 시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꼭 읽어보길 권한다.

 


 

4장에서는 지구상에서 사라져 가는 동식물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지구의 미래를 고민한다. 시인으로서의 감수성과 예리한 관찰력으로 미래를 관통할 통찰력 있는 시인의 혜안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시인이 시를 통해 말하려는 것은 의미가 아니라 존재"라는 저자는 "목소리를 가진 것, 그리고 사물에게 목소리를 입혀주는 것이 시인이 하고자 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서술과 사유를 통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내놓는다. 「지구의 아름다움을 찾지 말자」란 글에서 저자는 ① 낮은 목소리 ② 소똥구리 ③ 뱀들 ④ 매 ⑤ 대마와 굼벵이가 사는 집 ⑥ 목청 혹은 석청 ⑦ 고비 ⑧ 산매화를 제시한다. 저자는 지구의 어딘가에서 삶으로부터 어긋난 것들이 진화하는 것만 같다고 말한다. 생태계를 교란하는 외래종 동식물이 성가시게 괴롭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저마다 필사적으로 제 목숨을 잘 지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직은 그것들을 되살려낼 가능성이 있음을 내비친다. 더 늦지 말아야 할 것들이기에 굳이 이 책에서 적었으리라. 결국 시인은 죽어 있는 것들에 생명을 불어넣기도 하지만,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생명 회복은 우리들이 지금 나서야 할 때라고 부르짖는 것으로 독자는 이해된다.

마지막 글 「시, 그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은 저자의 시세계를 압축해 보여준다. "내가 찾는 시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다. 목소리를 가진 것, 아니 사물에게 목소리를 입혀주는 것이다. 나는 존재를 통해서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상하게 버들피리를 종일 불고 잠에 들면 내 몸이 잠시 버드나무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 꽃가루 휘날리면서 물이며 개구리며 짐승이며 사람까지 다래끼 일으키게 하는, 그런 얄궂은 존재! 그날 논길을 돌아다니다가 밝은 개똥 냄새도 주목받을 때가 있는 것이다."(p.273)

"시 쓰는 운명은 손가락도 발가락도 아닌 눈동자에 있다고 믿는다. 나의 눈을 밝게 하는 것은 죄 없는 사물이면서 세상으로부터 몸을 감추지 못한 생명이다. 나는 마냥 걸으면서 일순간, 목숨 가진 것들의 안위를 살피는 질문이 ‘시’가 된다고 생각한다."(p.284)

 


 

살아있는 것들의 안부를 묻는 것은 우리 자신의 안부를 묻는 행위이기도 하다. 시인의 시뿐만 아니라, 첫 산문집인 이 책 『나를 위로해 주는 것들』 역시 이렇게 안위를 살피는 질문들로 가득하다. 먹을 것을 발견하고 혼자서 먹어 치우는 게 아니라 다른 존재까지 불러들이는 그 울음 자체가 위안을 건네듯,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 모든 존재의 안위를 살피는 잔잔한 질문들은 지금의 각자도생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잔잔하면서도 은근히 강력한 위로와 용기를 준다.

 

달은 진흙머리였다가 온순한 맨발이었다가 물새의 얼굴이었다가 눈먼 고인돌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 달은 변신의 귀재였다. 오래 더럽혀져도 달은 노랗게 맑은 달이다. 달빛은 왜 자질구레한 것들을 좋아하는지 묻지 않았다. 어쩌면 영혼이라는 말은 저 달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달은 물질이 아니므로 삼키지는 말자.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저 빛이 미늘이다. 한 번 꿰이면 평생 노숙의 몸으로 살아야 한다. 물고기 아가미가 꽃잎같이 붉은 것도 이런 까닭이다.(p.193) - 「달밤에 반응하는 것들」 중에서

 

저자 : 이병일

 

1981년 전북 진안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7년 『문학수첩』 신인상에 시,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옆구리의 발견』,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나무는 나무를』 등이 있으며 오늘의젊은예술가상, 송수권시문학상 젋은시인상,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등을 수상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