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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
고혜원 지음 / 팩토리나인 / 2023년 8월
평점 :
전쟁이 시작되면 군인들이 가장 많이 죽는다는 말이 있지만 실제는 민간인, 그중에서도 어린이나 노약자가 죽는 경우가 더 많다는 말도 있다. 어떤 게 사실인지 여부는 별 의미가 없다. 현대전은 '전쟁은 곧 죽음'이라는 말이 공식처럼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무기의 발달로 최첨단 무기까지 동원되는 현대전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장거리 미사일이나 항공 폭격, 심지어 무인 드론까지 후방에 폭격을 가할 수 있으니 위험 지역이 따로 없다는 것이 실감난다. 가장 최근에 벌어진 우크라이나 전쟁을 뉴스를 통해 볼 때 그 생각은 더욱 강력하게 전쟁은 예방 이외의 답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이 나지 않도록 최선의 방어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 가장 합리적으로 들리는 이유다. 그러나 우리가 치른 가장 최근의 전쟁까지만 해도 가장 많은 희생자는 군인이었다는 전후 통계에서 보여주고 있다.
현대전이야 전후방이 따로 없다지만 그때만 해도 군인들이 밀고 밀리는 전선에서 가장 많이 희생됐다고 한다. 그렇다고 후방에 있는 사람들은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책 『래빗』을 읽어보면 가장 아슬아슬하게 삶을 이어가는 후방의 사람들도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는 없다. 이 책은 한국전쟁 때 실존했던 소녀 첩보원을 모티프로 한 소설 작품이다.
1950년 여름, 전쟁이 났다는 말은 듣고 있었지만 주인공 홍주는 아직 어린 소녀로서 전쟁이 실감나지 않는다. 더욱이 워낙 산골이어서인지 군인들이 왔다가지도 않았고, 흔한 총소리나 폭격도 겪어보지 못했으니 말로만 들었지 아직 전쟁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순박할 시골 소녀였다. 여느 때처럼 약초를 캐러 산을 헤매다 운 좋게 산삼을 발견하고 기쁜 마음으로 마을로 되돌아오다 말로만 듣던 은빛 비행기의 폭격을 목격하면서 홍주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폭격으로 한순간에 모든 걸 잃은 홍주는 살고자 하는 의지마저 잃고 군부대에 자원한다. 작전에 나간 열 명 중 아홉이 돌아오지 못한다는 켈로 부대 소속 소녀 첩보원 ‘래빗’이 된다.
'켈로 부대'는 독자로서는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던 한국전쟁 때 활약했던 유명한 부대 이름이다. 첩보 임무를 수행하는 켈로 부대는 어렸을 때 만화 등을 통해 자주 들어왔던 부대 이름이었다. 나중에 TV를 통해 확인도 했지만 이 작품에서 등장하기에 전후 세대인 독자가 전쟁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다시 백과사전을 통해 보충 지식을 더했다. 두산백과사전에 따르면 '켈로 부대'는 1949년 미국 극동군사령부 직할로 조직된 비정규전 부대이다. 한국전쟁 중에 첩보 수집 및 후방 교란 등의 특수 임무를 수행하다가 1954년 해체되었으며, 오늘날 특전사의 모체가 되었다.
미국 극동군사령부가 직할한 '주한 연락처(Korea Liaison Office)'의 영문 머리글자를 딴 명칭이며, KLO의 한국어 발음을 따서 '켈로 부대'라고도 한다. 1949년 창설 후 6·25전쟁 중이던 1951년 9월 제8240부대로 알려진 주한국제연합유격군(United Nations Partisan Infantry Korea; UNPIK)에 편입되었다. 제8240부대는 정전협정이 체결된 직후인 1953년 8월 대한민국 육군본부 산하의 제8250부대로 재편되었다가, 1954년 3월 육군에 분산 편입됨으로써 완전히 해체되었다. 군대에 잔류한 일부 대원들을 주축으로 하여 1958년 제1전투단(제7725부대)가 창설된 뒤 제1전투단은 1959년 제1공수특전단으로 개칭되었으며, 1969년 제1공수특전단과 제1·제2 유격여단이 통합되어 특수전사령부(특전사)가 창설되었다.
KLO부대는 고트(Goat)·선(Sun)·위스키(Whiskey)·이글(Eagle)·불도그(Bulldog)·리바이벌(Revival)·파인애플(Pineapple) 등 10여 개의 독립된 지대로 구성되었다. 부대원들은 창설 당시에는 북한 출신들로 채워졌으나 한국전쟁 중에 사망자와 실종자가 늘어가자 남한 출신도 모집하였으며, 전체 대원 가운데 약 20%는 여성이었다. 이들은 군번도 계급도 없는 비정규군으로서 적진에 침투하여 첩보 수집 및 후방 교란, 방해 공작, 양민 구출 등 특수 임무를 수행하였다.
특히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KLO 부대원들은 어민으로 가장하여 북한군이 도처에 설치한 기뢰를 찾아내는 동시에 연합군 군함이 무사히 인천만에 진입할 수 있도록 바다의 상태와 항로의 수심을 측정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작전 개시를 몇 시간 앞둔 9월 14일 밤에 고트 지대장 최규봉을 포함한 한국측 3명과 미군측 3명의 특공조가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팔미도 등대를 탈환하여 디데이(d-day)인 9월 15일에 등대불을 밝힘으로써 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끄는 전공을 세웠다. 인천상륙작전 때 이들의 활약은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보여준 대로 중요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기여했다.
이 책 『래빗』은 한국전쟁이라는 한국 역사의 비극을 배경으로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소녀 첩보원 ‘래빗’을 다룬다. 당연한 보호 대상이기에 오히려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거라는 이유로 첩보원이 되었고, 첩보원이었기에 전쟁이 끝난 뒤에는 그 이름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소녀들이다. 하지만 저자 고혜원이 그려내는 이들의 삶은 비극으로 가득 차 있지만은 않다. 전쟁 중에도 생명이 태어나고, 사랑하는 연인들은 미래를 약속하듯, 죽음과 상실이 만연한 곳에서 래빗들은 미제 초콜릿을 나누어 먹고, 고향 이야기를 꽃피우고, 살아 돌아온 서로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생의 의지를 불태운다.
주인공 홍주는 '독한 년'이라 불리며 가장 오래 살아남지만, 돌아온 것은 '변절해서 그런 것 아니냐'는 의심의 시선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전쟁이 가녀린 소녀가 삶을 이어가는 데 일찍 깨달음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의심을 뒤로 하고 떳떳함을 증명하기 위해 작전지로 향한 홍주는 또 다른 래빗 유경과 만나 친구가 된다. 자신의 의지로 입대했다는 유경과 있으면서 홍주는 처음으로 전쟁이 끝난 뒤의 삶을 생각한다. 이 무렵 두 사람이 있는 작전지로 아군의 폭격이 예정되어 있다는 첩보가 들려온다.
이 소설 『래빗』은 6.25전쟁을 배경으로, 당시 작전을 펼쳤던 첩보원 ‘래빗’들의 활동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적에게 의심받지 않는 효율적인 정보원이 필요해 시작된 작전명, 래빗. ‘전쟁 승리’라는 국운을 건 중대한 사명 아래 힘없는 개개인의 운명은 손쉽게 스러지고 묻힌다. 무기는 피아를 가리지 않으므로, 아군의 지뢰, 미사일, 총칼에 희생되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심지어 첩보원인 래빗은 작전 중에 적군에게 회유되어 변절하지는 않았는지 늘 아군의 의심을 견뎌야 한다. 적군의 총칼 앞에서 살아 돌아와도 아군의 의심을 피하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위태로운 존재다. 첩보 부대의 숙명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나오는 래빗들은 철두철미하게 작전을 수행하면서도 인간성과 다정함을 잃지 않는다. 누군가를 의심하고, 죽이는 게 당연해진 상황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다고, 비겁하고 비정한 마음에 전쟁이라는 핑계를 대고 싶지 않다는 그들의 꼿꼿한 마음이 귀해서 더 빛난다. 더욱이 총상을 입은 동료를 포기하지 않고 함께 돌아오는 강인한 생명력도 지니고 있다. 장편 시나리오 작업을 계속해 온 고혜원 작가는 뛰어난 캐릭터 설정과 철저한 사전조사를 거쳐 한편의 웰메이드 영화를 보는 듯 울림을 주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갓 스물이 된 두 명의 여성 첩보원, 홍주와 유경이 이 소설을 이끌어 간다. 홍주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폭격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살고 싶지 않았기에 고향을 떠나 첩보 부대에 입대했다. 또 다른 래빗, 유경은 첩보원 활동을 하면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는 거래에 응했다. 또,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두 가지 모두 유경에겐 꿈같은 일이었다. 3년 후, 홍주와 유경은 적군 점령지에서 마주친다. 우연히 두 사람 다 래빗이라는 걸 알게 되어 함께 지내면서, 전쟁이 시작되고는 처음으로 사귄 벗이 된다. 홍주는 유경 덕분에 전쟁이 끝난 뒤의 미래를 꿈꾸고, 유경은 홍주 앞에서 〈옥중화〉 연극을 선보이며 배우라는 제 꿈을 펼쳐 보인다. 그렇게 유경의 꿈과 미래는 잃어버린 과거를 붙잡고 있던 홍주에게로 전해진다.
첩보 부대 켈로(KLO)에서 적진으로 향한 래빗들은 열에 아홉이 죽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죽음은 특별하지 않다. 가장 오래 살아남은 홍주는 돌아오지 못한 소녀들의 이름을 다 외우지 못해 캐비닛에 바를 정(正) 자를 새겨 그 숫자를 기억한다. 다시 만날 수 없는 동료들의 빈자리를 보며 홍주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죽고 싶어서 왔는데, 아군으로부터 변절을 의심받으면서도 왜 나는 필사적으로 살아남고 있나.’ 자기모순에 갇힌 홍주에게, 전쟁이 끝나면 무엇을 할지 상상해 보라는 유경의 말은 이렇게 들리지 않았을까.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으려는 데는 이유가 없으니, 쓸데없는 생각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걸 찾아.’ 언제나 앞을 보고 걷는 유경은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게, 제자리걸음 중이던 홍주의 손을 이끈다.
“이 전쟁이 곧 끝나면 너는 뭘 하고 싶어? 나는 무대에 설 거라고 이미 말했잖아.”
“……모르겠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럼 이제부터 상상하고 생각해. 전쟁이 끝나면 너는 무엇을 할지.”(p.178)
소설 속에서 래빗들이 켈로 부대에 들어온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막 해방된 조국에 대한 애국심으로, 또 누군가는 소중한 것을 앗아간 적군에 대한 복수심으로 자원하여 입대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사라져 가고, 래빗들은 저마다 생존의 이유를 찾는다. 내일을 기대하기 어려운, 모든 게 망가지고 소실된 전쟁터. 하지만 보도블록 깔린 길에서도 틈새를 비집고 새싹이 피어나듯, 래빗들은 미제 초콜릿을 나누고, 공기놀이를 하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폭격으로 공포에 질린 동료를 감싸 안아준다. 이렇듯 작가는 가볍지도, 너무 비장하지도 않게 래빗들의 삶을 올곧고 따뜻한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이 소설 작품은 2022 제2회 K-스토리 공모전에서 6.25전쟁을 배경으로, 당시 활동했던 소녀 첩보원들의 삶을 생생하고 감동적이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대상을 수상했다. 전년에 이어 올해도 심사를 맡은 이미예 작가는 “흰토끼가 시각적으로 첩보원 소녀들과 맞아떨어지면서 이야기의 고유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각인됐고, 모든 등장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생생한 영상화가 기대되는 작품”이라고 호평했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춘 수작이어서 대상으로 결정했다는 이야기다.
저자 고혜원은 책 뒷 부분에서 「작가의 말」을 통해 “한국전쟁 뒤에 사라진 이야기들을 재조명하고 싶다는 마음에 이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중략) 전쟁 중이기에 모든 것들이 쉽게 사라지던 시대를 되돌아보며, 그 시대여서 잃어버린 것들을 고민했습니다.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시대를 한 가지 단어로 정의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제 마음은 미래를 택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저자 : 고혜원
벚꽃이 만발한 봄에 태어났다. 서로의 온기가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2019년 〈경희〉가 한경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서 당선되었다. 2022년 제1회 KT스튜디오지니 시리즈 공모전에서 〈연화〉로 우수상을, 제2회 K-스토리 공모전에서 장편소설 《래빗》으로 대상을 받았다. 앞으로도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