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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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지능이 발달한 존재로서 타 종에 대해 압도적 힘을 신체가 아닌 도구나 무기로서 개발해 수렵 및 전쟁에 사용함으로써 집단적 다툼의 우위에 섰다. 지금의 현대 무기는 생명에 치명적이어서 노출되는 순간 거의 죽음을 맞이하지만 총기 이전의 무기는 상해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전투 능력만 상실케 하는 정도로 공격을 가해도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무기로서 충분히 효용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전쟁의 승리 여부와 상관 없이 막상 상해를 입은 자는 생명을 건진다 할지라도 엄청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고통이 심하면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정도이니 그 고통은 직접 전투 중 부상의 후유증은 엄청나다고 할 것이다. 상처가 치료된다 하더라도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하는 등 진통제가 서둘러 개발된 것도 전쟁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전투 중 부상을 당한 병사에게 투여되는 약품이 바로 진통제다. 우리가 잘 아는 '모르핀'이라고 불리워지는 약품이다. 그러나 이 약품은 독성이 강한 데다 중독성마저 강해 반드시 의사의 처방에 따라 일정량 이하만 투여해야 한다. 약효가 떨어질 때쯤 또다시 찾아오는 고통은 다시 모르핀을 투여해야 하는데 잦은 모르핀 사용은 나중에는 효과가 점점 약화되다 다른 통증이나 수술이 필요해도 투여가 불가능해진다. 중독성이 강하다는 이야기다. 이 모르핀은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진통제도 모두 같은 약리 현상을 보인다고 하니 지나친 진통제 투여는 예나 지금이나 규제 하에 투입이 가능하다.

 

고통은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거나 다른 방식의 시술 혹은 치료를 통해 해결해야 하며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고통은 견디는 것이 아니었다. 견딜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고통을 견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정신병의 징후로 의심되었다.(p.29)

 


 

이 책 『고통에 관하여』는 의학적 논저의 제목 같지만 소설 작품이다. 작가 정보라가 중독성이 없고 부작용이 없는 완벽한 진통제의 개발을 설정해 썼다. 과학의 발달로 완벽한 진통제를 개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SF 소설 성격이 강하다. 약품의 이름은 〈NSTRA-14〉이며 보편적 진통제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고통이 사라지자, 또다른 부작용이라 할 수 있는 '고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신흥 종교 '교단'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준다고 주장하며, 제약회사에 대한 테러를 감행한다.

이 소설은 저자가 주로 머물던 호러와 환상의 세계에서 한 발짝 걸어 나와 처음 집필한 ‘스릴러’라는 점에서 저자의 새로운 가능성을 마주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미치고 거친, 세계의 기괴한 일면을 극적으로 드러내며 읽는 이에게 뒤틀린 이야기의 쾌감을 전했던 전작 『저주토끼』와는 달리, 아 작품의 분위기는 처연하고 서늘하다. 또 묘한 온기도 있다. 아마도 이런 간극은 이 소설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맞닿아 있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어딘가 잘못된 세상, 그곳을 만든 사람들에게 끔찍하고 아름다운 복수를 선사하던 정보라의 소설은 이제, 거칠고 미친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자’고 이야기한다. 출판사 소개글에는 이 소설의 특징을 "고통스러운 과거를 복기하며 자신을 파괴하는 일을 멈추고,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세계로 나아가자고. 세상과 싸우며 전복을 꿈꾼 사람의 결기가 녹아 있"는 이 소설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고 말한다. 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에 오르며 전 세계에 K-장르의 매력을 알린 지 4년만에 내놓은 저자의 신작 장편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저자의 '고통'에 대한 사유의 일단이 드러난다. 특히 사이비 종교와 불법 다단계 사업체 등으로 대표되는 착취적인 조직이 주로 사용하는 흔한 방식의 고통에 대한 설명이 인용되고 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 그 삶이 고통이더라도, 거기에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다면 사람은 어떻게든 견뎌낸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이 오래 지속되면 고통을 견뎌내는 것 자체가 삶의 의미가 된다. 삶의 의미를 고통에서 벗어나거나 더 건강하고 자학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찾을 능력과 자원은 이미 고통을 견디는 데 소모되어 사라진다."(p.31) 이 책의 사건의 중심에 있는 교단 또한 세력을 확장하고 신도를 붙잡아 두기 위해 같은 방식에 의존했다. 신도들은 고립되어 고통받았고, 그 고통을 견디는 과정에서 고립되었으며, 그 고통의 끝에 그들의 삶에는 교단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은 모두 한자로 한 자씩으로 지칭된다. 우리가 쓰는 상용한자의 범주를 벗어나 있는 한자어가 많아 정확한 뜻과 저자가 이들의 이름을 붙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의미하는 바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소설은 모두 6부로 나뉘어져 있다. 고통에 관한 기능이나 몸의 작용과 관련이 있는 기관들의 이름이 모두 등장한다.

1부 기억 : 해마체

2부 온도 : 체성감각 영역

3부 정서 : 변연계

4부 논리와 판단 : 전두엽

5부 깨달음 : 시상하부

6부 삶 : 온몸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테러 사건 후, 잠잠해진 교단에 끔찍한 살인 사건이 또 일어난다. 온몸이 고문 흔적으로 가득하고, 체내에서 다량의 약물이 검출된 사건의 피해자는 모두 교단의 지도자들이다. 형사들은 진범을 밝히기 위해 무기징역으로 수감되어 있던 테러 사건의 범인 ‘태’를 세상으로 불러들인다. ‘태’의 기억은 교단에서 시작된다. ‘태’는 형인 ‘한’과 교단의 시설에서 자랐다. 고통을 섬기며, 고통의 무게를 모든 사람들에게 지우려 했던 ‘태’의 신념은 무고한 피해자를 낳았을 뿐이다. 제약회사를 경영한 ‘경’의 부모도 이때 목숨을 잃었다. ‘태’의 도움으로 형사들은 교단에서 떨어져 나와 은거 중인 ‘한’을 붙잡지만, 어떤 진실도 밝히지 못한 채로 풀어준다. 호수 근처, 제약회사가 철수하며 사람이 모두 떠나 폐촌이 된 황무지를 조사하던 형사들은 그곳에서 불법 약물 제조 시설과, 유치장에서 풀려난 뒤 숨어 있던 ‘한’을 발견한다. ‘한’은 자신이 살인범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태’도 형은 범인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지만 무수한 증거가 ‘한’을 범인이라고 가리킨다. 한은 다시 유치장에 갇힌다.

토네이도가 들이닥친다며 기후 경보가 울리던 때, 또다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유치장에 갇혀 있던 ‘한’이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CCTV는 고작 3분 동안 작동을 멈췄고, 그 3분을 전후로 유치장에 드나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찰서에 설치된 CCTV를 모조리 뒤지며 조사해 보아도 모든 사람의 알리바이는 완벽하다. 단 한 명, ‘태’의 담당 정신과 의사 ‘엽’을 빼고. 형사들은 CCTV를 돌려 거기 찍힌 의사를 찾으려 하지만, 그 순간 불어닥친 토네이도에 경찰서 건물이 정전된다. 한참이 지나 토네이도가 물러가고, 다시 불이 들어왔을 때, 의사는 어디에도 없다. 유치장에 혼자 남겨진 ‘태’는 그를 떠올린다. 테러에 관한 질문, 교단을 향한 냉철한 태도, 고통에 관한 특별한 통찰력……. ‘태와’ 그를 둘러싼 ‘고통’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던 ‘엽.’ 대체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교단과 제약회사의 싸움에서 그는 무얼 얻고자 했던 것일까.

 


 

고통의 패러다임을 바꾼 강력한 진통제의 등장이라는 설정에도, 등장인물들이 살면서 마주해야 했던 각가지 고통은 일상의 우리에게도 몹시 익숙하다. 몸과 정신을 혹독한 환경에 놓아두면서까지 더 나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구는 지금의 한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들인 고통의 시간들을 ‘삶의 의미’라 부르며 견디고, 버티고, 참아내 왔다. 이런 ‘정상성’의 비틀린 부분을 매섭게 포착해 온 정보라 작가는 고통의 의미를 의학적, 철학적, 역사적 관점에서 분해하고 재조립해 마침내 하나의 결론으로 내보인다. 몸과 마음에 지독하게 새겨진 고통의 기억, 그 순간들은 과거에 내려놓자고. 우리가 내딛지 못했던 미래로 이제 한 걸음 나아가자고.

저자는 책의 뒷 부분 「작가의 말」을 통해 ‘-하지 않으면’ 뒤에 구체적인 설명조차 덧붙일 수 없는, 언제나 쫓기는 삶의 두려움. 폐지 줍는 노인을 돌보는 사회안전망이 없고 한번 비정규직은 평생 비정규직이니, 백세 시대에 나는 죽지도 않는 질긴 목숨을 저주하며 빈곤 속에 버려질 것이라는 공포. 그래서 나는 열심히 살기 위해서 잠을 못 자기도 하고 밥을 못 먹기도 하면서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잘 모르지만 하여간 정말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라고 쓰고 있다. 우리 사회의 발전 방향이 잘못 되어가고 있는 상황을 지적하는 듯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고문 기법이나 세뇌 기법이 현재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라고 하는 말로 이해된다.

 

저자 : 정보라

 

연세대학교 인문학부를 졸업하고 예일대학교에서 러시아 동유럽 지역학 석사,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슬라브 문학 박사를 취득했다. 대학에서 러시아와 SF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하여 한국에선 아무도 모르는 작가들의 괴상하기 짝이 없는 소설들과 사랑에 빠졌다. 예일대 러시아동유럽 지역학 석사를 거쳐 인디애나대에서 러시아 문학과 폴란드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SF와 환상문학을 쓰기도 하고 번역하기도 한다. 중편 「호(狐)」로 제3회 디지털작가상 모바일 부문 우수상을, 단편 「씨앗」으로 제1회 SF 어워드 단편부문 본상을 수상했다. 2022년 부커상 최종후보에 선정되었다.

지은 책으로 『붉은 칼』 『문이 열렸다』 『죽은 자의 꿈』 등의 장편소설과 『저주토끼』 『그녀를 만나다』 『씨앗』 『왕의 창녀』 등의 중단편 소설집이 있고, 『탐욕』 『광인과 수녀 / 쇠물닭 / 폭주 기관차』 『안드로메다 성운』 『그림자로부터의 탈출』 『거장과 마르가리타』 『구덩이』 『유로피아나』 『일곱 성당 이야기』 등 많은 책을 옮겼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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