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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왕 루이 14세 ㅣ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사사키 마코토 지음, 김효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8월
평점 :
'태양왕'과 '절대군주'라는 이미지와 함께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을 한 주인공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루이 14세. 그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왕으로서 프랑스를 유럽의 중심 국가 반열에 올렸다고 학교에서 배웠다. 당시 유럽에서 강대국에 끼지도 못한 채 주변국의 위치에 있던 프랑스를 재위 72년 동안 정치·군사·예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겨 유럽 중심국으로 끌어오렸다고 배운 기억이 있다. 특히 예술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 프랑스를 '예술의 나라'로 만든 기초를 닦았다고 알려져, 지금 프랑스 국민들에게도 프랑스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왕으로 각인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지어진 왕궁으로서 최고의 찬사를 받고 있는 베르사유 궁전을 지어서 주변 국가의 부러움을 샀다는 에피소드도 많다고 배운 기억이 독자의 기억속에 남아 있다.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베르사유 궁전을 보고 싶다는 왕들이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실제로 어렸을 때부터 발레에 푹 빠져 있었던 적이 있고, 자신이 친정을 시작한 이후 예술에 대한 지속적 지원을 계속했다고 한다. 이 책 『태양왕 루이 14세』는 그에 대한 평전(評傳)으로 쓰였다. 아버지인 루이 13세가 자신이 4살 때 타계하자 왕위를 물려받은 후 어머니의 섭정이 계속되었다. 워낙 유명한 왕이라서인지 그에 대한 문학 작품이나 각종 예술에서 그의 생애나 업적을 다룬 예술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까지 수백 년 지났지만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세계 어디에서도 독창적인 별칭 '태양왕'과 '절대군주'의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이 책의 저자 사사키 마코토는 그가 근대 국가로의 길을 연, 너무 이른 개혁가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이 책은 루이 14세에 대한 최신 역사 연구의 성과를 담았다. 그에 대한 올바른 시선으로 판단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저자는 이에 따라 신화적 요소를 최대한 배제한 그의 모습을 여러 방면에서 들여다보고 분석했다. 72년여에 걸친 루이 14세의 치세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저자는 루이 14세와 프랑스 귀족들의 관계에도 주목하면서, 상호 영향이 프랑스 국가 운영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알아본다. 루이 14세의 의도와 성과에 유의하며 당시의 정치 및 사회와 같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저자는 책의 〈머리말〉에서 루이 14세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에 나선 이유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역사학에서 개인의 의사나 행동이 역사에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고, 이에 따라 위인의 업적이나 치세가 제대로 평가된 것인지, 아니면 왜곡이나 과장된 것인지를 알고 싶었다는 저자의 말이다. 이 취지는 역사학에서 지금까지 의견이 정립되지 않았음을 귀띔하는 말이기도 하다. 즉 루이 14세가 개인이 능력을 발휘해 프랑스는 물론 유럽, 세계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미쳤는지, 아니면 과장되어 신화적 요소를 강조한 것인지를 밝혀내고자 하는 목적에 따라 연구의 실마리가 있다는 말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루이 14세가 등장하지 않았어도 프랑스에서는 절대 왕정과 궁정 문화가 성립했을까에 대한 의문에서 연구를 시작했다는 말로 독자는 읽힌다. 저자는 그런 생각을 따르지 않지만 루이 14세라는 개인의 행동이 시대와 사회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확실한 평가를 유보하는 듯한 태도다. 두 번째는 절대 왕정에 대한 평가 변화에 주목했다고 한다. 저자는 현대적 연구에서는 '관료제와 상비군으로 지지해온 강력한 왕권'이라는 해석은 더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절대 왕정은 '절대'적이지 않고 왕은 다양한 제약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관료제나 군대 등 절대 왕정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진 '기구'에 대해서도 주목하며 절대 왕정의 새로운 이미지를 그려보고 그 안에서 루이 14세의 역할에 대해 이 책에서 연구 검토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세 번째는 사실과 신화의 구별이다. 절대 왕정과 루이 14세의 역할에 대한 논쟁 속에서 루이 14세에 대한 다양한 신화가 형성되었다. 루이 14세만큼 이미지와 실상의 괴리가 큰 왕도 드물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이에 따라 신화적 요소를 최대한 배제한 그의 모습을 이 책에서 그려내고자 노력했다고 밝히고 있다. 저자의 세 가지 이유를 토대로 이 책은 루이 14세에 대한 평전을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보적 판단의 스탠스를 유지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해서 신화나 허구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아직 역사적 평가에 대해 새로운 제시하는 안(案)으로 받아들여지기를 기대하는 듯하다.
저자는 이런 의문 때문에 최근의 역사학에서는 실태적 권력과는 별개로 왕의 권위가 문제화되었다고 전한다. 권위란 피치자로 하여금 왕권의 정통성을 수용하고 그 지배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으로, 권위의 생성 및 전달 시스템으로서의 각종 의례와 왕권의 표상에 관한 연구가 왕성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루이 14세는 동시대의 다른 어떤 군주보다도 이러한 권위 즉, 왕권의 이미지 형성에 힘썼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루이 14세의 예술 정책과 그 정수인 베르사유 궁전에 대해 다루며 루이 14세의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고 한다. 특히 베르사유 궁전을 중심으로 성립한 궁정 사회에서는 루이 14세를 중심으로 하나의 소우주가 형성되었으며 그것이 그의 권위를 생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현대에도 루이 14세의 이미지는 계속되고 있다. 베르사유 궁전을 방문하면, 그 호화로움에 놀라고 그곳에서 펼쳐졌을 의례를 상상하며 화려한 궁정 문화를 떠올리게 된다. 루이 14세가 여전히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모두 8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어린 왕 루이 14세」, 2장 「프롱드의 난」, 3장 「친정의 시작과 초기 개혁」, 4장 「대외 관계와 군대·전쟁」, 5장 「루이 14세의 예술 정책」, 6장 「베르사유 궁전」, 7장 「치세의 절정기」, 8장 「만년의 루이 14세」 등이다. 각 장의 제목으로만 보아도 루이 14세의 업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독자는 부르봉 왕조가 프랑스 절대 왕정을 이끈 명문 왕가임을 서술한 일본 학자 나카노 교코의 저서 『명화로 읽는 부르봉 역사』를 얼마 전에 읽은 적이 있다. 나카노 교코에 따르면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유럽은 각 나라별로 독립 국가로 자신들의 나라를 이루고 살았다. 속국의 시대를 거쳐 그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각각 국가를 이룬 후 각자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로마 제국 후기에 들어 공인한 기독교가 유럽 대륙을 끈끈한 유대감을 갖도록 이끌었지만 각국의 결속력과 왕권의 부침에 따라 로마 제국 때의 결속력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이후 일부 국가는 이웃 나라와 국경 분쟁을 겪고 강세에 밀려 유럽 외곽이나 아프리카로 가지만 지금처럼 엄격한 선을 그어놓은 국경이라기보다 큰 강이나 산맥을 국경으로 삼은 자연 국경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또 동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의 명맥을 잇는 역할을 자처했기 때문에 16세기까지는 기독교의 막강한 영향력에서 유대 관계를 계속할 수 있었다. 특히 이슬람교의 새 종교 세력이 급격하게 확장되면서 200년에 걸친 종교 전쟁(십자군 전쟁)을 치르느라 유럽 문명은 2대 종교권으로 나뉘어 싸우는 형국이 지속됐다. 유럽의 이렇다할 절대 강국이 없는 탓에 유럽 각 국은 왕권을 강화시켜 강국을 이루는 데 더 전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유럽의 강력한 군주가 등장해 이웃 나라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왕권을 휘두르는 가문이 등장한다. 합스부르크와 부르봉 왕조는 유럽 2대 가문으로서 실제 유럽을 지배하는 강력한 왕들을 배출한다. 특히 합스부르크는 교황(동로마 제국)을 비롯, 여러 나라의 왕과 왕비를 배출한 최대 가문으로 650년 이상 이어졌다. 부르봉 왕조는 프랑스의 가장 강력한 최강의 프랑스를 이끌 왕들을 배출해 명문가에 이름을 올렸다. 프랑스 절대 왕조를 이끈 '태양왕' 루이 14세 등 루이 왕조가 부르봉 가문 출신들이다. 사사키 마코토의 이 책 『태양왕 루이 14세』와 나카노 교코의 『명화로 읽는 부르봉 역사』에서 부르봉 왕조의 태양왕 루이 14세를 보는 관점이 비슷한 것으로 보여 독자가 여기에 잠깐 서술했다. 두 저자의 분석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중점 서술된 부분이 다소 다르지만 프랑스 루이 14세의 절대 왕정이 태어난 이유를 역사적 필요성에 의해 절대적 통치자가 생겼다는 시각은 같지 않나 생각이 든다.
책에 따르면 루이 14세의 어린 시절은 그리 행복한 생활은 아닌 듯하다. 아버지인 루이 13세와 어머니 안 도트리슈(합스부르크 왕가)가 '늦둥이'를 얻었고, 루이 13세는 오랫동안 기대했던 왕태자가 출생한 지 불과 4살이 지날 무렵 결핵과 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뒤늦게 왕태자 루이 14세를 얻었지만 너무 어려 어머니가 섭정을 이어갔다. 루이 13세는 부인 안 도트리슈와 정략결혼이었을 뿐이지, 애틋한 연애 감정 등은 없었던 것 같다. 루이 13세는 더욱이 우울증에 동성애 경향이 있어 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독자 개인적 생각으로는 루이 14세는 친정을 시작한 후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하나씩 하나씩 달성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인근 국가와의 끊임없는 전쟁에 직접 참여하고 승리를 거머쥐면서 왕권을 탄탄히 할 뿐 아니라 인근 강대국 스페인으로부터 영토를 빼앗아 편입하기 시작한다. 루이 14세의 유럽 제패의 꿈도 이 무렵 생긱지 않았나 싶다. 루이 14세는 당대 최고의 조각상 예술가들에게 의뢰해 옛 로마 제국의 황제들의 조각상을 자신의 왕궁에 수십 개씩 세웠으며, 예술 지원도 자신의 이미지 확대 강화를 위해 열정적으로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점이 저자 사사키 마코토가 이 평전을 새롭게 쓰는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짐작할 만하다. 그가 아니어도 프랑스 절대 왕정은 성립됐을지도 모른다는 연구 이유가 설득력을 갖게 되는 부분이다.
루이 14세는 어렸을 때 겪었던 프랑스 지방 귀족들이 일으킨 프롱드의 난으로 이 왕궁, 저 왕궁으로 피해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30년 전쟁과 인근 국가와의 패권 전쟁을 벌이는 것도 왕권 강화의 구실이 됐고, 그는 직접 각종 전쟁에 참여해 승리함으로써 전쟁에 지친 프랑스 민중들이 오히려 강력한 왕이 나타나 안정된 국가로 만들어주기를 원하는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저자가 앞서 언급한 〈프롤로그〉에서의 의문이 설득력을 갖게 디는 대목이다. 비로소 독자도 저자의 말을 이해하기에 이른다. 친정 이후 행위들이 일관되게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로마 황제'를 꿈꾸며 이미지 강화를 추진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절대 군주의 이미지를 강화시키는 이유도 설명이 된다. 그런 시점으로 관찰하면 베르사유 궁전도 왕권 강화가 어느 정도 확립되었을 때를 이용, 유럽의 패권 국가로서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한 계획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도 독자의 시선이 미치게 된다. 왕궁의 규모 등도 무리한 재정을 투입해서라도 지으려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의 아버지 사망 이후 약 20년간 나라를 쥐고 흔든 마자랭이 1661년에 죽음으로써 루이 14세는 본격적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이에 1년 앞서 스페인 왕실의 마리 테레즈와 혼인함으로써 강력한 스페인의 지원도 얻게 된 그는 프랑스 고등법원의 권한을 축소하고 왕족과 대귀족의 정치참여를 제한했으며, 지방에 지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그리고 시민과 상인계급, 말하자면 부르주아 출신들 중에서 비서관들을 발탁하여 철저히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총신들로 만들어 나갔다. 그 중 한 사람이 우리도 잘 아는 콜베르이다. 리슐리외나 마자랭처럼 카리스마적이지는 않으면서 실무에는 능했던 그는 재무총감, 조영총관 등을 맡으며 루이 14세가 한껏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여러 해 동안 충실히 보좌하게 된다. 그가 그 정도로 치밀한 계획을 자신의 심복들과 논의했을까 여부는 확인되지 않지만... 추정 가능한 일 아닌가?
'짐이 곧 국가다'란 발언도 지금은 후세의 각색이라고 여겨진다고 저자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루이의 프랑스를 근대 국가의 원형으로 보는 이해는 더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맺음말〉을 통해 확언하고 있다. 16세기 관료제의 진전과 함께 왕권의 힘이 커진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생각에는 몇 가지 유보할 점이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첫 번째는 왕권의 경제력이 약했다는 것이다. 혁명에 이르기까지 왕권은 신민을 직접 파악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관료 수는 확실히 증가했지만 근대의 기준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다는 것. 왕권은 국내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며, 오래 전부터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되어온 단체와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매개로 통치를 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런 특권이 부여된 단체를 사단이라고 칭하는데 당시 프랑스에는 귀족, 관직 보유자, 길드 촌락 공동체 등 다양한 사단이 존재했으며 왕권은 이들과 특권을 매개로 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각 사단을 왕권의 통치 범위 안에 편입시켰다는 사례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루이 14세가 콜베르나 르 텔리에 내각을 이용해 통치를 한 것도 문벌의 수장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후견·피후견인 관계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를 지배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수법에 의한 통치라고 저자는 확신한다. 왕권은 각 사단의 특권을 인정함으로써 사단을 지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왕권은 오랜 관습 즉 '오래된 법' 에 의해 제한을 받았다는 반증이 된다.
17세기의 '절대 왕정'은 신장하는 왕권, 존속하는 신분제 사회, 기독교라는 상호 모순의 가능성이 있는 삼자에 의한 타협과 협조 위에 성립한 체제였다고 저자는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모순을 내재한 이 삼자의 미묘한 균형을 무리하게 설명한 것이 보쉬에였다. 그는 내란 등 혼란에 대한 강한 위구에서 국왕 권력(주권)의 절대성을 주권 신수설로 설명했으며 왕권은 교황이나 중간 단체와 같은 현세의 어떤 세력에도 종속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그것이 자의적 통치(전제)로 변질되지 않으려면 왕은 신의 법과 기존 공동체의 법(왕국 기본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루이 14세의 사적을 생각하면, 루이가 왕권 강화의 방향으로 선회한 것을 알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루이 14세는 사망 직전 왕태자에게 신의 가호를 기원하는 의식을 행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 될 나의 아들아, 너는 신에 대한 의무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전쟁에 관해서는 나를 따르지 말고, 늘 이웃나라와의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쓰며, 신민을 풍요롭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라. 이런 것은 불행히도 내가 행하지 못한 일이다.."(p.315)
저자 : 사사키 마코토
1961년 일본 도쿄 출생으로, 도쿄 도립 대학교 대학원 인문과학 연구과 박사 과정 만기 퇴학. 현 고마자와 대학교 문학부 교수이다. 근세 프랑스사를 전공했다. 주요 저서로, 『루이 14세기의 전쟁과 예술―만들어진 왕권의 이미지』(2016년), 『증보 신판 도설 프랑스의 역사』(2016년), 『알기 쉬운 프랑스 근현대사』(공저, 2018년), 『알고 익히는 역사학 공부법』(공저, 2016년), 『역사와 군대』(공저, 2010년), 『근대 유럽의 탐구 12 군대』(공저, 2009년), 『국민 국가와 제국』(공저, 2005년),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공저, 1998년), 『프랑스 혁명과 유럽의 근대』(공저, 1996년) 등이 있다.
역자 : 김효진
외국의 다양한 문화와 작품을 국내에 소개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번역가의 길로 들어섰다. 독자의 눈으로 글을 옮기고 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친절한 번역을 늘 마음에 새기며 현재 출판 기획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미국 흑인의 역사』, 『노예선의 세계사』, 『말의 세계사』, 『해적의 세계사』, 『로마 산책』, 『감자로 보는 세계사』, 『달은 대단하다』, 『중세 유럽의 레시피』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