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평생을 수치심과 싸워온 우리의 이야기
로라 베이츠 지음, 황가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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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성폭력 범죄가 도를 넘었다는 비판적 시론이 신문과 방송에 자주 언급된다. 2023년 대한민국 사회는 법 처벌 수위를 강력하게 올리고 있는데도 비웃기라도 하듯 성폭력 사건은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서 자주 오르내린다. 성폭력 범죄 유형도 새로워지고 잔인해졌다. 성폭력이 무분별해지고 있다는 비판적 시선을 피할 수 없을 정도다. '데이트 폭력'이란 신조어가 생길 정도이고, 성폭행의 수위마저 높아지고 있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살해마저 서슴지 않는다. 여성이 마치 '적'으로 보인 것처럼 잔인하게 대하는 데는 몸서리처질 정도다. 독자가 정확한 집계는 알고 있지 못하지만 뉴스에 나오는 빈도나 검찰이나 경찰에서 성폭력범들은 법정 최고형으로 무거운 처벌을 내린다고 강경 대응책을 내놓는데도 성폭력은 좀처럼 줄지 않는다.

2023년 7월, 대한민국 정부는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강화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스토킹 살해는 계속됐다. 전문가들은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이 살인 등 중범죄로 이어지기 쉬운 스토킹 범죄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피해자 보호 조치를 ‘피해자 스스로 판단하도록’ 전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책 『목록』의 저자는 저명한 영국의 페미니스트 로라 베이츠다. 이 책의 출간을 서두르던 그가 퇴고를 거듭하고 있을 때(두 번째 퇴고와 세 번째 퇴고의 중간 시기쯤인 2021년 9월) 영국 그리니치에 살던 한 여성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살해된 여성은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펍으로 친구를 만나기 위해 가는 도중이었다. 범인은 얼마 안 돼 잡혔는데 30대 남성이었다. 그 남성은 길 가던 여자를 강간한 후 죽였다. 저자는 그 사건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 책 출간을 앞두고 퇴고하는 사이에 '서비나 네사'가 죽었다. 이 책이 출간될 때쯤에는 또 다른 여자의 이름이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남자가 그녀를 탓할 것이다. 이것은 독립 사건이 아니다.”

비슷한 일은 대한민국에서도 불과 한 달 전에도 일어났다. 보도에 따르면 2023년 8월 17일, 서울 시내 한 등산로에서 출근 중이던 여성이 30대 남성으로부터 폭행과 성폭행 당하고 살해됐다. 대낮에 일어난 일이었고 범행 동기는 “강간이 하고 싶어서”였다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었났다. ‘그러니까 왜 여자가 혼자 운동을 하러 거기에 갔냐’ ‘당시에 무슨 옷을 입었냐’ 등 피해자를 향한 도를 넘는 2차 가해도 계속됐다고 보도는 이어졌다.

 


 

저자는 이를 두고 '강간 신화'(강간을 피해자 탓으로 돌리는 잘못된 믿음)는 현재 우리 사회에 여전히 진행 중이이라고 말한다. 영국이나 대한민국이나 어쩌면 그렇게 성폭력 양상이 똑같을까 생각해보면 섬찟하기까지 하다. 저자 베이츠는 지난 2012년 여성들이 자신이 겪은 성차별 경험을 공유할 수 있도록 ‘일상 속 성차별 프로젝트’라는 사이트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50명 정도가 사연을 올릴까 예상했지만, 이야기는 빠른 속도로 10만 개가 되며 화제의 중심에 올랐고, 오늘날에는 20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목소리를 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로라 베이츠는 선두에서 여성의 권리를 위해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2015년 디지털 혁신 분야에서 영국 언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세계 각지에서 쏟아져 들어온 온갖 불평등 이야기들, 성차별적인 농담, 길거리에서 일어나는 성희롱, 직장 내 차별, 성추행 등의 사건이 이 책에서 말하는 각자의 ‘목록’이다.

이 책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일상화된 불평등의 원인을 사회의 제도적·구조적 시스템에서 찾고자 한다. 그 누구보다 평등을 지향해야 할 교육, 경찰, 사법, 정치, 언론이 어떤 식으로 여자들에게 수치심을 주고 그들의 입을 막고 좌절하게 하는지를 엄격한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이에 따라 이 책 『목록』은 여자로 살아가며 평생에 걸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의 기록인 동시에 더 이상 그것이 개인의 일상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고 외치는 '선언'이다.

이 책에서 저자의 주장은 명확하다. 여자가 입고 있던 옷도, 몇 시에 어디를 갔는지도,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 것은 차별을 정당화하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라는 점을 저자는 강조한다. 많은 경우 인종차별, 동성애 혐오, 계급 차별, 장애인 차별, 트랜스젠더 혐오, 무슬림 혐오 등의 편견과 얽혀 있기도 하다. 특히 사회적 편견이라는 점에서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관습과 사회 제도로 성차별과 성폭력을 너무나 관대하게 바라본다는 것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또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우리 사회는 모두에게 평등하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는가?라는 묵직한 성찰을 제안한다. 이미 우리나라 한 여성 국회의원도 “시스템을 바꿀 이유와 힘은 이미 우리에게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연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이 책을 집어 들어야 하는 이유다.

 


 

전 세계적으로 거의 매일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하지만 대개 우리는 그 여자들의 이름조차 모른다. 언론에 머리기사라도 한 줄 실리는 경우는 극소수이고,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회는 이를 ‘극히 드문’, ‘물 흐리는 미꾸라지가 저지른’, ‘비극적인’ 일로 치부하고 사건들의 상호 연결성을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시스템 차원의 해결책을 논외로 만들어버린다. 그리하여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건의 원인과 예방과 해결책은 또다시 여자의 몫이 된다.

가부장제의 억압을 ‘개인의 선택’으로 치부하고 여자를 비난하는 일은 안전하고 쉽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여자들이라면 시스템을 바꿀 필요도, 누군가가 책임 질 필요도, 제도를 개혁하고 구조적 문제를 뿌리 뽑을 필요도 없다. 그 결과 여자들은 괴롭힘, 폭행, 강간, 살해에서 벗어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영국에서 세라 에버라드라는 여성이 실종된 후, 경찰은 집집마다 방문해서 절대 여성 혼자 외출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들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여자들이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자들의 집을 방문해서 범인을 밝혀낼 때까지 외출하지 말라고 경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통계적으로 범인은 남성일 확률이 압도적이다.)

이 책에는 여자들이 자신의 일상을 지키기 위한 긴 대처법 목록이 실려 있다.(p.106~108) ① 길을 걷다가 남자 무리가 있으면 반대편으로 가기 ② 혼자 살지 않는 척하려고 남자 목소리 녹음해두기 ③ 여자친구들과 헤어진 후에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문자 보내기 ④ 술집에서 손으로 술잔 위를 덮고 누가 내 술에 약을 타지 않는지 매의 눈으로 감시하기 ⑤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벽에 서 있기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나온다. 독자는 이런 일들이 21세기 선진국 수백만~수천만 명이 모여 사는 대도시에서 해야할 여자들의 일이라고 믿기 어렵다. 여자들은 자신의 무의식적인 습관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에게는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라는 점이, 여자들이 이렇게 불편하게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여러 권의 페미니즘 책을 쓴 로라 베이츠는 자신의 어렸을 적 경험과 사회적 관습이 얼마나 성차별이 보편화되었는지, 여성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규정지으려 하는지를 이 책에서 강조한다. 또 이 관습과 인식들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현실을 사례를 들어 지적한다.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책에 쓰인 것도 열거하는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다. 그러나 이런 사례들은 개인적인 '목록'이 되고, 이는 성차별 금지 인식과 성인식, 성감수성을 높이고 사회 시스템의 변화를 가져올 가장 좋은 요소가 된다는 것이 저자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밑바탕이 된다. 저자 베이츠는 페미니스트 활동가, 작가, 강연자. 방송에서 남자 패널과 피 튀기며 토론하고, 여성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 열심히 뛰었다고 한다. 자신도 역시 성차별을 겪은 순간은 있었다고 담담하게 털어놓기도 한다. 정확하게는 ‘있었다’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목록이 자신이 살아온 동안 내내 뒤따랐다고 주장한다.

그러다 비슷한 사건들을 연속적으로 경험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점과 점을 연결했다. 이로써 ’단편적 경험 사례들이 모여 목소리에 힘을 실을 만큼 강력한 자료가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비로소 이 사건들이 우연히 벌어진 독립사건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그간 일상에서 흔하게 겪었지만 무시하려 애썼던 목록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삶이 공포, 학대, 괴롭힘, 차별로 얼룩지는 것이 정당한 걸까? 그래서 여자들에게 목록에 대해 물어보았다. 대부분은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아무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평범한 일상이니까요.” 자포자기하거나 그냥 일상으로 인식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정확하고 또렷한 목소리를 낸다.

"우리가 제일 먼저 취해야 할 가장 작고 간단하고 시급한 저항의 행동은 목록을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앉아서 생각하고 써라. 스스로 느껴라. 행인들의 무관심 혹은 당신이 사랑하고 믿는 사람들의 일축으로 인해 잊고 잃어버리고 도둑맞은 순간들이 더욱더 많이 있음을 깨닫고 분노해라. 그 순간을 되찾아라. 각각의 경험이 더 큰 이야기의 일부임을 깨달아라."(p.28)

 


 

이처럼 주장하는 저자 역시 자신의 어렸을 때부터 마흔아홉 살까지 자신에게 가해진 이야깃거리가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정도라고 말한다. 자신의 이야기는 많은 여자들이 용감하게 공개한 것 같은 끔찍한 성폭력은 아니고 그저 평생 남자들에게 괴롭힘당한 이야기일 뿐이지만 이런 일들은 그렇게 인식하는 순간부터 묻히기 시작한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자신보다 "어린 여자들에게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고 싶다"고 말을 꺼낸다. 자신이 모든 것을 말없이 참아서, 대부분 신고하지 않아서, 나에게 일어난 일을 소리 내어 외치지 않아서 사회 시스템이 이 지경이 된 데 일조했다는 방관자로서 후회를 내비친다. 침묵을 지킨 탓에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주지 못했다고 자신을 성찰하고 앞으로는 참지 않고 철저하게 기록하며 매일 목록을 작성하겠다고 각오를 다진다. 변화된 내일을 위해서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다. 더 이상 그런 일이 일상이어서는 안 된다고, 침묵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이제는 알게 됐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야기들이 모일수록 다양한 억압의 형태 간에 겹치는 부분, 즉 ‘교차성’이 명백해진다. 여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사과하는 듯한, 의구심 가득한 말투를 사용했다. 여자들은 스스로를 믿지 않도록, 목록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도록 체계적으로 훈련받아 왔다. 이것이 바로 아주 오랫동안 가부장으로 대표되는 권력을 가진 이들이 사회 시스템을 통해 구축해놓은 억압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이 책은 장(章)의 구분 없이 10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목록을 순서대로 나열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서인가 싶다. 책의 소제목은 그 장의 성격을 나타내는 제목만으로도 구별이 되기에 굳이 장의 순서를 구분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10개의 핵심 단어와 문구로 구분되어 있다. 「목록」, 「시초」, 「가부장제? 무슨 가부장제?」, 「'독립 사건'」,「미꾸라지」, 「피해자를 심판대에 올리기」, 「정치와 특권」, 「대중매체의 여성혐오」, 「점과 점 연결하기」, 「여자가 아니라 시스템을 고쳐라」 등이다.

 


 

"우리가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시급한 저항의 행동은 우선 목록을 만드는 것이다. 차별은 없다고 말하는 누군가의 세계를 부수기 위해서, 연대하고 한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목록이 필요하다. 그러니 당신의 목록을 만들어라. 그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당신만의 이야기를 담은 목록을."

 

저자 : 로라 베이츠(Laura Bates)

 

영국의 페미니스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여자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성차별 사례를 들어보자는 취지로 2012년 ‘일상 속 성차별 프로젝트 Everyday Sexism Project’라는 웹사이트를 개설했다. 2015년 전 세계 각지에서 도착한 사연은 10만 건에 이르렀고, 현재 20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목소리를 냈다. 이 작업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케임브리지대학교를 졸업하고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하며 정기적으로 〈가디언〉, 〈텔레그래프〉 등에 글을 썼다. 일상 속 성차별 프로젝트를 통해 모은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첫 책 《일상 속의 성차별》을 비롯해 여러 권의 페미니즘 책을 썼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5년 영국 언론상을 수상했다. 〈코스모폴리탄〉, 〈레드〉, 〈선데이 타임스〉 ‘올해의 여성’으로 선정되었으며, BBC에서 다양한 분야의 여성 개혁가를 뽑는 ‘우먼스 아워 파워 리스트 2014’ 10인에 선정되었다. 젠더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엔과 긴밀히 협력하는 등 다방면으로 힘쓰고 있다.

 

역자 : 황가한

 

서울대학교에서 불어불문학과 언론정보학을 복수전공 한 후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근무했으며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에서 한영번역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현대적 사랑의 박물관』, 『보라색 히비스커스』(2019 올해의 청소년 교양 도서), 『아메리카나』, 『제로 K』, 『사랑 항목을 참조하라』(2018 세종도서 교양 부문), 『엄마는 페미니스트』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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