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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미학 - 미적 안목을 기르고 싶은 현대인을 위한 최소한의 디자인 미학 지식
최경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3년 9월
평점 :
이 책 『디자인 미학』의 표제어에는 '미학(美學)'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다. 미학이란 낱말은 우리말 어감으로도 좋고 한자어로 된 의미 또한 아름다운 낱말이다. 그러나 미학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과는 다르게 철학에서 다루는 한 분야이다. 독자도 낱말에 이끌려 『미학이론』이란 책을 읽으려고 시도했다가 10분의 1도 못 읽고 손에서 책을 놓아야 했다. 너무 어려워서다. 이 때 독자가 구입한 책은 아도르노(Adorno, Theodor Wiesengrund)의 책이었다. 아도르노는 이미 1963년에 타계한 독일의 철학자였다. 독자가 철학이란 분야를 전혀 모르고 관심도 크게 두지 않다가 '미학'책을 '예술' 에 관한 책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아도르노는 독일 출신으로 철학, 사회학, 미학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연구 활동을 했던 사상가였다. 그의 사상과 논저는 그가 활동할 때 이미 대단한 영향력을 있을 정도로 진보적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됐다.
『철학사전』에 따르면 1931년 모교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사강사(私講師)로 일하면서 나치에 의해 추방되어 34년에 망명한 후 38년부터 미국에서 파시즘 연구를 진행했다. 미국에서도 『권위주의적 성격』(1947)과 호르크하이머와의 공저 『계몽의 변증법』(1947)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었다고 한다. 나치 독일이 패망한 후 1949년에 귀국해서 모교 교수가 되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자로 활약하며, 비판 이론, '부정적 변증법'을 전개하고, 사회, 문화, 과학 연구의 인간 소외 및 물상화 등을 예리하게 비판한 유명 철학자였다. 독자가 철학과 미학 모두 완전 문외한이었기에 '뭣 모르고' 미학이론 책을 읽으려 시도했던 기억이 이 책을 표제어를 보니 또렷하게 떠올라서 여기에 적어본 말이다. 이 책의 표제어에 '미학'이란 낱말을 사용한 만큼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이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한 마음에서다.
이 책은 미학에 관한 책이 아니고 '디자인'에 관한 책이다. 저자 최경원은 「디자인 미학의 시대를 환영하며」란 제목의 〈머리말〉 첫 문장에 "디자인 미학이라는 말은 참 낭만적"이라고 적고 있다. 디자인이란 단어에 이미 아름다움이 담겨 있는데 거기에 미학이라는 말까지 더해졌으니 아름다움다움으로 충만해서 낭만적으로 들린다는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의 발간에 역할을 한 것이 '디자인'과 '미학'이라는 단어가 조합해서 '낭만적'을 상상하게 하는 것 때문이라고 밝힌다. 이 두 낱말의 조합이 '낯선' 이유는 오랫동안 디자인에서는 아름다움보다는 쓰임새를 앞세웠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그동안 미학은 디자인과는 거리가 먼 인문학 영역이었다. 그래서 디자인 미학이라는 말은 디자인을 수사학적으로 묘사하거나 문학적으로 표현할 때나 썼지 디자인의 중요한 이론으로 진지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디자인 뒤에 미학이라는 말이 자주 따라다니고, 어색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일상에서도 많이 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디자인을 받아들이는 대중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18세기에 알렉산더 고틀리프바 움가르텐이나 이마누엘 칸드를 중심으로 서양의 근대 미학이 나타나는 데 대중이 중심이 되는 근대사회의 출현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처럼, 디자인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존재감이 급부상하면서 디자인에서 미학이 중요해졌다. 물론 그 뒤에는 사회적, 경제적인 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저자의 말대로 18~19세기 산업혁명과 식민지로부터 막대한 부를 쌓은 유럽의 풍요로운 사회에서 대중은 이전처럼 기업이나 디자이너가 만들어주는 대로 쓰려고 하지 않았다는 중요한 동기가 나타난다. 부유해진 대중은 단순히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을 찾는 것처럼, 경제적 여유가 생긴 대중은 자신의 미적 안목을 길러주고 지적 만족감을 충족시켜줄 디자인을 원하기 시작했다. 디자인에서 기능성을 넘어서는 격조 높은 즐거움을 얻으려 한 것이다. 이에 따라 디자인의 패러다임은 근본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저자의 논리다. 이 변화를 모두 끌어안은 것이 바로 디자인 미학이라는 주장은 차근차근 논리적 단계를 밟아간다. 디자인 미학을 통해 기능주의에 의존하던 기존의 단순한 디자인 논리는 좀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바뀌어갔다. 그리고 생산을 중심으로 한 오래된 디자인관(觀)도 수용자(대중)를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 점점 바뀌어갔다. 이 논리로 저자는 디자인을 창조하는 디자이너와 디자인을 감상하는 수용자 모두에게 디자인에 대한 깊은 통찰과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3장(章)으로 나뉘어 있다. 1장 〈디자인에서의 미학, 미학에서의 디자인〉, 2장 〈미학의 체계 속에서 디자인〉, 3장 〈디자인의 미학적 구조〉 등이다. 저자는 세 개의 장에서 각각 주제에 맞는 내용의 세부 항목으로 나뉘어 설명과 논리적 단계를 높여간다. 각 세부 항목에서의 설명에는 실제 디자인 조형물 등 사용예를 들어가며 설득력을 높인다. 첫 장 세부 항목 「어색한 디자인 미학」에서, 앞서 언급한 단어 조합의 '낯선' 이유를 설명한다. '디자인'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대단히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이는 대중이 디자인 상품으로부터 현실적이면서도 아름답고 감각적이고 신선한 느낌을 갖기 때문이란 풀이다. 또 '미학'에 대해서는 어려워하면서도 지극한 인문학적 품격과 예술성에 대한 신비로움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한다. 어떤 단어든 미학이란 단어를 뒤에 붙여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경우가 없는데, 정작 디자인에서는 좀 다르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디자인 종사자에게는 이 말은 상당히 낯설게 느껴진다는 것. 미학은 '아름다움의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아름다움을 전문적으로 추구하는 분야가 예술이다. 그래서 미학은 주로 예술 영역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그런데 디자인을 하는 많은 사람이 디자인은 예술과 거리가 먼 공업적 생산 활동이나 상품을 만드는 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이질적 느낌을 갖는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로 인해 디자인 종사자들이 예술이나 붙는 미학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부조리하다고 느낀다고 강조한다.
이 경우 왜 디자인 종사자들은 디자인이 예술 분야와 다르다고 생각할까? 하는 의문이 독자는 생긴다. 디자인 사학자 페니 스파크는 "금세기 들어 서유럽 사회에서 디자인을 창조하고 계속 지배해온 산업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디자인은 대량생산 및 대량소비와 이중의 관계를 맺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는 말을 했다고 저자는 전한다. 디자인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산업적 체제 안의 국한된 활동이라고 못박았다는 의미다. 디자인 이론가 스티븐 베일리도 "디자인은 미술과 산업이 만날 때, 사람들이 대량생산된 제품이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할 때 발생한다."고 했다. 베일리 역시 스파크와 같은 견해다. 이들의 디자인관은 예술과 어떠한 연관성도 찾을 수 없다. 산업 생산 내의 활동이나 그 결과물로 정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에도 주위를 살펴보면 많은 디자인을 보면 그 말들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는 생필품, 전자제품 등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고 있는 공업적 생산품이 실용성을 충족시키는 물건 또는 이미지로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디자인에 관련된 일을 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 두 사람의 공감하고 이들의 이론을 배웠다. 만일 그 이론에 반대하는 학생이 있다면 선후배들로부터 어처구니없다는 눈총을 받기 일쑤라고 교육 현장도 지적한다. 예술이 무슨 범죄도 아니고, 아트사커 같은 말을 보면 스포츠도 예술이 되는 세상인다, 어떤 분야든 예술이 되어서 나쁠 것은 없는데도 묘하게도 디자인만은 예술이라는 뒷 말이 붙기를 꺼려한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런 이유를 저자는 명쾌하게 설명한다. "디자인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예술을, 정확히 말하면 순수미술을 작가의 내면적 주관을 표현하는 고립적이고 이기적인 분야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주변 세상에는 관심이 전혀 없고 순전히 자신의 주관적인 예술 세계를 표현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매우 이기적이고 고립된 활동을 순수미술이라고 보는 것이다."(p.20)
기존의 디자이너들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으로 독자에게는 읽힌다. 저자의 주장은 디자인 미학은 단순히 작품의 아름다움을 논하거나 작품의 외적인 부분을 평가하는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미학은 본래의 뜻처럼 ‘감성적 인식의 학(學)’을 가리킨다. 즉 미학은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곳 어디에나 존재하며, 우리의 일상을 둘러싼 모든 것이 미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디자인 미학은 극히 자연스러운 논점이고, 극복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저자는 강조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과 "예술과 완전히 다른 디자인"이 어우러져 서로를 보완해 대중들에게 어필되도록 해나가는 것이 예술을 하는 사람이나 디자인과 관련된 일에 종사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공통된 과제하는 인식이다.
2장 〈미학의 체계 속에서 디자인〉에서는 진정한 예술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조명한다. 저자는 설명을 위해 과학, 예술, 문화, 역사를 모두 동원해 하나씩 사례와 시대이 변천에 따른 예술이나 학문의 변화까지 연관시켜 재조명한다. 이는 단순한 디자인으로서의 디자인에 관한 연구가 아니라 모든 학문과 예술 등 세상의 모든 것들과의 연결고리의 하나로서의 디자인의 영역과 역할을 찾으로는 시도로 독자는 이해한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의 등장으로 고전물리학이 설 자리를 잃었듯이, 예술 역시 시대에 따라 개념이 재정립되었다. 대중이 문화적 주체가 될 수 없었던 전근대시대에 문화나 예술은 소수 귀족들만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시민혁명으로 시민사회가 성립됨에 따라 예술가들은 귀족들이 향유하던 예술을 시민사회의 영역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경제적 여유가 생긴 대중이 예술을 적극적으로 향유하고 소비하면서 예술가는 작품을 창조하는 존재이고, 대중은 그저 그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작품에 내재된 창작자의 의도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존재라는 이분법적 구분 방식을 탈피하기 시작했다.
즉 일방적인 관계였던 창작자와 대중(수용자)이 쌍방적인 관계로 바뀐 것이다. 그 결과 예술가는 작품을 창작할 때 대중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게 되었고, 수용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제품들 가운데서 좋은 작품을 고르고 작품의 본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미적감각을 기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더군다나 시간이 지날수록 예술의 범주도 점차 확대됨에 따라 전통적인 미학관으로는 예술을 더 이상 정확하게 규정할 수 없게 되면서 새로운 미학관이 필요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책 새로운 미학관을 정립하는 데 이정표가 되어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예술미에서 주관주의 미는 아름다움이 대상의 특징이 아니라 경험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라 보고, 미적대상을 파악하나느 주체의 태도나 작용 측면에서 미를 연구한다. 지오반노니의 조명디자인을 객관주의 미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름다움의 법칙 같은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디자이너가 장난으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 완벽한 아름다움의 법칙으로 만들어진 예술이라도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즐거움을 얻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다."(p.134~135)
3장 〈디자인의 미학적 구조〉에는 예술가 개인적 경험의 산물이 아니라 누구나 공감할 수 있으며, 정신 속에서 현실화될 수 있는 보편적 원형인 ‘이마고imago’를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지에 대해 시공간을 가로지른 여러 예술가의 고뇌가 담겨 있다. 저자는 알레산드로 멘디니, 자하 하디드, 이세이 미야케, 마르셀 반더스, 하이메 아욘, 잉고 마우러, 필립 스탁 등의 산업디자이너들을 통해 개인의 창작욕과 시대의 요구를 어떻게 융합해 작품으로 탄생시키는지에 대한 과정을 쉽고 밀도 있게 그려낸다.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데, 창작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생활양식에 부합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자신들이 지향해야 할 바와 이를 실현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소양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저자는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전쟁의 상흔으로부터 빨리 치유되고 회복되기를 원해 예술이라 부르는 모든 영역이 목적과 기능에 충실해야 한다는 기능주의의 길을 걸었다고 전제한다. 디자인 역시 예술이 아니라 산업으로 취급된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문제는 새로운 밀레니엄에 들어와서도 그러한 인식은 여전한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며 디자인을 산업이나 기술의 소산으로만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시대를 불문하고 디자인이 디자인으로서 존재하려면 ‘형태’와 ‘색’이라는 형식미를 갖추어야 하지만, 디자인의 외적인 것이 아니라 디자인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이에 따라 저자는 단순히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며 기능성과 형식미를 탐미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시대정신과 역사적·전통적 가치관 등에 집중할 것을 요청한다. 실제로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유럽과 미국, 일본의 디자이너들은 자국의 전통을 바탕으로 한 현대예술 작품이 다른 작품들과의 차별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이를 작품에 적극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다. 실례로 이탈리아 패션 명가 돌체앤가바나는 비잔틴제국의 문화적 유산을 패션에 적용했고, 일본의 건축가 단게 겐조는 요요기 국립경기장을 건축할 때 일본의 전통 건축양식을 뼈대로 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예술가와 대중이 갖추어야 할 인문학적 소양이다. 먼저 예술가라면 뛰어난 심미안과 예술적 감각도 중요하지만 시대의 분위기를 읽어내 기민하게 반응해야 한다. 왜냐하면 앞선 세기와 달리 오늘날에는 디자인을 소비하고 선택하는 주체가 정부나 기업이 아니라 대중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경영학적, 마케팅적 논리로 설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게다가 대중을 아우르려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를 담고 있으면서도 다른 창작자와 구별할 수 있는 고유한 개성과 감각이 담긴 디자인을 선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네덜란드의 산업디자이너 테요 레미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는 것은 일상에서 누구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이불보와 담요를 오브제로 써서 ‘레그 체어’라는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한 것은 물론 한 가족의 역사성을 디자인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펜스와 같이 대중에게 친숙한 사물들을 분해하고 재해석하면서 미학을 넘어선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디자인을 담고 있다. 이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디자인의 앞날을 비추고 있다고 역설한다.
역사적 산물로서의 디자인을 살펴보면 단지 하나의 기능적인 대상, 프로젝트 산물에 그치지 않고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가면서 문화적 이정표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이러한 디자인은 지금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걸작으로서 굳건하게 자리 잡으면서 역사적 성과를 입증하고 있다. 그래서 디자인을 단순히 디자이너가 창조한 개인적 작품이나 수용자 개인의 심미적 쾌감을 자아내는 오브제 정도로만 볼 수 없으며, 좀더 거시적이고 문화적인 시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p.254~255) - 「3장 「디자인의 미학적 구조」
저자 : 최경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국민대학교 등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디자인학부 겸임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등에서 한국 문화 관련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2010년에 현디자인연구소를 설립하고, 한국 문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디자인 브랜드 ‘훗컬렉션’을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쓴 책으로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의 비밀 우리 미술 이야기』(전3권) 『끌리는 디자인의 비밀』『Great Designer 10』『디자인 인문학』 『알레산드로 멘디니』『좋아 보이는 것들의 비밀 Good Design』『디자인 읽는 CEO』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