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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베 저편의 목소리 - 구로베 협곡에 흐르는 조선인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
고노가와 준코 외 지음, 박은정 외 옮김 / 글로벌콘텐츠 / 2023년 8월
평점 :
이 책 『구로베 저편의 목소리』는 일본에 있는 댐 공사에 왜 한국인들이 노동자로 일했을까?란 의문에 대해 답하는 역사서이다. 표제어로만 본다면 자칫 소설 작품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고노가와 준코, 호리에 세쓰코, 우에다 스에노 등 3명의 일본인 저자들이 직접 뛰고 취재해 발굴한 논문과 르포 형식의 글을 책에 실었다. 의문점이 한 가지 더 늘었다. 왜 일본인들이 구로베 댐 공사에 한국인 노동자가 있었고, 희생 당한 사실을 밝혀 내려는 것일까. 구로베 댐은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이고 높이로도 유명한 일본 최대의 댐으로 손꼽힌다. 이 댐은 일본 도야마현에 있으며 협곡의 풍광이 아름다워 일년 내내 관광객이 쉴 새 없이 오가는 곳이라고 한다. 수력발전을 위해 지어졌으며 이 거대한 댐 건설을 위해 일본 건축 기술을 집대성한 구조물로 손꼽히고 있다. 이렇게 아름답고 웅장한 풍경을 자랑하는 구로베댐 아래 조선인 강제 징용의 역사가 묻혀 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이 책은 쓰여진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물론 일본 정부의 공식 기록이 아니다. 강제 징용이다보니 착공 당시부터 조선인 노동자의 존재를 부정했을까? 그러나 저자들이 확인하 바로는 착공 당시 징용 사실을 숨기기 위해 조선인 신분을 일부러 숨긴 것인지 전후에 삭제한 것인지, 아니면 실제 조선인 노동자는 없었는지 불분명한 상태로 일본 최대의 댐은 묵묵히 제 기능을 오늘날까지 수행해 왔다. 이 댐은 40년 걸려 1963년 완공한 것이라면 일제 때인 1922년 안팎의 시기에 착공했다는 이야긱다. 당시 신문이나 정부 문서, 혹은 기업 임금 등의 문서에 남겨져 있을 텐데 조선인은 없다고 일본 정부는 주장하고 있어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강제 징용이라면 댐 공사 중 사고 등으로 사망하거나 병사하는 등은 역사적 문제로 비화될 문제다. 일본 정부는 당시 댐 구역 행정기관인 도야마현의 기록 부재만 되풀이하고 있다.
강제 징용은 전후에 문제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완공된 후 철저하게 삭제되었을 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다. 이에 저자들은 정부의 입장을 믿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 입소문이나 누군가의 말을 듣고 조사를 시작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당시 일했던 사람 중에 살아 있는 사람들도 있어 혹시 그들을 만난 게 아닐까 하는 추정도 가능하다. 아무튼 패전 후 일본 정부의 입장은 피해 당사자 국에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구로베 댐 공사에 조선인도 강제 징용이든 자원 노동자이든 일한 사실까지 왜 숨기려 하는가. 국제적 문제로 비화되면 외교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서기 때문일까? 똑같은 전쟁을 수행하고 일제보다 더 잔혹한 학살의 경험을 가진 독일인들은 깨끗이 잘못을 인정하고 보상과 진정한 사과 등을 참회의 태도를 보이는데 일본은 너무나도 다른 행보를 보인다. 그러니 입으로 전해진 말이라도 파헤쳐 볼 수밖에 없는 것이 피해자 입장 아니겠는가. 저자들은 한국인들이 아닌데 일본 정부에 반하는 기록물을 썼을까? 양심적 일본인인가? 책도 저자들도 처음 보고 들어서 독자 역시 확인된 사항이 아니라 조사 결과로서 조심스럽게 읽었다. 책을 읽고 나니 사안의 윤곽이 뚜렷이 드러난다. 한국인인 독자는 일본인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달라졌다. 일제의 태도와는 다른 일본인도 있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했다.
공식적 일본 정부의 주장은 아니지만 양심 있는 일본인들의 말이라서 오히려 한국인이 조사 발굴한 것보다 오히려 더 신뢰감이 가기도 한다. 아무튼 이 책은 일본인 저자 3명이 공동 입장으로 구로베 댐 공사에 한국인(당시에는 '반도인', '조선인'이라고 칭했다고 함)이 동원됐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또 대규모 눈사태로 목숨을 잃거나 공사중 사고로 생명을 잃은 한 많은 죽음이 많았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눈시울이 붉어진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뒤늦게나마 저자들에게도 감사하고 싶다.
저자들은 당시 조선인이 왜 바다 건너 구로베까지 와서 일을 했는지, 그리고 왜 그들의 존재가 어둠 속에 묻혀버린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바탕으로 구로베댐의 건설 과정, 특히 구로3과 구로4를 중심으로 추적한다.(구로베 댐 4개의 공식 명칭은 구로베 1수력발전소, 구로베 2수력발전소, 구로베 3수력발전소, 구로베 4수력발전소이지만 저자들은 약칭으로 '구로1' '구로2' '구로3' '구로4'로 사용했다) 숫자를 매긴 것은 구로베 댐이 4개로 인근에 지어졌으니 공사 순으로 순서를 매긴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구로3' 구간은 구로베댐 공사 중 가장 가혹한 환경이었다. 저자 3명 중 한 명인 호리에 세쓰코가 쓴 책 〈머리말〉에 따르면 구로베강 제3발전소에서 터널을 통과하여 6km 상류에 있는 센닝다니까지의 댐을 말한다. 이 댐은 중일전쟁이 전면전으로 치닫기 바로 직전인 1936년부터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는 1940년에 걸쳐 건설되었다. 이 지역 사람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 그리고 더 나아가 돈을 벌기 위해 바다를 건너온 조선인들도 상당수 건설공사에 종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구로3' 댐 공사를 포함한 구로베강 전원 개발에 종사한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단신으로 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가족과 함께 함바집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족들은 구로베 협곡 입구인 우나즈키에 살면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면 1990년대 현재 오륙십 대 나이인 현지 사람들에게는 분명 조선인 동급생이 있었을 것이다. 그 이전 세대에서도 구로베 선상지의 농가에서는 농한기가 되면 협곡의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니까 그 사람들도 조선인 노동자들을 기억하고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그로부터 50년이 지났으므로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저자들은 당시 일본은 최신 기술을 사용하여 위험을 줄이고, 열악한 노동 환경을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주장했지만, 사전 조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빨리 완성하려 무리하게 강행한 공사였다는 점도 밝혀내고 있다.
저자들이 밝힌 바로는 1940년 '구로3' 댐이 완성되던 시기에는, 공사 기지인 우나즈키를 포함해서 우치야마의 인구는 4,830명이었다. 우치야마의 인구와는 별개로 '구로베 오쿠야마 국유림'의 함바집에 기거하는 공사 관계자가 3,500명이었는데 그 중 약 3분의 1이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노동자 혹은 주민으로서 사회적, 경제적인 면에서 공헌한 구성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나즈키 마을의 역사나, '구로3' 댐 건설을 모델로 하는 요시무라 아키라의 소설 『고열수도』에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이 어려운 공사를 이뤄낸 사토공업주식회사(사토구미)의 회사 연혁인 『110년의 발자취』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물론 역사적인 건축물 공사에 종사했다고 해서 기술자나 노동자들이 언급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관계자들을 통해, "조선인 노동자가 없었으면 '구로3' 댐은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을 빈번하게 들을 수 있었고, 당시 신문에도 일본인 이름과 함께 사고 피해를 입은 조선인의 이름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공사 당시는 전쟁 중이었고 조선인 '황민화' 추진 정책이 한창이어서 신문에도 미담 기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고 일본 각지에서 이미 100만 명이나 되는 조선인 노동자가 차별 대우를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저자들이 왜 이 책을 쓰기 위해 구로베 댐 건설 조선인 노동자의 유무를 추적해는지의 이유다. 이 댐 공사 때는 폭발, 고열, 눈사태 등으로 인한 사고가 빈번히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일본인 노동자와 더불어 수많은 조선인이 희생되었다. 댐 공사가 시작되었던 1900년대 초는 일제강점기 시절이었고, 이미 일본 각지에 100만 명이나 되는 조선인 노동자가 차별 대우를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이에 관한 연구나 간행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책은 당시 댐 건설 관계자와 그 가족, 유족들을 취재하고 신문 기사, 잡지, 영상 등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강제 징용·노동에 대한 사실관계를 바로잡고 있다.
이 책은 모두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구로베강 제3발전소 건설」(고나가와 준코)에서는 공사 자료와 관계자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조선인 노동자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제2장 「조선인 유족들의 반세기」(호리에 세쓰코)에서는 ‘구로3’ 시아이다니 눈사태를 중심으로 구로3의 노동자들, 사고 유족들을 찾아간 한국 여정을 보고한다. 마지막 제3장 「도야마현의 조선인 노동자」(우치다 스에노)에서는 구로베의 조선인 노동자의 역사적 배경을 신문 기사를 중심으로 확인한다.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 조선인 노동자 존재의 의미를 찾고, 일본이 저지른 잘못의 근거를 조명함으로써 앞으로의 한일관계까지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 사료적 가치가 크다. 이 책이 "저 발전소에, 이 도로에 당신네 나라 사람들의 피와 땀이 배어 있습니다."라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저자의 말처럼,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진지하게 마주하는 계기를 독자들에게 선사할 것이라고 독자는 기대한다.
3장 「도야마현의 조선인 노동자」에는 〈'강제연행' 이전사〉란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장에서 저자 우치다 스에노는 공사장에서 조선인들이 처했던 상황과 도야마현의 대응을 5가지 점에서 살펴본 기록을 모두 적었다. ① 싼 임금과 가혹한 처우로 불안정한 노동-함바에서 ②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 ③ 일상적, 치안 단속 대상으로서의 조선인 ④ 지역, 노동 현장으로부터의 배척 ⑤ 자연 발생적 노동 쟁의 반발 등이다. 특히 ①에서의 사례를 나열하고 있는데 매우 구체적이다. 임금은 대부분의 큰 공사장이 하루 1엔 20전에서 90전으로 도야마현 사람에 비해 20~30전이 적다. 그러나 간부 당 2~3할이 공제되고 하루 식대 70~80전이 빠진다. 손에 쥔 일당은 60~70전. 이 돈은 하루 술값으로 사라지는 게 다반사다. 또 하루 12시간의 노동, 판잣집 주거지, 여자보다 술을 동경한다고 적었다.
"일본에 도항해온 조선인들은 악조건 속에서 노동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많은 데이터와 증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박정식의 『조선인 강제 연행 기록』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임금은 일본인의 50~70%에 불과했고 직종은 대부분 토목공이었다고 한다. 일용직 인부의 경우, 고용주나 인부 감독으로부터 평균 30~40%의 중간착취를 당했기 때문에 생활수준은 최하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935년 도쿄의 토목 노동자 및 인부의 세대 당 월 평균 수입은 각각 20엔 78전과 19엔 60전으로 최저 생활을 유지할 정도였다."(p.61)
역자 : 박은정
건국대학교에서 일본어교육을 전공하고 일본 도야마대학교에서 석사, 히로시마대학교에서 언어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검도를 배우면서 문학과 번역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2009년 시즈오카 세계번역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아 시즈오카대학교에서 연구생으로 1년 동안 수학했다. 옮긴 책으로는 다케다 타이준의 『반짝이끼』와 나카지마 아쓰시의 『빛과 바람과 꿈』 그리고 『짧았기에 더욱 빛나는: 일본문학 컬렉션 01』(공역), 『발칙한 그녀들: 일본문학 컬렉션 02』(공역)이 있으며, 임철우의 『이별하는 골짜기(別れの谷)』(공역)를 일본어로 번역했다.
역자 : 안영신
건국대학교 일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엔도 슈사쿠 문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국대학교, 동남보건대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출강하였고, 타자론과 육체 담론에 관심을 갖고 일본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엔도 슈사쿠 문학과 마르키 드 사드」, 「일본 전후문학과 노년의 젠더」, 「일본 전후문학에 나타난 육체의 표상」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조선’ 표상의 문화지』(공역), 『황후의 초상』(공역), 『짧았기에 더욱 빛나는: 일본문학 컬렉션 01』공역), 『발칙한 그녀들: 일본문학 컬렉션 02』(공역)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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