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 수명 시네마
노유정 지음 / 팩토리나인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 『기대 수명 시네마』의 표제어는 장르소설 작가답게 새롭게 만든 저자 노유정의 신조어다. 고유명사인 듯하지만 직업 종류의 하나인 보통 명사로 쓰인다. 영화의 종류를 가르키는 말로서 쓰이기도 한다. 업종의 탄생과 임종을 관리하고 기록하는 영화이고, 직업이다. 작중 주인공 송세린은 11년 차 무명 배우다. 학연, 지연도 없고, 배우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극단에 들어갔지만, 11년째 극단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맡아 무대에 서본 경험이 없다. 타고난 재능은 자타가 인정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항상 캐스팅에서 주요 배역을 낙점받지 못한다. 11년째 극단 밑바닥 생활로 송세린은 연기가 아닌 연출이 되어 있다고 말할 정도다.

'기대 수명 시네마'에서는 기대 수명이 궁금한 이에게는 기대 수명을 알려주고, 직업이 궁금한 사람들에게는 'JOB 콘서트'를 통하여 직업의 세계를 보여준다. 시네마를 관할하는 점장에게는 고민거리 한 가지가 있다. 기대 수명을 채우지 못하고 행방불명된 직업인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올해도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일명 ‘재연 배우’를 구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송세린을 만나게 된다. ‘무명의 배우 지망생이 기대 수명 시네마의 입구를 통과했다고? 초대받은 사람들만 입장할 수 있는 곳인 이곳에?’ 말은 냉정했지만, 테스트를 해보고 싶어졌다. 적임자가 나타난 걸까? 하는 기대감도 갖는다. 직업 수명 ‘0’년의 배우 지망생 송세린은 ‘기대 수명 시네마’에서 자신의 ‘진짜’ 직업을 찾을 수 있을까?

 

 

11년 차 배우 지망생 송세린은 사실 딱히 배우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주위에서 연기에 재능이 있다는 말을 듣고 연극영화과에 입학하며 배우의 꿈을 꾸게 된 것이다. 하지만 졸업 후에도 여전히 진로에 대한 확신 없이 극단에 들어간다. 결국, 자신에게 내정되었던 역할을 친한 후배에게 빼앗기게 되고, 홧김에 극단을 박차고 나온 세린은 우연히 '기대 수명 시네마'를 발견한다. 환영인 듯 축축하고 안개 같은 분위기다. 오랜 대학로 생활을 하면서도 처음 본 극장이고 분위기다. 세린은 혼자 "나······ 혹시 죽었나?'라고 되뇌인다.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고 어디까지가 이승이었고 어디서부터가 사후인지 잘 모르겠지만, 오히려 다행이란 심정이다. 지금 이 순간이 이생이라면 마이너스통장에 신용도 제로인 본인에게 기물를 파손한 상해죄를 크게 물었을 테니 말이다. 세린은 시네마의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는다. 이곳에 들어가 송마호를 만난다. 송마호는 이곳의 관리인이다. 송마호를 통해 점장을 만나게 된다. 간단한 질문과 답변이 이루어지고 점장은 세린에게 카드 한 장을 꺼내 책상 위로 뒤집어 올린다. "한 번 확인해 봐."

세린은 황급히 바지에 손을 문질러 땀을 닦아낸다. 건조해진 손은 책상 밑에서 올라와 카드를 집어 들었다. 방금 발급된 것인지 미적지근한 열기가 남아 있다. 세린은 카드를 뒤집었다. '배우 송세린: 기대 수명 0년'

"이게 뭐예요?"

세린의 질문에 적막이 흘렀다. 점장 대신 테이블 옆에 서 있던 마호가 입을 열었다.

"음······, 그러니까 직업의 기대 수명이에요. 세린 님의 직업 기대 수명이요."(p.36)

 


 

세린이 받아든 카드에는 일말의 기대와는 달리 배우로서의 직업 기대 수명이 ‘0’년이다. 세린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자조감에 젖어든다. 세린은 항의하듯 점장에게 따져 묻는다. "저기요! 하······ 왜 저는 배우로서의 기대 수명이 0년이죠?" 욱하는 열기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뿜어졌다.

"뻔한 걸 왜 물어봐? 재능이 없는데 무턱대고 맞지 않는 옷을 꾸역꾸역 입으려고 애만 쓰고 있으니까. 물론, 이유는 개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무튼 넌 네가 생각한 배우는 될 수 없을 거야. 자, 그럼 이제 어느 정도 궁금증도 해결된 것 같고, 그만 가봐, 늦었네."

무례한 점장의 말로 인해 자존심이 상한 세린은 오히려 오기가 불타오른다. 시네마 직원 손에 들린 ‘재연 배우 모집 공고’ 포스터를 보고 실력을 증명하겠다는 포부를 내던진다. 자신의 실력을 증명한 세린은 6개월 계약직 재연 배우로 시네마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다. 서서히 기대 수명 시네마와 산하단체 직원들과 함께 교류하며 합을 맞춰나가는 법을 익히게 된다.

이곳 기대 수명 시네마는 직업 데이터 센터와 영화 제작사도 갖고 있다. 시네마에서 총체적으로 직업을 관리한다면, 직업 데이터 센터는 매년 직업의 트렌드와 직업 기대 수명 측정에 유용한 자료수집에 관련된 업무가 진행되는 곳이다. 영화 제작사는 기대 수명 시네마가 가진 직업 DNA 정보를 검수하고 편집하여 영화화시키는 작업을 주로 하는 곳이다.

시네마에서 세린의 주 업무는 자신의 직업 기대 수명을 모두 채우지 못하고 사라진 사람들을 대신해서 기대 수명이 사라진 이유를 찾아 직업의 서사를 만들도록 도와주는 역할이다. 이른바 실제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하는 '재연 배우' 역할이다. 다양한 직업인들이 기대 수명 시네마를 통해 힘을 얻고 새로운 다짐을 다지는 것을 보고 세린은 시네마 재연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보람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갖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실종 사건이 벌어진다.

 


 

저자 노유종은 이 책의 두 번째 사건을 한 학교에서 벌어진 학생 실종 사건을 다룬다. 책의 두 번째 장(章)의 제목은 「사라진 학생」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유진은 특성화 학교 교사다. 유진은 입시 수험생 시절부터 교사가 꿈이었고, 피나게 노력해 원하던 교사가 되어 12년째이다. 학생 한 명이 갑자기 사라진다. *이름: 이소민, *반: 그래픽디자인 반 *진로 및 특기: 없음 -1학년: 애니메이션 디자이너란 파일 속 내용의 학생이다. 2학년인 현재 *진로 및 특기란은 비어 있다. 그러다가 한 학기, 아니 몇 달 새 180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유진은 소민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교과목 세부 특기란을 찬찬히 살피던 중 1학년 2학기 그래픽 애니메이션 과목에 대한 평가가 눈에 띄었다.

"스토리텔링과 일러스트 그래픽 구현에 우수한 감각이 있음. 자율 애니메이션 기회 및 제작 실습 시간에 애니메이션 〈블루문 베타〉를 제작함. 소외되어 마땅한 비주류의 존재와 사라져가는 전통 사이의 교집합을 찾아 감동적인 스토리로 끌어냄. 특히 수중도시 그래픽과 질감 구현이 수준급임."

유진은 '소외되어 마땅한', '비주류', '사라져가는'에 샛노란 형광펜을 치며 생각에 잠겼다.(p.55)

2장의 이 부분은 하나의 에피소드로 전체 책의 일부 기능을 한다. 역시 가상 공간이다. 상상력 속의 세상에서의 일이다. 마치 현실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상상력으로 재연되고 있는 점을 저자는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의 구성상 특징이고, 다양한 얘기를 에피소드 형식으로 끼워넣음으로써 전체의 줄거리에 기여를 하는 스타일의 구성 능력을 저자는 보여주고 있다.

 


 

세린이 눈을 떴을 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주먹을 꽉 쥔 손을을 펴자 카드엔 햇빛을 닮은 황금색이 담겨 있었다. 색의 이름은 'Daylight'.

"세린 님!"

상영관을 나오자 누군가 경쾌한 목소리로 세린을 불렀다. 마호였다.

"소민 학생이 가장 간절하게 기다려 온 말을 세린 님이 건네주신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어떻게 하신 거예요?"

마호의 칭찬에 세린의 기분은 훨씬 가벼워졌다. 두 사람은 대화 중 앞서 가던 점장이 말한다.

"너는 본체의 인생에 잠깐 스며드는 역할이니까. 그리고 이소민의 앞날은 교사 한유진과 학생 이소민의 몫이지. 분명한 건 네 덕분에 이소민 학생의 미래가 달라졌을 수도 있고."

세린은 점장의 시선을 따라 함 쪽을 바라봤다. 명패는 '인문계 영어 교사 한유진'에서 '교사 한유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교사 한유진이요?"

"자기 업의 본질을 깨달은 거야. 희미해서 지나칠 수도 있는 빛을 감지하는 눈을 갖기 시작하면서."

손에 쥐고 있던 교사 한유진의 카드를 확인하자 기대 수명도 바뀌어 있었다. '기대 수명 38년'

 


 

독자는 저자의 구성 솜씨에 감탄한다. 어릴 때 타임머신을 타고 시공을 초월해 과거와 미래를 오가면서 착한 일을 하는 만화를 많이 보던 생각이 난다. 그때 독자의 꿈이었지만 지금은 생각지도 못한 어릴 때 만화를 보고 잠시 했던 공상에 불과했지만 어쩌면 실현 가능한 일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실감 나게 이야기를 구성한 이 책의 매력을 듬뿍 맛볼 수 있다. 좋은 일은 상대를 직접 마주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른 배역으로서 당시 현실에 맞게 대역을 해서 좋은 방향으로 이끈다는 점이다.

이 책은 10여 편의 에피소드가 각각 독립적이면서 하나의 스토리로 귀결되는 연작 소설 형식을 띠고 있다. 자칫 주제에 어긋나거나 팔방미인의 히로어(영웅)가 세상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통제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위험을 당초에 막는 구성 방법이라고 생각하니 이 소설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또 가상 공간인데도 현실처럼 생생하게 재연해내는 일을 오래된 재연 배우가 맡아 가능하게 했다는 저자의 구상에도 감탄한다.

이 책은 무명의 배우 지망생과 각자의 이유로 갈등과 위기를 겪는 직업인들이 자신의 업의 의미와 정체성을 찾아 나가는 이야기이다. ‘번아웃이 찾아온 최고 벤처기업의 CEO’ ‘앞만 보고 달려가던 고등학생’ ‘꿈에 그리던 순간을 맞이한 파티쉐’ ‘엄마’ 등 다양한 직업인들의 에피소드와 함께, 점장이 숨기고 싶어 하는 시네마의 비밀을 함께 밝혀가는 것도, 이 책을 읽는 흥미거라일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저자 : 노유정

 

‘이로운 언어를 널리’라는 소명으로 활자를 대한다. 단어 하나가 바꾸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반해 광고홍보학과에 진학했고, 그곳에서 포용의 언어를 배웠다. 다중전공인 영상학부에서 언어의 시각화를 익혔고, 졸업 후 IT분야에서 일하며 수치화된 언어의 효용을 깨달았다. 여전히 낯선 언어를 배우는 일이 즐겁다. 혼자만 곱씹기 아쉬웠던 온화한 문장들을 나누고 싶어 글을 썼고, 《기대 수명 시네마》를 펴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