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재탄생 - 인류학, 사회과학, 심리학, 신경과학, 뇌과학까지 감정 연구의 역사와 미래
얀 플럼퍼 지음, 양윤희 옮김, 경희대학교 비폭력연구소 기획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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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감정의 재탄생』은 우리 인간의 '감정'이 변해온 과정을 탐구하기 위한 책이라기보다는 감정을 연구해온 연구자와 학자들이 감정을 어떻게 해석했느냐의 변천사에 대해 연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탐구를 위해 책의 부제로 사용한 학문 분야가 나열돼 인류가 오랫동안 '감정'을 연구해 왔다는 사실이 명쾌하게 드러난다. 감정 연구에 관해 인류학, 사회과학, 심리학, 신경과학, 그리고 최근의 뇌과학까지 동원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저자 얀 플럼퍼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연구 과정과 자신이 밝혀낸 감정의 정의(定義)를 정립하고 있다. 저자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직책이 말해주듯 저자는 역사학자이다. 그렇다면 왜 책의 제목을 '감정의 역사'나 '감정사(感情史)라고 쓰지 않고 '재탄생'이라고 썼을까? 독자의 의문을 푸는 데는 이 책의 처음 몇 페이지를 읽으면 해결된다. 저자 얀 플럼퍼는 감정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재정립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 연구도 그렇듯 이 논저도 〈감정이란 무엇인가?〉란 의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즉 감정의 본질을 밝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저자는 책의 첫머리 〈들어가는 말〉을 통해 '편도체'의 실체와 기능을 설명한다. 역사학자인 저자가 실제 편도체를 처음 보았는지, 아니면 '감정의 재탄생'을 쓰기에 단서 역할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책을 쓸 수 있는 결정적 뇌속의 물체임은 분명한 듯하다.

"건포도만 한 어두침침한 타원형 반구가 약간 더 밝은 빛의 뇌 물질 속에 스며든 것이 편도체이다. 이것을 보자마자 편도체만 따로 떼어 내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간이나 신장 같은 기관이 아니었다. 간이나 신장 같으면 몸통에서 자유자재로 떼어 내거나 붙이거나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눈엔 마치 누군가 양배추를 가르듯 뇌를 절단한 후 그 속에 편도체를 박아 놓은 것처럼 보였다. 한 학생이 폼알데하이드가 담긴 여러 개의 통 안에 잠겨 있는 수많은 뇌의 단면 중 유독 편도체가 잘 보이는 것을 찾아내어 조심스레 내게 들고 왔다. 2009년 12월 어느 날 이른 아침, 유럽에서 가장 큰 베를린 샤리테 해부학 연구소의 루돌프 연구실에서 일어났던 일이다."(p.15)

 


 

이 책을 쓰는 데, 뇌를 연구하는 데, 감정을 연구하는 데 '편도체'의 기능과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저자는 암시하고 있다. 편도체는 1819년 독일 해부학자 칼 프리디리히 부르다흐에 의해 명명되었고, 아몬드 형태의 모양 때문에, 그리스어 알몬드를 본떠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저자는 편도체의 중요성에 대해 대중적 지식을 알린 사람과 기능을 연구 발표한 수많은 학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저자가 굳이 언급한 것은 저자와 편도체의 관계, 즉 편도체가 자신이 연구하던 '군인들 사이 공포'에 관한 연구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와 편도체의 역할이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일 터다. 저자는 이 편도체에 대한 연구 결과 "오늘날에는 신경생물학적 용어라는 옷을 차려 입지 않고서는 군인들이 느꼈던 공포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적용할 인류학적 상수란 없다."고 단언한다. 이 사유의 기저에는 시간이나 문화를 망라해서, 호모사피엔스부터 실험실의 쥐까지, 모든 동물이 느끼는 공포감의 중심에는 확실한 신경생물학적 단초가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19세기 이후 문화적 보편성과 시간을 초월하여 모든 종의 생물학과 심리학의 심층에 기본적으로 굳게 연결된 감정 연구의 한 기둥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제 편도체의 실체에 접근한다. 편도체란 무엇인가? 뇌에서 특별한 작용을 하는 활성화된 신경세포의 덩어리다. 그러나 즉각적으로 드는 의문이 있다. 도대체 어떤 신경세포가 편도체에 속한단 말인가? 저자가 편도체를 처음 보았을 때 당황했던 기억도 끄집어낸다. 뇌 단면의 어두운 부분과 그것을 둘러싼 조금 엷은 빛깔 사이의 점진적인 침착으로 인해 명확한 구분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더욱이 학자들 사이에는 편도체의 기능에 대한 의견 불일치도 있었다. 편도체가 부정적인 감정에만 책임이 있다는 생각은 점점 소용없어졌다. 오늘날 실험실에서 밝혀진 바로는 편도체는 후각이라든가, 시각적 인지 작용, 재즈 음악가가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지 즉흥 연주를 하는지 알 수 있는 능력 등을 담당한다. 이와 함께 편도체의 신경세포 조직과의 연결은, 실험체인 설치류와 인간 사이에서 다르게 도출된다.(〈감정에 대한 연구에서 범해진 일곱 가지 실수〉 참조, Richard J. Davidson, 저자 주) 엄밀히 말해, 편도체에 대해서는 아직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것이 뇌의 각 반구에 한 개씩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들이 연결되는지, 별개의작업을 수행하는지는 통상적으로 신경생물학자들에게 열렬한 토론 주제가 될 것이라고 저자는 기존 연구자의 주장을 덧대어 강조한다.

 


 

이후 저자는 연구소를 떠날 때쯤 모든 생각이 편도체에 빠져 있음을 인정한다. 베를린의 옅은 겨울 태양 아래 서게 되자 그제야 어떤 직관이 찾아왔다고 저자는 표현한다.(p.18) 공포에 관한 인류학 연구 책을 읽으면서 저자는 완전히 색다른 문제와 우연히 맞닥뜨렸다. 저자에 따르면 인류학은 어떤 특별한 신경해부학적 부위를 가진 일반적이고 독특한 공포의 매커니즘을 찾아온 것이 아니다. 다른 세대 혹은 다른 문화에서 공포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그 차이에만 주목했다. 한 가지 예로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19세기 중반 영국의 침입을 받기 전까지 자기들끼리 종종 전쟁을 치렀는데, 만약 어떤 마오리족 전사가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몸을 떠는 육체적 징후의 공포심을 보이면 사회적 규약인 타푸(tapu)를 어겨서 아투아(atua)라는 영신에 들려 그런 것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판단된 전사는 그런 신들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마오리족 중 사회적 위상이 가장 높은 여성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 나가야 했다. 여성의 성기인 질은 전사가 아투아에서 자유로워지도록 하는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그가 떨지 않고 가랑이 사이를 통과할 수 있다면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져 전장에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전사가 여전히 떤다면, 정화의식은 실패로 돌아간 것이기에 처벌받지 않는 대신 집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분명한 것은 어떤 전사도 아투아에 들린 상태로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기에 마우리족 병사들은 공포를 느끼지 않고 전쟁을 치렀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로써 마오리족 전사의 군인 공포의 원형은 신체 바깥에 있다는 것이 판명된다. 공포는 그의 '영혼', 그의 '정신', 그의 '뇌'가 아니라 타푸라는 이름의 초월 공간과 더 높은 존재에 기인한 것이다.

19세기 중반 이래로, 감정에 관한 학문적 논의는 상극인 특성들 주위를 선회했다. 즉 강함과 유연함, 본질주의와 비본질주의, 결정론과 비결정론, 보편적 혹은 문화적이라는 두 가지 양극을 중심으로 논의됐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그들 서로 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저자의 의문과 질문은 이어진다. 어떻게, 언제, 어디서 그런 것들이 창출되었을까? 그들 간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저자는 연구가 그저 초기 단계일 뿐이라는 자신의 결론을 이끌어낸다. 서기 2000년의 첫 10년 동안 신경과학자와 인문학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다학제적 회의에 참가했던 사람이라면 이러한 양극화가 얼마나 민감한지, 그리고 주위가 얼마나 빨리 잔인한 적으로 둘러싸이는지 알 것이라고 지목하고 있다.

 


 

감정의 역사는 이처럼 21세기에 접어들어서도 아직 새로운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그동안 확립되어 온 보편주의와 사회구성주의 사이의 양극화는 종종 주목되었다고 한다. 어떤 학자는 감정을 타고난 것으로 보는 반면 다른 학자는 감정을 사회적 구성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또 거기에 덧붙여 한 학자는 보편과 변수 사이 어느 곳에 경계를 긋느냐고 반론한다. 이제는 그동안 주장해온 다양한 감정에 대한 이론이 얽히고설킨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피터와 캐롤 스턴스 등 두 학자는 "문화에 기인한 일시성으로부터 동물의 향상성을 분류하는 도전을 이야기한다고 저자는 밝히며 뤼디거 슈넬의 말을 인용한다. 슈넬에 따르,면 "오늘날 감정에 대한 역사 연구는 기본적인 것과 상반된 두 가지 입장을 가진다. 하나는, 인간의 감정이 단지 표현 양식만 달랐을 뿐 수천 년 동안 서로 같은 상태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감정은 일반적으로 역사적 변화로 결정되는 각각의 고유한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슈넬은 또한 보편주의자와 진화론자가 한 진영에 있고, 구성주의자가 다른 진영에 있다고 생각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어 많은 질문들이 이어진다. 아르민 귄터는 "감정이 역사를 가졌는지, 아니면 인류학적 상수인지" 질문한다. 캐서린 루츠와 제프리 화이트는 "다수의 고전 이론 혹은 문학 속 가정에서 인식론적 긴장감이 발견된다"라고 결론 짓는다. 이들이 바로 보편주의와 상대주의에 포함되는 것이다. 사회구성주의와 보편주의라는 이항 대립이 발생하지 않는 곳조차 이러한 대립을 은연중에 명시하는 경우도 있다.

저자가 수많은 감정에 관한 연구나 연구자들의 이론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이 결국은 감정의 역사에 포함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런 수많은 이론이 새로운 이론으로 재정립(재탄생)되는 과정이라는 말을 증명하려는 듯이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일반적으로 보편주의와 사회구성주의 사이의 이러한 구분은 우리의 사유를 발전시키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고 슬쩍 말머리를 돌린다. 18세기나 19세기의 저술들은 얼핏 보기만 해도 이러한 구분이 신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증거로 내세운다. 그것은 자연 대 문화라는 또 다른 이분법에서 비롯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모든 것은 또 계몽주의와 더불어 변화했다.

 

 

18세기를 거치면서 감정 이론에 말을 보탠 사람들 중에 드디어 우리가 아는 샤람들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한다. 토머스 홉스, 존 로크와 장자크 루소 등이다. 이들은 '자연'을 이야기할 때 빠짐없이 명명되는 학자들이다. 그들에게 자연이란 사회가 존재하기 전 기간으로 정의된다. 또 자연은 멀리 떨어져 있어 유럽 민족이 아닌 자들을 묘사하는 '원시적인'이란 말로도 한정되었다. 계몽사상가들은 자연을 인간의 신체와 동일시하여 본질적이고 변하지 않는 본능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마직막으로 자연의 의미는 환경과 융합되었다. 그 결과 식물군과 동물군이 자연이 되었다. 자연을 몸으로 보는 것과 환경으로 보는 마지막 두 견해는 무엇보다도 종교 이전의 정당한 형태가 되었다. 그리고 나서 단순화 경로를 따라, 일말의 여지 없이, 우리가 '세속화'라 부르는 독특하고 절대적인 정당화 사례가 되었다. 자연은 단단한 기반을 이룬 절대물로 주조되어 새로운 궁극의 확실성이 된 것이다. 현대 자연과학이 전문화되고 제도화된 것과 마찬가지로 우생학으로의 풍속화가 이루어졌다. 자연과 문화의 대비는 과학적 방법의 토론으로 각인되었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이 책을 쓴 두 가지 목적을 밝히고 있다. 첫째는 무엇보다도 감정 역사에 관한 개론서이기에 그로 인해 역사에 관한 통상적인 지식의 총합이 될 거라는 점이다. 이런 종류의 개론서가 쓰기에 쉽지 않은 것은 역사란 모든 방면에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은유적으로 말하면, 발사대에서 발사되는 로켓의 가속을 순간사진으로 포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감정을 심리학, 민족학, 철학을 통해 살피는 것은 늦은 감이 있지만, 역사로 보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너무나 먼 곳에서 출판되어 우리가 지식으로 흡수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더라도 감정 역사의 파편들은 여전히 그러모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가 저자는 설명한다. 향후 이러한 재조사 작업을 통해서, 이 책은 최근 연구와 관련된 신화들을 말끔히 요약하고 정렬할 것이며, 방대한 인용문을 삽입하여, 자신만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감정에 관한 연대기를 연구하기에 좋은 기초 자료를 제공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이 책은 "단순한 개요서기보다는 빠르게 발전하는 연구 분야에 대한 일종의 개입"이라고 말한다. 각각의 장(章)들은 평이할 것인데 자료들의 요약에서 중립을 지킬 것이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무론 동시에 저자의 견해는 가능한 투명하게 개진할 것임을 내비친다. 문학과 이미지 연구와 관련하여 인문학과 사회과학 일부에 저자의 비판이 할당되리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이 책은 오늘날 만연되어 있는 시경과하긍ㄹ 이용한 정치과학까지 다룬다. 다소의 반대 위험이 있고, 거부감도 있을지라도 중요한 혁신을 위해 거침없이 개입할 의지를 내비친다.

이 책은 4장(章)으로 나누어진다. 1장 「감정의 메타역사」, 2장 「인류학: 사회구성주의」, 3장 「생명과학: 보편주의」, 4장 「감정 연구의 역사적 전망」 등이다. 1장은 19세기 후반 감정사의 시작부터 감정에 대한 역사 연대기를 제시한다. 이러한 발달 과정은 감정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 다른 과학 분야와 함께 사회적, 정치적 사건의 맥락에 놓일 것이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감정의 역사조차도 어떤 메타역사를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2장은 감정 논의의 목적을 사회구성주의자로 돌려 타문화 속에서는 다르게 취급되는 감정에 관한 우리의 이해, 즉 인류학을 다룬다. 3장에서는 감정 스펙트럼의 다른 끝인 보편주의자로 관심을 돌려 감정 연구에 관한 전반적 개괄을 제공한다. 19세기 말에 일어난 실험심리학, 특히 신경과학에 관한 최근 연구에 초점을 두고 풀어낸다. 여기서 저자는 심리학, 생리학, 의학, 신경과학 연관 분야에 '생명과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용어는 '생물학'이라는 제한된 의미를 좀 더 확장시키기 위해 1980년대 나온, 인지심리학, 뇌 연구, 컴퓨터를 기반으로 살아 있는 유기체를 다루는 신경학 연구를 소개한다. '생명과학'은 별개의 학문 사이에 존재하는 유동성을 나타낸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에 따라 4장은 감정 역사 연구에서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관점을 열어놓는다. 이 책에서 2장의 사회구성주의와 3장의 보편주의는 뚜렷한 이원 구조를 이룬다. 이 둘의 대조는 느낌과 감정에 대한 기록된 모든 것에 너무 큰 영향을 미쳤다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이 둘의 통합을 보여주는 것이 이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책 『감정의 재탄생』이 양자관계에 의문을 일으켜 궁극적으로 두 진여의 화해를 모색하는 것이 저자의 속마음일 것이다.

 


 

이 책에 대한 번역자와 출판 편집자들의 소감을 이 책에 대한 내용을 짧고 명쾌하게 소개한 내용을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감정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나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질문에 바로 명쾌한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다면 다음의 질문을 살펴보자. 감정은 타고나는가 아니면 양육이나 삶의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가? 심장과 뇌 가운데 어느 쪽이 감정에 더 중요한가? 동물에게도 감정이 있는가? 이 책 『감정의 재탄생』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프로이트, 다윈, 에크먼, 레디, 르두, 다마지오와 같이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사상가와 학자들의 ‘감정’ 개념 및 연구를 비판적으로 추적해 나간다. 이 내용은 철학, 인류학, 사회학, 언어학, 예술사, 정치학부터 19세기 실험심리학에서 최신 신경과학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 다루는 감정의 역사는 ‘메타역사’이며, ‘감정’ 개념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러한 폭넓고 집요한 연구의 결과로 이 책은 국제 인문학상을 수상했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감정에 관한 다학제 자료를 헤쳐나가는 연구자들에게 생명줄을 던진” 최고의 입문서로 평가되고 있다.

 

저자 : 얀 플럼퍼(Jan Plamper)

독일의 역사학자이며, 아일랜드 리머릭 대학교의 역사학과 교수이다. 주요 연구 분야는 감정의 역사, 감각의 역사, 러시아 역사, 이주의 역사 등이다. 브랜다이스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튀빙겐 대학교에서 강의했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베를린 막스 플랑크 연구소 감정사 센터 연구원, 2012년부터 2021년까지 골드스미스 런던 대학교에서 역사학 교수로 재직했다. 『감정의 재탄생』과 『스탈린 컬트』는 여러 상을 받았고 다양한 국가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 외 저서로 『우리는 모두 이주자: 다문화 독일의 역사』 『공포』 등이 있다.

 

역자 : 양윤희

포스트모더니즘 소설 분석으로 학위를 받고 20년간 문학 강의를 했다. 삶은 이야기들의 향연이라고 일깨워 주신 외조모와 그것을 생생하게 만드는 것이 작가의 일이라고 일러준 프루스트에게 사랑을 보낸다. 시간은 모든 것을 앗아가고 황폐하게 하지만 거기에 틈을 내고 영원의 환상과 사유를 집어넣을 수 있는 보석보다 휘황한 문학이 있음을 기뻐한다.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반복충동과 포스트모던 소설』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번역서로는 『천 에이커의 땅에서Ⅰ, Ⅱ』(민음사), 『요술 부지깽이』(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1) 등이 있다. 2013년 단편소설 「순수와 오염」으로 문예감성 신인 문학상 수상하였고, 논문으로는 「롤리타: 나보코프의 서사욕망」, 「정신분석, 그 또 하나의 서사」 등이 있다. 평론으로 「사랑의 세 가지 진화 유형」, 「여성과 문학」, 「‘벌레 이야기’로 본 서사 욕망의 전복」 등이 있고, 수필 「도깨비와 인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방랑자들을 읽고」, 단편소설 「은총」을 썼다. 첫 장편소설 『두 달 뜨는 밤』을 썼다.

 

기획 : 경희대학교 비폭력연구소

2007년 설립된 경희대학교 부설 연구소이다. 현재까지 꾸준히 비폭력 주제 연구를 이어오고 있으며, 특히 집단감정?감정교육 연구 및 세미나 개최 등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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