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유전학
임야비 지음 / 쌤앤파커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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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유전학』. 표제어로부터 오는 강렬함이 이 책의 내용과 잘 맞는다. 표지 그림을 볼 땐 소설 같다는 느낌이지만 제목만 따로 읽는다면 '유전학' 논저로도 보인다. 표제어뿐만 아니라 내용 역시 멋진 제목을 주제로 잘 구성된 소설이어서 독자들의 호기심과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내용은 우리 나라가 아닌 구소련 직전과 이후 '소련'의 일을 다루지만 정치적 실제 인물이 중심인물들이 등장함으로써 '이색적'이거나 특이한 느낌으로부터 오는 생소함을 완화시킨다. 과학(의학) 소설임도 확실하다. 19세기 이후에야 체계를 갖춘 '유전학'이 주요 소재이다. 제정 러시아 말기부터 이야기의 발단도 구소련의 탄생 직전이다. 1913년, 시베리아 지역. 극한의 추위가 몰아쳐 사람이 살기 힘든 러시아 제정 변방의 한 도시다. 소비에트 이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왕 때의 이야기다. 다른 유럽 여러 나라는 프랑스 대혁명을 기점으로 농노제를 폐지하고 자본주의 제도를 도입해 민주주의 체제와 함께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제정 러시아는 농노제를 여전히 유지하며 국민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더 이상 발전이 불가능할 상태여서 민심은 흉흉하고 러시아는 숨만 쉬고 있는 빈사 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미 유럽의 변방으로 치부되던 때다.

당연히 국민들, 특히 농노를 비롯한 농사에 종사하던 사람들과 도시 노동자의 폭동이 오늘 내일 할 정도로 정세는 악화됐다. 큰 거리에서 대낮에도 틈만 나면 범죄가 일상이 될 수밖에 없는 최악의 국가 재정 상태다. 뜻 있는 지식인들은 노동자·농민 등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고 날짜를 기다린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대부분의 국민들은 세계 1차대전이 발발해 유럽이 온통 전쟁터로 바뀌어도 전쟁보다 생계를 위한 음식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이 소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한 작은 도시에서 스스럼없이 강도 행각을 벌이는 한 사내에 집중하고 있다. 일을 끝내고 마차에 올라탄 사내가 움켜쥔 손에는 돈자루가 들려 있다. 이 정도면 사내의 윗선인 '그분'이 세상을 뒤엎을 공작금으로 넉넉하다고 속으로 되뇌인다. 30만 루블. 사내는 그 길로 부모와 처자식을 내팽개치고 유유히 고향을 떠난다.

 


 

이 극악무도한 사내가 훗날 10월 혁명으로 공산주의 국가를 수립하고, 주변 이웃나라를 모두 통합해 소비에트연맹을 수립한 레닌의 후계자이다. 바로 스탈린이다. 냉혹한 권력의 대명사, 스탈린은 넓은 동토의 소련에 '철의 장막'을 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장악한다. 냉혹한 성격으로 러시아는 소련으로 거듭나며 일정 성과를 거둔다. 그는 국방력을 강화하고 민주주의와 대립되는 공산주의를 이끄는 지도자가 된다. 그가 어떻게 공산주의 혁명의 주요 일원이 되었는지 이 책에는 자세히 언급되지 않지만, 그는 역대 소련의 서기장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지도자임에 틀림없다. 우리 나라도 2차 대전 후 소련의 영향력으로 분단됐고, 지금도 반쪽 국가로 한 많은 사람들을 많이도 만든 '악'의 구체적 실체로 인식되고 있다.

이 소설은 스탈린이 태어나고 이후 소련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후 자신들의 나라처럼 냉혹한 권력자의 '유전한 실험'이다. 이 소설의 소재와 주제를 제공한 자는 러시아의 유전학자 리센코 후작이다. 리센코는 러시아에서 빈농이나 다름없는 몰락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영재였다고 한다. 그의 능력을 알아 본 제정 러시아 황제는 그의 유학을 지원했고, 유전학과 진화론에 관심이 있었던 리센코는 저명한 스승을 찾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공부했다. 스물두 살이 되던 해,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자신이 세운 가설을 실제로 인간에게 적용해 실험해 보기로 한다. 추위를 타지 않는 강한 민족을 만들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그의 계획은 황제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고, 그렇게 수백 명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시작되었다. 인간은 절대 실험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서양 의학의 기본에 입각해서도 인간을 직접 실험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의사 이전에 누구도 해서는 안 될 금지 사항 아닌가?

 


 

이 책 『악의 유전학』에서 실험을 주도하는 리센코 후작은 실존 인물인 생물학자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를 모델로 해 탄생한 인물이다. 이 작품에는 리센코 외에도 여러 실존 인물의 이야기가 촘촘하게 담겨 있다.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실존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고 여기에 있는 모든 사건을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니다. 주요 사건이나 일을 부각시키기 위해 저자 임야비가 소설로 재구성했다. 요즘 흔히 쓰는 말로 팩션(faction, 허구+사실)이다. 인간 대상 실험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일제도 했던 일이라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우리도 일본에 의해 유능한 사람이 피해를 보고 옥사한 것으로 처리된 예를 배우고 들었다. 독자로서는 '731부대', '마루타' 등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처음 알게 됐을 때는 증오심이 불탔지만 두 번째 들으니 그때만큼의 충격을 받지 않았다. 다만 일제가 시도한 것보다 이전이란 사실에 '인간 실험'이란 게 일제가 처음 시도한 것은 아니구나... 하는 느낌에 인간의 '악'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됐다.

이 책에서 리센코가 유전학에서 배우고 느낌 점 중에서 가장 영향을 준 학자와 학설은 한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 '용불용설'을 발표한 라마르크의 『동물 철학』이란 책을 통해서다. 이때 라마르크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들은 환경에 따라 필요한 부분은 발달, 불필요한 부분은 퇴화되어 유전된다는 ‘용불용설’ 이론을 발표했다. 환경에 의해 ‘획득’한 ‘형질’은 이후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다는 ‘획득 형질의 유전’을 주장힌 것이다. 그 이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완두콩 실험을 통해 얻어진 '멘델의 법칙' 등 유전학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 게다가 프랜시스 골턴은 인류의 발전을 위해 열성 인간의 임신과 출산을 막고, 우성 인간의 출생률을 증가시켜야 한다는 ‘우생학’을 주장하며 더 뛰어난 인류를 만들기 위한 주장들이 대두되기도 했다.

 


 

저자 임야비는 의사 출신 작가다. 그가 유전학을 소설 작품으로 쓴 것은 유전학의 실체를 잘 알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짐작되는 부분이다. 또 실명을 사용함으로써 소설의 구체적 내용들이 진실일까? 하는 의문의 꼬리표가 붙지만 너무 분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의사로서 저자가 의학이나 생물학에 깊은 조예가 있을 것이고, 작가로의 저자는 허구와 사실의 구분을 하고 소설로 구성했을 터이다. 옳다 그르다를 위한 사실 관계 여부를 따질 필요는 없다는 게 독자의 생각이다. 사실 독자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대화나 기타 표현, 묘사, 인물 연관 관계 등이 저자가 창조한 내용이지, 사실 기록은 아닐 터이니 내용만 파악하면서 읽으면 훨씬 흥미로울 것이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구성을 잘하면 스토리는 가끔 사실 여부에 관계 없이 독자들이 사실, 진실로 믿게 되기 쉽다. 이런 점만 배제한다면 이 소설 작품은 한결 재미 있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리센코가 스물한 살이 되던 1856년, 자신만의 확고한 이론을 완성한 그는 내로라하는 유전학자들의 책을 모두 덮어 버렸다. 그는 세계 최초로 라마르크의 '획득형질의 유전'을 인간에게 적용해보기로 결심한다. 영국에서 '일란성 쌍둥이'와 '천재의 혈통' 연구의 권위자인 유전학자 프랜시스 골턴을 무작정 찾아가 자신이 확립한 이론을 대학자인 골턴에게 내민다. 골턴은 젊은 '러시아 천재'의 이론에 관심을 보이면서 이론이 법칙으로 성립하려면, 반드시 실험적 증명과 과학적 통계가 수반돼야만 한다고 조언해준다. 자신이 고안한 통계학을 전수해 줄 수 있지만,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은 시간적, 윤리적, 재정적 문제로 시도 자체가 힘들다는 쓴소리도 건넨다. 하지만 리센코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러시아로 되돌아온 리센코는 자신의 이론을 적용해 법칙으로 만들기 위해 계획한 인간 대상 실험을 실천을 옮긴다. 자신의 유전학을 이용해 인간을 강한 유전자로 변형시킬 수 있다는 자신이 세운 이론을 법칙으로 정립하기 위해 제정 러시아 황제의 도움을 받는다. 정확히 1년 후 리센코는 연구원들과 50명 정도의 군인을 이끌고 유쥐나야로 들어온다. 이들은 곧장 홀로드나야의 수도원으로 가서 250명의 남자아이와 250명의 여자아이가 들어와 있었다. 이 중의 한 명이 케케, 스탈린의 어머니가 있었다.

 


 

인간을 개조하겠다는 목적으로 자행된 루센코의 실험에서 피실험자였던 사내의 어머니(케케)는 한 살 때 투루한스크 지역의 산속 마을로 옮겨졌다. ‘기적의 케케’라 불리며 행복하고 사랑과 설렘이 있었던 어린 시절을 지나 실험체로 철저히 이용당하며 처절한 삶을 살다가 결국은 베소(스탈린의 아버지)와 그곳을 탈출하게 된 20년 동안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준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아들과 함께하는 날 밤, 케케는 자신이 살아온 곳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모든 진실을 꺼내 놓는다.

그로부터 6년 후, 사내는 다시 고향 마을을 찾아온다. 그사이 사내의 아내 카토와 아버지 베소는 죽어 세상에 없었다. 사내는 각종 폭동, 테러, 파업, 방화, 강도, 암살 등을 일삼으며 잡혔다 탈출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다가 이번에는 도망칠 수 없는 멀고도 추운 지역, 투루한스크로 유형을 가게 되었고, 유형 가기 전날 밤 어머니를 만나러 집에 들른 것이었다. 투루한스크로 가게 되었다는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 케케는 그동안 품어 왔던 비밀을 털어놓기로 마음먹는다.

 

“네 아비 베소는 악마가 될 만한 배포가 없는 사람이었다. 한낱 불쌍한 주정뱅이일 뿐이었어.”

평생 술을 입에 대 본 적 없는 노파가 테이블로 잔을 가져와 보드카를 따랐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진짜 악마는 따로 있다. 그 악마가 베소와 나를 완전히 망가뜨렸어.”

노파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보드카를 반 잔이나 마셨다. 아들은 난생처음 보는 어머니의 음주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평생 숨겨 왔던 비밀을 막 풀려는 참이었다.(p.19)

 


 

의사 출신의 저자는 ‘유전학’과 ‘우생학’이라는 과학 지식과 정치적 이념이 일상을 지배했던 19~20세기의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악의 유전학』을 구상했다. 우생학을 통해 ‘강한 나라’을 만들겠다는 신념을 가진 과학자 ‘리센코’와 그 과학자의 실험체로 20년 동안 산속 마을에 갇혀 살았던 수백 명의 아이들, 그리고 그곳에서 탈출해 살아남은 단 한 명의 실험체 ‘케케’. 그리고 케케의 아들, 반전의 ‘사내’.

이 책 『악의 유전학』에는 실존 인물을 토대로 과학적 사유와 역사적 사실을 자연스럽게 엮어, 실제로 일어났을 법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완벽한 인간’을 만들기 위해 20개월 동안 1600여 쌍의 쌍둥이로 인체 실험을 자행했던 것처럼 당시 러시아에서도 실제로 이와 같은 실험이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만큼 촘촘한 구성과 철저한 고증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케케는 저수지로 걸어갔다. 후작의 방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하얗고 단단하게 얼어 있었다. 저수지 옆에 놓인 큰 돌을 양손으로 들고 빙판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누군가 뚫어 놓은 작은 구멍이 있었다. 큰 돌로 구멍 주변의 얼음을 깨 커다란 검은자를 만들었다. 케케는 돌을 품에 안고 얼음 구멍 앞에 섰다. 각막이 간지러워 올려다본 밤하늘은 오롯이 오로라 차지였다. 케케는 언덕 위 수도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녕, 베소.”

엄마의 자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케케는 흰자 속으로 가라앉았다.(p.208)

 

저자 : 임야비

 

서울. 시월생.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유리알 유희를 하며 여러 유형의 글을 쓴다. 대학로 극단에서 연출부 드라마투르그로 일하며, 총체극과 클래식 연주회를 기획 및 연출한다. 2020년 장편 소설 《클락헨Clock-Hen》을 출간했고, 2022년에 출간한 증언 문학 《그 의사의 코로나》는 <신과 함께>를 제작한 대형 영화 제작사, 리얼라이즈 픽처스와 영상화 계약을 완료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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