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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엔 연애를 쉬겠어 - 우리가 연애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
임윤선 지음 / 시공사 / 2023년 9월
평점 :
독자에게는 독특한 친구가 한 명 있다. 지방에서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고 늘 함께 어울렸던 '동네 친구', 그야말로 죽마고우다. 그 친구는 사법시험에 뜻을 두었지만 막상 대학을 졸업할 무렵 자신의 능력이 못 미친다며 대신 법원 공무원직을 선택했다. 몇 곳의 지방법원을 거쳐 대법원 총무처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근무할 당시는 같이 서울에 있어 자주 만났다. 술도 좋아하는 사이라 더 자주 만나곤 했다. 그런데 좀처럼 직장 이야기를 안 하던 그가 어느 날 사법연수원 이야기를 꺼냈다. 고등하교 후배인데 지금 사법연수원에서 연수중이라고 했다. 사실은 독자의 동생과 중매(소개팅)을 하기 위해 독자에게 은근히 떠본 것이다. 동생도 S대 출신이고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던 터이다. 그러나 결국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소개팅 후 서로 원하던 이상형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가 그날 연수원생 이야기 중 몇 가지를 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사법고시 합격자가 지금처럼 숫자가 많지 않아 1년에 300명씩 뽑던 시절이다. 연수원을 마치면 바로 판·검사와 변호사로 갈린다. 대부분 판·검사를 희망한다고 했다. 물론 변호사를 지원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 숫자가 많지 않을 뿐. 그러나 판·검사는 TO가 많지 않단다. 사전에 충원 계획때부터 미리 정해둔다고 한다. 연수원 성적이 판단이 기준이 된다고 그 친그는 말했다. 사법시험 성적도 포함된다는데 일괄적으로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아무튼 판·검사는 아무리 못해도 순위 80등 안에는 들어야 한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나머지는 어쩔 수 없이 변호사로 출발한다고 한다. 사실 사법시험은 옛날 조선시대로 비유하면 과거시험이다. 과거 중에서도 대과이다. 앞길이 그야말로 탄탄대로인 사람들이다.
300명의 연수원생들도 모두 하나같이 모범생들은 아니라고 한다. 어느 집단이나 그렇듯이 모범생이고 머리가 좋은 것은 이미 아는 사실이지만 생활하는 것을 보면 보통의 조직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말을 그 친구를 통해 들었다. 연애하는 사람, 술에 자주 취하는 사람, 방안에서 뭘 하는지 잘 나오지 않는 사람 등 다양한 모습이 거기에서도 나타난다고 했다. 심지어는 술 외상값을 받으러 왔단 사람도 있고, 여성이 찾아와 연수원생들이 당황해 몸을 숨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 여성은 중매장이들이 많았다고 들었다. 사실 웬만한 집안에서는 넘보지도 못할 남자들이니까. 아마 한참 유행하던 신부 지참금이 '열쇠 두 개' '열쇠 세 개' 하던 시절의 이야기니까. 이같은 '강남 뚜쟁이'(그때 그들을 비하하는 은어)들이 설치고 다닌 이유는 '소개비'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연수원생과 의사들이 '0순위'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직도 그때의 풍습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닌가 싶어서다. 이 책 『올해엔 연애를 쉬겠어』의 저자 임윤선은 변호사 출신 방송인이다. 한때 한두 달 정당에 몸담았지만 두 달을 못 넘기고 완전히 발을 뗐다고 한다. 저자도 사법연수원생을 거쳤으니 그곳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가 책에 중매장이의 존재를 내비쳤기 때문에 읽으면서 옛 생각이 나서 서평에 큰 관계가 없는 말인데 독자가 꺼낸 이야기다. 이 책은 '연애'와 '사랑', '결혼'을 주요 소재로 다뤘기 때문에 사법연수원 시절의 이야기가 들어간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물론 이 책에서 다룬 연애나 결혼 이야기는 중매장이를 통한 이야기는 아니다. 또 저자가 여성이기에 대상으로 점찍지 않았을 터, 그들과 만나지는 못했지만 이야기는 들었을 것으로 충분히 예상이 된다.
S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로 활동한다는 것은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로서 더 대단한 일 아닌가. 어디서나 주목 받을 위치다. 더욱이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할 정도로 풍부한 시사 상식과 말솜씨도 지니고 있다면 주목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외모에서 풍기는(독자도 방송을 본 적이 여러 번 있었기에) 분위기는 흔히 말하는 '현모양처' 스타일이어서 더욱 주목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변호사로서 활동하고 있고, 바쁘다는 방송 프로그램 진행도 했다니 시간이 있었을까? 어떻게 연애하고 그 경험을 책으로 쓸 수 있었을까? 하는 신기함과 호기심이 잔뜩 들어찬 기대를 갖게 한다. 이 책 전체의 내용이 저자 자신의 경험담은 아니다. 지인, 친구의 경험담도 다수 들어 있지만 독자 입장으로서는 어떻게 연애할 시간을 가졌느냐에 관심이 더 간다. 더욱이 이 책이 처음으로 낸 책이라 더욱 관심이 갔다. 출판사 측도 저자에 대해 "다수의 시사 · 교양·예능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대중적 인지도를 쌓은 방송인이자 16년 차 변호사" 로 소개했다. 그가 직접 경험했거나 주변에서 일어난 실제 연애담을 바탕으로 사랑과 연애, 결혼, 남녀 관계에 관한 날카로운 시각과 통찰을 담고 있는 에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살갑고 달콤한 연애 상황은 단 한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달달하게 시작하지만 쉽게 나락으로 떨어지고는 하는 연애의 극한 현실을 솔직하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최고의 모습을 연출하는 소개팅에서의 첫 만남 이후 서로의 채점에 의해 감점이 누적되다가 결국에는 ‘탈락’하는 과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애초 시장에 ‘매물’로 나와서는 안 되는 이들이 작정하고 위장한 채 ‘상품’으로 둔갑해서는 상대의 삶마저 망가뜨리는 연애 사기극의 유형과 험난한 연애를 거쳐 결혼에 이르고도 여전히 관계의 불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부부들의 현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책은 연애와 결혼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가? 그렇지는 않다. 일과 사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연애에서도 실패할 자유와 특권이 차츰 줄어드는 세대에게는 예방주사와 같은 책이다. 관계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지 말고 먼저 단단한 개인으로 홀로 서라는 깨달음을 전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연애와 관계에 상처 입은 이들에게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준다. 과감한 비약과 반전으로 페이지가 순식간에 넘어가는 재미는 덤이다.
책에 따르면 철저하게 미래를 설계하고 이성과 교제하는 영악한 사람이 아니라면, 20대의 연애는 좋아하는 감정만으로도 충분하다. 실패했을 때는? 사회화라는 포인트를 얻는다. 이런 상황은 30대 초반까지도 어느 정도 유효하다. 하지만 결혼 적령기에 임박했거나 한창때를 훌쩍 지나버린 이들은 이번이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 같은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매사에 똑부러지고 사회적 커리어도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 연애에서만큼은 큰 실수를 하곤 한다. 때로는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에 이어 좋은 배우자로 삶의 이력서를 완성하려는 지나친 계산이 오히려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결혼이라는 성과를 전제로 하는 이들에게 연애란 이래저래 만만한 일이 아니다.
방송인이자 변호사인 저자 임윤선에게도 연애는 경험이 쌓일수록 익숙해지는 일상의 사건이 아니라 갈수록 난도가 더해지는 장애물 경기였다고 털어놓는다. 그는 중년 이후에 겪었던 혹독한 연애의 기억과 주변에서 일어난 갖가지 상황을 되짚으며 연애와 결혼, 남녀 관계에 관한 날카로운 분석을 시도한다. 자신의 경험과 지인의 연애 진행과정을 겪으며 내린 저자의 결론은? "연애와 관계를 종용하는 압박과 결혼을 둘러싼 섣부른 조언에 휘둘리지 말아라"이다. 결혼은 안 해도 연애는 해야 한다는 통념에서 자유로울 것을 조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짓으로 자신을 부풀리고 없는 매력을 꾸며내는 가짜 사랑꾼을 조심하라는 특별 메시지를 던진다.
독자가 이 책을 보고 놀란 것은 저자의 연애 경험담 때문이 아니다. 저자와 친해지려 했다는 한 사람의 남녀 관계에 대해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저자가 변호사인 줄 알면서, 그의 성격도 알면서 '쓰리섬'을 은근히 내비친다는 것은 독자에게는 충격적이다. 저자는 무척 완화해 표현했지만 지능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물론 불쾌했을 것이다. 특히 소개팅도 아니고 성관계를 셋이서 하자고? 대학교수가? 이런 문제는 드라마에서도 다루기 어려운 문제다. 사회적 파장이 크고 분명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일 아닌가? 저자로서는 큰 실망과 좌절감마저 느낀다고 했다.
"그 반백인 50대 남성의 직업은 무려 대학 교수였다. K가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알게 됐다. 둘은 몰래 만나는 연인 관계였는데, 이 대학 교수라는 인간은 여성이 둘 있는 쓰리섬이 아니면 도무지 관계가 안 되는 사람이었다."(p.127)
또 저자와 한 남성('분당남')과의 만남은 그 남성의 이상한 성격만 확인하고 끝나고 만다. 그런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음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저자를 보면 매우 낙관적 성격으로 독자는 이해된다. 결혼을 앞두고도 단체 소개팅에 나타나서는 버젓이 미혼 행세를 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전처와 자식을 철저하게 숨긴 채 순정남 가면을 쓰고서 상대를 농락하다 급살(?)을 맞는 이도 있다. 백화점에서 물건을 고르듯 여러 대상(의 조건)을 비교하는 식으로 연애를 소비하는 이도 있으며, 상대에게 끊임없이 보호자와 신하 역할을 강요하는 미성숙한 사람도 있다. 헤어진 옛 연인을 지속적으로 소환해서 무용담을 늘어놓는가 하면, 결혼식을 치르고 법적 부부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평범한 독자 입장에서도 쉽게 겪지 못한 일을 왜 변호사이며 방송인인 저자는 겪었나 생각하면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더 씁쓸하다. 특히 고위층, 부유층이 이런 일에 관여한다는 것은 저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부패한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저자가 이처럼 연애의 흑역사만 골라서 소환한 이유가 뭘까? 아마 치정극의 각본처럼 혹독한 상황이 모두 현실이니 반면교사 삼으라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위안과 위로다. 우리 대부분은 작정하고 속이려 들거나 자기애가 지독해서 타인을 진정 사랑할 줄 모르는 이의 실체를 간파할 심미안을 갖고 있지 않다. 더구나 어떤 상황에 처한 당사자가 나 자신일 때 직관은 좀처럼 작동하지 않는다. 왜 그런 사람을 만났냐고 스스로 자책하고 주변 사람으로부터 타박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행위는 잘못이 아니다. 그러한 일이 나에게만 일어난 것도 아니다. 그러니 훌훌 털어버려도 된다는 귀띔이다.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장점은 저자의 솔직함이다. ‘어디서 들은 얘긴데…’라는 식으로 남 얘기를 하듯 뭉뚱그리지 않는다. 직접 겪고 치른 연애담을 솔직 담백하게 보여준다. 대중에게 얼굴이 알려진 공인이 이처럼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기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말이다. 그 덕분에 저자의 글 솜씨도 있겠지만, 독자들에게는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다가온다. 또 무엇보다도 재미있다. 연애담은 누구나 귀가 솔깃해지는 소재다. 여기에 저자의 예사롭지 않은 글 솜씨와 뛰어난 말 솜씨가 잘 어우러진 듯하다.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곁들여 잔뜩 수다를 뜬 것처럼 가뿐하다. 『올해엔 연애를 쉬겠어』는 유쾌하지만 한 편으론 슬프기도 한 연애담을 한 권으로 정리한 책이다.
저자 : 임윤선
남한강의 작은 물줄기를 끼고 있는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좋아했으며, 삶과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즐겼다. 삶과 사랑의 여러 가지 모습을 경험하기 위해 대학에서 연극부 활동을 했고, 시사·예능·교양 TV 프로그램을 진행하거나 패널로 참여하는 등 방송인으로 활동했다. 한때 정당의 대변인 역할을 했으나, 권력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정치와 연을 끊었다.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를 졸업했고, 47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6년 차 변호사로 살면서 남의 삶을 이야기하지만, 내 삶을 이야기하는 것도 포기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부터 봐주는 이 없어도 쓰던 그 글을 이제야 공연히 쓰게 되었다. 종국에는 '문화인'으로 불리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이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